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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7)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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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 *기원앞 2182년 제3세 단군 가륵(嘉勒)왕검 즉위.

2181- 을보륵(乙普勒) 박사가 한글의 전신인 국민정음(國民正音) 38자를 만듬

2180 – 고설(高설)에게 배달유기(配達留記)를 쓰게 함.

2177 – 색정(索靖)을 약수(弱水)로 보내어 흉노(匈奴)의 조상이 됨.

2175 – 두지주(頭只州)의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餘守己)

우두머리 소시모리(素尸毛리)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 하였고 지금은 음이 변하여 소머리가 되었으며 그 후손

협야노가 바다로 도망하여 세 섬(三島:일본) 을 점령하고 참람하게도

왕이라 하였다.

2153 – 25년 만에 건청궁(乾淸宮)을 완성함

*배달유기(配達留記): 동양사학의 원조라고 하였으니, 국사 및 동양사의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단기고사>의 저자 대야발

(발해시조 대조영의 아우)이 발해문으로 간행한 일이 있다.

*지백특(支伯特): 티베트

*약수(약수): 합려산 근처에서 고비사막으로 흘러드는 강, 또는 흑룡강.

*가림토(加臨土): 가림다문(加臨多文)이라고도 한다. 가림토란 원래 한자가

아니고 순수한 우리말일 것이다. 이것이 세종대왕 때 집대성한

한글의 전신,‘한글의 모양은 옛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하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음.

* 2138-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시고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보위에 올랐다.

**기원앞2137년 제4세 단군 오사구(오사구)왕검 즉위.

*임금의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 왕으로 봉함.

*2133- 원공패전(圓空貝錢:조개껍질에 구멍을 뚫어 만든 돈)을 만듬.

*2131- 살수에 조선소를 세움.

*2119 – ()나라 상왕(相王) 때 반란이 일어나 오사구 왕검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 세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2109- 천황은 매년 3월마다 마한의 군사를 사열하고 사냥도 하였으며 이해

1016일 기린굴(麒麟굴)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의(검을조衣)

관을 씌워주는 예를 행한 후 노래와 춤을 추는 등 여러 놀이를 행하였다.

*2100 - 6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시고 태자 구을(丘乙)이 보위에 올랐다.

**기원앞 2099년 제5세 단군 구을(丘乙)왕검 즉위.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세우고, 아우 셋을 봉건제후국 번()왕에

봉하였다.

*태백산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하늘에 제사 지냈다.

**동양: 2096- 슈메르 제3왕조 멸망.

*2087- 감성관(監星官) 황보덕(皇甫德)에게 혼천기(渾天機:천문관측기)를 만들게 함.

*2084-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에 행차하여 제천단을 쌓고주변에 무궁화(槿花)

를 많이 심음.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어 세상을 뜨셨고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냈다.

** 얼마전 이북에서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축했는데, 이 능의 소재지가 평양시

강동군(전에는 평남 강동군) 대박산이다. <단기고사>에는 송양을 강동(江東)

이라 하였고,<신단실기>에는 송양은 강동현 이라 했다. 그래서 평양의

이 단군릉이 제5세 단군 구을왕검의 릉이라고 추정한다.

**기원앞 2083년 제6세 달문(達門)왕검 즉위

*2078- 맏아들 한속(翰粟)을 태자로 세웠다.

*을지선(乙支仙)을 재상, 연석천(淵石泉)을 상장(上將),

진무경(陳無競)을 섭사직 (攝司職), 관기을(關機乙)을 숙정사(肅政使)

삼았다.

*2077- ()나라왕 소강(少康)이 사신을 보내와 신년 하례를 하였다.

**서양: 2060년 우르 제3왕조 시작. *슈메르문명 전성기.

*2049-임금께서 열국의 제후들을 상춘(常春)에 모이게 하시고 하늘에

제사지냈는데,

신지(神誌) 발리(發理)에게 서효사(誓效辭)를 짓게 하였다

*2048- 임금이 세상을 뜨고 태자 한속(翰粟)이 보위에 올랐다.

**기원앞 2047년 제7세 단군 한속(翰粟)왕검 즉위

*맏아들 우서한(于西翰)을 태자로 삼았다.

*2022- 큰 흉년이 들어 쌓아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 하였다.

*2000- 백성들의 세금을 반감해 주었다.

**동양: 2000 - 아리안인 서북인도로 이주 시작.

*1994- 임금이 세상을 뜨시니 태자 우서한이 보위에 올랐다.

* *기원앞 1993년 제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왕검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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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5)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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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본류를 떠나 중국인들의 문명은 동아시아 최초의 문명도 아니고,
중국이라는 민족국가 성립의 자체가 우리의 신시, 단군조선의 통치를
뒤엎고 세워졌다는 사실에 접근하여 보았다
.

의외로 그 분량이 많아 곁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말았으나 결코
시간의 낭비가 아니었으며 따라서 유익한 일이었다고 사료된다
.


당연히 13대 단군 흘달(屹達)왕검부터 다시 이어가겠지만, 그 분량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최대한 간략 하게 요점만을 기술 하되 우리민족의
국가형성기로 볼 수 있는 신시
(神市)로부터 기술하겠다.

즉 지금으로부터 9206년 전(B.C 7,197) 환국(桓國) 1세 환인
안파견
(安巴堅 )으로부터 제7세 환인 지위리(智爲利 )까지의 환국의
기록은 빼고
, 5906년 전(B.C 3,897)의 제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으로 부터
18세 환웅 거불단 (居弗檀)까지의 1565년과 그리고 4342
(B.C 2,333)의 단군왕검으로 부터 47세 단군 고열가 (高列加)까지를
소개하겠는데
, 사사건건을 다 소개할 수는 없겠고 신시(神市)대 와
단군조선 대의 특별한 사건이나 동시대의 동양권과 서양권의 움직임을
함께 기술하여 세계 속의 흐 름과 동향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해보겠다
.

