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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매일이 주일이다-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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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4.4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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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이 주일이다”
(Everyday is the Lord’s Day)
-- 마태복음 28:16-20


                                                            (김 영봉 목사)

1.

Happy Easter! 부활의 은총과 기쁨이 여러분의 마음 안에 깊이 깊이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시기적으로, 부활절이 봄의 시작과 거의 맞물려 있다는 것이
우연만은 아닌 듯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의 땅에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나, 생명이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이던 땅에서 새 싹이 돋아 나오는 것이나,
생명의 신비를 전해 준다는 점에서는 같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생명의
이적이 여러분 각자의 영혼 속에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지난 토요일로서 우리는 사순절 40일간의 여정을 끝내고, 오늘 부활일을
맞았습니다. 지난 40일동안의 순례 여정에 참여하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센터빌로 그리고 맥클린으로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셔서 함께 기도하신 분들께
감사 드리며, 집에서 혹은 직장에서 <사순절 묵상집>으로 영적 순례를 행하신
분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이제 오늘부터 오순절까지 50일 동안은 ‘부활절’
(Eastertide)입니다. 이 기간 동안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묵상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실은, 기독교인들은 일년 내내, 일요일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하고 감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토요일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이라고 부르는, 한 주일의 마지막 날입니다. 창세기
2장 2절과 출애굽기 20장 8절 이하에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은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지금도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토요일 휴무제도가 시작된 것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지속적인 로비(lobby)를 벌인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무슬림들은 금요일에 예배를 드립니다. 앞으로 미국 내 무슬림들의 정치 세력이
커지면, 금요일 휴무제도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의 일요일 예배가 로마 시대에 유행했던 하급 종교의 태양 숭배에서
왔다고 헐뜯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도 일요일이 아니라
토요일 즉 안식일에 예배 드려야 한다고 믿는 교단에서 그렇게 주장하곤 합니다.
우리말로 ‘일요일’이라 번역된 Sunday가 태양 숭배의 전통에 기초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로마 시대에 많은 하급 종교인들이
태양을 예배하던 날이 the Day of the Sun 즉 일요일입니다. 그러니 이 날에
기독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하급 종교를 따른다고 비난할
소지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터무니 없는 비난입니다. 이미 신약성경 안에 초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주간 첫 날, 즉 일요일에 모여 기도하고
교제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행 20:7; 고전 16:2; 계 1:10). 그들은 일요일을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주의 날’ 혹은 ‘주님의 날’
(the Day of the Lord or the Lord’s Day)이라는 이름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줄여서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일 주일’ 혹은 ‘이 주일’할 때의 ‘주일’은
한자로 ‘주일 주’(週)자를 사용한 것이고, ‘주일 예배’라고 말할 때 ‘주일’은
‘주인 주’(主)자를 사용한 것입니다.

2.

자, 여기서 커다란 질문이 생깁니다. 왜 기독교인들은 십계명의 제 4계명인
안식일 준수의 계명을 어기고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안식일 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안식’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안식일보다
부활일이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통해 주신 안식일 계명은 단순히
일을 중단하는 것만을 기대한 것이 아닙니다. 일을 중단하는 것은 참된 안식을
위한 기초 작업일 뿐이었습니다. 일을 멈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찬양하고
축하하면서 정신적으로, 심리적으로 그리고 영적으로 안식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외적으로 일을 중단하는 것에만 집착했습니다.

“안식일에 일을 하지 말라”는 계명은 모호하기 짝이 없습니다. 아무 일도 하지
말라니,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움직이지 말고 침대에 그냥 누워 있으라는
말입니까?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가 일이 아닙니까? 이 질문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이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위해 세부 조항을
만들어 냈습니다. 유대인들의 제 2경전인 <미쉬나>(The Mishnah)에 보면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39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몇 가지만 예로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바느질, 타작, 체질, 반죽, 빵을 굽는 일, 두 글자를 쓰는 일,
두 글자를 쓰기 위해 두 글자를 지우는 일.

