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풍 :: '김영봉목사' 태그의 글 목록

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내 하나님은 늘 낯설다”
                                            (My God Is Always Puzzling)
                                               시편 (Psalms) 139:7-12

1.

소설 <오두막>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세 사람의 등장 인물을 통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어떻게 ‘따로 또 같이’ 활동하시는지를 세 등장 인물을 통해 보여 줍니다. 삼위일체와 같은 복잡한 교리를 말로 설명하다 보면 여러 가지의 모순과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의문점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하나의 이야기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이 소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독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려 하면, 어쩔 수 없이 왜곡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통해 그리려 했으니, 그런 부분이 왜 없겠습니까? 적어도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모순이나 오류가 하나도 없는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런 글을 읽을 때 작가가 어떤 점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그렸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는 오해되고 왜곡됩니다.
주인공 맥은 오두막에서 성부인 파파, 성자 예수 그리고 성령 사라유를 만나, 2박 3일 동안 동거하며, 그들과 ‘함께’ 그리고 ‘각각’ 대화하면서 상처를 치유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파파와 예수와 사라유가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기쁘고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셋은 분명히 구분되는 개별적인 인격체들인데, 동시에 그 셋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통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일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독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느껴’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저는 앞으로 네 주일 동안 폴 영이 만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소설 <오두막>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첫째,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파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세 인물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충격을 주는 것은 이 흑인 여성입니다. 오래 전에 개봉된 코미디 영화 <브루스 얼마이티>(Bruce Almighty)에서는 흑인 배우 노먼 프리드만(Norman Freedman)이 하나님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저는, 감독이 꽤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흑인으로나타나시다?’ 적지 않은 백인들에게, 특히 인종차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폴 영은 한 술 더 뜹니다. 성부 하나님은 흑인이면서도 여성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여성은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마마’라고 불러야 옳을 사람에게 파파라고 부르라니! 독자들은 여기서 아주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선택이요 고안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뜨리려 했음에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전통은 신구약성경 안에 뿌리가 깊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는 사람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은유(metaphor)입니다.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을 오해하여 부지불식간에 그분을 남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맥이 오두막을 향해 떠나기 전에 친구 윌리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나옵니다. 친구 맥이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눈치 챈 친구가 묻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나?”(109쪽) 그러자 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르겠네. 환하게 발광하는 빛이거나 불타오르는 나무일 수도 있겠지.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허옇고 긴 턱수염을 휘날리는, 몸집이 큰 할아버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왔네.”(110쪽)

 

맥이 실제로 하나님을 간달프나  KFC 할아버지처럼 생각했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가 유아기적인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이해가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맥의 대답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혹은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혹은, Aunt Jemima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맥의 반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파파를 만나고 나서 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미쳐가는 걸까? 썰렁한 유머 감각을 지난 저 뚱뚱한 흑인 여자를 과연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하는 걸까?”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에서 맥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뉴저지에 사는 제 백인 친구 바바라는 제게 보낸 메일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그리는 것은 그분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 같고, 심지어는 그분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3.

이 거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제 친구 바바라는 저자의 문학적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바바라만이 아니라 수 많은 독자들이 여기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 어색하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요?  그 이유를 파파는 맥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메켄지, 남자나 여자나 모두 나의 본성에서 나왔지만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내가 당신에게 남자나 여자로 ‘보이고자’ 한다면, 그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은유들을 뒤섞이게 하고, 또 당신이 종교적인 고정관념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내가 간달프처럼 턱수염을 휘날리며 거구의 백인 할아버지로 나타났다면 당신의 종교적인 고정관념이 더욱 강화되었겠죠. 하지만 이번 주말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랍니다. (142쪽)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들을 심각하게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들 가운데 근거 없는 편견은 없는지, 과연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의 바램으로 만든 우상은 아닌지,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편견에도 갇힐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실 때 그 어떤 모습도 취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바’라고 불렀던 성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선입견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방법에 따라 늘 새롭게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모습 대로의 하나님, 내가 배워 온 모습 대로의 하나님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굳어버린 생각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계속 변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알수록 그분은 새로운 면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편견과 아집과 오해와 불신앙을 치료하십니다. 반면, 우상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더 강해지기는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그 사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은 늘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9편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심오한 것에 속합니다. 어떤 경위로 시인이 이같은 고백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주 작은 흔적을 체험하고 목격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그에 비해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리로 하나님을 배우다 보면, 머리로 그분을 담을 수 있고 글로 그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오해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분의 위대하심 앞에서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4.

둘째, 맥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몇 개의 성화를 떠올릴 것입니다.

 

맥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맥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성화에서 자주 보던, 말끔하고 정갈하며 조각상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전형적인 유대인 남성답게 길죽한 얼굴에 유난히 크고 긴 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맥은 예수님과 친해진 다음에 이렇게 아쉬움을 표현합니다. “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당신을 체격도 좋고 외모도 출중한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173쪽). 많은 독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매력 없는 남자로 그려 놓은 것에 대해서도 마음 편치 않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분을 지상 최대의 미남을 생각해 왔던 고정관념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예 수님의 실제 모습이 어떠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 전,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리노의 수의(the Shroud of Turin)에 남겨진 흔적으로 바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재구성 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의가 정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셈입니다. 맥의 추측대로, 아주 뛰어난 외모를 타고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이사야 53장의 예언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의 종에 대해 예언하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사 53:2)

둘째,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살펴 보면, 조각상과 같은 미남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 중 하나인 마리아와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자리가 없어서 짐승이 자는 곳에서 태어나셨고, 짐승의 먹이통을 첫 침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조각상 꽃미남을 예수님의 외모로 선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나님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더라”는 속담을 인정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형외과 의사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외모는 그렇게 잘 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비범한 무엇을 느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간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육체적인 모양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그 내면에 있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육체는 내 존재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모, 다시 말해서 겉모습에 불과한 외모를 존재는 항상 초월하죠. 자신의 편견에 따라 아주 예쁘다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얼굴 뒤에 있는 존재를 알고 나면, 표면적인 생김새는 점차 빛이 바래다가 결국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죠. (174쪽)

저는 이 말의 마지막 부분을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자신의 편견에 따라 예쁘다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얼굴 뒤에 있는 존재를 알고 나면, 표면적인 생김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지요. 잘 생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왠지 매력 있어 보이거나, 정말 잘 생겼는데 왠지 거북하게 느끼는 겁니다.” 진실이 이렇다면, 예수님에게서 외모로는 설명하지 못할 신비로운 매력이 발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외모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분에게 압도되고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5.

셋째, 성령의 역할을 담당한 사라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파파는 흑인 여성으로, 예수님은 중동 남자로, 그리고 사라유는 동양 여인으로 나옵니다. ‘사라유’라는 이름은 ‘바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말 ‘루아흐’와 신약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말 ‘프뉴마’는 모두 ‘바람’, ‘숨’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바람처럼 어느 곳에서나 활동하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유라는 이름은 성령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의 경우에는 깨어져야 할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이 우리에게 많이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는 별로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 있다면, 성령을 하나의 에너지 혹은 기운으로 보는 태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분명한 인격체입니다. 즉,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근심하고 기뻐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사라유를 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맥은 이렇게 느낍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맥은 그녀를 더 잘 보고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빛 가운데 아른거렸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데도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정면보다 그나마 곁눈으로 보는 편이 나았다. (127쪽)

사라유가 맥을 환영하면서 껴안을 때, 맥은 아주 신비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맥은 갑자기 몸이 공기보다 가벼워져서 공중부양이라도 하는 기븐이 들었다. 그녀는 그를 안지 않고서도 그를 안았고, 그를 만지지도 않으면서 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뒤로 물러선 후에야 그는 자기가 여전히 두 발을 바닥에 대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129쪽)  

파파와 예수님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라유 즉 성령은 시종일관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라유는 어릴 때 읽었던 동화 <피터팬>의 팅커벨을 생각나게 합니다.

 

눈 앞에 있다가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추고, 어디 있는가 하고 두리번 거리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납니다. 똑바로 쳐다 보려 하면 더 아른 거리고, 잡으려 하면 더 멀어집니다.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필요할 때마다 어느 구석에선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말 없이 말하고, 손짓 하나로 세상을 변하게 만들며, 마음을 꿰 뚫어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성령께서 사라유의 활동 모습처럼 부드럽게, 신비스럽게,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를 만들어 내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마치 비둘기가 땅에 내려 앉듯 사뿐히 임했다는 기록도 역시, 성령의 온유하고 부드럽고 신비로운 활동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령의 활동의 한 측면일 뿐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라유처럼 활동하는 것만이 성령의 유일한 활동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실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읽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때로 불같이 뜨겁게 그리고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마치, 바람에는 미풍도 있고 순풍도 있지만, 폭풍도 있고 태풍도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때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또 때로는 거세고 강력하게 활동하십니다. 그 모든 활동 방식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6.

무신론자들은 모든 종교들이 신봉하는 신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사람보다 작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철학과 깨달음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계시된 신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이야기들이 때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그것이 자주 문제가 되는데, 실은 성경의 하나님 이야기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하나님이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그분을 만나 사귀어도 그분의 1%도 제대로 알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 순종하며 사귀고 살아가려면 고정 관념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상 신앙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4:8)라는 야고보서의 권면대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늘 새롭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연구하며 묵상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을 계속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그분은 당신을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일상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하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이셔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가슴 벅차게 만들고 또 때로는 난처하게 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 또한 변화해 갑니다. 그러한 차원이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며, 우상 숭배일 가능성이 큽니다. 참된 하나님을 만나면 늘 낯선 느낌이 드는 반면, 우상 숭배는 늘 익숙한 신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삼위의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만이 참 생명을 줍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의 사고 능력 안에 넣을 수 있는 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못 할 신비로운 분, 낯선 분입니까?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영적 여정을 걸어 오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면서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 떨며 또한 신비로움에 젖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알던 하나님과 지금 아는 하나님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여정에는 늘 이같은 기대감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이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그렇게 경험할 때 우리의 영적 여정이 신명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 이같은 신비와 기쁨이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의 기도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평생 구약을 연구하며 묵상한 사람답게 그는 시편 129편만큼이나 하나님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기도로써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주님을 부르고
저희가 필요한 대로 주님의 역할을 규정하고
저희가 선 각도에서 주님께 다가갑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저희 자신의 깊은 요구,
깊은 상처
그리고 깊은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부르는 이름은 잠시 동안 유효할 뿐,
주님은 그 이름을 넘어 다가오시며
저희 생각을 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저희가 잡을 수 없는 영광 속으로 사라지십니다.
주님의 자유와 숨으심을 목도하며
저희는 인정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저희보다 위에 계시며
저희를 위해 계시고
또한 저희를 넘어 계시다는 것을.
저희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저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우물거릴뿐입니다.
그것을 통해
이름지을 수 없는 주님 앞에 선
저희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주님을 설명하고 찾고 규정하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주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육신을 입고 고통받으시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저희에게 주신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62010_hvod.asp
방송듣기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욥기 42:1-6]
1.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노폭(Norfolk)에서 열린 228차 연합감리교회 버지니아 연회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 연회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짐 걸리 목사님(Rev. Jim Gulley)의 간증이었습니다. 걸리 목사님은 연합감리교회 선교국(General Board of Global Mission)에 소속된 선교사로서 캄보디아, 나이지리아, 아이티 등 저개발 국가에서 농업과 지역 사회 개발 프로그램을 도와 왔습니다.

올 해 64세인 그는 지난 1월 12일 아이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연합감리교회 선교사 두 명과 함께 Port-au-Prince의 몬태나 호텔에 있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하자 호텔이 무너졌고, 세 명의 선교사들은 다른 세 명과 함께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무려 55 시간 동안 갇혀 지냅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심한 부상을 입습니다. 길고 긴 고통과 어둠의 시간을 지내고 난 후, 여섯 명 모두 구출되었는데, 샘 딕슨 목사(Rev. Sam Dixon)와 클린트 랩 목사(Rev. Clint Rabb)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걸리 목사는 55시간 동안 그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경험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그들은 이틀 하고도 반 날 동안 서로를 격려해 가며 버팁니다. 돌아가며 기도하기도 하고, “내게 강 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 같은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걸리 목사는 그들의 감정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롤러 코스터와 같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 폐허 안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따라서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그들의 미래는 안전하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걸리 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Why me?”라고 묻기 보다는 “What to do?”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 아이티의 비극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세상을 떠난 다른 두 선교사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아이티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장이나 흥분 없이 담담하게 진행된 간증이 끝난 후, 2천여 연회원들은 기립 박수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2.