이는 여러 사료들을 참고하였으나 그 뼈대는 <단기고사><환단고기>
그리고 <규원사화>임을 밝히고 있는 고동영의 <단군조선 47대사>에서
발췌 기술하는 내용이다
.


이에 앞서, 환국(桓國)이니 환단(桓檀)이니 환웅(桓雄)이니 환인(桓因)
말하거나 기술하면서 환이 아닌 한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학설도 만만치
않으나 필자가 환을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박태종님의
[1982년 일본학자 가지마(鹿烏昇)에 의해 환단고기 일어판이 간행되고
1985년경부터 여러 본의 국내 판이 번역 되면서 한국 지식계는 새로운
바람으로 크게 술렁이기 시작했다
. 그 중 임승국(林承國) 선생 이 번역
주해한
<한단고기>가 지식인 및 일반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는데
그의 환
()을 한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문자학적 면에서 볼 때
증거와 설득력을 결여하고 있다
.] 전개한 그의 문자학 적 설명이
지극히 합당함은 물론 많은 정황이 이를 뒷바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리의 상고사 연표

B.C 3897- 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 즉위

* 신시(神市)에 도읍하고 나라를 배달(神市)이라고 함

* 역법(曆法)을 만들어 365일을 1년으로 함.

B.C 3803 - 2세 환웅 거불리(擧弗理) 즉위.

3717 - 3세 환웅 우야고(右耶古) 즉위.

3618 - 4세 환웅 모사라(慕士羅) 즉위.

3511 - 5세 환웅 태우의(太虞儀) 즉위. 서양: B.C 3500년 경

*복희(伏羲)씨 팔괘를 만들고 환역(桓易)을 지음. * 슈메르인 메소포타미아
진출

* 이집트 나일강 유역에 도시국가 분립

  1. - 6세 환웅 다의발(多儀發) 즉위

3320- 7세 환웅 거련(居連) 즉위.

3239- 8세 환웅 안부련(安夫連) 즉위.

*소전(小典)을 강수(姜水)에 보내어 군사를 감독하게 함.

*소전의 아들 신농(神農)씨가 여와(女와)의 뒤를 이어

왕이 됨.

3166 - 9세 환웅 양운(養雲) 즉위.

3070 - 10세 환웅 갈고(葛古) 즉위.

*신농씨의 나라와 국경을 정함.

2970 - 11세 환웅 거야발(居耶發)즉위.

2878 - 12세 환웅 주무신(州武愼)즉위.

서양: B.C 2850

*메네스왕 상.하 이집트 통일

2773 - 13세 환웅 사와라(斯瓦羅)즉위.

2706 - 14세 환웅 자오지(慈烏支: 치우천황)즉위.

*창과 투구 등 쇠로 만든 병기로 유망(楡罔)과 헌원(軒轅) 동양: 2679

을 이기고 서쪽으로 국토를 넓힘. *황제 헌원(軒轅) 즉위

*자부선생(紫符先生)이 삼황내문(三皇內文)을 헌원에게 줌.

*칠성력(七星曆)이 시작됨

*청구(靑丘)로 도읍을 옮김

2597 – 15세 환웅 치액특(蚩額特) 즉위

2508 – 16세 환웅 축다리(祝多利) 즉위 동양: 2500~1500 서양: 2500

2452 – 17세 환웅 혁다세(赫多世) 즉위 인더스문명 메소포타미아
아우르

2380 – 18세 환웅 거불단(居弗檀) 즉위 제1왕조 성립

*신시(神市, 배달나라)18대 역년 1565년으로 2357: 당요(唐堯) 2480:
이집트 제5왕조

끝남. 즉위 2350: 이집트 제6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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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4)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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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일본이 우리의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말살하고 조작하고 왜곡한 목적은
한국을 영원한 자기들의 식민국가로 만들기 위해서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역사문화를 축소시키고 왜곡시켜 부끄 러운 역사문화
,
내세울 것 없는 선조들임을 각인시켜 열등감을 가지게 함으로써
식민지배를 숙명 적으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

그래서 단군조선을 신화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에 이어 한무제에 의한
한사군의 통치를 받는 식민국가로 우리의 고대사는 시작된다
.

한사군 반도내 설치설은 중국의 사서 어디에도 그 기록이 없는데 한
예를 들면 중국의
<사기> ‘() 본기 태강지리지’에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는데
..” 여기에서 낙랑군이 수성현, 갈석산,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 등의 기술이 나타난다.


그럼에도 오로지 우리 교과서에만 지금도 낙랑은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걸쳐 있고 만리장성 또한 황해도 수안을 동쪽의 끝으로 보고있는
것이니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한국의 사서 및 교과 서가 얼마나 고마우랴
,
낙랑군이 설치된 지 2천년 후에 조선총독부에 의해 낙랑군이 평안남도와
황해도 북부에 결쳐 있었고 그 치소는 대동강변의 토성동이라고 만들어진
것인데 오늘날의 중국은 이 논리에 따라 한강 이북을 중국사의
강역이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의 누리집은
“위만조선의 도읍 부근에 설치된 낙랑군 조선현의 치소가 지금의 대동강
남안의 토성동 토성”이라고 이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는 것이다
.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

여기서 1925년 사이토 총독이 전국에 시달한 교육시책의 내용을 살펴보자.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
,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그 부조
(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반드시 실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 그때에 일본 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同化)
지대할 것이다
.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일본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

** 그 결과 무려 50여종의 20만권을 압수하여 불태우고 그 중 중요사료는
일본으로 가져가 황실도서관 맟 동경대 지하 비밀서고에 보관하고 있다
.


역사 왜곡 및 조작의 구체적인 내용은

상고사 말살 및 조작: 고조선 이전의 역사 말살, 즉 단군은 신화일 뿐 이를
역사로 교육하는 것은 오히려 역사왜곡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중국의 속박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피식민지배국가 였다는 것을
강조하였고

고대국가 강역 축소:서기 200~300년에 이르러서야 겨우 국가형태를 갖추고
한반도를 중심으로

살아온 민족으로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는 민족이라며 강역을
축소하였으며

민족비하: 항상 침략만 받아온 약소민족이며 갈등하고, 분열하며, 시기가
많은 민족성을 가진 민족 으로 교육 시켰다
.


