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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제사가 아니다-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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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2.14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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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가 아니다”
(It Is Not a Sacrifice)
히브리서 Hebrews 10:19-23

                         (김 영봉 목사)


1.

몇 주일 전,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에 맞추어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11절까지 기록된 ‘가나의 혼인잔치’ 이야기를 읽고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는 13절부터 22절까지 기록된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소동’ 이야기를 읽고, 예수님의 활동 속에서 은밀하게 시작된 영적 음모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물을 포도주로 바꾸심으로써 장차 율법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 가장 자리로 밀려날 것을 예고하셨고, 성전에서의 소동을 통해, 장차 성전이 효력을 잃어 버릴 것임을 예고하셨습니다. ‘율법의 종교’가 밀려나고 ‘은혜의 종교’가 그 자리에 들어설 것을 암시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일으킨 소동에 대해 말씀 드리면서, ‘예배당’(chapel)을 ‘성전’ (temple)이라고 부르는 일을 삼가하자고 제안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보이는 성전’을 무효로 만들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그분을 우리 삶에 모심으로 우리 자신이 성전이 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면 그 모임이 성전이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에게는 온 천하가 성전이 됩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몇 주일 동안 이 주제에 대해 말씀을 나눌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영적 음모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고, 여러분들에게 오히려 혼란만 안겨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사순절 기간 동안 이 문제에 집중할 것입니다. 성전이 무너질 때 일어나는 모든 변화들을 살펴 봄으로써 우리가 믿는 ‘은혜의 종교’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 보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이번 기회에 우리 믿음 안에 뿌리 내리고 있는 율법주의의 요소들을 뽑아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2.

예루살렘 성전이 허물어지면, 더 이상 하나님께 ‘제사’(sacrifice)를 드릴 수 없게 됩니다. 유대인들의 믿음에 의하면, 제사는 오직 성전에서만 드려야 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동네 마다 ‘회당’(synagogue)이 있었지만, 그곳에서는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고, 주중에는 학교로 혹은 마을 회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제사는 오직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야 했고,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은 일 년에 한 두 번이라도 성전에 가는 것을 꿈으로 여겼습니다.

제사는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마련된 제도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신학에 따르면, 죄에는 두 종류가 있었습니다. 죄인 줄 알고 지은 ‘고의적 죄’(intentional sins)와 죄인 줄 모르고 지은 ‘과실의 죄’(unintentional sins)가 그것입니다. 이 중에 제사로써 용서받을 수 있는 죄는 죄인 줄 모르고 지은 죄뿐입니다. 고의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선행으로 상쇄시켜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 서면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의 무게와 선행의 무게를 잴 것인데, 만일 선행의 무게가 고의적인 죄의 무게보다 크면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교인들에게는 ‘제사’와 ‘선행’이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두 개의 기둥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죄로 인해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방법으로 부지런히 죄를 씻어 내야만 그분의 눈에 들 수 있고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전에 가면 이 두 가지를 다 행할 수 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림으로 과실의 죄를 해결하고, 성전 문 곁에 늘어서 있는 거지들에게 적선해 주고 성전 헌금궤에 헌금을 드림으로써 선행을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 잘 하면 분노한 하나님의 눈에 들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믿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부목사님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 도시에 꽤 유명한 유대인 거지가 몇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은 ‘전문직 거지’(professional beggar)인데, 실은 저택을 가지고 사는 알부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유대교인들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는데, 그 태도가 매우 당당하다고 합니다. 마치,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합니다. “나에게 돈을 달라. 내가 없으면 너희들은 구원받지 못한다. 너희가 나를 돕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돕는 것이다. 그러니 이 죄인 놈들아, 나에게 후하게 적선하라!”

좋은 목적으로 마련된 제도가 얼마나 오용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이 성전을 허물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마련되었지만 사람들에 의해 오용되고 있었던 이 두 가지의 방편들이 모두 폐지될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과실로 지은 죄를 해결하기 위해 드리는 ‘제사’도 폐지되어야 했고, 고의로 저지른 죄를 해결받기 위해 행하는 ‘선행’도 폐지되어야 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는 하나님 없이 욕심껏 살고, 그 결과로 얻은 양심의 가책을 제사로 혹은 선행으로 해결하려는 불순한 음모가 하나님에 의해 심판 받을 것이라고, 예수님은 예언하신 것입니다.

3.