여러분은 이 믿음을 어떻게 보십니까? 5층짜리 건물의 폐허 더미 아래에서 55시간 동안 갇혀 꼼짝 없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한 사람들 중 두 사람은 끝내 목숨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짐 걸리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도 의식을 잃을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보입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이 갇혀 있던 그 현장이야말로 다음의 세 가지 추론이 가장 그럴 듯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둘째, 계신다 해도 인간의 불행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셋째, 그럴 능력은 있으나 그럴 마음이 없거나, 셋 중 하나가 진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가장 그럴 듯하지 않은 믿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지진이 나고 호텔이 무너지고 우리가 그 건물 더미에 깔렸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는, 맹목적인, 완고한, 그리고 구제 불능의 믿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 믿음이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실은 믿음이 이 정도에 이르러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게는 걸리 목사님의 믿음이 놀라워 보입니다. 제가 만일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제 믿음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롤러 코스터를 타는 감정에 속지 않고, 견고한 믿음 위에 견고히 버티고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믿음입니다. 그분은 절대 고독의 깊은 수렁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같은 믿음 위에 설 수 있을까요? 세상이 모두 뒤죽박죽인 것 같고, 모든 것이 우연과 사고의 연속인 것 같으며, 인생에는 아무런 뜻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다시리신다”(God is in control)라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그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공식이나 비법을 배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비법이란 오직,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깊이있는 관계 안에 머물러 살면서 그분에 대해 더 많이 경험하여 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식으로 배워 안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서 체득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 진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그 영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3.

믿음은 체험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조심하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것들 중 세 가지만 다루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다스린다’(to control)는 말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수정해야 합니다.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라는 새로운 형식의 갱신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브라이언 맥클라렌(Brian McLaren) 목사의 저서 <새로운 기독교인이 온다>(A New Kind of Christian)에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눈이 확 뜨이게 만드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고대인들이 상상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 목동이 양을 치는 것이나 농부가 농작물을 기르는 것 혹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좋은 목동은 양을 풀밭으로 인도하고,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놀게 만듭니다.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 양이 있으면 잘 타이르고 길들입니다. 때로, 채찍을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입니다. 어떤 양이 병들면 완치될 때까지 목동은 함께 아파하며 치료를 돕습니다. 때로, 고집을 피워 목동을 떠나 짐승의 밥이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목동이 최선을 다해도 그런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목동은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목동이 양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애정 깊은 관계를 가꾸고 그 관계 속에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반면, 현대인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컴퓨터의 ‘콘트롤 키’(control key) 혹은 기계의 ‘콘트롤 버튼’(control button)을 상상합니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콘트롤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정지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누르면 정상으로 가동됩니다. 컴퓨터의 콘트롤 키는 많은 기능을 가집니다. 콘트롤 키와 다른 키를 함께 누르면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즉각 즉각 해결할 수 있습니다. 콘트롤 키를 누를 때, 누른 사람의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콘트롤 버튼과 키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을 들을 때면 저 하늘 어디선가 60억개의 콘트롤 버튼을 쥐고 기계실에 앉아 조종하는 신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믿음에 곤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콘트롤 버튼을 눌러 아이티에 지진을 일으켜서 20만명에 가까운 생명을 한 순간에 희생시켰다고 생각하니, 그 하나님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면, 몬태나 호텔이 무너져 내릴 때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콘트롤 버튼 하나 누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 하나님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또한 인간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다스리십니다. 기계 다루듯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애정 깊은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하듯, 혹은 성품 좋은 목동이 양들을 다스리듯, 관계를 통해 다스리십니다. 애정 깊은 부모와 성품 좋은 목동은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강요하지 않고, 조급하게 나서지 않습니다. 때로 위험을 보아도 자녀들이 그 위험을 겪어내기를 바라면서 아픈 마음으로 지켜 보고 기다립니다. 가장 좋은 양육은 자유 의지를 선하게 활용하여 거침 없고 구김살 없이 자라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그 자유 의지를 오용할 가능성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맡기고 지켜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관계를 깊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연의 순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지진이나 태풍 혹은 산불 같은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악이 아닙니다. 길게 보면, 그것은 모두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다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인간들이 악의를 가지고 저지르는 범행을 완력으로 막아 서지 않습니다. 칼을 쥔 팔목을 잡아 채거나, 날아가는 총알을 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건물 더미를 멈추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당장은 유익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애로운 부모가 자녀들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관계를 통해 다스리는 것처럼, 자연 법칙과 자유 의지에 모든 것을 맡겨 두고는 관계를 통해 다스리기를 선택하셨습니다.

4.

둘째,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때로 의심스러워지는 이유는 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이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오히려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짐 걸리 목사님은 간증 중에 테니스 선수 아더 애쉬(Arthur Ashe)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아더 애쉬는 1960년대와 70년대를 주름잡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그랜드 슬램(Grand Slam) 즉 US Open, French Open, Australian Open, 그리고 영국에서 열리는 Wimbledon 경기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했고, 그 중 한 번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아더 애쉬는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인해 발 목이 잡혔고 두 번이나 수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술 동안에 받은 수혈로 인해서 AIDS에 걸립니다. 아더 애쉬는 1993년,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AIDS에 걸린 것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전세계 팬들로부터 수 많은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같이 나쁜 병을 위해 당신을 선택해야 했습니까?” 아더 애쉬가 AIDS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에 누군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애더 애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 중 5백만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 중 50만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 중 5만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 중 5천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 중 두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제가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록 <은총의 나날들>(Days of Grace)에서 아더 애쉬는 AIDS에 걸리고 나서 많은 질문을 가져 보았으나, “왜 접니까?”(Why me?)라는 질문은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더 애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제가 심장마비 혹은 AIDS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을 즐기는 제 권리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야 합니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한 다음 날, 저는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 만일 저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저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아더 애쉬가 진작에 좀 더 성숙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고 하늘을 향해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왜 저에게 이같은 축복을 주십니까? 자격 없는 제게 이 축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은 성공과 번영의 순간에 겸손해질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나, 재앙을 마주하여 “하나님, 왜 접니까?”라고 들이대는 미성숙함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억울하게 AIDS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믿게 해 주었습니다.

5.

셋째, 우리는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마땅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만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소설 <오두막>에 보면, 맥도 이와 같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선악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맥이 사라유에게 묻습니다. “미시는 보호받을 권리가 없었나요?”(215쪽) 어떤 면에서 생각하든, 그 귀여운 아이에게는 하나님에게 보호받을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라유의 대답은 단호했고, 심지어는 냉담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없었어요. 아이는 사랑받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지 처음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건 아니예요.” 이 대답에 맥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라유의 대답에 그는 일손을 멈추었다.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방금 한 말은 온 세상을 뒤짚어 엎는 것 같았고, 그는 흔들리지 않고 버티어 서기 위해 힘써야 했다.”

사라유의 말은 진실로 우리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짚어 엎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별로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라유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보호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서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권리를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그 요청이 거절되는 것 같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둥,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둥, 혹은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다는 둥, 불평을 합니다.

오늘 읽은 욥기의 마지막 고백이 바로 그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자주 오용되고 있는 책이 욥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의 첫 부분과 끝 부분만 읽고, 그 중간에 나오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건너 뜁니다. 그렇게 읽고는, “욥은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당하고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읽어 보면,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고 항변합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그 긴 대화 끝에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길게 나옵니다. 마치 참고 참았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욥이 대답할 틈을 찾지 못할만큼 끊임없이 말씀을 쏟아 놓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느냐? 내가 온 우주를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모든 지혜의 근원인 나에게 네가 논쟁을 하자는 것이냐? 네가 나에게 무슨 권리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냐?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나 있느냐?”

한 껏 교만하고 완악해져 있던 욥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심하게 떨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 42:3, 5-6)  

이렇듯,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면, 아니, 그분의 존귀와 영광과 위엄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그분이 어떤 처분을 하신다 해도 아무 것도 다툴 것이 없고, 항변할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아무런 권리도 없으면서 마치 하나님께 큰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혹은 하나님에게 받을 빚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6.

이 대목에서 저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오래 전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면서 공부와 목회를 겸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저는 온타리오 호수 옆에 있는 아파트에 잠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깊은 시간에 홀로 바람을 쏘이면서 온타리오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저 홀로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그 거대하고 깊은 호숫물,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거대한 하늘과 별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슴 벅차게 경험합니다. 동시에 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감합니다. 그 밤에 제가 그 호수에 빠져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가 방금 전에 호수로 던져 넣은 돌맹이나 저 자신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게 저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다를 것이 없다 싶었습니다. 그 순간에 벼락이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저는 아무런 항변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제 뇌리를 뚫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복음의 말씀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돌맹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나를 지으시고 구속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시울이 찡해 왔습니다. 그분이 제 이름을 아시고, 제 머리카락 수까지 헤아리고 계시며, 이사야의 말씀(49:16)처럼, 내 이름을 그분의 손에 새기셨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의 자격 없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경험하고 보니, 사랑에 빚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권리가 있다면,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뭔가를 할 책임이나 의무가 있다면 저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하시든, 저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싶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축복이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재앙이 닥친다 해도 제가 할 말은 오직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저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를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해도, 저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은 그 복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없으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묻습니다. “왜 접니까? 제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 은혜를 주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이렇게 감격하고, 이렇게 항복하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기를 결단합니다.

제가 “왜 저입니까?”라고 물을 때는 재앙이 닥칠 때가 아니라 일이 잘 되고 있을 때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때로 축복이 두렵습니다. 평안이 두렵습니다. 문제 없이 일이 잘 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제 믿음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말로 들릴까 염려됩니다만, 진실로 그렇습니다. 제게 그런 자격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하실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 없는 은혜, 그 놀라운 은혜, 그 두려운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갚기를 소망합니다. 늘 이 마음으로 산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무능한 것 같고, 능력이 있다 해도 무관심한 것 같은 상황이 우리 중에 자주 일어납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짐 걸리 목사님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우주와 세상과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오늘 말씀 드린 세 가지의 그릇된 사고 방식들을 고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릇된 사고 방식들이 더 많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만 고쳐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습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기계를 조종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목동이 양을 기르듯, 혹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관계 속에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려울 때만이 아니라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체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믿음, 그리고 걸리 목사님이 죽음의 문턱에서 55시간 동안 붙들고 있었던 그 믿음,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존재의 터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악의 현실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견고히 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 께서 다스리십니다.

주님 만이 왕이십니다.

저희 눈을 뜨게 하소서.

주님 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써

이리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은 저희가

선으 로 악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61310_hvod.asp
방송듣기
http://70.182.190.23/sermon/2010/audio061310kim_b.wma

“독립은 없다”
(Independence Is Not an Option)
--갈라디아서 2:20


1.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 것입니다. 이 나무와 열매에 대해 의문은 많기도 하고, 그 의문의 대부분은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는 한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인 우리가 추측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하는 질문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는 어거스틴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려운 질문으로 교사를 괴롭히기를 즐기는 청년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어거스틴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을까요?” 어거스틴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 봅니다. 그에게서는 진지한 구도심이 보이지 않고, 다만 어려운 질문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고 자신의 명석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 같은 놈을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네.”

믿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답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신비로 놓아 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으셨느냐는 질문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로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같은 질문은 신비에 속한 것으로 두고, 우리는 그 대신 그 선악과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철이 들고 나서 선악과에 대해 제가 가졌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을 금지하셨을까?” 기독교인의 주요 관심사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의도가 제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질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닙니다만,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습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타락이 일어나기 전에 영적 세계에서 먼저 타락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사탄은 인간을 악의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유혹을 합니다. 하와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욕심을 부추긴 것이고,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명분이나 핑게가 주어지면 숨겨졌던 욕심을 채우는 데 발빠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첫 번째 일어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무화과나무의 잎을 따서 몸의 일부를 가렸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니 그 열매를 따먹기 전에는 달리 느꼈습니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벌거벗은 것을 악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심각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과연,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을 과연 악으로 보았다면, 그들의 판단이 옳습니까? 사람마다 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을 악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자연주의’(naturism) 혹은 ‘나체주의’(nudism)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악으로 여긴 것이 진실로 악의 범주에 드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2.