우리들은 오늘도 실역사인 단군앞 신시는 있지도 않았으며 단군조선을
신화로 믿는다
. 또한 위만조 선을 멸망시킨 한나라가 한반도내에 설치한
한사군에 의해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조작된 사실을 그 대로 믿고있음은
물론
1925년 사이토 총독의 교육시책에 의한 우리의 조상과 역사적
인물과 역사 문화의 전통에 부정적이며 스스로 약소민족이라고
, 분열과
갈등과 시기심 많은 민족이라고 민족비 하에 혈안이 되어 살아간다
. .

[191338세의 일제 사학자 이시니마루(今西龍)가 갈석산으로 달려가
‘점제현 신사비’를 정으로 쪼아 떼내어 배에 싣고 평남 온천군으로
날라왔고 이 신사비를 앞세워 한반도내 평양 인근에 낙랑 군이 설치된
것으로 조작하였으며
, 그 내용조차도 이에 맞는 내용으로 왜곡하였다]
사실도 밎지 않으 며
, 그러면서 그때 만들어진 조선사 37권의 조작된
내용이 옳다고 여긴다
.

1925~1937년까지 12년간 100억원(현재 가치, 원화)을 투입하여 말살하고
조작하고 왜곡한 우리 역사 문화를 사실로 믿고있는 한
, 우리들의 조상은
없다
. 우리 천손민족이 유일신으로 떠 받들던 하늘 임금님(하나님, 하느님)
도 천손민족도 모두 거짓이 된다.

고구려, 발해마저 중국의 변방국가가 되며 한강 이북은 중국의 옛 영토가
되고
, 우리는 그저 반도 안에서 늘 중국과 일본에 끼어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는 민족이 되고 만다
.


그동안 신시와 단군조선 역대 왕조를 역사적 사료들을 바탕으로 기술해
오다가 중국의 역사문화를 소개하여 중국의 것이 더 깊고 오래라는
고정관념을 뛰어넘어보려고 하였다
.

그러다보니 우리역사의 소멸과정과 왜곡의 실체까지를 소개하게 되었으니
이제 본류인 단군조선사 에 돌아가겠는데 최대한 요약하여
50회 전 후로
마무리를 지을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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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2)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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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앞 칼럼에서 진시황은 한족(漢族) 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에도
대대로 신봉해온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화하, 화산족)의 천자국 단군조선 숭배사상을 지워버릴 수 없다고 보고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을 숙청하고
,
서적을 불태우고, 조작된 사서들을 다시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
하였으며 그러고도 단군조선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
축조사업정책을 펼쳤다고 했다
,

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동이족의 흔적을 다 지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처치 곤란한 유물과 유적이 남을 것이다.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난 수량의 왕릉 과 비석과 탑들이다
. 그것은 부셔 흩
뿌리거나 바다로 운반하여 수장시키거나 땅 속에 묻어 감출 수 도 없는
골치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 일반 무덤도 아니고 고구려총의
모습과 같으면서 규모가 훨씬 더 큰 신시
18대와 단군조선 47, 65기의
왕릉이다
. 제후국들의 왕릉까지를 포함 시키지 않아도 이미 도저히
말살시킬 수 없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식의 계단식 왕릉들이다
. 금속이나
철제같은 유물이라면 녹여 진시황의 아방궁 건축물에 사용하였 듯
,
그것들을 얼마든지 변형시켜 흔적을 없앨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무덤들
(고인돌 포함)과 돌기둥과 탑들과 비석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그 방법이
묘연하다
.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비록 기록이나 유적
으로서 실증할 수는 없으나 확고한 심증을 두고있는
) 그 내용을 제시
한다
.

만리장성의 축대 속에는 장문의 비문이 새겨진 비석(송덕비 포함)등의
유적류
, 신시 및 단군조선 역대 왕릉의 축대에 사용된 다듬어진 돌들은
장성의 성벽을 쌓는데 사용함으로서 유적이 될만한 것 들을 모두 감추고
성벽을 쌓는데 필요한 다듬어진 돌들을 충당 하였을 것이다
.

또한 그것이 만리장성을 축조한 진시황의 진정한 숨은 뜻이었을
것이라고 추정추정하고 있다
.

그도 그럴 것이 불과 30여년을 지속하다가 사라진 진나라가 들과 산에서
자연석을 캐고
, 나르고, 깍고, 다듬어 그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


이쯤에서 본류에 복귀해야겠다. 본 연재는 재미 있게 엮어내는
얘기책이나 역사소설이 아니다
.

아무리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도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의
틀을 깨고 우리 참역사의 현장 을 찾아나서는 사실의 역사 기록이라는
본질을 탈피할 수는 없다
.


그러면 진나라의 시황제 진시황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몽염을 시켜 쌓았다 는 만리장성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
?

이때 진나라의 영토는 동으로 바다를 연하여 조선에 미쳤고, 서쪽으로는
임조
, 강중, 남쪽으로는 북호까지 뻗쳤다. 그리고 북쪽은 황하를 기점으로
하여 음산산맥을 따라 요동
(현 요동이 아님)에 이르렀는데 만여
()이다

좀더 알기 쉽게 표현한 수경주(水經注)의 기록을 보면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장성은 임조
(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갈석산
(동쪽 끝)에 이르렀다는 것, 갈석산은 창려현에 있으며
산해관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고대의 요동지역이다
.

장성의 안쪽에 위치하는 창려현(현 하북성 창려)과 장성 밖에 위치하는
산해관
(옛 낙랑군 수성현) 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뻗어가 서쪽의 임조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 이를 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서한(西漢) 시대까지도
우리의 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그 동쪽이 지금의 난하
(옛 요수)와 갈석산
지역
(현 요하의 서쪽)으로 옛날에 요동이라 부르던 지역이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

우리 역사 말살의 10대 수난사

그럼에도 우리의 영토는 반도이고 고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며 위만조선은 한 나라에게 패망하여 반도내에 낙랑
, 현도, 임둔,
진번 4군을 두어 다스렸다는 등식을 만들어 우리 민족의 조상은 애초부터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무위 무능한 존재로 날조해 놓았다
.