이렇듯, 율법주의자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를 두고 씨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 기대하셨던 내적 안식과 영적 안식은 점점 먼 이야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율법의 잣대를 가지고 주변을 살피면서 범법자를 찾고 있었던
사람들의 영혼도 쉴 수 없었고, 율법주의자들의 눈에 띄어 고난을 당할까
노심초사 하는 이들의 영혼도 쉴 수 없었습니다. 이렇듯, 율법주의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잘 지키려는 노력처럼 보이지만, 실은 율법을 주신 뜻을 해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반대하셨습니다. 그분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39가지
일들을 거침없이 행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다가 밀이삭을
손으로 비벼 먹은 제자들을 변호하셨고(마 12:1-8), 18년 동안 등이 굽어 고생하는
여인을 안식일에 치료해 주셨으며(눅 13:10-17), 수종병 환자를 안식일에 고쳐
주셨습니다(눅 14:1-6).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친 것도
안식일이었고(요 5:1-9), 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을 고쳐 주신 것도
안식일이었습니다(요 9:1-12).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율법학자들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 싶을 때면, 더욱 더 도발적으로 금지된 일을 행하셨습니다.

이같은 행동이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원뜻을 천명하시면서 자신을 변호하셨습니다. 한 번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생긴 것이 아니다”(막 2:2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제 칠일에 일을 멈추고 쉬라고 하신 것은 전인적인
안식을 추구하도록 주신 명령인데, 그 율법으로 오히려 사람들의 영혼을 옥죄고
있는 잘못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또 한 번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다”(막 2:28)라고도 하셨습니다.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모세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율법을 준 모세가 초보적인 가정
교사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교사로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은 율법의 종이 아니라 율법의 주인이셨습니다. 그분은 율법을 마음대로
하실 권한을 가진 분입니다. 그분이 율법을 어겼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음에
틀림 없습니다. 겉으로는 어긴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본 뜻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마 5:17)고 말씀하셨습니다.

3.

둘째, 안식일 계명은 ‘창조의 질서’(order of creation)에 따른 것인 반면, 주일
예배는 ‘구원의 질서’(order of salvation)에 따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시작된 구원의 질서는 창조의 질서를 완성하고 또한 초월합니다.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공부할 때, 평생 독신으로 사신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언젠가, 학생 중 한 사람이 당돌한 질문을 했습니다. “왜, 교수님은 창조의
질서를 어기고 독신으로 사십니까?” 그러자 교수님이 명답을 하셨습니다.
“나는 창조의 질서를 따라 살지 않고 구원의 질서를 따라 산다네. 예수님이,
천국에서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잖아? 나는 이미
천국의 질서 속에 살고 있는 셈이지. 자네들과는 차원이 달라.” 저는 그 때
총각이었기 때문에 잠시 고민에 빠졌더랬습니다. ‘나도 구원의 질서, 천국의
질서 안에서 살아야 하나?’ 물론, 그분은 농담처럼 이 말을 던지셨습니다만,
저는 그것이 명답이라고 느꼈습니다. 구원의 질서는 창조의 질서를 뛰어 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이 이르기 전에는 안식일 계명을 지키면서 메시야가
올 것을 기다리고 기도해야 했습니다. 일을 멈추고 안식을 취하면서 영혼의 안식을
추구했습니다. 이렇게 안식일 계명을 지키는 것은 창조의 질서를 따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안식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모세보다 더 크신 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을 통해 안식일보다 더 큰 것이 우리에게 생겼습니다.
부활일,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질서를 따르는 사람은 부활일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께서는 갈릴리에서 활동하실 때 무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 11:28-30)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
줍니다. 우리는 흔히 구원을 ‘죽어서 천당 가는 것’이라고 정의합니다만, 그것은
구원의 한 요소일뿐입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어 있었는데,
이같은 ‘깨어진 관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은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희생으로 그 모든 죄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에게 돌아가 그분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셔서 영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죽은 후에만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여기, 이 땅에서도 천국을 누리며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천국을 살아, 우리가 사는 이 땅을 천국으로 변화시켜 가도록 우리를
도우십니다. 그렇게 살다가 죽어 하나님의 품에 이르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때, 첫 열매로 부활하신 주님처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또한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의 영혼은 정박할 항구를 찾는 것이며,
안길 품을 얻는 것이고, 돌아갈 고향을 찾는 것입니다. 일을 멈추는 것으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진정한 안식과 평화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값진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과 부활로 인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안식일이 아니라, 부활일을 지키는 것입니다. 부활일이 안식일
계명의 뜻을 완성시켰으므로, 말하자면 부활일이 안식일을 삼킨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주일 예배 시간에 대표 기도하시는 분들이 다음과 같이 기도하는
것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습니다. “주님, 이 거룩한 안식일에 저희를 불러 모아
주시어 예배 드리게 하시니 감사 드립니다.” 우리 찬송가에도 그렇게 생각하도록
오도하는 가사가 있습니다. 통일찬송가 57장에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이라는 가사가 그것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안식일을
일요일로 옮겨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안식일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4.