이상의 추론을 통해서 어느 정도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탄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선을 선택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독립적인 인간, 자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사는 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 난 다음, 그들의 눈이 밝아지기는 했는데, 불행하게도 완전한 시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만했지만, 실은 이로써 선과 악에 대한 혼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선을 악으로 오인하여 마음 놓고 악을 범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저 자신과 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맹목적인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역사 드라마를 보거나 역사의 현장을 여행할 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권력자들의 선전에 속아 악을 선으로 착각하고 그 의미 없는 전쟁에 생명을 바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신의 뜻으로 미화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그같은 일은 계속되고 있고, 그래서 무신론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의 궤적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만나 “아, 이건 재앙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오히려 축복으로 드러난 경우가 있지 않았습니까? 반면, 좋은 일이 생겼다고 신이 났었는데, 나중에 보니 악이었습니다. 때로는, 잘 하고 싶은데, 선을 행하고 싶은데,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의식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실은 악을 도모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선에 대한 저의 믿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목사 자신도 이 질문이 가장 어렵습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 보면,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반증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하려면 그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여 주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인 우리는 장기판에 올려진 말과 같습니다. 장기판에 올려진 말에게는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는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만, 때로 그 사람도 자신의 승부에 집착하면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장기판 전체를 제일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훈수꾼입니다. 그 사람은 게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아야만 어떤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장기판에 선 말로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 영적 세계와 물적 세계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현재만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이해 관계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눈이 어둡고, 물질 세계에 대해서도 지극히 한정된 부분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연루된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이라고 판단한 것이 때로 악으로 판명되고, 악이라고 생각한 것이 때로 선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에 붙들려 고민하기도 합니다.

3.

소설 <오두막>에 보면, 맥이 사라유와 함께 대화하는 중에 선악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맥이 선악과에 대해 말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라유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우선 질문 하나 해 볼게요. 당신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이 선인지 악인지 어떻게 판단하죠?”(211쪽)

그러자 맥이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합니다. “음,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젠데요. 아마도 내게 좋아 보이면, 다시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거나 안정감이 들면 선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그와 반대로 나에게 고통을 주거나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줘야 한다면 악이라고 생각하겠죠.”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주관적이군요……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 당신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죠?”

맥이 대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선’, 다시 말해서 내 마땅한 권리를 누군가가 위협한다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하지만 실제로 어느 것이 선하고 악한지를 결정하는 논리적인 근거가 나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내게 영향을 미칠 때는 말이 달라지죠. 말해 놓고 보니 죄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이네요. 지금까지 난 그다지 잘해오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선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알고 보니 지독히도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된 것도 있었고, 또 악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서도 나중에 알고 보니……”(212쪽)

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라유가 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는군요. 당신이 심판자가 되는 셈이에요. 당신이 선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악으로 판명되니, 더욱 혼란스럽겠군요. 게다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할 이들이 수십억 명이나 된다는 건 더더욱 혼란스러운 일일 테고요. 결국 당신의 선과 악은 다른 이의 선과 악과 충돌하고, 그 결과로 싸움과 논쟁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전쟁까지 벌어지겠죠.”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맥은 사라유와 함께 정원을 가꾸면서 독초를 발견합니다. 그 독초를 보고 맥이 사라유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독성이 있는 식물을 왜 만든 거죠?”(208쪽) 그러자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질문은 독이 나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또 그런 것을 창조하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죠. 소위 독초들은 대개 치유력이 뛰어나거나 다른 것과 혼합되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지요. 인간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정 짓는 대단한 재주가 있어요.”

4.

이 대화는 선악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결국,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현실들이 왜 생겼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탄은 이 무능력을 이용하여 인간을 혼란시킵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헛된 자만심을 불어 넣어 악을 행하는 데 거침이 없게 만듭니다. 사라유가 맥에게 말했듯이, 60억의 인구가 서로 이기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선과 악을 판단하고,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미시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마져도 자신에게 선하다고 생각하고 그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악의 원천적인 책임이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뻔뻔한 책임 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유 의지가 없이, 뇌속에 주입된 프로그램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절대 자유, 절대 독립을 위해 종교의 굴레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킴이나 부림을 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어떤 도덕률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같은 무신론자들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얼마든지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호언 장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정말 그렇습니까?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하고, 나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충돌합니다. 나의 선은 다른 사람에게 악이 되고, 다른 사람의 선은 나에게 악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악이 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악이 됩니다. 탈레반 사람들이 선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악이 됩니다. 그렇게, 60억개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여 악을 증폭시키고, 인간 현실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 그 책임을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차를 가지고 나가 친구들과 놀던 아들이 밤 늦게 돌아오다가 그만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칩시다. “왜, 내가 차를 가지고 나가도록 허락했어요. 제게 차 키를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니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혹은, 그렇게 타이르고 때론 꾸중을 해도 공부에 게으르던 아이가 나중에 때가 늦어 버린 것을 깨닫고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칩시다. “왜, 그 때,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때려서라도 공부하게 했어야 했잖아.”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찌 이렇게 일관된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는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린 자유로 인해 악한 결과가 생기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깁니다. 정작 우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런 악이 일어나게 했느냐고, 왜 이런 악이 일어나도록 놓아 두었느냐고, 그리고 심지어는 왜 처음부터 자유 의지를 허락했느냐고 묻습니다.

5.

피조물인 인간에게 독립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힘에든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자유케 하는 힘에 자신을 의탁할 때입니다. 스캇 펙은 사탄의 속임수 중 백미는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그와 맞먹는 또 다른 속임수는 ‘나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탄의 세력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그 하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 하니,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엉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선택은 선악을 판단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완전한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안에 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기 위해 힘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대로 행하면, 그것이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설 <오두막>으로 돌아가 봅시다. 맥이 사라유에게, 인간의 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권리를 포기해야 해요. 내 안에서만 살겠다고 선택한다는 것이 당장은 쓰디쓴 약을 삼키는 것 같겠죠. 당신은 나를 신뢰할 만큼 나를 충분히 알아야 하고, 내 속에 있는 선을 의지하는 법도 배워야 해요.”(214쪽) 사라유의 말대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 그분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해결책이 있다는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에서 저자 폴 영은, 이같은 철저한 신뢰의 삶을 완전하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한 말에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완전히 인간이죠. 그는 완벽한 신이지만 신의 본성으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오로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왔고, 내가 모든 인간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바로 그 방식대로 살고 있어요. 그가 최초로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루었죠. 자신 안에 거하는 나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첫 번째 사람이고, 겉모습이나 결과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의 사랑과 선함만을 믿는 첫 번째 사람이죠.”(154쪽)

이 진실은 나중에 예수 자신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됩니다. “나의 삶은 그대로 따라해야 할 본보기로 의도된 것이 아니죠. 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립성이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생명, 진정한 생명, 바로 나의 생명을 당신에게 주려고 내가 왔어요. 우리는 당신 안에서 우리 삶을 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우리 눈을 통해서 보고, 우리 귀로 듣고, 우리 손으로 만지고, 우리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그런 연합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됩니다. 결국은 당신도 그것을 원하게 될테니까요.”(238-39쪽)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 하나됨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에 융화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과 의와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잃어버린 삶의 방법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 삶의 방법입니다.

6.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영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담과 하와가 탐했던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예속되어 살기보다는 독립하여 살고 싶고, 우리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선악을 분별하며 살고 싶고,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보고 싶은 욕망, 말씀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 불순한 욕망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욕망을 따름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잃어버렸던 그 삶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옳았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롬 5:19). 아담과 하와가 행한 선택으로 인해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악을 소멸하는 삶을 스스로 사셨고 또한 그 삶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그 길을 바울 사도가 걸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 증거가 드러납니다. 오늘의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의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고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율법의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내게 방법을 일러 주었고, 그렇게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내 자아는 더 이상 내 중심이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의롭게 보이거나 여러분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보는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는 이 삶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연구하여 무엇이 선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무엇이 선인지를 제대로 알 수도 없었고, 선을 안다 해도 그것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모든 자신감을 내려 놓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모든 열심도 내려 놓았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일에 전심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바울은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다 있음을 말입니다. 그것이면 다 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길은 독립이 아니라 항복(surrender)에 있고 신뢰(trust)에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 실현의 길이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버리고 그분께 항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악의 현실은 점점 줄어갈 것입니다. 이같은 영적인 삶이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 의해서 시작된 선악의 혼란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 안에서 종식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러 하루 하루 그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언약의 기도’(the Covenant Prayer)를 읽어 드림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기도는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도들의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된다면, 그리고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철저한 신뢰의 삶, 바울 사도가 살았던 그 영적 하나됨의 삶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저로 행하게 하소서.
저에게 고난을 주소서.
저를 주님께서 고용하소서.
저를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높이시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낮추소서.
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기도 하시며,
또한 제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기도 하소서.
제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그리고 마음 다해 드립니다.
오, 영광스럽고 복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도 확증하여 주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60610_hvod.asp
방송듣기
 

“악엔 배후가 있다”
(There Is Someone Behind Evil)
-- 요한복음 8:39-47


1.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소설로서 <오두막>은 꽤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를 한 편의 소설로써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악의 문제를 붙들고 진지하게 씨름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의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의 주제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주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여기서 ‘영적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탄, 마귀(devil), 악령(evil spirit), 귀신(demon)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적어도 이 소설만 두고 말하자면, 윌리엄 폴 영의 세계관에는 악한 영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시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일부러 무시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맥과 삼위의 하나님(Triune God) 사이의 대화 중에, 악의 현실에 있어서의 사탄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용어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에 대해 여러 가지의 용어들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리가 좀 필요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말이 ‘사탄’(Satan)입니다. 이것은 아람어에서 나온 말로서, ‘반대자’(adversary)라는 뜻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사탄과 동의어로 쓰이는 헬라말이 ‘디아볼로스’로서 우리 말로는 ‘악마’로 혹은 ‘마귀’로, 영어로는 주로 devil로 번역합니다. 사탄 혹은 악마의 지시를 받아 악한 일을 일삼는 영적 존재들을 가리켜 ‘귀신’(demons) 혹은 ‘악령’(evil spirits)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선하게, 의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적 세계를 창조하셨고 또한 물리적인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적 세계에는 천사를 두셨고, 물적 세계에는 인간을 두셨습니다. 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사들 중 일부가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그 천사를 루시퍼(Lucifer)라고 불러 왔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암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루시퍼는 천사장 미가엘과 함께 영적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존재인데, 자유 의지(free will)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추종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두머리 루시퍼는 사탄이 되고, 그의 추종자들은 악한 영이 되어, 이 땅에서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천사’(angels)에 대해서도 잠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 사이에 천사를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취급하여 아예 무시하고 사는 경향이 보입니다. 아마도, 천사라는 말이 ‘흰 옷을 입고, 두 날개를 단, 사람같이 생긴 존재’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런 동화적 그림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동화의 세계를 떠나면서 천사에 대한 믿음까지도 함께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메신저’(messenger)입니다. 그 외모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창조된 영적 존재가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이며, 진정성 있는 영적 체험을 통해 경험한 사실입니다.

2.

여기서 잠시 ‘자유 의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할지 거역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이 당신에게 거역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악은 대부분 천사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가 오용됨으로써 생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할만한 여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악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이 질문은 자유 의지의 성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자유 의지는 진정한 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만일 내가 누구와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스스로 나의 친구가 되기를 선택할 자유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는 그의 책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이해하기>(Wrestling With God: Loving the God We Don’t Understand)에서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이 만든 우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제국의 왕이 비천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여인도 자신을 사랑하기 바랬습니다. 왕은 군사들을 보내어 그 여인을 강제로 데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굴종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왕은 값비싼 물건을 보내어 그 여인의 마음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랑을 얻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왕은 보통 사내로 변장을 하고 그 여인의 초라한 움막으로 갑니다. 그것만이 그 여인의 진정한 사랑을 얻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왕은 그 여인으로부터 거절당할 위험을 무릎쓰고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천사와 인간을 지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로봇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천사와 인간을 위압하여 군림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관계를 선택하셨습니다. 자유 의지에 근거한 관계는 위태롭습니다. 거부하고 거부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같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진정한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자유 의지에 근거한 관계는 또한 힙겹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정성을 들여 가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관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이기에, 위태롭고 힘겹지만 그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때, 그것을 오용할지를 미리 아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전지(omniscienct)하시다면, 그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소설 <오두막>에 나오는 ‘새의 비유’를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전지의 능력을 제한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미래를 아시지만, 알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3.

본래 천사로 지어졌으나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악의 배후가 된 사탄은 그 본성이 ‘속이는 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속아 진리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 8:44).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영적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 사탄의 주된 전략입니다. 이 점에 대해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게 되는 ‘귀신들림’의 현상은 사탄의 주된 전략이 아닙니다. 때때로, 모든 정신 질환을 귀신 들린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 질환 혹은 심리적인 질환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만이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며 베스트셀러 저자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단순한 정신 질환이 아니라 귀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이는 두 환자를 관찰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하여 나는 귀신들림이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귀신이 뛰어나와 그의 속으로 쏙 들어갈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귀신들림이란 당사자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반복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하겠다. (<거짓의 사람들>, 366쪽).