그것은 중국이 밑돌을 깔고 일제가 못박은 형상인데 그에 대한 기사의
정리는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 역사말살의 빼놓을 수 없는 수난사를 살펴보자. (이를 10대 수난사로
표현하기도 한다
)


1차 고구려 동천왕 18(244)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 소각
, 이때 고구려 <유기> 100권이 사라짐.

2차 백제 의자왕 20(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
(史庫)가 불타 없어짐(燒盡)

3차 고구려 보장왕 27(608) 당나라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함
.

4차 신라 경순왕 원년(972)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의 책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 당할 때 방화 소각됨
.

5차 고려 인종 4(1129) 금나라에서 주체서적을 몰수해감.

6차 고려 인종 20(1133) 몽고의 침입으로 소각. 3한 고기(三韓古記)>,
<
해동고기(海東古記)> 가 이때 없어짐.

7차 조선 태종 11(1411) 5부학당을 송제(宋制)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교서적 일체를 소각함

8차 선조 25(1592) 임진애란으로 무수한 전적이 방화 소실됨, 조선의
4대 사고 중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각, 훗날 마리산 사고로
옮겼으나 고종
3(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강하도
공격으로 방화됨
.

9차 병자호란으로 인한 소실 및 손실.

10차 일본강점(1910)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사서 20여만권, 탈취,
소각,개조됨.

*** 동방의 한국은 가장 오래되고 경이로운 역사를 간직해온 나라이면서
전대미문의 과거단절도

경험한 나라인데 그것은 모두 외세의 침탈과 인위적인 역사말살의
비정상적인 단절의 악순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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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1)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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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역사.문화가 우리 신시 및 단군조선의 굴레에서 맴돌던 화하,
화산족(華夏,華山族:나라 를 열었던 지명에서 나온 이름일 뿐 혈통적 종족
이름은 아님
))의 무리였고 그나마
(:西漢:B.C 206~A.D. 9 / 東漢:A.D. 9~24)나라 이후의
한족
(漢族)이나, 중화민국 (中國:A.D. 1911~1949 ) 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중국:A.D. 1949~현재)은 수십의 종족이 섞여 이루어진
민족일 뿐이다
.

그런 그들이 역사조작에 그들의 사서를 모두 태우고 다시 쓰는 분서갱유와
춘추필법의 사필원칙 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그래서 오늘은 딱딱하고, 어렵기만한 기록형 역사기술에서 탈피하여 근거
불확실하면서도 가능 성이 높은 예측기사를 전해보려 한다
.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자의 상상력은 아니며 여러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들이다
.


이는 진시황과 만리장성의 얘기인데 공자와 춘추필법 얘기로 시작한다.

공자는 자기가 은(:동이족이 세운나라)나라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바 있으며 또 동이에 가서 살고싶다고도 하였다
.

그런데 그의 저서 오월춘추에서는 동이(東夷)에 대해 제자가 묻자
‘융적과 더불어 이
()는 더러 운 것이다’는 등 동이를 깍아내리는 말이
나오는데
, 또 다른 제자가 이()족들은 예()가 없는 야만족입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는 “동이는 어진사람들이며 마땅히 공경할 만한 사람들”
이라고 대답하였다
. 이 모순을 어디에서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까?

동이족이면서도 종족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2중인격자로서 권력에 아부하면서도 이면의 양심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을까
? 다음 두 가지 예 를 참고해 보자.


그대는 교기(驕氣), 다욕(多欲), 태색(態色), 음지(淫志)를 버려라’

이 말은 공자가 예()에 대해 묻기위해 노자를 찾아 주나라에 갔다가
노자의 꾸짖음을 받았다는 내용인데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체 뽐내는
태도
(교기)와 욕심이 많다는(다욕) 것과 밖으로 드러내 는 표정(태색)으로
도리에 어긋나는
, 즉 도리를 어지럽힌다(음지)는 꾸지람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과 더불어 좀 특이한 기록이다.

공자의 부친인 숙량홀(叔梁紇),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 백어의 아들
즉 공자의 손자인 자사
(子思)가 모두 자기 아내를 쫓아낸 소위 공씨삼세
출처
(孔氏三世出妻)라는 고사의 장본인들이며 공자 또한 아내를 쫓아
내지는 않았으나 노나라 소공때 난리가 나서 제나라의 이계 땅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 기관씨는 남편인 공자를 따라가지 않고 송나라로
가벼렸다는 것이다
.

공자의 출생에도 더 나쁜 기록이 있으나 공자를 폄하하기 위해 그의
나쁜점 만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니 그만두겠으나 우리
(동이) 역사 조작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춘추필법 즉 중국을 높이고 외국
(동이를 지칭)
깍아내린다
. 중국역사는의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하게,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는 사필원칙을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다음의 얘기를
전개한다
.


공자와 진시황과 만리장성

공자 사망 후 진시황의 대대적인 분서갱유가 단행되었고,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몇 종의 책을 제외하고 모든서적을 불태우고 다시
썼으며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매장까지 시켰다
.

그뿐 아니라 그는 제도정비와 도량형 정비를 하였고 스스로 최초의 황제라
칭하며 만리장성 구축 에 나섰다
. 이미 세명의 황제 조상이 있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최초의 황제로 내세운 것은 앞서
3황제는 실제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했거나 무시해버렸다는 것이고
, 아마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제후국의 왕으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당시 실제 단군조선 제후국으로서의 지배를 받고있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유학자들이 대대로 신봉해온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지나족
(화하, 화산족)의 천자국 단군조선 숭배사상을
지워버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

결론적으로 진시황은 중국대륙에서 동이족으로부터 받은 지배흔적을
모두 몰아내고 또 종주국


단군조선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 축조사업정책을 펼친
것이다
.