아무 대책 없이 성전을 허물어 버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죄’는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 있는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성전 제사 제도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죄를 은밀하게 즐기면서, 제사 제도를 오용하여 죄책감을 해결하고 있었습니다. 죄를 해결하도록 마련된 제사 제도와 선행의 교리가 오히려 그들의 죄를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제사 제도가 끝날 것을 예고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죄의 문제를 끝장낼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마련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사역의 마지막 즈음에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으로 치러 주려고 왔다”(마 20:28). 예수님은 다니엘 7장 13절의 예언에 따라 자신을 ‘인자’라고 부르심으로써 당신이 장차 우주적인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우주적인 통치자가 인간을 섬기러 이 땅에 왔으며, 그 섬김의 끝에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죽음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제물로 당신 자신을 드리는, 영원한 제사였습니다. 그렇게,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물로 바쳐지고 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부활시켜 우주적인 통치자의 자리로 높여 주실 것이라고 믿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고 가는 모든 세대와 인류의 죄를 위해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물로 십자가에서 희생되셨습니다. 십자가, 바로 그것이 제사 제도에 대한 대안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물이 드려졌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짐승으로 혹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이 점을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모든 제사장은 날마다 제단에 서서 직무를 수행하면서 똑같은 제사를 거듭 드리지만, 그러한 제사가 죄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사하시려고, 단 한 번의 영원히 유효한 제사를 드리신 뒤에 하나님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서 그는 그의 원수들이 그의 발 아래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는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을 단 한 번의 희생제사로 영원히 완전하게 하셨습니다. (히 10:11-14)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짊어 지고 영원한 제물로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가장 먼저, 그분이 십자가에서 드린 영원한 제사가 바로 나의 죄 사함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믿어지십니까? 기독교의 교리 중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낍니다. 저에게도 그랬습니다. 내 죄의 대가를 다른 사람이 치룬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고,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나를 위해 그같은 일을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으며, 2천 년 전에 한 사람이 행한 일이 오고 가는 세대의 모든 사람들의 죄를 대속하는 효력을 가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고, 논리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4.

이것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가 있습니다. 뭔가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는 이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무조건적인 은혜와 사랑을 의심하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공짜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만, 막상 공짜 앞에서, 특별히 값비싼 공짜 앞에서는 뭔가 함정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게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가 그렇게 우리를 훈련시켜 놓았습니다.

오래 전, 경제적으로 압박을 당하면서 공부하던 유학 초기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날, 메일 함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편지를 발견했습니다. 누구든 상관 없이, 5천명에게 각각 최고 10만 달러씩을 나누어 주기로 했으니, 동봉된 서류를 작성하여 보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미국은 정직한 나라라고 배웠기 때문에 반신반의하면서 서류를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얼마 후, 제가 10만 달러를 받을 사람으로 선택되었다는 회답과 함께 또 다른 서류를 작성하여 보내라는 기별이 왔습니다. “와, 이제 고생 끝!”이라고 생각하고 떨리는 손으로 서류를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회답이 오기까지 10만 달러를 유익하게 사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 후가 어떻게 되었느냐구요? 말하지 않겠습니다. 말 안해도 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겪어야 했던 스트레스를 말해 무엇합니까? 그 때 두 가지의 교훈을 얻었습니다. 첫째는 “눈 먼 돈을 밝히지 말라”는 것이었고, 둘째는 “너무 좋아 보이는 제안에는 언제나 함정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요즈음도 저의 이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유혹의 스팸 메일, 전문 용어로 fishing mail이 오곤 합니다. “어느 갑부의 아내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유산을 나누어 주려고 하니 당신의 신상 정보를 보내 달라.” 거기에 자주 나오는 이름이 Rebeccca Williams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는 이름일 것입니다. 이런 메일에 응답했다가 곤란을 당하고 손해를 본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같은 쓰디 쓴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너무 좋은 소식은 믿지 않도록 훈련됩니다.

너무나 좋은 제안에는 늘 함정이 있게 마련이라는 경험적 진실이 우리로 하여금 복음의 제안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내 모든 죄에 대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값을 지불하셨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면 모든 죄를 무상으로 용서 받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뭔가 함정이 있거나,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덥썩 받았다가는 나중에 모르는 사이에 가입된 회원권을 취소하고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배달되어 온 물건을 반품하느라고 골치를 썩지 않을까 싶어 주저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값없이 용서받는 것에 대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내가 지은 죄에 대한 대가는 내가 받겠다고 만용을 부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엄청난지를 모르고 겁 없는 만용을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서기 전까지 자신의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하나님의 높은 기준에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면 하나님의 기준에 합격하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너져 그분의 전적인 은혜를 구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십자가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 은혜와 사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죄성에 절망하고 영원한 징벌의 현실을 마주한 채, 그 절망 가운데서 벗어날 희망의 빛이 없는지를 찾을 때, 우리는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 한 번에 영원히 완성하신 십자가의 제사가 바로 나를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에 있어서 대가를 치룰 수 없을 정도로 귀한 것들은 모두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한 번의 생(life)도 선물입니다. 그것을 위해 여러분이 치룬 대가가 무엇입니까? 한 번의 생을 위해 대가로 지불할 만큼 값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사랑도 무상으로 주어진 선물입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여기, 너희를 위한 선물이 있다. 와서 그 선물을 값없이 가져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물’은 기본적으로 이유 없이 주는 것입니다.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받았다면, 그것은 더 이상 ‘선물’이 아니라 ‘보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 나머지, 값없이 용서를 받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더 이상 짐승을 잡아 바칠 이유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린 십자가의 제사를 설명한 다음, 이렇게 권합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서 담대하게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우리에게 새로운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 그러니 우리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참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갑시다. 우리는 마음에다 예수의 피를 뿌려서 죄책감에서 벗어나고, 맑은 물로 몸을 깨끗이 씻었습니다. 또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 (히 10:19-23)

5.