그러므로 귀신들림의 현상을 두고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넘겨 주어 귀신들림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크나 큰 불행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사탄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그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두려워할 일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스스로 ‘거짓의 아비’에게 찾아들어가 ‘거짓의 자식’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속임수는 너무나도 교묘해서 깊은 영적 차원에 있는 사람조차 한 순간에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대부분은 사탄이 인간을 속이고 유혹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범죄자들이 가끔 그렇게 고백합니다. “제 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를 유혹하는 그 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고백은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거짓인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같은 심리 현상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탄의 속임수와 교란 전술에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행한 사람의 책임이 면제되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이란 내 속에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악행에 대해 악령의 책임이 몇 %이고 범죄자의 책임이 몇 %인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현실 배후에는 악한 영적인 힘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속임수와 유혹에 넘어간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악을 탐하는 마음이 그 속임수와 유혹을 핑게로 삼은 것입니다.

앞에서 자유 의지에 대한 말씀을 잠깐 했습니다. 자유 의지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용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그것을 오용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선택권을 주셨다면, 어느 편을 선택하든지 내버려 두어야지, 잘 못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 심판한다니, 말이 됩니까?’ 얼른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각각의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를 충분히 알게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 악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변명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4.

하지만 사탄의 공격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자 사람들이 그분을 헐뜯습니다. 그분이 귀신의 우두머리인 바엘세불 즉 사탄의 힘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 (눅 11:21-22)

여기서 말하는 ‘힘센 사람’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미 사탄의 진영을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결박해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은 결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스스로 양도하지 않는 한 귀신들림은 일어나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결코 사탄에게 속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이 귀신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지나가는 뱀을 기겁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저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뱀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산책하는 길에 작은 실뱀이 제 앞으로 휙 지나갔습니다. 뱀이 저를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데, 저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제 무의식에 숨겨진 어떤 문제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사탄과 악령에 대해 병균을 대하듯 대하면 됩니다. 과학을 하시는 분에게 문의해 보니, 병균이나 세균은 건강한 균이 변질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병균이나 세균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강박관념(neurosis)에 걸린 사람처럼 병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병균과 싸우는 것도 아니요, 병균을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병균에 감염되거나 병균의 세력에 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건강을 키우고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때로, 병균의 세력에 압도되면 병균과 싸우며 건강을 회복시키도록 힘쓰면 됩니다.

사탄과 악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존재와 활동 양상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크게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탄과 악령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영적인 강박관념’(spiritual neurosis)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사탄과 악령에 대항해 싸우는 것도 아니요, 사탄과 악령을 피해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탄에 속임수를 조심해 가면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 넘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성령의 손에 맡기도록 매일 힘쓰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넘겨지면 우리의 영혼은 노예가 되고 파멸의 길을 가지만, 성령의 손에 맡겨지면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신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영적인 실재(spiritual realities)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바른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선의 초점을 오직 그리스도께 맞추어야 한다. 그 초점에서 가까운 주변에 두어야 할 것은 천사들이다. 그 바깥 주변에 두어야 할 것이 악의 세력이다. 우리에게는 악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의 메시지는 승리, 희망, 기쁨, 자유의 소식이어야 한다”(<21세기 선교와 세계관의 변화>, 581쪽. Transforming Worldviews).

5.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동화처럼 들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과거에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기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오직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세계를 부정했고, 하나님을 거부했고,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 세상은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지만, 이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회의를 품고, 다시금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들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두뇌의 명석함이 떨어지거나 학문이 짧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정신과 온전한 지성을 가지고도 영적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탄과 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사탄의 가장 큰 속임수에 넘어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스캇 펙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어쩌면 사탄의 거짓말 중 백미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현존성을 감쪽같이 숨겨 버리는 일이다. 사탄은 그 점에서 전폭적인 성공을 거두었다”(401쪽). 이 성공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아 넘어가는 줄도 알지 못한 채 속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악한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사귀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관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악에로의 유혹과 속임수를 벗어나 살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악에 대해서도 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악의 현실 앞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 본영이 이미 파괴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을 사탄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온 우주를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바로잡으실 날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을 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줄도 모르면서 ‘거짓의 자식들’로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더 열심을 낼 것입니다. ‘거짓의 자식들’을 ‘진리의 자녀들’로 변화시키는 것만이 이 세상의 악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크랩(Crabb) 가족이 만든 ‘거룩한 땅’(Holy Ground)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거룩한 땅(Holy Ground)

We are standing on holy ground/And I know that there are angels/All around/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어요/천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나는 알지요/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찬양합시다/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까요/그 거룩한 땅에

See in His presence there is joy/It's beyond all measure/And that His feet, a peace of mind/It can still be found/He said if you have a need/My child I'll always have for you/An answer/All you have to do is reach out/And claim it /For child, you're standing right here/On holy ground

그분의 임재 안에 기쁨이 있음을 보세요/측량할 수 없는/그분의 발치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마음의 평화를/그분이 말씀하셨지요/너희에게 필요한 것/내 자녀야, 나는 너희를 위해 늘 가지고 있다/대답을/네가 할 일은 단지 손을 뻗어/그것을 가지는 것일 뿐/왜냐하면 자녀야, 너는 바로 지금 이곳/거룩한 땅에 서 있기 때문이지

We are standing on holy ground/And I know that there are angels/All around/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어요/천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나는 알지요/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찬양합시다/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까요/그 거룩한 땅에

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Standing in His presence/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그러니 지금 함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 거룩한 땅에

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그러니 이제 함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안에 서 있으니/그 거룩한 땅에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53010_hvod.asp
 방송듣기
http://70.182.190.23/sermon/2010/audio053010kim_b.wma

문화 영성 프로젝트 <내 영혼의 오두막 5>

“악은 현실이다”
(Evil Is a Reality)
--마태복음 26:36-46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
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
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
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
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52310_hvod.asp
방송듣기
http://70.182.190.23/sermon/2010/audio052310kim_b.wma

“용서가 세상을 바꾼다”
(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에베소서 4:25-32



1.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적인 신앙은 비정한 악의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맥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그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냥 참고 지켜 보십니다. 때가 이르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그 전까지는 잠자코 지켜 보십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그러시듯 하나님은 분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분노가 얼토당토 않은데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면 그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분노한 큰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꿈 속에서 경험한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대화 중에 하나님은 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케이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 미시가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와 카누를 타고 놀다가 케이트가 아빠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맥은 손을 흔들어 응답했고, 케이트도 아빠에게 응답하려고 노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카누가 뒤집혔습니다. 맥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그 사이에 미시가 납치되었습니다. 케이트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케이트처럼,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징계하고 그 징벌을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은 맥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징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케이트의 마음에서도 그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 폴 영은 독자들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징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
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상처를 당하여
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
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
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
용서로써 나를 바꾸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
세상을 바꾸고
주님을 웃게하도록,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51610_hvod.asp
방송듣기


<5월 16일: 내 영혼의 오두막 3>

“아픔이 아픔을 치유한다”
(Pain Heals Pain)
-- 이사야 (Isaiah) 53:1-6



1.

얼마 전, 어느 교우께서 예배 후에 찾아 오셔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최근에 상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답니다. 자신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했지, 가해자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곰곰히 따져 보았답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슨 상처를 주었나?’

그 교우님은 자신이 받은 상처도 많고 깊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많은 상처를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답니다. 그분은 이를 악 물고 아내로서 혹은 엄마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진실로 사랑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져 보니, 남편에게 ‘미/고/사’(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남편의 자존심에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 냈음을 알겠더랍니다. 그 날 저녁, 그 자매는 남편에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할지, 장담은 못 하겠어. 하지만 앞으로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기까지 최선을 다할께. 그동안 미안했어, 여보.”

저는 지난 주일, 소설 <오두막>의 이야기를 가지고, 내 영혼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내 마음을 은밀하게 지배하고 내 이성적인 판단을 교란시키는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그 자매처럼 본능적으로 내가 받은 상처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알고 보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고 살아가는지요! 가령,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초보 부모의 실수로 인해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저 자신도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학생 시절, 일회용 기저귀값이 부담 되어 그 때 그 때 갈아주지 않았습니다. 젖어있는 상태가 괜찮아 보이면 두 번, 세 번 쌀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아동 심리학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것이 아이의 성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요! 잠 버릇 가르친다고 제 풀에 지쳐서 잠들 때까지 침대에 홀로 내버려 두었던 것도 미안하고, 아들이니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호되게 야단 친 것도 미안합니다. 가장 예민할 시기에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어려움을 겪도록 만든 것도 미안합니다. 돌아보니, 애비가 한 일이 상처 주는 일 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혹은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오신 분들이 자주 그러십니다. “아, 아이들은 금방 적응하고, 영어도 금방 트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문제지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관찰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겉으로는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 앓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처럼 상처를 견뎌낼 힘이 부족하고, 마음에 입은 상처가 어른보다 더 오래 갑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잘려서 새로운 토양에 심겨진 아이들이 이곳에서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자는 아이’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이민자들의 가정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른 노릇을 하며 자라는 것입니다. 중간에 이민 온 부모는 영어를 정복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듭니다. 때로는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업을 가지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 가운데 착실한 아이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습니다. 영어로 오는 모든 전화와 편지를 부모 대신 처리합니다. 부모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집안 살림을 챙깁니다. 부모들은 그 아이를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만, 그 짐이 고스란히 그 아이의 영혼에 쌓이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또한 그 아이가 가장 역할을 하느라고 건너 뛴 청소년기의 공백이 그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인 상처로 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상처가 청년기에 혹은 결혼 후에 혹은 중장년이 되어 흉칙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 요즈음 다 큰 자식들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요즈음, 두 아이에 대한 저희 부부의 주요 과제는 상처의 치유입니다. 상처 주는 것인 줄도 모르고 준 상처, 알면서도 감정에 사로잡혀 준 상처, 혹은 자라는 과정에서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배우자와 행복할 것이고,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때로는 내가 준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그가 쏟아내는 쓴물을 한 없이 받아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자식에게 혹은 배우자에게 혹은 부모에게 한 일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너무도 늦게 깨닫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상처가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져 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기까지 그 상처로부터 나오는 피고름을 한 없이 빨아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받은 상처는 그 자식으로, 그 자식의 자식으로 대물림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의 이야기를 그분의 허락을 받고 나눕니다. 그분은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함께 이민을 왔습니다. 이민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아들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부부만 먼저 왔습니다. 둘은 열심히 살았고,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아들을 데리고 오려 했을 때, 그는 이미 열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늦게서야 부모 품에 들어온 그 아이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방황을 시작했고, 자주 부모의 마음을 찢어놓곤 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 때마다 아들을 다그치고 혼 내고 싸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 부부가 우리 교회에 나오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문제도 새롭게 보입니다. 10년 동안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상처와 어린 나이에 미국 땅에 와서 적응하느라고 얻은 상처가 그 아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동안에는 아들의 행동이 밉기만 했는데, 막상 그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니 죄스럽고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합니다. “아들에게 입힌 상처가 다 치료될 때까지 나는 그 쓴물을 다 마시겠다”고 말입니다. 그 이후로는 아들이 말로나 행동으로 마음을 찢어 놓아도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픔을 당하면 그만큼 치유되는 것임을 믿고 아들이 내품는 쓴 물을 빨아 들이고 아들이 쏘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 줍니다.

그 교우님이 제게 한 말씀이 제게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 아이에게 10년 동안 상처를 주었는데,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그 기간의 두 배는 족히 걸리지 않겠어요? 사실, 지금까지 아이가 변화된 것만 보아도 놀라워요.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은 비록 힘들겠지만, 그런 마음만 있으면, 그 아들에게도, 그 부모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 내 며느리, 내 시어머니, 내 사위, 내 장인, 장모, 시집 간 내 딸, 친정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 나로 인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는데, 나는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잠시 눈을 돌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진실한 고백과 회개 그리고 사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얼마가 걸릴지 모를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의 치유를 위해 속이 시커멓게 되도록 쓴 물을 받아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4.

내가 누구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굳이 내가 준 상처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화학의 기본 법칙 중에 ‘질량 불변의 법칙’ 혹은 ‘질량 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얼음이 된다 해도, 그것을 구성하는 원물질은 소멸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보존된다는 법칙입니다. 아픔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아픔의 질량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소멸되거나 증발하지 않습니다. 이동하거나 변화할 뿐입니다.