진시황은 한족(漢族) 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을 숙청하고
,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것도 이들 타민족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

그렇다면 서적을 불태우고, 조작된 사서들을 다시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 하고나면 당 연히 유물과 유적이 남을 것인데
,
금속이나 철제 등은 녹여 진시황의 아방궁 건축물에 사용하였 듯,
변형시켜 흔적을 없앨 수 있겠으나 그 많은 무덤들(고인돌 포함)
돌기둥과 탑들과 비석들은 어찌 처리할 수 있겠는가
, 그것이 보통
무덤이라면 모르되 신시
18대 및 단군조선 47대 총 65 대의 왕릉이며,
이는 고구려 장군총을 연상하면서 그 규모가 장군총보다 규모가 더
큰 왕릉들을 상상해보면
8~10층 축대형식의 돌의 양은 얼마이며 탑과
비석의 수는 얼마이겠는가
, 이를 어디 에 묻을 수 이ㅆ으며, 어떻게 다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 만리장성의 축대 속에는 유물이 될만한 것들을,
돌담에는 왕릉의 축대(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돌들을 사용하면서
유적들을 감추었으리라
, 그것이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의 숨은 뜻이
아니었을까
? 불과 30여년을 지속하다가 만 진나라 가 들과 산에서
자연석을 캐고
, 나르고, 깍고, 다듬어 그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진시황은 분서갱유 이후 인류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 반대세력 축출이라기
보다는 동이족 축출과 동이문화 숭배사상을 말살하려 하였으며
, 그것은
우리 민족의 혼 빠진 정신상태를 비추어 일단 일본의 역사왜곡과 더불어
성공을 걷우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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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0)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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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 이어 몇 가지 더 살펴보자.

** 단군조선 제12세 아한(阿한)왕검 38(기원앞 1797)에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하고 무도 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아한 왕검께서는
국정을 더욱 바로 살피니 하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나라의
신하나 백성되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有爲者:11세 단군 도해왕검의 태자인
아한의 태부로 삼았으며 아한 왕검은 스승인 그를 國太師로 삼았다
.)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다 옮겨올 수 없어 중요한 부분 몇가지를 간추려 본다.
()나라는 단군조선의

왕이 바뀔 때마다 사절이 찾아왔고, 그러다가 어느때에는 조선의 변방을
침공하기도 했다
.

즉 제21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47(기원앞 1291)에는 은나라(상나라에서
은나라로 바뀜
)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을
침공하였는데
, 결국 조선에 크 게 패하고 물러나며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온 일도 있었으며
, 23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8(서기앞 1210)에는
은나라 백성들이 몰려와 은나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가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게해달라고 간청하므로 임금께서 허락하니
이에 은나라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 하였으며
, 25세 단군
아홀
(阿忽)왕검 29(기원앞 1122)에 은나라의 임금 주()가 주()나라의
무왕
(武王) 희발(姬發)에게 패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수차례에 걸쳐 연대별 중국의 역사를 다루어 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우리들의 잘못 된 역사인식과 사대적인 관념을 먼저
타파해 나가야할 것이다
. 과연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유구하며 그 뿌리가
깊고 길어 우리의 문화가 대부분 그들의 것을 받 아들여 발전해 욌다고
믿고 있는가
?

여기에서 <중국역조 제왕개람>의 중국 최 고대의 인물들, 그들이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세명의 황제와 다섯 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자
.


삼황: 태호 복희(기원앞 3500년대)— 배달국(神市) 태우의 환웅의 12 아들
중 막내아들
(동이(東夷)에서 차용해간 내역, 아래 동일)

: 염제 신농(기원앞3200년대)—배달국(神市) 8세 안부련 환웅때 신하였던
소전의 아들
.

: 황제 헌원(기원앞 2698~2598)—배달국(神市) 14세 치우환웅(자오지천황)
때 제후의 아들로 소전의 먼 후손

오제: 소호 금천(기원앞 2598~2515)—헌원의 아들

: 전욱 고양(기원앞 2514~2437)—헌원의 손자.

: 제곡 고신(기원앞 2436~2367)—헌원의 증손자.

: 제요 도당(기원앞2357~2284)—고신의 막내아들.

: 제순 유우(기원앞 2284~2224)—장님인 고수의 아들


이제는 분서갱유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필원칙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중과 배경을 미루 어 알만하지 않은가
, <다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인용한 내용을 보자
>

중국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그의 저서
<중국역사 연구법>에 춘추 필법의 사필원칙을 쓰면서 중화사상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부분을 날조했다
.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
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앞서 설명한 춘추필법 사필원칙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문난적(斯文亂賊)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
.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이지(李贄 이탁오)가 공자는 존경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 받들면서 살아있는 천만인의 입을 틀어
막는 주술로 삼고
, 중생의 성령을 조여 죽이 는 법보로 삼는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비판 하였다
.

주자(朱子)가 일찌기 “하늘의 중니(仲尼: 공자의 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놓고
그는
(유해칭찬)이라는 글에서 “그러면 아마도 중니(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불을 밝히고 길을 다녔겠소 이다”
라고 설파 했다
.

공자를 신격화하는 황당함과 가소로움을 조소한 이 글을 근거로 이탁오는
성인을 비난하고
, 법을 어겼다는 죄명을 쓰고, 76세의 나이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되었으며 결국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머리를 벽에 찍고
죽는 최후를 선택하고 말았다
.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그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 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

송나라 이후 주자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 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 체계로서 공자 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며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


공자가 떠난 지 2,500여 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조선 서인들의
사대주의가 일제 식민사관 에 접목되고 한민족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일부
강단론자들의 뿌리 깊은 사문난적 현상은 오늘도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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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9)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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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하..주 또는 하..주 시대로부터 현 중화인민공화국까지의 역사를
역대순으로 살펴 보았는데
, 사실 하..주 이전의 요임금과 순임금은 물론
그들의 최초의 황제라는 헌원의 대를 통틀어 우리 민족 조상의 신시
,
단군조선과 연계 또는 관련되지 않은 중국의 고대사는 없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기원앞 2700년대의 한족의 시조라는 황제 헌원과
단군조선 앞 신시
14 대 한웅 자오지 천왕과의 관련기록을 보자
(우리의 한단고기, 규원사화 및 중국 최초의 정사라 는 사기 권1, 이외
수십여종의 사서
)

신시(또는 九黎구리)자오지 환웅은 13대 환웅 사와라(斯瓦羅)가 세상을
뜨시고 보위에 올랐는 데 기원앞
2706~2598년까지 109년 동안 제위에
계셨으며 수는
151세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기원앞 2700년대 한족의 시조 황제헌원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 해 동시대의 영웅이었던 신시
(神市)의 동두철액
치우천자를 비교론 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었던 황제헌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자가
탁록에서 징벌하였다
.

