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앞 칼럼에서 진시황은 한족(漢族) 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에도
대대로 신봉해온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화하, 화산족)의 천자국 단군조선 숭배사상을 지워버릴 수 없다고 보고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을 숙청하고,
서적을 불태우고, 조작된 사서들을 다시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
하였으며 그러고도 단군조선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
축조사업정책을 펼쳤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과연 동이족의 흔적을 다 지웠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하고도 남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처치 곤란한 유물과 유적이 남을 것이다. 그것도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난 수량의 왕릉 과 비석과 탑들이다. 그것은 부셔 흩
뿌리거나 바다로 운반하여 수장시키거나 땅 속에 묻어 감출 수 도 없는
골치거리였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일반 무덤도 아니고 고구려총의
모습과 같으면서 규모가 훨씬 더 큰 신시 18대와 단군조선 47대, 65기의
왕릉이다. 제후국들의 왕릉까지를 포함 시키지 않아도 이미 도저히
말살시킬 수 없는 거대한 피라미드 형식의 계단식 왕릉들이다. 금속이나
철제같은 유물이라면 녹여 진시황의 아방궁 건축물에 사용하였 듯,
그것들을 얼마든지 변형시켜 흔적을 없앨 수도 있겠지만 그 많은 무덤들
(고인돌 포함)과 돌기둥과 탑들과 비석들은 어떻게 처리할지 그 방법이
묘연하다. 이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추정하는 바(비록 기록이나 유적
으로서 실증할 수는 없으나 확고한 심증을 두고있는) 그 내용을 제시
한다.
“만리장성의 축대 속에는 장문의 비문이 새겨진 비석(송덕비 포함)등의
유적류, 신시 및 단군조선 역대 왕릉의 축대에 사용된 다듬어진 돌들은
장성의 성벽을 쌓는데 사용함으로서 유적이 될만한 것 들을 모두 감추고
성벽을 쌓는데 필요한 다듬어진 돌들을 충당 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것이 만리장성을 축조한 진시황의 진정한 숨은 뜻이었을
것이라고 추정추정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30여년을 지속하다가 사라진 진나라가 들과 산에서
자연석을 캐고, 나르고, 깍고, 다듬어 그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본류에 복귀해야겠다. 본 연재는 재미 있게 엮어내는
얘기책이나 역사소설이 아니다.
아무리 어렵고, 딱딱하고, 재미가 없어도 조작되고 왜곡된 역사의
틀을 깨고 우리 참역사의 현장 을 찾아나서는 사실의 역사 기록이라는
본질을 탈피할 수는 없다.
그러면 진나라의 시황제 진시황이 소위 그들이 말하는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몽염을 시켜 쌓았다 는 만리장성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
‘이때 진나라의 영토는 동으로 바다를 연하여 조선에 미쳤고, 서쪽으로는
임조, 강중, 남쪽으로는 북호까지 뻗쳤다. 그리고 북쪽은 황하를 기점으로
하여 음산산맥을 따라 요동(현 요동이 아님)에 이르렀는데 만여
리(里)이다’
좀더 알기 쉽게 표현한 수경주(水經注)의 기록을 보면 ‘진시황이 태자
부소와 몽염에게 명하여 장성을 쌓게 하였는데 장성은 임조(서쪽 끝)에서
시작하여 갈석산(동쪽 끝)에 이르렀다’는 것, 갈석산은 창려현에 있으며
산해관 바로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고대의 요동지역이다.
장성의 안쪽에 위치하는 창려현(현 하북성 창려)과 장성 밖에 위치하는
산해관(옛 낙랑군 수성현) 의 중간을 가로지르며 뻗어가 서쪽의 임조에
이르렀다는 것이고, 이를 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 서한(西漢) 시대까지도
우리의 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그 동쪽이 지금의 난하(옛 요수)와 갈석산
지역(현 요하의 서쪽)으로 옛날에 요동이라 부르던 지역이었던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우리 역사 말살의 10대 수난사
그럼에도 우리의 영토는 반도이고 고조선은 기자조선, 위만조선으로부터
시작되었며 위만조선은 한 나라에게 패망하여 반도내에 낙랑, 현도, 임둔,
진번 4군을 두어 다스렸다는 등식을 만들어 우리 민족의 조상은 애초부터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아온 무위 무능한 존재로 날조해 놓았다.
그것은 중국이 밑돌을 깔고 일제가 못박은 형상인데 그에 대한 기사의
정리는 뒤로 미루고 우선
우리 역사말살의 빼놓을 수 없는 수난사를 살펴보자. (이를 10대 수난사로
표현하기도 한다)
제1차 고구려 동천왕 18년(244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공략하여 많은 사서 소각, 이때 고구려 <유기> 100권이 사라짐.
제2차 백제 의자왕 20년(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자성이 함락되면서
사고(史庫)가 불타 없어짐(燒盡)
제3차 고구려 보장왕 27년(608) 당나라 이적이 평양성을 공격하여 전적을
모두 탈취함.
제4차 신라 경순왕 원년(972) 견훤이 경애왕을 치고 신라의 책을 전주로
옮겼다가 왕건에게 토벌 당할 때 방화 소각됨.
제5차 고려 인종 4년 (1129) 금나라에서 주체서적을 몰수해감.
제6차 고려 인종 20년(1133) 몽고의 침입으로 소각. 3한 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가 이때 없어짐.
제7차 조선 태종 11년(1411) 5부학당을 송제(宋制)에 의하여 설치하면서
유교를 장려하고 비유교서적 일체를 소각함
4대 사고 중 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각, 훗날 마리산 사고로
옮겼으나 고종 3년(1866)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의 강하도
공격으로 방화됨.
제9차 병자호란으로 인한 소실 및 손실.
제10차 일본강점(1910)이후 식민지 교육정책으로 사서 20여만권, 탈취,
소각,개조됨.
*** 동방의 한국은 가장 오래되고 경이로운 역사를 간직해온 나라이면서
전대미문의 과거단절도
경험한 나라인데 그것은 모두 외세의 침탈과 인위적인 역사말살의
비정상적인 단절의 악순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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