내가 당한 상처를 마음 속에 그대로 품고 있으면, 그 아픔은 내 영혼 속에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내가 내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그 사람이 나 대신 고통을 당합니다. 아픔이 이동하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아픔을 끌어 안고 그 쓴 물을 빨아 들이면, 내 아픔은 이동할뿐 아니라 변모합니다. 산소 하나(oxyson)와 수소 둘(hydrogen)이 합해지면 물(H2O)이 되듯, 내가 빨아들인 ‘아픔’은 내 마음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여 보람과 기쁨으로 변모합니다. 영적인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영적인 능력이며 신비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하나의 역설을 발견했습니다. 즉, 아픔을 느끼기까지 사랑하면, 아픔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진실 말입니다.”(I have found the paradox, that if you love until it hurts, there can be no more hurt, only more love.)

우리가 이 영적인 신비를 믿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속이 시커멓게 되도록 아픔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닐까요? 내 아내 혹은 내 남편이 나를 만나기 전에 얻은 상처가 있어서 때로 견디기 힘 든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갈라서는 것이 제일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 입는다면 다른 길이 열립니다.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 아픔을 견뎌주며 그 상처의 피고름을 빨아내어 치유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복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간증할만한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소설 <오두막>의 저자 폴 영의 아내 킴벌리가 그 예입니다. 어느 날 그는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의 사무실에 갑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남편의 의자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봅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남편이 읽다가 그대로 두고 간 이메일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의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심코 열려 있는 남편의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킴은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남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킴벌리는 분노하고 절망하고 통곡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폴 영은 아내에게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아내의 분노를 풀 길이 없었습니다. 폴은 그동안 은폐와 거짓말로써 지켜 온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멕시코의 어느 도시로 날아가 모텔을 잡고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사 먹고 자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위기에서 폴은 어느 친구의 도움으로, 씨앗 하나만큼의 희망만 있다면 살아남아 그 씨앗을 키워 볼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상담 치료를 시작했고, 아내에게도 자신의 숨겨졌던 상처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버렸지만, 최소한 그에 대한 참회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 킴벌리는 처음에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고, 남편의 얼굴을 대면하기에 치가 떨렸지만, 치유에 대한 남편의 진실한 태도로 인해 서서히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의 상처 치유를 위해 쓴 물을 빨아 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여 11년만에 폴은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인내 그리고 본인 자신의 일관된 노력을 통해 완전히 치유를 받았고, 또 다른 이들의 치유를 위해 이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The Healing”, <Guideposts>, http://www.guideposts.com/story/paul-young-shack-healing)

만일 킴벌리가 배신감과 분노와 절망감에 압도되어 그대로 그 결혼을 끝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폴 영은 지금도 낙오자가 되어 비관 속에서 하루 하루를 죽이고 있을 것이며, 킴은 남편에게서 얻은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우울의 늪 속에서 힘겹게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자녀들도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의 칼날로 이웃에게 아픔을 주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소설 <오두막>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고 신앙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인터넷에 올라 있는 수 많은 독자평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치유를 위해 킴벌리가 감내했던 고통과 아픔은 당시로서는 힘겨운 것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53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 안에 네 개의 ‘종의 노래’(the Songs of the Servant of Yahweh)가 있다고 봅니다(42:1-4; 49:1-6; 50:4-9; 52:13-53:12).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은 네 번째 노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이 종의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믿으셨습니다. 이 노래의 예언대로 그분은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 누구도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의 핵심에 고난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이 당하고 있는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분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픈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으며,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고, 사회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강력한 치유의 능력이 있어서, 돌아 다니면서 아픈 사람들을 툭툭 쳐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빨아 들이는 일입니다. 그랬기에 저녁이 되면 예수님의 심신은 지쳤고, 그래서 저녁이나 새벽이 되면 홀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사람들의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빨아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미래를 내다 보시고는, 십자가에서 당하게 될 그 아픔을 통해 인류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네 번째 고난의 종의 노래에서 내다 보았던 그 상처 치유의 사건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 보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6절)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받는 찔림과 상처와 징계와 매로써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길로 당신을 부르셨다고 믿고, 십자가의 길, 그 아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상처 난 영혼들을 사랑하여 그 아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들이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이마신 그 아픔은 그분의 사랑과 결합하여 영적 화학 반응을 통해 변모되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밑에 머리 숙여, “주님, 제 상처와 아픔을 내어 놓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십자가는 여전히 살아 있어서 우리의 아픔을 빨아들여 변모시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같은 거룩한 꿈을 꾸어 볼 일입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기를 꿈 꾸고 기도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 주시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기를 꿈 꾸고 기도할 일입니다. 누군가의 상처 치유를 위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겪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입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목회가 무엇입니까?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다른 사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내가 그 아픔을 대신 담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산책을 하다가 속이 시커멓게 썩은 고목 나무를 보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 앞에서 한 참을 서 있더니, 그 고목나무에게 말하시더랍니다. “너는 목회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속이 썩어 버렸니?”

그렇습니다. 목회는 속 썩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속을 썩고 있다면, 목사가 아니라도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기르는 것도, 직장에서 동료들을 품어 안는 것도, 교회에서 교사로 섬기는 것도, 속회를 섬기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해 속 썩으신 하나님, 나를 위해 쓴 물을 삼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흉내를 내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내 속에서 사랑과 아픔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영적 화학 반응을 경험하며 삶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이렇게 행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6.

산다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받는다는 뜻입니다. 상처는 아픕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의 성품을 결정하고 기질을 결정합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의 삶을 파산시킵니다.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파괴시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잘 치유된 상처는 아름다우며,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받은 사람은 향기로운 사람이 됩니다. 시인 복효근씨는 ‘상처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우리 교회 안에도, 수 많은 상처로 인해 설 익은 포도처럼 시큼 털털하던 분들이 치유를 받고 나서 향기로운 포도주 맛과 향을 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상처로 인해 짖밟힌 장미처럼 으깨어졌지만,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어 눈매에서 꽃향기를 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향기가 배어나오는 사람의 가슴 속엔 잘 익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저는 교우님들을 통해 확인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 자신의 상처 치유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체득하고 있습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의 이야기는 저자인 폴 영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맥처럼 폴 영도 ‘거대한 슬픔’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맥은 2박 3일 동안의 영적 체험을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맥은 어떤가?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다. 나[맥의 친구 윌]는 대개 변화의 과정에 저항하는 편이지만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며 더 빨리 용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변모된 모습은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그중에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맥처럼 단순하고 즐겁게 삶을 영위하는 성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꼭 해 두어야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과거의 그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모습의 아이가 되어 단순한 신뢰와 경이로움 안에 살게 되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가진 거장이 짠 풍요롭고 심오한 테피스트리를 안듯이, 심지어 그늘조차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끌어안게 되었다.(407-8쪽)

복효근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맥은 그 깊은 상처를 치유받은 후 눈매에서 꽃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자 폴 영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 킴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처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힘겹지만, 치유가 되고 나면 상처를 받기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폴 영과 그 아내 킴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잘 치유된 상처는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상처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씩 향기로운 꽃으로 변모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눈가에서도 꽃향기가 진하게 풍기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의 우리의 말과 행실이 이 세상에 상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더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의 삶이 그렇게 향기로운 이유가
주님의 상처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끌어 안으신 상처로 인해
공포스러운 형틀인 십자가가
아름답게 변모하였습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에 기대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게 하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위해
마음과 삶을 드리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의 눈매에서
꽃향기가 번지게 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50210_hvod.asp

문화 영성 프로젝트 <내 영혼의 오두막> 첫번째

“누구나 아프다”
(Everybody Hurts)
--창세기 3:1-7

1.

윌리엄 폴 영(Wm. Paul Young)의 소설 <오두막>(The Shack)은 맥켄지 앨런 필립스(Mackenzie Allen Phillips)라는 가상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여서 ‘맥’이라고
부르는 그는 미국 중서부의 한 농장 지대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아버지는 엄격하고
냉담한 사람이었고, 보수적인 교회의 장로였습니다. 그 아버지에게는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자주 술에 만취하여 부인과 아이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것입니다.
저녁 식탁에서 그는 끝도 없는 설교와 훈계를 늘어 놓았고, 즉석에서 내는 성경
퀴즈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아이들에게 끔찍한 벌을 주곤 했습니다.

열 세살 되던 해, 청소년 수양회에 갔다가 맥은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는 지도
교사에게 기도를 부탁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털어 놓습니다. 은혜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그 지도 교사가 아버지의 직장 동료라는 것을 깜빡 했습니다.
며칠 후, 지도교사는 맥의 아버지에게 충고를 합니다. 잘 한다고 한 것일텐데,
그것이 맥에게는 큰 화를 초래합니다. 집에 돌아온 아버지는 가족을 모두 이모집에
보내 놓고는 뒤뜰에 있는 참나무에 맥을 묶어 놓고 허리띠로 때리고, 성경 구절을
들이대면서 훈계를 합니다.

약 2주일 후, 맥은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되자 가출을 결행합니다. 열 세살 나이의
소년에게 세상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크게 탈선하거나 자포자기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갑니다. 20대 초반에는 신학교에 다니기도 했습니다.
그는 성인이 되어 어머니와 여동생들을 만나 화해했으며, 내넷 새뮤얼슨(Nannette A, Samuelson)과 결혼하여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아갑니다. 그들 사이에는 다섯 자녀가
있었는데, 두 아들은 독립했고, 조시(Josh)와 케이트(Kate) 그리고 늦둥이 다섯 살
미시(Missy)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어느 해, 노동절 연휴, 맥은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왈로와 호수 주립 공원(Wallowa Lake State Park)에 야영을 하러 갑니다. 간호사인 아내 낸은 교육을 받으러 시애틀에서
주말을 보낼 예정이었습니다. 맥은 세 아이와 꿈 같은 시간을 지냅니다. 그런데
마지막 날, 아들 조시와 딸 케이트가 카누를 타고 놀다가 그만 뒤집혀 버립니다. 맥은
강물로 뛰어 들어 허우적 거리는 케이트와 조시를 구조해 냅니다. 한 참 후 뭍으로
올라와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그를 사로잡습니다. 돌아 보니,
벤치에서 색칠 놀이를 하고 있던 미시가 사라졌습니다.

경찰이 오고 비상이 걸렸습니다. 간장을 태우는 초조한 시간이 지난 후, 경찰은 깊은
산 속, 버려진 어느 오두막에서 미시의 피 묻은 드레스를 발견합니다. 미시의 시신은
찾지 못했고, 경찰은 미시를 살해한 범인은 어린 소녀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러 온
연쇄 살인범이라는 사실만을 밝혀 냅니다. 다섯 살 어린 딸이 유괴범에게 납치되어
인적 없는 오두막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비참하게 살해되었는데, 그 시신 조차도
수습하지 못한 것입니다.

2.

그 이후로, 맥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살아갑니다. 그의 마음에는 ‘거대한 슬픔’
(The Great Sadness)이 자리를 잡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삶을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아 있다 할 수도 없었습니다. 맥은 가끔 웃는 일이 있었지만, 그 웃음
안에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을 느낍니다. 맥의 감정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미시가 실종된 그해 여름 이후 ‘거대한 슬픔’은 투명하지만 무거운 누비이불처럼
맥의 어깨를 두껍게 감싸고 있었다. 그 무게에 두 눈은 흐려지고 어깨는 축 쳐졌다.
두 팔이 모진 절망과 함께 누비이불에 꿰매지고 자신도 그 일부분이 된 것 같았으며,
그것을 털어내려는 노력 때문에 항상 녹초가 되곤 했다. 맥은 매일 납으로 만든
무거운 목욕가운을 입은 것 마냥 축 쳐진 채 먹고 일하고 사랑하고 꿈을 꾸고,
만물을 퇴색시키는 음산한 낙담 속을 터벅터벅 걸어야 했다.”(35쪽, p. 27)

그렇게 4년이 지난 어느 날, 눈비가 심하게 오던 날, 맥은 우체통에서 발신인 주소도
없는 엽서 한 장을 발견합니다. 그 엽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맥켄지, 오랜만이군요. 보고 싶었어요.
다음 주말에 [그] 오두막에 갈 예정이니까
같이 있고 싶으면 찾아와요.
--파파

‘그 오두막’은 말할 것도 없이 미시가 살해된 그곳을 말합니다. 맥은 그 엽서를 받아
들고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누가 어떤 목적으로 그 엽서를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파파’는 아내 낸이 기도할 때 하나님을 부르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보낸 엽서인가? 도대체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면 누가
장난한 것인가? 누가 이렇게 잔인한 장난을 한다는 말인가? 혹시, 그 연쇄
살인범이 나까지 노리고 한 수작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판단이 서질 않습니다. 하지만 맥은 끝내 그 엽서를 구겨 버리고
모른체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엽서를 보낸 사람의 정체가 무엇이든, 확인을 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처제 집으로 보내 놓고 친구의
지프를 빌려 그 오두막으로 향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소설의 전반 약 1/4의 내용입니다. 후반 3/4에서는 그 오두막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차차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오두막에서 맥이 하나님을 만나 대화하는 가운데
‘거대한 슬픔’을 치유 받는다는 것이 후반부의 내용입니다.

