대풍 :: '세계의 한국인' 태그의 글 목록

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오디오
오디오 (다운받기)
이메일
뉴스레터
프린트
기사 공유하기

사진제공-글로벌 어린이 재단

올해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있었던 글로벌 어린이 재단 11차 정기총회 단체 사진.

1997년 한국의 IMF 외환위기로 가정이 파탄되고 일부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1998년 워싱턴 DC 지역에서 한인 어머니들이 마음을 모아 한국의
결식아동을 돕기 시작한 것이 글로벌, 세계 어린이재단이다. 그리고 11년이 지난 지금 국제적인
자선단체로 성장했다. 미국 전역에 16개 지부가 있으며 한국, 홍콩, 일본의 3개 지부 등 총 19개
지부에서 3,500여명의 회원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올해로 창립 11주년을 맞았다. 지난 7월 창립 11주년 총회에서 방숙자
이사장은 글로벌 어린이재단은 지난 10년 동안 나눔의 세계화를 만들었고 국제적인 자선단체로서,
봉사하는 기구로 성장하기까지 회원들의 봉사가 큰 역할을 했다고 격려했다. 또 앞으로도
세계어린이를 돕는 단체로서 더욱 성장해 나가자고 말했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앞으로

어린이들의 삶의 현장을 체험하며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지원을 하게 된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방숙자 이사장을 만나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창설부터
주요 활동에 대해 알아본다.

한국에는 1997년 외환위기로 기업이 파산하자 가정파탄이 뒤따랐고 버려지는 아이들이 큰
사회문제로 떠올랐다. 그리고 한국의 어린이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됐다고
방숙자 씨는 설명한다.

방숙자: 한국의 IMF를 기억하실 겁니다. 한국의 IMF로 말미암아 한국에 실업자 많이
생겼습니다. 그 실업자가 생기니까. 부모가 직장을 잃으니까 아이들이 집에서 먹을
것이 없습니다. 들어오는 돈이 없고 물건을 살 수가 없으니까. 어떤 분이 당시를
표현하기를 가을에 가랑잎 떨어지듯이 실업자가 생겼기 때문에 그로 말미암아 배고픈
아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방숙자 씨는 1998년 당시 한국에서 배고픈 어린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지적한다.

방숙자: 어린이들의 실태 조사를 위해 한국을 방문해 식당에서 식사할 때면 밥을 달라는
어린이들이 많아 안타까웠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외면할 수 없어 워싱턴에 사는 한인 어머니들은 바로 우리가 나서서 버려진
아이들을 먹이자고 다짐한 것이 바로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탄생이다.

방숙자: 어머니들이 저렇게 배고픈 아이들에게 그저 보고만 지나칠 수 없으니까,
우선 먹을거리라도 해서 배고픈 것을 면해주자 해서 몇몇 어머니가 시작한 것이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전신인 나라 사랑어머니회입니다. 바로 그 단체를 워싱턴
DC에 있는 어머니들이 시작했습니다. 그때 십여 명 됩니다. 우리 자식들 손자들을
생각해 도와주자 해서 시작했어요.

방숙자 씨는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전 세계 3,500여 명의 회원으로 성장했다고 말한다.

방숙자: 1년 사이에 미국 전 지역에서 조직했고 19개 지부가 있는데요. 그 당시
14개 지부가 조직됐습니다. 1998년에 그 당시 빨리 조직 됐습니다. 회원제로 한 달에
10달러, 1년의 120달러 지금은 3,500명의 회원으로 미국뿐만 아니라 한국 일본 홍콩
등지에 있습니다.

방숙자 씨는 글로벌 어린이 재단이 미국 와 아세아권 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소개한다.

방숙자: 14개 미국의 큰 도시에서 활동하고 있고 한국의 지부, 홍콩의 지부 일본의
지부가 지역에서 활동할 수가 있습니다. 걷기대회를 한다든가, 음악회를 한다든가,
어떤 행사를 하든지 모금을 해서 절반은 본부로 보내고 절반은 지역사회를 위해 쓰고
있어요. 본부에서 전체적으로 단체와 회원들을 관리하는 총회장이 있습니다. 총회장이
글로벌 어린이재단을 관리하게 됩니다.