전통적으로 기독교인들은 ‘주일성수’(holy observance of the Lord’s Day)를 매우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해 왔습니다. ‘주일성수’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명령을 주일에 적용한 것입니다. 특별히, 미국의 청교도 전통의 영향을 크게
입은 한국 교회는 주일 지키는 것을 안식일 지키는 것처럼 받아들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주일에 ‘해야 할 일’보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더 많이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습니다만, 저희 어릴 때만 해도, 주일에는
여행하지 말아야 하고, 시장에서 사고 파는 것도 하지 말아야 하며, 공무원
시험에 응시해서도 안 되고, 심지어 버스를 타도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대구의
어느 교회에서는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 버스를 타도 되느냐의 문제를 두고
논란이 생겼다고 합니다. 결국 교회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노회에 질문서를
보냈는데, 노회의 판결은 “예배당에 올 때는 버스를 타고, 집에 갈 때는
걸어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세월이 바뀌어 이제는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게 되었고, ‘주일성수’를 ‘주일
대예배 참석’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주일 아침 일찍 한 시간 예배를 드리고 나면,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 살아도,
주일 성수의 계율을 범하지 않은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형식의 율법주의입니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말은 일요일 전체를,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일에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공적 예배를 드리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거기에 더하여, 은혜를 입은
자답게 은혜를 베푸는 활동으로 주일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 즉 부활의 은혜를 기념하고 감사하고 축하하는 데 주일 하루
전체를 사용하기 위해, 할 수 있으면 주일에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주일성수는 ‘새로운 율법’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의 ‘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가급적 그 날,
예수께서 부활하신 날, 일을 멈추고 함께 모여 예배 드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나누고 베풀고 쉬고 감사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려고
힘써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더 살기가 어려워지는 미국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려면, 부득불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용된 일꾼인 경우에도 그렇고,
세 들어 있는 몰(mall)의 주인(land lord)이 주일에 영업을 할 것을 요구하는
경우에도 그렇습니다. 나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경우보다, 혼자만의 결정으로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럴 경우, 용감하게, 모든 손해를 무릅쓰고
주일 휴업을 단행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모두에게 이럴만한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모두,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신 분이시지만, 율법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계를 위해 주일에 일을 해야 하는 경우, 죄책감만 붙들고 망연히 있어서는
안됩니다. 주일에 모든 일을 멈추고 예배와 찬양과 나눔과 사귐과 봉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기를 소원하고 노력하면서, 그 때까지, 다른
방법으로 주일성수의 ‘정신’을 이룰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주일 예배 참석이
영 불가하면, 다른 날이라도 예배에 참석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5월 1일부터
우리 교회는 토요일 오후 7시에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주일 예배 참석이 어려운
분들이 토요 예배를 통해 영적인 힘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기회가
될 때마다, 그것이 토요일이든 월요일이든,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감사하고 나누고 섬기고 베푸는 일에 마음을 쏟는다면, 주일 성수의 정신을 어느
정도 실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이렇게, 주일을, 혹은 일 주일에 하루만이라도 성별하여, 예배를 드리고 감사와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는 것은 나머지 6일을 그같은 정신으로 살려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날들을 정하여 거룩하게 지키고 나머지 날에는
영적 해이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을 바라시지 않습니다. 모든 날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을 거룩한 곳과 거룩하지 않는 곳으로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있으면 그 어디나 거룩한 곳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또한 거룩한 사람과 거룩하지 않은 사람으로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성령께서 내주하시면, 누구나 거룩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또한 거룩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을 나누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거룩하게 지으셨고,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것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그분은 거룩한 시간과 거룩하지 않은 시간을 나누는 것에