3.

주인공 맥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의 상처는 특별합니다만, 저자는
그의 상처를 통해 독자들이 각자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기를 기대합니다. 이 소설이
지향하는 목적지는 치유와 변화입니다만, 그 목적지에 이르기 위해 먼저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도록 독자를 흔듭니다. 그동안 외면하고 살았던, 혹은 억압하고 살았던,
혹은 망각하고 살았던 상처를 대면하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힘은 참으로 강하고도
신비롭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는 동안 독자는 자신의 상처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뛰어납니다.

지난 2월 초, 멕시코 단기 선교 여행을 하는 동안, 저는 이 소설을 두 번째로 읽고
있었습니다. 공항에서 기다리는 시간과 비행기 안에서 머무는 시간은 독서에 가장
유익한 시간입니다. 보스톤에서 휴스톤으로, 휴스톤에서 메리다(Merida)로 가는
공항 대합실과 비행기 안에서 저는 이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멕시코에서의 둘째 날, 저는 아주 특별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 누군가를
만났는데, 그 사람이 제 눈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눈망울 안에서 저에 대한 강렬한 원망의 빛이 보입니다.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강렬한 적의를 느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저는 잠에서 소스라쳐
깨어났습니다.

잠시 후, 다시 잠을 청하는데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그 꿈에 무슨 메시지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자문해 보았습니다. “내 안에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상처가 무엇일까? 그렇게 강렬한 원망의 감정을 나에게 품고 있을 사람이 누구일까?”
성령께서 그 꿈을 통해 저에게 뭔가를 가르쳐 주시려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기억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필름을 되돌려 보다가, 제 안에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하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단정할 논리적
근거가 하나도 없었지만, 제 마음에 아주 분명한 확신이 들었습니다. 저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일어나 떨리는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 드렸습니다. 제게서 받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아직도 있다면 치료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또한 제게 남겨진
상처를 위해서도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구했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를 드린 후, 저는 다시 침대에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제 의식은 “나에게는 이같은 상처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 무의식 속에 있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처를 기억나게
하고, 그것을 다시 보도록 저를 일깨웠던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이야기 하나가
얼마나 신비로운 힘을 발휘하는지요! 시카고에서 목회를 하는 제자가 있는데, 이번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이 소설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메일을 보내왔습니다.

“작년에 구입해 놓았지만 왠지모르게 주저하면서 잃지 못했던 소설이었습니다.
그 알 수 없는 주저함이 무엇인지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성령님의 신비로운
움직이심과 역사하심이란... 한 소설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은 상처들과
죄책감을 부드럽게 들추어 내고, 느끼게 하고, 그리고 동시에 용서하고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말을 잃어 버렸습니다.”

4.

이 소설의 저자 폴 영도 많은 상처를 안고 산 사람입니다. 캐나다 출생인 그는
목사이면서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뉴기니(New Guinea)에서 열 살까지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폴은 원주민에게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잠시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상급생에게 또 다시 성적 학대를 당합니다. 그뿐 아니라,
선교사 자녀들이 자주 그렇듯이, 그는 졸업할 때가지 13번 전학을 해야 했습니다.
그것도 언어와 문화가 다른 나라로 돌아 다니면서, 말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있었던 상처들을 이야기하면서, 그로 인한 아픔의 종류를 이렇게
나열합니다.

“여러 다른 문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겪은 아픔, 사랑하는 사람들을 연이어
잃어버리는 아픔, 겨울 한 밤중에 일어나 철길을 따라 폭풍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아픔, 제정신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끊임없이 내면을
흔들어 놓는 그 깊고 시끄러운 수치심의 아우성, 개인적인 실패로 인해 깨어지고
지워져 버린 꿈들, 방아쇠만이 유일한 해결책처럼 보일 정도로 희미한 희망.” (http://theshackbook.com)

그는 이 모든 상처와 아픔을 억누르며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발버둥쳤습니다.
그로 인해 완벽주의적인 성향이 생기고, 일중독에 빠지는 등, 이런 저런 문제가
일어나기는 했지만, 그럭 저럭 정상인처럼 살아가는 데 가까스로 성공합니다.
하지만 서른 여덟이 되던 해, 억눌렸던 상처와 아픔이 그 흉한 모습을 드러냈고,
그로 인해 그의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지독한 아픔과 상처를
안겨 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한 순간에 난파선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아내 킴(Kim)은 남편을 떠나지 않고, 그로부터 11년 동안 남편의 치유
과정을 함께 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을 위해 자신의 상처와 치유 이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자녀들을 위한 선물로 시작된 이 소설은 무려 29개의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구와 함께 자비로 출판했고, 광고와 홍보를
위해 2백 달러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독자들의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고, 2010년 현재 7백만부가 팔려 나갔습니다. 이것은 출판계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입니다.

이 기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모두에게 상처가 있으며,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잊혀졌거나 억압해 왔던 상처를 기억하도록 돕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면, 너무 단정적이라고 하시겠습니까?

5.

그렇습니다.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어린아이가 찢어질듯한 울음을 울면서
태어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인생을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느끼는
것은 아픔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생은 고해(苦海)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요 1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시대에 가장 존경받는 정신과 의사이자 사상가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그의 명저 <The Road Less Traveled>(아직도 가야 할 길)의 첫 문장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Life is tough.”

왜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3장과 이어지는 4장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창세기 1장과 2장까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 세계는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과 4장에 보면, 그 완벽한 조화와
하나됨과 평화에 균열이 생깁니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금이
생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금이 가자, 인간 사이에 금이 갑니다. 2장에서는 아담과 하와가
벌거 벗었어도 아무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하나님께 죄를 짓고 나서는
서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나뭇잎으로 치부를 가립니다. 그 균열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자연은 인간에게 길들여지기를 거부하고,
인간은 그 자연을 땀흘려 정복해야만 하는 관계로 타락합니다. 창세기 3장과
4장은 우리에게 인생에 대한 하나의 진리를 아주 선명한 목소리로 들려 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상처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한 가지 진실, 즉 “누구나 아프다”는 진실은
성경이 증언하는 진실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다 보면,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픕니다. 누구는 과거에 심히 아팠습니다. 지금 아픈 사람도 있습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로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 아플 것입니다. 협박이 아닙니다.
삶의 진실입니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Life of the Beloved)라는 책에서 친구 프레드 브랫트만(Fred Bratman)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자네는 상처받은 사람이고, 나 역시 상처받은 사람이지.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이 상처받은 사람이네. 우리가 상처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며, 너무나 구체적이고 뚜렷해서, 이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쓸 것이 많다는 점을 믿기 어려울 때가 자주 있지”(73쪽).

6.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고,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모두
상처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 적어도 두 가지의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납니다.

첫째,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을 때, 누구나 때로 아프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동안에는 나만 당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나만 재수에 옴 붙은
줄 알았는데, 혹은 하나님이 나만 피해 다니시는 것 같았는데, 겉으로 멀끔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그 나름의 상처가 있고, 불행할 것 하나도 없어 보이는
저 사람에게도 나름대로의 상처가 있음을 알고 나면, 버틸 힘이 생깁니다. 때로,
다른 사람의 상처는 작아 보이고 내 상처만 커 보일 수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는 큰 상처가 있고 가벼운 상처가 있다 할 수 있지만, 상처는 당하는 사람에게는
늘 절대적인 무게로 느껴지는 법입니다.

이 대목에서 노래 하나를 들려 드리려 합니다. 미국의 록 밴드 R. E. M.이 부른
노래인데, 좋은 그림과 함께 편집해 놓은 영상이 있어서 한글 자막과 함께
여러분에게 들려 드립니다.

(영상과 음악)
Everybody Hurts
누구나 아프다

긴 하루가 지나고 밤을, 당신 홀로 밤을 맞을 때,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느껴질 때,
그래도 견디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누구나 때로 울고, 누구나 때로 아프기 때문이죠.
때로, 모든 것이 엉망일 경우도 있어요.
그 때, 노래를 부르세요.
당신의 날들이 어둠 뿐일 때,
견디세요, 버티세요.
다 포기하고 싶을 때,
버티세요.
이젠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래도 버티세요.
누구나 아프기 때문이죠.
친구에게서 위로를 찾으세요.
누구나 아파요.
포기하지 마세요.
그래요. 포기하지 마세요.
혼자라고 느껴지나요?
아니어요, 아니어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혼자가 아니어요.
당신이 세상에 홀로 남겨졌다면,
낮과 밤들은 견딜 수 없이 길 거여요.
더 이상 버티기에 너무 지쳤다고 생각한다면,
때로 누구나 아파요.
누구나 울어요.
때로 누구나 아파요.
때로 누구나 아파요.
그러니, 버티세요, 견디세요.
버티세요, 견디세요, 놓지 마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버티세요.
누구나 아파요.
당신 혼자만 그런게 아니어요.

둘째, 우리가 사는 세상이 깨어진 세상이요 우리가 함께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입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를 보듬어 치유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앞에서 들려드린 노래는 참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상처 많은 세상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는 데서 끝난다는 점에서 부족함이 있습니다. 때로 누구나 아픈 것은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도 힘이 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견디고 버티면서, 그 상처를 치유해 나가야 합니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문제는 대부분 내가 입은 상처에서 발생합니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알고 보면 그 사람이 가진 상처에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므로 나와 너의 진정한 희망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보듬어
주어야만 합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설 <오두막>을 가지고 씨름하는 이 기간 동안, 우리
각자가 자신의 상처를 정직하게 대면하는 기회를 가지기 바랍니다. 우리의 상처로
우리 자신이 우리 영혼 안에 지은 그 흉칙한 오두막을 다시 찾아갈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치유의 첫 걸음입니다. 또한 이번 기회에 우리의 시각이
바뀌어, 누구를 만나든지 상처입은 사람으로서 대하고, 그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견뎌 주며, 서로 보듬어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상처의 치유에 대해서는
다음 주일에 더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다만, 너나 나나 모두 다 아프다는
이 하나의 진실을 생각하고 그 사실에 눈을 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위로자이신 성령의 위로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이 땅의 모든 상처 받은
영혼들에게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상처의 왕이신 주님,
상처 입은 저희가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그 사실을 잊지 말게 하시고,
저희의 상처를 대면하여
치유의 길을 찾게 하시며,
저희를 사용하여
세상의 깨어짐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10.4.4 (김 영봉 목사)

인쇄페이지 열기
MP3로 듣기

“매일이 주일이다”
(Everyday is the Lord’s Day)
-- 마태복음 28:16-20


                                                            (김 영봉 목사)

1.

Happy Easter! 부활의 은총과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깊이 깊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시기적으로, 부활절이 봄의 시작과 거의 맞물려 있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땅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나, 생명이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던 땅에서 새 싹이 돋아 나오는 것이나,
생명의 신비를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생명의
이적이 여러분 각자의 영혼 속에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토요일로서 우리는 사순절 40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오늘 부활일을
맞았습니다. 지난 40일동안의 순례 여정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센터빌로 그리고 맥클린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셔서 함께 기도하신 분들께
감사 드리며,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사순절 묵상집>으로 영적 순례를 행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제 오늘부터 오순절까지 50일 동안은 ‘부활절’
(Eastertide)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묵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실은, 기독교인들은 일년 내내, 일요일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한 주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창세기
2장 2절과 출애굽기 20장 8절 이하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토요일 휴무제도가 시작된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로비(lobby)를 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슬림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앞으로 미국 내 무슬림들의 정치 세력이
커지면, 금요일 휴무제도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일요일 예배가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하급 종교의 태양 숭배에서
왔다고 헐뜯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도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 즉 안식일에 예배 드려야 한다고 믿는 교단에서 그렇게 주장하곤 합니다.
우리말로 ‘일요일’이라 번역된 Sunday가 태양 숭배의 전통에 기초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로마 시대에 많은 하급 종교인들이
태양을 예배하던 날이 the Day of the Sun 즉 일요일입니다. 그러니 이 날에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하급 종교를 따른다고 비난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는 비난입니다. 이미 신약성경 안에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간 첫 날, 즉 일요일에 모여 기도하고
교제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행 20:7; 고전 16:2; 계 1:10). 그들은 일요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날’ 혹은 ‘주님의 날’
(the Day of the Lord or the Lord’s Day)이라는 이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줄여서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일 주일’ 혹은 ‘이 주일’할 때의 ‘주일’은
한자로 ‘주일 주’(週)자를 사용한 것이고, ‘주일 예배’라고 말할 때 ‘주일’은
‘주인 주’(主)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2.