방숙자 씨는 회원들이 내는 회비 전액으로 처음에는 한국의 배고픈 아이들을 도왔지만, 최근에는
회원들이 늘어 세계 어린이들을 돕는다고 설명한다.

방숙자: 회비 전액이 아이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최근에는 한국을 제외하고16여
개의 나라를 돕습니다. 눈을 떠 보니까 세계의 배고픈 어린이가 너무 많아요. 일 년에
한 20만 달러 정도 지원금을 주고 있습니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서 직접 바자회, 즉 자선 특매장을 열어기금을
모금해 지원한다.

방숙자: 유관순 기념관에서 결식아동을 위해 갖는데 (올해 미국에서 75명 미국 각
지역과 홍콩 일본 한국에서 모여서 바자에서 8만여 달러 이상을 모금해서 모두
한국에 주고 옵니다.) 공부방 어린이들에게 주도록 합니다. 그리고 저희가 소망의
집이라고 장애인 어린이집이 있습니다. 장애인들을 위해서 매년 2만 달러씩 주고
있고 한국에 지원하는 후원금이 약 10만 달러 정도 됩니다.

방숙자 씨는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그동안 북한에도 5년 동안 지원하고 있다고 말한다.

방숙자: 처음에 2001년도에 갈 때는 어린아이들 속옷 8천 벌 담요도 8천 개 라면도
몇 컨테이너 되고 이런 것들을 감개무량하게 동족을 돕는 뿌듯한 마음으로 도왔는데요.
지금은 북한에 직접 가서 돕지는 않아도 연변에 탈북 어린이들을 선교사를 통해
돕고 있습니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해외 어린이들을 어떻게 돕고 있을까? 방숙자 씨는 세계 어린이들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과 더불어 앞으로는 자급자족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했다.

방숙자: 오랫동안 이라크 난민들 전쟁고아들도 도와 왔습니다. 그 외에도 수단 말라이를,
수단에는 소를 사줬고 그리고 말라이는 양을 사줬으며 페루는 돼지나 닭을 사줘서
자기들이 자급자족을 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또 아이들에게 삶의 현장에서 직접 경험할
그런 기회도 만들어 줬고 카자흐스탄이라든가 캄보디아는 미감염 나병환자가 많은데
미감염 어린이를 돕는 그런 일도 3년 도와왔고요. 몽골에도 3년 동안 1년에 2만 달러씩
도와왔고요. 스리랑카 등의 쓰나미 피해나 인도네시아의 지진피해가 있을 때 돕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러시아에 있는 어린이들도 돕고 미국에서는 할렘가에 있는
어린이집 즉 워싱턴 DC에 있는 마더스 테이블 어린이집도 돕고 있습니다.

글로벌 어린이 재단은 앞으로도 어린이들이 자립할 수 있고 건강한 아이로 살아가도록 도울
것이라고 방숙자 씨는 다짐한다.

방숙자: 어린이들을 돈을 들여 먹이는데만 10년을 해 봤는데 먹이는 것도 일부에서
하지만 아이들에게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나가고 심리적으로 보통 가정의 어린이와
다른 점이 없다는 자신감을 심어주기 위해 힘을 쓸것입니다. 한국의 농촌 어린이에게도
소를 사 줘서 직접 키우도록 하는 방안을 계획 중에 있습니다.

방숙자씨는 한인 여성들의 아름다운 마음으로 세계 어린이를 돕자고 호소한다.

방숙자: 모든 한국의 여성들, 모든 어머니가 한 달에 10달러만 아끼면 내 주위에 배고픈
아이들을 돕고 어머니들이 이런 일을 했다는 자부심도 보여주는 본보기가 될 수 있는
이민 1세 어머니들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어머니가 우리 단체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자고 호소하고 싶고요.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창설자인 방숙자 이사장으로부터
글로벌 어린이 재단의 창설과 주요 활동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이 기사를

오디오
오디오 (다운받기)
이메일
뉴스레터
프린트
기사 공유하기

2009-10-23

‘사업실패, 그리고 놀라운 재기, 인생의 밑바닥에서 주7일, 하루 17시간의 일에 몰두하면서 쌓아올린
성공신화의 주인공’ 미국의 일간신문 워싱턴 포스트가 작년 말 사업가 최정범 씨의 사연을 보도하며
붙인 표현들이다.