십자가 위에서 제사 제도는 끝이 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써 율법주의의 불순한 음모가 드러났습니다. 율법주의의 음모는 하나님을 왜곡함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에 대해 매우 화가 나 있으며, 조금만 더 그분의 화를 돋구면 불같은 심판이 떨어질 것처럼 가르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기준에서 멀러 떨어져 있습니다. 분노한 하나님의 눈에 들기 위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고의로 저지른 죄를 해결하기 위해 헌금을 많이 드리고 거지들에게 넉넉히 적선을 해야 합니다. 과실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제사장들의 지시에 순종하여 값비싼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눈에 들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율법주의의 올무에 걸려 버리면, 우리는 죄책감을 해결하는 일에만 매이게 되고, 죄성을 극복하고 거룩함에 이르는 일에는 마음을 쏟을 겨를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항상 두려워하게 되며, 자신의 죄의 결과에 대해 두려워 하고, 그래서 그 죄책감을 해결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지만 충분히 미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더 비싼 제물도 바쳐 보고, 더 많은 헌금을 드려 봅니다. 그렇게 몸부림을 쳐 보아도 마음에는 기쁨도 없고 평안도 없습니다. 마치 부모님의 기대에 늘 못 미친다는 가책에 시달리는 자식처럼, 율법주의의 올무에 걸리면 늘 하나님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하게 살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이 율법주의를 끝장 내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진실입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위해 자신을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그 제물은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한다는 말은 무엇보다도 먼저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모든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고 믿는다는 뜻입니다.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더 이상 값비싼 제물을 드리지 않아도, 혹은 더 이상 성전에 큰 돈을 바치지 않아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당신의 자녀로 받아 주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더 이상 진노한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내린 사람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 마치 미소를 가득 머금고 사랑스러운 자식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처럼 느낍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눈에 들기 위해 몸부림치지 않습니다. 오직 당신의 자식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리고 당신의 독생자의 피로 구속한 존재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하신다고 굳게 믿습니다. 자신이 하나님께 등지고 죄 속에 뒹굴며 살고 있을 동안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셨고, 앞으로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분의 사랑은 변함 없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부어진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 사람의 목표는 죄책감을 해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께서 해결해 주셨으므로, 이제는 거룩한 삶을 위해 노력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 거룩한 사람으로 지어져 갑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하나님의 분노를 풀기 위해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 예배합니다. 그 사람은 헌금을 드릴 때 하나님의 눈에 들기 위해 뇌물 바치듯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한 없는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아낌 없이 바칩니다. 그 사람은 자기의 죄를 해결하기 위해 적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그 사랑의 표현으로 넉넉하게 돕습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율법주의의 올무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하십니다. 더 이상 진노한 하나님에게 제사 드리려는 심정으로 예배 드리지 마십시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강단에서 진노한 하나님이 선포되고 있으며, 그분의 눈에 들기 위해 제사를 드리라는 외침이 들리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도,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두려운 마음으로 예배당에 나와 짐승을 바쳐 제사를 드리는 심정으로 예배를 드리는지 모릅니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죄책감을 해결하는 일에만 묶여 있습니다. 이미 저지른 죄를 어떻게든 해결하여 ‘화난 하나님’을 진정시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땅에 쏟아 버리는 일이며, 우리의 영성을 질식시키는 일이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라 보십시다. 그분의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다. 그 위에서 예수께서 드리신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제사를 바라 보십시다. 그 제사가 바로 나를 위한 것임을 받아들이고 고백하십시다. 십자가 위에서 나를 향해 환히 웃으시는 하나님을 바라 보십시다. 그분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이 얼마나 뜨거운 것인지, 그리고 그 사랑이 얼마나 영원한 것인지를 깨달아 아십시다. 그 믿음이 나를 자유케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나를 새롭게 할 것입니다. 그 믿음이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굴 것입니다. 그 믿음이 내 삶의 강력한 추진력이 될 것입니다.

제사가 아닙니다. 예배요, 찬양이요, 감사요, 응답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종교를 믿는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여기에 진정한 기쁨이 있고, 진정한 자유함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이 활짝 피어나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가 여기에 있고, 그분의 생애와 가르침, 그분의 고난과 십자가에서의 희생 그리고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모두 이것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가 말한대로, “우리에게 약속하신 분은 신실하시니, 우리는 흔들리지 말고, 우리가 고백하는 그 소망을 굳게 지킵시다”(히 10:23).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의 능력으로 자유하게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 위에서 저를 위해 흘리신 보혈을 생각합니다.
그 절대치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한 그 고귀한 희생,
하지만 마치 나 하나만을 위해 바친 희생처럼 보이는
그 값진 희생을 기억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그 사랑에 확신하게 하소서.
오직 사랑에 취하여,
오직 은혜에 사로잡혀,
찬양하며 감사하며 보답하는 삶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