자, 여기서 커다란 질문이 생깁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준수의 계명을 어기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안식일보다
부활일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주신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는 것만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중단하는 것은 참된 안식을
위한 기초 작업일 뿐이었습니다.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고
축하하면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안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외적으로 일을 중단하는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그냥 누워 있으라는
말입니까?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일이 아닙니까? 이 질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세부 조항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대인들의 제 2경전인 <미쉬나>(The Mishnah)에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39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느질, 타작, 체질, 반죽, 빵을 굽는 일, 두 글자를 쓰는 일,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이렇듯,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고 씨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내적 안식과 영적 안식은 점점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면서 범법자를 찾고 있었던
사람들의 영혼도 쉴 수 없었고, 율법주의자들의 눈에 띄어 고난을 당할까
노심초사 하는 이들의 영혼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율법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려는 노력처럼 보이지만, 실은 율법을 주신 뜻을 해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들을 거침없이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하셨고(마 12:1-8), 18년 동안 등이 굽어 고생하는
여인을 안식일에 치료해 주셨으며(눅 13:10-17), 수종병 환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셨습니다(눅 14:1-6).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도
안식일이었고(요 5:1-9),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요 9:1-12).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싶을 때면, 더욱 더 도발적으로 금지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같은 행동이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원뜻을 천명하시면서 자신을 변호하셨습니다. 한 번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일을 멈추고 쉬라고 하신 것은 전인적인
안식을 추구하도록 주신 명령인데, 그 율법으로 오히려 사람들의 영혼을 옥죄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막 2:28)라고도 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율법을 준 모세가 초보적인 가정
교사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교사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마음대로
하실 권한을 가진 분입니다. 그분이 율법을 어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겉으로는 어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본 뜻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3.

둘째, 안식일 계명은 ‘창조의 질서’(order of creation)에 따른 것인 반면, 주일
예배는 ‘구원의 질서’(order of salvation)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구원의 질서는 창조의 질서를 완성하고 또한 초월합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평생 독신으로 사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언젠가, 학생 중 한 사람이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 교수님은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독신으로 사십니까?” 그러자 교수님이 명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지 않고 구원의 질서를 따라 산다네. 예수님이,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 나는 이미
천국의 질서 속에 살고 있는 셈이지. 자네들과는 차원이 달라.” 저는 그 때
총각이었기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더랬습니다. ‘나도 구원의 질서,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하나?’ 물론, 그분은 농담처럼 이 말을 던지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명답이라고 느꼈습니다. 구원의 질서는 창조의 질서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이르기 전에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서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일을 멈추고 안식을 취하면서 영혼의 안식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모세보다 더 크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안식일보다 더 큰 것이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부활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은 부활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만, 그것은
구원의 한 요소일뿐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는데,
이같은 ‘깨어진 관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죽은 후에만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여기,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천국을 살아,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가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 하나님의 품에 이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때, 첫 열매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정박할 항구를 찾는 것이며,
안길 품을 얻는 것이고, 돌아갈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일을 멈추는 것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값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부활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일이 안식일
계명의 뜻을 완성시켰으므로, 말하자면 부활일이 안식일을 삼킨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주일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이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 이 거룩한 안식일에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어 예배 드리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오도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통일찬송가 57장에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이라는 가사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겨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4.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주일성수’(holy observance of the Lord’s Day)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주일성수’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주일에 적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미국의 청교도 전통의 영향을 크게
입은 한국 교회는 주일 지키는 것을 안식일 지키는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주일에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저희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여행하지 말아야 하고, 시장에서 사고 파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버스를 타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버스를 타도 되느냐의 문제를 두고
논란이 생겼다고 합니다. 결국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노회에 질문서를
보냈는데, 노회의 판결은 “예배당에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는
걸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바뀌어 이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고, ‘주일성수’를 ‘주일
대예배 참석’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 살아도,
주일 성수의 계율을 범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형식의 율법주의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일요일 전체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에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공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은혜를 입은
자답게 은혜를 베푸는 활동으로 주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즉 부활의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데 주일 하루
전체를 사용하기 위해, 할 수 있으면 주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일성수는 ‘새로운 율법’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가급적 그 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일을 멈추고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나누고 베풀고 쉬고 감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지는 미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부득불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용된 일꾼인 경우에도 그렇고,
세 들어 있는 몰(mall)의 주인(land lord)이 주일에 영업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경우보다, 혼자만의 결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럴 경우, 용감하게, 모든 손해를 무릅쓰고
주일 휴업을 단행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이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시지만, 율법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해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죄책감만 붙들고 망연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 모든 일을 멈추고 예배와 찬양과 나눔과 사귐과 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소원하고 노력하면서, 그 때까지, 다른
방법으로 주일성수의 ‘정신’을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일 예배 참석이
영 불가하면, 다른 날이라도 예배에 참석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월 1일부터
우리 교회는 토요일 오후 7시에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주일 예배 참석이 어려운
분들이 토요 예배를 통해 영적인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회가
될 때마다, 그것이 토요일이든 월요일이든,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고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면, 주일 성수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이렇게, 주일을, 혹은 일 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성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나머지 6일을 그같은 정신으로 살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날들을 정하여 거룩하게 지키고 나머지 날에는
영적 해이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모든 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을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는 곳으로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있으면 그 어디나 거룩한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거룩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룩하게 지으셨고,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일 성수의 정신입니다. 일 주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축하하며 구원의 은혜가
우리 마음 안에 살아있게 하여, 나머지 엿새 동안 그 은혜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주일 성수의 정신입니다. 매일 경건 생활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하루의 시간 전체가 거룩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율법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20). 여기서 ‘항상’이라는 번역은 아쉽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에서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를 잘 살려 번역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I’ll be with you as you do this, day after day after day, right up
to the end of the age.) 부활의 주님은 일요일에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우리와 함께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요일만이
주일이 아니라 매일이 주일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께서
자신의 일기에 “Everyday is holiday”(“매일이 성일이다”)라고 써 놓았는데,
오늘 저는 “Everyday is the Lord’s Day”(“매일이 주일이다”)라고 쓰고
싶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겨울, 참 힘 드셨지요? 유난히 눈도 많았고, 비도
잦았으며, 추위도 길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경제 상황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루 밤 사이에 온 세상이 꽃
천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따뜻한 햇볕을 받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기지개를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직결되는 소식입니다. 이제 겨울이 다 지나고 꽃 천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삶에 맞아들여 그분과 함께 새 세상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디서나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세상,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 우리 모두 거룩해지고, 그리하여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길을, 주님께서는 활짝 열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매일, 빠짐 없이, 언제나, 순간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우리의 목숨이 다할 때 그분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의 품에 이루고,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때 우리는 그분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 위에 선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하루 하루가 주일이요, 생일이고, 축일이며, 성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터널도 지나고, 어둠의 계곡도 지납니다.
질병의 고난도 당하고, 실패의 아픔도 겪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겪어야
하고, 마침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매일 함께 한다면,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고난도 고난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향해 이렇게 호령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 15:55)

이같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깊이
그리고 밀도 있게, 매일 그리고 매 순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Happy Easter!

부활하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신 주님,
언제 어디서나 저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문제는 저희입니다.
저희의 마음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모른체 하는 저희,
주님을 모시고 더불어 먹고 살기를 불편해 하는 저희,
주님을 주일 예배에만 묶어 두려는 저희,
저희가 문제입니다.
오, 주님,
저희를 깨우소서.
주님의 열어놓으신 새 세상으로
활짝 깨어나도록 도우소서.
주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걸어
매일을 성일로 만들게 하시고
우리가 선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게 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09.11.15(김 영봉 목사)

인쇄페이지 열기
MP3로 듣기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
다섯 번째 습관: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새로운 살 길을 걷다”(We Are On the New and Living Way)
--히브리서 10:19-25

                                                 (김 영봉 목사)

1.

우리가 속해 있는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mission statement 즉 ‘사명 선언문’을 알고 계십니까?
To Make Disciples of Jesus Christ for the Transformation of the World. 우리말로 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입니다. 믿는 사람들 하나 하나를 진정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육하면 그 결과로 세상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믿음을 담아 낸, 아주 좋은
사명 선언문입니다. 온 세상이 변화될 것을 믿음의 눈으로 내다 보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위해 일하자는 뜻입니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새 세상’의 모습이
다르기는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점에서는 예외가 별로
없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우리는 이 세상이 불완전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좀 더 나은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정권이 바뀌면 그 소망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고, 어떤 사람은
혁명이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며, 또 어떤 사람은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같은 천지개벽을
기대합니다. 그같은 소망이 때로는 끔찍한 범죄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Fort Hood에서 일어난
끔찍한 총격 사건은 현실 세계에 절망하고 새 세상을 꿈꾸던 한 사람의 비틀린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립니다. 우리 시대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학자요 저술가인 톰 라잇(N. T. Wright)은 ‘임한다’(arriving)고 표현하지
않고 ‘드러난다’(being revealed)라고 표현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 먼 우주 공간에 있다가
우리가 사는 세계로 진입해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형태로 우리의 우주를
감싸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우리는
지금 우리의 세상을 “부분적으로만 알고”(고전 13:9) 있을 뿐입니다. 장차 지금 우리 눈에 가려져
있는 실체가 드러날 것인데, 그 때서야 우리는 전체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우리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온전한 세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장차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언젠가 드러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과 같아지게 만들기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 전까지 이 세상은 완전해지지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망연히 그 때만을 기다리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힘이 미치는
영역부터라도, 아주 사소한 변화라 하더라도, 이 세상이 성경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의 비전에
가까와지도록 할 일을 찾아 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런데 그같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가장 먼저 일어나야 하는 일은 믿는 사람 자신이 변화되는
일입니다. ‘세상’이란 무엇입니까? ‘사람들의 사회’입니다. 사람이 모여 세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사람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아니,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입니다. 내가 변화되는 것이 이 세상의 변화의 출발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먼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실로 거듭나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로 빚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성숙해지지 않으면, 세상은 결코 변화되지 않습니다. 자신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만일 자신의 변화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나선다면, 그 변화는 분명 ‘파괴적인 변화’가 될 것입니다. 연합감리교회
사명 선언문,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들어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사명 선언문에서
“세상을 변혁시킨다”는 말에 초점을 맞추면 큰 실수를 하는 것이 됩니다.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가 저질러 온 무수한 범죄들은 대부분 믿는 사람이 먼저 변화되지 않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 힘쓰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명 선언문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만드는 것”에 우선 집중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 나고 그분의 영으로 새로와지도록 돕는 것이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는 군사력이나 금력이나 정치 권력같은 것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반대합니다. 시시 때때로 그같은 잘못을 범해 왔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 26:52)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독교의 원리입니다.
돈을 쓰는 사람은 돈으로 망할 것입니다. 권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권력으로 망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을 통해 선한 영향력을 세상에 미치는 방법을 택합니다.
소금이 배추에 녹아들듯이 혹은 촛불이 조용히 어둠을 밀어내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된
사람들을 통해 거룩하고 선한 영향력을 파급시킴으로써, 조용히, 은밀히, 그리고 속에서부터
세상을 변혁시킵니다.

물론,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행동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거대한 사회적 악이 사람들의
생명을 짓누르고 있을 때,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이 연대하여 목소리를 높이고
정의를 외쳐야 할 때도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님이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정의를 외친 것처럼, 혹은 본회퍼 목사님이 나치 정권의 폭정을 끝내기 위해 목사의 신분으로
히틀러 저격단에 가담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의 변혁을 위해 먼저 행동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질문은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변화하고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사회적인 악과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의 악에 대해서는 눈이 멀어 버리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세상을 바꾸려고 몸부림쳤지만, 정작 자기 자신은 모순투성이의
인간으로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도 바꾸지 못하고 자신도 변화되지 못합니다. 마침내
그런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이 거북해 하는 기피 인물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바꾸려 했던 사회에 대해서도 증오심을 품게 됩니다.

3.

저는 두 주일 전 설교에서 공지영씨의 신작 소설 <도가니>의 등장 인물에 대해 말씀 드렸습니다.
이 소설의 두 주인공 이강석과 이강복은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교회 생활 경력만으로
장로가 되었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변화되지 않은 채 장애인들을 위한 복지 사업에 손을 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거듭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면서도
그들의 관심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힘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힘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 소설의 또 다른 등장 인물 중 서유진이라는 여자가 있습니다. 결혼에 실패하고 친정 어머니와 아이
둘을 데리고 무진에 내려와 살아가는 single mother입니다. 서유진의 아버지는 목사였는데, 독재
정권과 싸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서유진은 무진시로 내려와 ‘인권운동사무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의 대학 후배인 강인호와의 인연으로 인해 이강석, 이강복 형제가 운영하는
자애학원의 비리를 폭로하는 일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아버지로부터 전해받은 정의감과 의협심
그리고 강단이 그에게 있었지만, single mother로서 무진시의 거물들이 연루된 거대한 악과 싸우는
것은 힘겹고 벅찬 일이었습니다. 때로 가망 없어 보이고, 부질 없는 일처럼 보였습니다.