RFA PHOTO/ 이현기

한국에서 사업 실패 이후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피땀어린 노력으로 재기에 성공한 사업가 최정범 씨.

포스트는 실패를 경험한 최씨가 굳은 신앙과 가족들의 성원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며
그의 이야기는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 씨가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재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재미교포로서 한인 2세 최정범 씨는 워싱턴 인근의 16개 정부기관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이다.
최정범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는 미국에 오기 전 12살 나이로 4형제 중 둘째로 아버지가
사업한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가 암과 투병을 하게 되고 병원에서 더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깊은 신앙으로 기도원에서 고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잘나가던 사업도 마다하고 더욱 진취적인 삶을 위해 1974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1974년 4월 5 아버지가 사업에 어떤 회의를 느끼면서 안정된 곳에서 살고파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됩니다.

최정범 씨의 미국에서의 학창시절을 뒤돌아보자. 그는 뉴욕에 있는 예술고등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악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음악도로서 큰 희망과 포부를 갖는다.

미국에 맨 처음 와서 영어가 되지 않고 말을 못하니까. 아마 어려서부터 저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게 바이올린이었고 바이올린을 잘 켰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뉴욕에 예술고등학교에 시험에 합격해서 다니게 됐습니다.

그러나 최정범 씨 가정의 이민생활 시작은 어떠했을까? 다른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지 않고 한국을 떠나신 것 같습니다. 오셔서 많은 이민자가
하는 조그만 식품가게 부터 시작해서 권총 강도를 당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희는
아들만 4명인데 짐을 싸서 뉴욕으로 가서 뉴욕에서 얼마 사업기반을 일구시다가
화제로 말미암아 사업체가 다 불에 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980년에 다시 워싱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한인 2세 최정범은 초기 이민 생활에서 혹독한 고통을 맞게 된다. 다니던 학업도 중단하고
가족들을 대표해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고한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 사업이 망하니까.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 와중에
저희 형은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밑에 동생은 저보다 5살 이상 나이 차가 있어
중학생 초등학생이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런 일을 당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힘들어하셨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안을 책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가 조그마한 매장을 하나 차려주셔서 볼티모어에서
햄버거 굽는 일을 시작했었지요.

어려운 이민자의 길에 들어선 최정범은 어떻게 자신을 극복해 나갈까? 공부하며 일하는
한인 2세 청년으로 발돋움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6명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전공을 바이올린에서 이제는 사업의 연장선인 경영학으로 바뀌게 된다.

대학교에 가서 인터뷰를 했을 때 입학 사정관이 성적은 절대 안되는데 지금까지 학교
역사상에서 추천서를 16장을 가지고 온 학생은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받아줘서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분교를 2년을 다닙니다. 그리고 다시 버펄로에 거튼
대학으로 옮겨 다니게 됩니다. 작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역시 경영학을 공부합니다.


최정범 씨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주 7일 부모님을 도왔으며 매주 부모님 사업을 도왔다고
이야기 한다.

거의 주말마다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있을 때 부모님이 잠드시기
전에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는 거의 8시간 거리입니다. 항상 머릿속에는
부모님이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구나. 집에 오셨겠구나 주무시겠구나 하고
저도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최정범 씨는 1989년 한국에 나가 개인 사업을 시작하지만, 한국의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사업이 망하자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좌절을 하게 된다.

저도 뭔가 저 자신을 위한 일을 해봐야겠다 해서 한국으로 갑니다. 1989년-1990년
이때 한국에 들어가서 여행사 공연기획하는 회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열심히 몇 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1997년 11월에 한국이 경제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때 제가
운영하던 사업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저도 빈털터리가 돼 참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세상이 아무 소망이 없었다고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최정범에게 기나긴 고통의 나락에서 한 가닥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사업에 망한 후
미국에 돌아와 희망이란 찾기 어려웠던 때다. 놀고 있었을 때 교회를 통해 스리랑카로
선교여행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스리랑카의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들과 바퀴벌레 파리 사람들 굶주림에 먹지도
못하는 속에서도 잃지 않는 웃음을 보면서 사람 산다는 것이 무얼 가져서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올바르게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이 만들어진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그 안에 제가 가진 것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겠다
생각을 바꾸어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최 씨는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다. 하루에 17시간의 일은
다반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한국인의 끈기로 10년을
노력한 끝에 오늘의 성공신화를 이루게 된다.