이미 산동성 동평에서는 치우천자의 유물 ‘치우총’이라는 비석과
‘치우사’라는 표지석이 나왔다
.

요와 순을 거쳐 하()나라를 건국한 우()는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은
뒤로하고 마지막 임금 걸
()왕에 대한 관련기록들을 살펴보자.

걸왕은 악독하고 탐욕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런 그가 매희(昧喜)라는
한 여인에게 빠져 주지육림
(酒池肉林)에서 혜어나질 못하였으므로
백성의 원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

이에 탕임금이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치니 하나라는 패망하고 걸왕은
남소
(南巢)로 달아났다. 소위 하나라는 걸왕 때 망하고 순임금 시절 우를
도와 치수
(治水)사업에 종사했던 설() 13대 손 탕()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

이러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 역시 경국지색(傾國之色) 달기에 빠져,
달기가 원하는 것 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여봐라 이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발가벗어야 하며 남자는 반드시
벗은채 벗은 여자를 업고 짐이 있는 곳까지 걸어와야 한다’는 명령도
달기의 원함에서 비롯 되었다
. 그래서 1000 여명의 남녀가 발가벗은채
춤을 추었고
, 주지육림에 묻혀 환락의 극치를 치닫다가 주나라의 무왕
(武王)에게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때 남겨진 얘기 하나, 나이 90이 념은 형리가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달기의 목을 치려고 칼을 잡았는데 달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현기증을
일으켜 칼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

결국은 달기의 얼굴을 보자기로 가린 후에야 목을 쳤다고 하는
얘기이다
.


단군조선 속의 중국 하.().

다시 우리 상고사에 나타나는 하나라의 기록과 그 패망시기를 우리 사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

** 1세 단군왕검 67년인 갑술년(기원앞 2267)에 태자 부루(扶婁)
도산
(塗山)에서 순 ()임금이 보낸 우()와 만나 치수(治水)법을
가르쳐주게 했다
.

태자 부루는 우에게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皇거倧寶)
세가지 보물까지 주며

물을 잘 다스리라 하였다. 이에 우는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천제의
아드님의 명을 힘써 행하여 태평을 열고 삼신에게 감사 드리겠습니다’
고 하였다
.

** 2세 단군 부루왕검 26년 병인년(기원앞 2215)에 순()임금의 아들
상균
(商均)이 고국인 조선에 돌아와서 관직이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 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왕검 19년 임인년(기원앞2119)에 하()나라
상왕
(相王)

덕을 잃자 그나라 신하들이 왕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임금
(烏斯丘)이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 (), ()
세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는데 소문만 듣고도
그들은 항복하였다
.

** 5세 단군 구을(丘乙)왕검 5년 병인년(기원앞 2096) 봄에 하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
(曆書)와 두건갑자기(頭建甲子記)를 가지고
와서 입조하였다

** 5세 단군 달문(達門)왕검 10년 정해년(기원앞 2073) 가을에 하나라
왕 소강
(少康)이 사신을 보내와 신년 하례를 하였다… 중략


** 12세 단군 아한(阿漢)왕검 2년 무자년(기원앞 1833)에 발 하나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 울었는데 이 짐승은 하나라 남쪽의 양수(陽獸)로서
하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난을 피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

* 제위 38년 갑자년(기원앞 1797), 임금(阿漢)이 하나라 걸이 포악하고
무도하여 멸망하는 것을 보고 더욱 근면하여 국정을 바로 살피니
하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
()나라 신하되 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

*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 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

**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이 바뀔 때 마다 사절이 찾아왔고,
21
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47(기원앞 1291)에는 은나라 왕
무정
(武丁)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 (令支) 등을
침공하였는데 조선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나며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온 일 도 있었으며
23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8
(기원앞 1210)에는 은나라 백성들이 와서 은의 정치가 문란하여
살 수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게 해달라고 간청하므로 허락하니
이에 은나라 사람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도 하였으며 제
25
단군 솔나
(率那)왕검 29(기원앞 1122)에 은나라 임금 주()
()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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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8)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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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기원앞 1046년에 일어난 주(東周, 西周)나라가 275년 만인 기원앞 771년에 패망하면서 지나(중국)
춘추시대에 접어든다
.

소위 하,,주 또는 하, , 주 시대가 끝나고 춘추열국시대에 접어드는 이 시대까지도 중국 이
그토록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앞세워 자랑하는 한족
(漢族)이라는 명칭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기 22세기
(서기 3세기)에 와서 한나라가 생기고 나서야 한(), 한인(漢人)이라는 말이 등 장하지만 종족을
의미하는 한족
(漢族)이라는 명칭은 등장하지 않고 단기 29세기(서기 5세기)

송나라 범엽의 후한서에도 동이족의 분류는 상세히 기록하면서도 정작 한족이라는 명칭은 등

장하지 않는다고 안호상의 <배달.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상지>에 기술하고 있다.


이어서 한나라 앞 진나라의 진()이나 한나라의 한() 마저도 우리 배달나라의 한개의
이름인 진() 또는 진단(震旦)을 따서 진()이 된것이고, 밝다는 뜻의 한, 또는 마한, 진한,
변한의 한()에서 한()나라가 비롯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족이라는 민족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면 결국 중원에 분포하여 그곳의 역사와 문화를 일으키고 남겨온 동이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는 학설이 심심찮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 중원에 사는 사람을 그저 중원사람이라 하였고
중국이라는 중화민국
(Republic of China) 은 물론1911~1949년에 불리워진 나라 이름이고, 현재
불리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 People’s Republic of China)1949년부터 이다.