상황이 한 참 어렵게 진행될 즈음, 악한 사람들이 세운 철옹성이 결코 무너질 것 같지 않아서 서유진은
점차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간의 어느 날, 서유진은 차에 키를 두고 내리는 바람에 무진시 경찰을
책임지고 있는 장경사의 차를 얻어 탑니다. 장경사라는 사람은 지역 유지들과 적당히 타협하며
일신상의 이익을 꾀하는 타락한 경찰 공무원입니다. 그가 운전하면서 지쳐있는 모습의 서유진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당신을 보면 무슨 배짱으로 저러고 사나, 뭐 이런 생각이 듭니다. 잘
모르지만 정치할 생각은 없으신 것 같고…… 그렇다면 혹시 그런 순진한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겠다고
그러는 건가……”

그러자 서유진이 장경사의 말을 끊고 나지막하게 그러나 강한 어조로 대답합니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257쪽)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 마음이 찡했습니다. 서유진의 말이 오늘을 사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도 진실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믿음으로 세상을 변혁시키겠다고, 보무도
당당하게 외치지만, 정작 우리에게 더 시급한 과제는 세상에 의해 우리가 변질되는 것을 막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이같은 태도는 너무나 소극적이고 패배주의적인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래가지고야
이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킬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이야기 세계
속에서 서유진이 싸우는 ‘가망없는 싸움’은 그 자신을 지켜 주기도 했지만,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소금같이 혹은 촛불같이 그 역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서유진, 그는 이 세상이 자신을 변화시키지
않게 하려고 싸움으로써 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실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변혁시키려 하기에 앞서, 세상에 의해 세뇌당하고 오염되고 꺾이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가장 우선적인 싸움이며, 그것이 이
세상을 변혁시키는 가장 주효한 방법입니다. 우리는 서유진처럼 때로 거대한 악의 세력 앞에서 침묵을
강요 당하기도 하고, 타협을 요구 받기도 합니다. 금전적인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부정한 술수도
가리지 않는 사업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가치관을 지키고 살아가는 것은 때로 벅찬 일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리는 가치관을 오염시키고 판단력을 마비시키고 내면에 있는 타락한 욕망을 따라
살아가도록 교묘하게 공격해 오는 세속 문화의 영향력과 싸워야 합니다.

최첨단 문명의 이기로 인해 이제 인류는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부터 세속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서 노출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길러지기도 전에 사람들은 세속 문화의 가치관에 완전히 예속되어 버립니다. 며칠 전,
부목사님 한 분에게서 들었습니다. 한 돌도 안 된 아이가 울며 떼를 쓸 때, 그 무엇을 주어도
그치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I-Phone을 주면 울음을 뚝 그친답니다. 그 기계에서 보고 듣는 것을
이해할 수도 없는 나이인데도 그 기계가 요즘 아이들에게는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런 이유로 인해
바쁜 부모들은 어릴 적부터 어린아이들을 여러 종류의 기계에 맡겨 둡니다. DVD 플레이어, TV, 게임,
오락기, 컴퓨터, I-Phone 등등. 이렇게, 아이들의 영혼은 세속 문화에 맡겨집니다. 어쩌면 요즈음
아이들은 무덤에 이를 때까지 기계의 세계에 함몰되어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어린이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TV나 인터넷 혹은 그와 같은 매체들을
통해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려는 세속 문화의 공격이 얼마나 은밀하고 교묘한지요! 과연
우리는 그같은 전면 공격에 대해 얼마나 준비되어 있습니까? 우리는 과연 밤낮으로 교묘하게
우리의 정신과 영혼을 마비시키려는 세속 문화의 ‘소비주의’, ‘황금만능주의’, ‘물질주의’, ‘
성공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이기고 보자 주의’ 등에 대해 얼마나 대비되어 있습니까? 과연,
우리에게는 이같은 문화적 선전들을 보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분별하여 우리 자신이 변질되지
않도록 지킬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과연,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을 계획하고 디자인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나와 있는 진리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아니면, TV나 영화 혹은 상업 선전물에서 본 것을
기준으로 삼습니까? 여러분이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방법은 예수님을 통해 배운
것입니까? 아니면, 세상 문화를 통해 전해 받은 것입니까? 여러분이 신봉하고 있는 가치관을 하나
하나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이 어떻게 형성된 것이며, 과연 그 가치관은 성서의 진리에
얼마나 가깝습니까?

“나는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서유진의 이 말을 우리는 잘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적인 관심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세상에 의해 변화되지 않도록 지키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더라도 나 한
사람이 세상에 동조하지 않고 의롭고 바른 길을 간다면 나로 인해서 이 세상은 그만큼 변화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몇 번을 생각해도 결론은 같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이 달라지기를 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새 하늘과 새 땅의 모습에 가깝도록
변화되기를 원하는데, 그 모든 소망의 첫 걸음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5.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성서 일과는 히브리서 10장 19절부터 25절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라는
편지는 초대 교회에 실재했던 어느 교회를 위해 쓰여진 설교입니다. 이 편지가 쓰여질 때, 그 교회
교인들은 그들을 변질시키려는 세상과의 지루한 싸움에 지쳐 있었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모여 기도하고 서로 격려하며 힘껏 싸워 왔는데, 상황이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점점 기운이 소진되었습니다. 마치, 거대한 악의 세력과 싸우다 지쳐 두려움에 질려 있는
서유진처럼, 그들은 자신들의 힘은 너무 약하고 싸워야 할 세상은 너무도 강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줄을 서서히 놓고 있었습니다. 함께 모이려는 열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습니다.
한 때, 기꺼이 생명이라도 바칠 것 같았던 믿음에 대해서 확신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한 열정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정에 있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참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여러 가지의 비유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10:20).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새로운 길, 그 생명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그 길에 서서 멈추지 말고
앞으로 걸어 나갈 때, 예수님께서는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서’ 저자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22절).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그리고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23-25절).

이 권면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요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 요점은 세상의 압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기억해야 할 가르침입니다.

첫째, 믿는 바를 굳게 잡으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인류
역사를 살펴 보면,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많은 경우 다수가 아니라 소수였습니다. 진리 편에
섰던 사람들은 박해와 오해와 손해를 감수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다수가 내
믿음을 조롱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라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
놓으신 길만이 참된 구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길을 걷는 일을 멈추지 말라는 것입니다. 길을 나섰으면
걸어가야 합니다. 길은 걸어가라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길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영적 여정’(Spiritual Journey)이라고 부릅니다. 때론 멈추어 쉬기도 하고,
때로 경치 구경에 넋을 잃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시 일어나 걸어가야 합니다. 부단히
영적으로 성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믿음의 종착점이
아니라 출발점입니다. 좁은 문을 열고 좁은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생명의 성에 도착할 때까지
좁고 험한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걸어갈 때 우리에게는 길벗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절대 다수가 외면하는 진리의 길을 가려는 사람은 그 길을 함께 갈 길벗을
찾아야 합니다. 홀로 그 길을 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로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모이고, 속회로 모이고, 성경 공부로 모이고, 영적 대화를 위해 모여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고, 서로 부축하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세상의 압박에 굴하지 않고
생명의 길에 서서 진보해 나갈 수 있습니다.

6.

지난 주일까지 우리는 네 주간에 걸쳐 로버트 슈네지 감독이 제안한
<열매맺는 교회의 다섯 가지 습관>을 살펴 보았습니다. 슈네지 감독은 한 그리스도인이 열매
맺는 신앙인이 되고 한 교회가 열매 맺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첫째, extravagant generosity
즉 ‘후한 인심’의 습관, 둘째, radical hospitality 즉 ‘따뜻한 관심’의 습관, 셋째, passionate worship
즉 ‘영감있는 예배’의 습관, 넷째, risk-taking mission and service 즉 ‘위험을 감수하는 선교와
봉사’의 습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은 다섯 번째 습관으로서
 intentional faith development 즉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 노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항목에서 슈네지 감독이 강조하려는 단어는 intentional 즉 ‘의도적인’이라는 말입니다. 영적인
성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물론, 우리의 노력이 우리를 바꾸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만이 우리를 바꿀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터치하시도록 우리 자신을 부단히 그분에게 노출시키는 노력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꾸준히 영적 성장에 힘써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진실하게 거듭나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를 받아 그 능력으로 새로와져야 합니다. 우리의 속
사람이 무럭 무럭 자라나야 합니다. 그 속사람이 나의 옛 사람을 완전히 지배할 정도로 성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으로부터의 어떠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그 어떤 선전에도
속지 않는 영적 능력을 얻어야 합니다. 세상의 오염으로부터 자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 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을 달라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난 주일까지 살펴 본 네 가지 습관은 모두 이 한 가지 습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이 한 가지
습관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맡겨진 것들을 잘 관리하여 넉넉하게 드리고 나누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한 그렇게 드리고 나누는 일에 마음을 쓰다 보면, 그것이
영적인 성장으로 귀결됩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만이 다른 이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보일 수 있고,
그렇게 따뜻하게 이웃을 대하다 보면 영적으로 더 성숙하게 됩니다. 영감있는 예배를 드리려면
영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동시에, 그렇게 예배하다 보면 영적인 성장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만큼 우리는 더 많은 부담과 위험을 감수하고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돌볼 수 있으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과 진실로 만날 때 우리는 영적으로 변화하게 됩니다.

영적 성장을 위한 지속적인 노력?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온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바로 내가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로 변하는 것,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내 직장이 변하고 내 가정이 변하는 것,
그것도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되게 변하는 것, 바로 거기에서 시작됩니다. 세속 문화의
공격으로부터 나 자신을 지키는 것, 그것도 역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내가 영적으로 변화하는
데 열쇠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가 믿는 바를 더욱 굳게 잡고, 교회로, 속회로
모이기를 힘쓰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붙여주신 길벗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을 걷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이 길에서 결코 멈추거나 낙오됨이 없기를
바랍니다. 이 좁고 험한 길을 기뻐 뒤며 걸어 생명의 성에 이르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12장에서 교인들을 격려하는 말을 전해 드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나른한 손과 힘빠진 무릎을 일으켜 세우고, 똑바로 걸으십시오. 그래서
절름거리는 다리로 하여금 삐지 않게 하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12-13절)

오, 주님,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여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요 17:15-17)
오, 주님,
저희에게도 이 기도가 필요합니다.
저희를 세상으로부터 지켜 주시고
거룩하게 하여 주소서.
주님의 제자로서 자라게 하셔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저작자 표시
신고

Today's KORUS House English class is an article about Chuseok, one of Korea's biggest traditional.....

전찬윤 씨의 댓글

아래는 2016년 1월 전찬윤 씨가 댓글로 올려 주신 내용입니다. 전찬윤 2016-01-29 04:00 우리나라 동포(교포) 3세가 2052년에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것이다 ​ 님의 블로그에서 유익한 내용, 마음에 와 닿는 내용..

반디의 ‘고발’ 미국 아스펜 문학상 후보에 올라

아스펜 문학상 웹사이트에 게제된 반디의 ‘고발’ 후보작품. Photo courtesy of aspenwords.org k121317fe-hk.mp3 00:00/00:00 북한 반체제 소설 반디의 ‘고발’이 미국 아스펜 문학상 ..

캐나다 인권박물관에 북한 인권 디지털 전시대 개소식

북한 인권 디지털 전시대 개소식에 참가한 이경복 씨(왼쪽)와 서석구 변호사. 사진제공: 캐나다 북인협 00:00/00:00 지난 11월 23일 캐나다 인권박물관에 ‘북한 인권 디지털 전시대와 열람소’ 개소식이 열려 북한 인권과..

중국 선양서 체포된 아기 등 10명 강제 북송

중국 안전 가옥에서 찍은 이태원 씨의 아내와 아들. 사진제공: 이태원 씨 k112917fe-hk.mp3 00:00/00:00 지난 4일 중국 선양에서 공안에 체포된 아기를 포함한 탈북민 10명이 18일 강제 북송 됐다고 갈렙선..

2015년 시애틀 탈북자 통일 선교 대회 특집 1부:나는 보았네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뉴저지 정성호 원로목사의 신간
세계평화를 위한 중대한 제언-뉴욕 서병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