정말 기회였지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원하지 않는 한 매장을 얻게 됩니다.
참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열심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건물주와 여러분이 저를
좋게 봐줘서 건물주가 다른 건물주를 소개해주고 그리고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문을 타고 가서 다른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에서
부탁이 들어오고 해서 우리 회사가 커지게 되지요. 10년만에 아무도 저 자신까지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회사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저 혼자의 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요. 제가 믿는 신앙 제가 가진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리고
제 가족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믿어주고 항상 지원해주는 아내와 두 자식 이런
것이 저에게는 제가 잠을 자지 않아도 행복하고 제가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하고
힘들어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 규모를 묻는 말에 최정범씨는 300여 명의 직원에 연간 700만 명에게 음식를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해 준다.

연방정부공무원을 상대로 구내식당을 운영하는데 저희가 연간 약 700만 명에게
아침 점심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300여명 넘습니다. 미국에서 큰 회사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 하는 회사로서 이 계통에서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회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정범씨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부모님께 받은 것은 미국에 와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무릅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 이것이 제가 부모님께 배운거고
존경하는 겁니다.

최정범씨에게 사업의 목표를 물어봤다. 그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미국에 알리는 마음으로
사업에 임한다고 설명하고 그동안 몇 차례 정부 입찰에서도 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한국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한국사람끼리 경쟁하지 않고 맥도날드와 경쟁하자
아니면 저희 업계에 큰 회사들이 있습니다. 저희 같은 일을 하는 회사 중에서
지금 제일 작은 회사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부입찰을 해서 큰
미국회사와 입찰을 해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최정범씨가 미국에 정착해 사는 탈북인들에게 주는 충언은 이렇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서 사는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두고온 것이 어떠한
것이던 것을 떠나서 지금 새롭게 사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떠나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땅과 자기 나라를 떠나서 살아야 된다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내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온 힘을 다해서 그 비극을 희망으로
만들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어떠한 소망보다도 나 자신에게 큰 소망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씨의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제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제2부에서는 한인 2세로서
사회봉사의 이모저모를 들어봅니다.
저작자 표시
신고

Today's KORUS House English class is an article about Chuseok, one of Korea's biggest traditional.....

꽃제비 출신 탈북 청년을 만나다

꽃제비 출신 탈북 청년을 만나다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17-06-21 인쇄 공유 댓글 이메일 장대현학교 학생들과 브니엘고등학교 학생들이 파주시 도라전망대에서 개성시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K0..

북한 해외 근로자들의 삶 (3)

도문경제개발구 안에 있는 조선공업원(북한공단)에서 일하는 북한 여성 근로자들이 점심식사를 마치고 일터로 돌아가고 있다. 사진-(사)코리아선진화연대 제공 00:00/00:00 동남아 일원에서 노동자로 일하다 몇 해 전 남한으로 ..

북한 해외 근로자들의 삶 (2)

몽골의 봉제공장에서 근무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 사진-북한인권정보센터 이승주 연구원 제공 00:00/00:00 동남아 일원에서 근로자로 일하다 몇 해 전 남한으로 망명한 심 모 씨는 북한 해외 노동자는 지옥과도 같은 감시와 ..

북한 해외 근로자들의 삶 (1)

돈벌이를 위해 러시아 연해주로 몰려든 북한 건설노동자들이 블라디보스토크 중심 레닌 거리의 한 상가 건물 보수 공사장에서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00:00/00:00 동남아 일원에서 근로자로 일하다 몇 해 전 남..

2015년 시애틀 탈북자 통일 선교 대회 특집 1부:나는 보았네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세계평화를 위한 중대한 제언-뉴욕 서병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