중국의 저명한 학자 임혜상은 이른바 ‘한족(漢族)’ 유래의 근원에 관해 ‘화.하계(華夏系)

한족 구성의 줄거리일 뿐더러, 온 중국민족의 줄기이다’고 주장한다.


오로지 한나라 앞시대를 “화.하계”라 하고 한나라 뒷시대를 “한족”이라 하며 신석기 시대의 후기에는
황하 유역에 국한해 살다가 지금은 중국 대부분의 땅에서 살고 있다고 밝히고 있는 데 이마저 근거
없는 구차한 주장이라고 안호상은 일축한다
.

.하계가 한족의 독립된 종족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으나 이러한 주장은 어떠한 역사적 근거가
없음은 물론 화
. 하라는 것도 종족의 명칭이 아닌 지명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중국, 한족의 뿌리는?


이처럼 역사문화의 빈곤국이라는 것 자체가 그들 한족의 입지나 자존심에 치명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 수많은 공정들을 통해 역사를 인위 제작하고 있는 것이다
.

이어서 그들 국가연대를 살펴보자.

기원앞 770~476년까지를 춘추시대, 기원앞 475~221년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한다.

이를 합하여 춘추전국시대(기원앞 770~221)로 분류하기도 한다.


(:진시황제)나라의 개국은 기원앞 221년이요 패망은 14년 만인 기원앞 207년이다.

이어 기원앞 206년에 등장하는 나라가 한(:西漢:한고조)나라이고 서기9년에 패망하며 서기
9~24년 까지의 아주 짧은기간에 신()나라가 등장한다

이어 서기 25년부터 220년까지 동한(東漢)의 시대를 거쳐 삼국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나라의 존속은 서기 220~265, ()나라의 존속기간은 서기 221~263년이며 오() 나라는
229~280년까지 존속 하였다.

서기 265년에는 서진(西晉)이 생겨니고 316년까지 존속하였으며 서기 317년에 일어난 동진
(東晉)은 서기 420년에 패망하면서 소위 남북조시대가 열린다.

남조(南朝), (), (), (), (), 등이 일어나고 스러지지만 남북조 전체의 시기는

서기 420~588년이고, 이어서 북조(北朝)시대가 열리는데 그 또한 북위(北魏), 동위(東魏), 서 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등의 나라가 일어났으며 존속기간은 남북조 시기와 겹쳐 서기386~588년이다.


북주(北周)와 진()에 겹친 서기 571년에 일어난 수나라는 36년이 되는 617년에 당의 태조
이 연
(李淵) 부자에게 패망하게 된다.

즉 서기 618년에 세워진 당나라는 대체적으로 길게 봐주는 289년을 존속하다가 서기 9075
(Five Dynasties)기를 맞아 역시 당나라의 문은 닫히고 만다.


5대란 후양(後梁), 후당(後唐), 후진(後晉)후한(後漢), 후주(後周)이며 다시 10(十國)
일어나는
960년까지 존속하게 된다. 즉 서기 907~960년까지를 ‘5 Dynasties’라고 한다.


이어 일어난 십국은 송(), 북송(北宋), 남송(南宋), (), 서하(西夏), (), (), (),
() 을 말하며 이들나라의 건국과 패망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 개국과 패망 연월 일을
간략하게 기록하여 보겠다
.

(서기 960~1279), 북송(960~1127), 남송(1127~1279), (916~1125), 서하(1038~1227),

(1115~1234), (1279~1368), (1368~1644), (1644~1911)이며 중화민국(1911~ 1949), 중화민국
(1949~현재 : 타이완), 중화인민공화국(1949~현재).


우리 학자들 중에는 중화민국 이전의 중국을 중국이라 부르기를 거부하는 분들이 있다.

지나로 표기해야한다는 것이다. 심하게는 잡탕민족이라는 표현도 서슴치 않는다.

그들의 심한 중화주의, 세계중심주의가 주는 반응도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
역사의 실상을 들여다 보면 그른 주장이 아니라고 볼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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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7)

                                    <참역사문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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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여기 즉 이 삼황의 시대는 중국의 실역사에 해당하지 않고 신화의 시대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이미 앞서 소개했 듯
염제신농
(炎帝神農), 태호복희(太호伏羲), 여와 등 중국의 3조상은 우리의
단군조선 앞 신시의 실존 인물들이다
.

즉 태호 복희씨는 신시(한배달) 5세 환웅 태우의(太虞義)
아들 열둘 중 막내아들이며
, 6 세 환웅 다의발(多義發)의 아우이다.
그는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
얻었으며 팔괘
(八卦)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여와는
환웅 다의발의 여동생이니 복희씨와도 남매지간이다
.

신농씨는 신시 제 8세 환웅 안부련 제위시 강수(姜水)의 군사감독관
소전
(小典)의 아들이다.

신농씨는 강수에서 살아 성을 강()씨라 했고 복희씨의 여동생 여와의
뒤를 이어 제후국 왕이 되었다
.

화하족과 무관한 천손(天孫) 민족의 조상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만들어 받드는 이유가 무었일까
?

*[최근, 1980년대부터 남.북한에 일고있는 역사 민족주의적 분위기의
확산에 대한 대응책 중의 일환 으로 동이족
(묘족)의 수장이라는 신시
14대 자오지(치우)천황을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이미 마쳤다
.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현에 건설한 귀근원(歸根苑)
중화삼조당
(中華三祖堂)이 그 중 하나다. ‘귀근원’은 중화민족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중화삼조당’은 중화민국의 중화민족
3명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들 최고의 황제로 떠받드는 그 헌원황제와 동아시아
최초의 대전
, 탁록대전을 치른 붉은악 마라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치우천황을 헌원황제와 나란히 삼조당 안에 안치해놓고 있는 것이다
.