반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시간이 거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일 성수의 정신입니다. 일 주일 가운데 하루를 구별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허락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고 축하하며 구원의 은혜가
우리 마음 안에 살아있게 하여, 나머지 엿새 동안 그 은혜의 힘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주일 성수의 정신입니다. 매일 경건 생활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루에 한 시간을 떼어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시간으로
만듦으로써 하루의 시간 전체가 거룩하게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은 율법 안에 사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비밀을 가지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떠나 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보아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 28:20). 여기서 ‘항상’이라는 번역은 아쉽습니다.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에서 마지막 문장의 뉘앙스를 잘 살려 번역해 놓았습니다. “너희가 이 일을 하는
동안에, 이 시대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하루도 빠짐없이,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I’ll be with you as you do this, day after day after day, right up
to the end of the age.) 부활의 주님은 일요일에만이 아니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매일, 우리와 함께 일하기 원하십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일요일만이
주일이 아니라 매일이 주일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 목사님께서
자신의 일기에 “Everyday is holiday”(“매일이 성일이다”)라고 써 놓았는데,
오늘 저는 “Everyday is the Lord’s Day”(“매일이 주일이다”)라고 쓰고
싶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 겨울, 참 힘 드셨지요? 유난히 눈도 많았고, 비도
잦았으며, 추위도 길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지금 미국이 겪고 있는 경제 상황을
상징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하루 밤 사이에 온 세상이 꽃
천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는 따뜻한 햇볕을 받고 맑은 공기를 마시며
마음껏 기지개를 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부활의 소식은 2천 년 전에 있었던
역사적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오늘 저와 여러분 각자의 삶에
직결되는 소식입니다. 이제 겨울이 다 지나고 꽃 천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식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우리의 삶에 맞아들여 그분과 함께 새 세상을 살라는
초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고 부활하셔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 주셨습니다. 어디서나 부활하신 주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사귀며
살아가는 세상, 그리고 언제나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세상,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 우리 모두 거룩해지고, 그리하여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길을, 주님께서는 활짝 열어 놓으시고 우리를 그 길로 부르십니다.
우리는 주일마다 함께 모여 예배 드리며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모레도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갈 것을 다짐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신 부활의 주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매일, 빠짐 없이, 언제나, 순간순간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과 함께 우리는 이 땅에서 천국을 살고, 우리의 목숨이 다할 때 그분의 은총을
힘입어 하나님의 품에 이루고, 언젠가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를 때 우리는 그분처럼
부활하여 영원히 다스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믿음 위에 선 사람에게는
주어지는 하루 하루가 주일이요, 생일이고, 축일이며, 성일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을 입고 있는 한, 어쩔 수 없이 고난의 터널도 지나고, 어둠의 계곡도 지납니다.
질병의 고난도 당하고, 실패의 아픔도 겪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겪어야
하고, 마침내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가야 합니다. 하지만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는다면,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매일 함께 한다면,
어둠도 어둠이 아니며, 고난도 고난이 아니고, 죽음도 죽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죽음을 향해 이렇게 호령했습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 15:55)

이같은 부활의 능력과 기쁨과 은총이 여러분 모두에게 그리고 저에게도, 깊이
그리고 밀도 있게, 매일 그리고 매 순간,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Happy Easter!

부활하셔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넘어서신 주님,
언제 어디서나 저희와 함께 하시는 주님,
문제는 저희입니다.
저희의 마음문을 두드리시는 주님의 음성을 모른체 하는 저희,
주님을 모시고 더불어 먹고 살기를 불편해 하는 저희,
주님을 주일 예배에만 묶어 두려는 저희,
저희가 문제입니다.
오, 주님,
저희를 깨우소서.
주님의 열어놓으신 새 세상으로
활짝 깨어나도록 도우소서.
주님이 열어 놓으신 구원의 길을 걸어
매일을 성일로 만들게 하시고
우리가 선 자리를 천국으로 만들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