즉 중화삼조당 안에는 치우. 황제. 염제를 모셔놓고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

<*[ ] 안은 우실하의 요하문명론 간접인용.>

이렇게 중국이 진시황의 분서정책(焚書政策), 공자의 춘추필법,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북공정을 너머 최근에는 요하문명론을
제기하고 있다
.

소위 만주지역 서쪽인 요서 지방과 요하 일대를 중국문명의 시발지로
삼고
, 이 지역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부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삼아,
요서 지역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은 황제의 후예들 이며,
그러므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과 역사는 중화민족이고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지역에 기원한 예. 맥족은 물론 단군. 주몽 등 우리의
조상들이 황제의 후손이 되며
, 우리 의 역사. 문화 모두가 중국의
방계 역사
. 문화로 전락하게 되는 공정이 곧 요하문명론의 실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다른 공정들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공정
, 요화문명론을 펴고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곧
홍산문화와 요하문명의 문화적 주된 맥은 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 요하문명과 홍산문화는 결국 한국문화의
원류이고
, 그 주인공은 우리 민족의 선조들인 때문이다.(이미 많은
유물
, 유적들이 발굴되었음)

이제 중국의 고대사를 들여다보자.

우리 단군조선의 개국과 같은 연대의 요임금, 뒤를 이은 순임금, 그리고
우임금의 얘기는 후에 따로 하기로 하고
19963월부터 시작된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으로 대대적인 유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자신들의
고대 왕조인 하
(), (), ()의 설립 연대와 멸망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정 지은 역사 부터 살펴보자
.

**(): 기원앞 2070~기원앞 1600

**(): 기원앞 1600~기원앞 1046, 상나라의 19대 반경왕(盤庚王)
도읍을 은
()으로 옮긴 것은 기원앞 1300년이며 이후 즉 도읍을
은으로 옮긴 이후를 상나라와 구별하여 은나라라고 한다
.

**(): 기원앞 1046~기원앞 771

사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등 200여명 의 전문가들이 이루어낸 이 업적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시대는 주나라 공화
(共和)원년인 기원앞
841 년이 그들의 상한선이었으니 물경 1229년이나 그들의 역사를
고대로 끌어올린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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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6)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우자는 기치를 내걸고 워싱턴
중앙일보사의 관심과 적극적적인 지원 아래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을
연재해온 지도
36주에 이르렀다.

일본이 우리 고조선과 백제, 가야, 고구려, 신라의 역사문화를 떠나서
그들은 그들만의 독창적인 역사는 물론 신화 마저도 내세울 수가
없었기에 우리의 역사 및 자신들의 사기와 일본서기까지도 변조
하였다는
것을 일일 이 증거를 제시하며 알린 바도 있다
.

이제 우리 민족의 뿌리를 찾아나서는 대 장정은 신시 171565년을
거쳐 단군조선
12대 아한 왕검까지 이르렀는데, 이쯤에서 우리의
선조들이 발원하여 수천년 동안 이어져 오며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남겼던 대륙
(중원), 소위 중국땅 그 넓은 광야 속의 조상 얘기와 더불어
한족
(漢族)의 얘기를 곁들여 보기로 한다. 어쩌면 이미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가 자리잡고 있는 그 땅에서 우리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강조하기보다 는 역으로 그들의 역사를 짚어보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쉽겠다는 생각이 든다
.


오늘날의 중국은 그 영토나 인구, 그리고 잠재력에 있어서 세계의
으뜸이다
.

그 영토 안에서 발원한 모든 인류문명은 세계 4대 고대문명을 앞지르는
깊이와 길이를 자랑한다
.

그러나 그 긴 역사를 통하여 그 영토를 지배했던 민족이 화하, 한족으로
불리는 중국인으로만 한정할 수 있 겠느냐고 반문해보기로 하자
. 이는
매우 중대한 질문이 될 것이다
.

우선 기원 앞 230년을 전후하여 진시황의 분서정책(焚書政策)으로
자신들의 부끄러운 역사
, 지배당했던 역사서를 모조리 불태우고 나서
다시 쓴 역사서를 우리는 받들어 배워왔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그
이후 일어난 우리 역사의
10대 수난사를 들여다 보면 전대미문의 역사
(과거) 단절이라는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사필원칙(史筆原則)이란?

과연,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사필원칙(史筆原則)이란 무엇인가?

**중국을 높이고 동이족(외국)은 깍아내린다(尊華攘夷 존화양이)

**중국사는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히 (詳內略外 상내약외)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감춘다(爲國諱恥 위국휘치)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이 악습은
사마천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 된 역사는 많은 부분 날조된 사실들이
속속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이다
.

일본 학자 오향청언(吾鄕淸彦)의 말을 빌어보자.사마천의 사기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을 지배했었다

는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서 마치 중국이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한나라의 한()이라는

국호 자체도 옛날 3한 조선의 한()이라는 글자를 그대로 빌려

간 것에 불과 하다” 우리가 잘 아는 가까운 중국의 역사 가운데
금나라를 세운 숙신
, 읍루, 말갈에서 이름이 바뀐 여진족이 세운
나라였으며
, 여진족에서 이름이 바뀐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웠고,
()나라는 몽골족에 의해 지배를 받 았지 않은가! 본래 숙신은
단군조선의 한 부족이었고
, 숙신에서 이름을 바꾼 읍루는 부여의
한 부족이었으며 읍루에서 이름을 바꾼 말갈은 고구려와 발해에
속한 부족이었다
.

이러한 일이 비단 원과 청의 대에서만 국한되어 일어났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


중국이 조상이라고 떠 받드는 삼황(三皇) 오제(五帝)가 있다.

책에따라 다섯으로 분류되는데, 사기(史記)와 삼황기(三皇記)
,,人 즉 天皇, 地皇, 人皇이며 풍속통

(風俗通), 황패(皇覇)에는 복희(伏羲),여와(女와),신농(神農)으로
되어있고 나머지는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

두번째의 기록과 매우 흡사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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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KORUS House English class is an article about Chuseok, one of Korea's biggest tradi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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