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명깊은설교

“죄 속에 벌이 있다”-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Archive | Home |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10.2.21 (김 영봉 목사)

인쇄페이지 열기
MP3로 듣기

                                                    (김 영봉 목사)

“죄 속에 벌이 있다”
(Sins Are Sugar-coated)
--로마서 (Romans) 6:15-18

1.

요즈음, 잠이 부족해서 고통을 호소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순절
새벽기도회에 참여하느라고 그런 분도 있지만, 동계 올림픽 때문에 그런 분도
있습니다. 올림픽 초반에 한국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올리는 바람에 밤 늦게까지
TV 앞에 앉아 있게 됩니다. 밴쿠버가 우리가 사는 곳보다 3시간이 늦다 보니,
그곳에서 모든 행사가 끝날 즈음이면 이곳은 한 밤중입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한국 선수들의 선전으로 인해 기분은 좋습니다.

소위 ‘신세대 선수들’에 관한 기사를 읽으면서 금석지감(the gap between the old generation and the new)을 느낍니다. 구세대의 운동 선수들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출세하기 위해 피나는 고통을 참아가며 자신을 갈고 닦았습니다. 운동은
돈 벌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반면, 신세대의 선수들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운동
자체가 좋아서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같은 운동을 하더라도 어떤
동기로 하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납니다. 돈과 성공을 목표로 운동하는 사람들은
그 목표를 이루자마자 타락하거나 추락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운동 자체를
즐기는 선수들은 정상에 올라선 이후에도 계속 성장합니다.

이번에 500미터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금메달을 딴 모태범 선수가 1000미터
경기에서는 0.18초 차이로 은메달을 땄습니다. 과거, 제 또래의 선수들은 그런
경우 엉엉 울면서 분통해 했습니다. 외국 기자들은 가끔, “왜 한국 선수들은
은메달이나 동메달을 따면 억울해 하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 하곤 했습니다.
1등 혹은 금메달이 목표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모태범 선수는
은메달이 확정되자 1위 선수에게 가서 인사를 건네고 나서 태극기를 들고 환한
미소로 관중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도
시원했습니다.

그런 말이 있습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따라가지 못하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따라가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제 또래의 운동 선수들은 노력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반면, 신세대 선수들은 즐기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즐기고, 그렇기 때문에 훈련과 실전에 최선을 다하며, 그 결과에
대해 승복하고 자족하는 삶의 태도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신앙인의 삶의 자세는
모름지기 이와 같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2.

이것은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받은 ‘거룩한 삶’에도 적용되는
진리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동기에도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뭔가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운동하는 사람들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동기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은 매우
‘거북한’ 것이 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적인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다른 하나는
거룩한 삶 자체를 즐기는 것입니다. 운동이 좋아서 하는 사람들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거룩한 삶은 신나는 모험입니다. 이것이 은혜로써
행하는 신앙 생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 19:2). 거룩성(holiness)은 하나님의
성품 중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성품입니다. 성서의 기록에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언제나 대면하는 첫 번째 느낌이 하나님의 절대적 거룩성
(absolute holiness)과 자신의 절대적 죄성(absolute sinfulness)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거룩하게 산다고 자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서는 순간
자신의 한 없는 죄성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자신의 두뇌에 대해 꽤 자부하던
사람이 아인슈타인을 만나 “아, 나는 어린아이로구나!”라고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 속에 빠진 이유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 안에 살면서도 그분의 존재를
무시하고, 그분과 사귐을 나누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무시하고 관계를 끊고 살아가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입혀 주신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잃어버립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에 우리는
죄성을 유전병처럼 전해 받았습니다. 그 죄는 이 땅에서 우리의 영적 삶을
질식시키고 마침내 하나님으로부터 영영 단절되게 만듭니다.

죄에 관해 우리가 꼭 깨달아야 하고 또한 기억하고 있어야 할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죄 안에는 벌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죄는 마치 옛날에
유행했던 ‘당의정’(sugar-coated tablet)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겉은
달콤하지만, 단맛이 가시고 나면 쓰디 씁니다. 당의정의 쓴 맛은 병을 치료하는
약효를 가지고 있지만, 죄의 쓴 맛은 우리의 생명을 고갈시키며 마음을 할퀴어
놓고 삶의 기초를 잠식해 갑니다. 우리는 너무도 어리석어서, 죄를 통해 당장에
맛보는 달콤한 맛에 끌려서, 후에 맛보게 되는 쓰디 쓴 맛을 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이 죄와의 싸움에서 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입니다.

우리가 짓는 죄에 대해 적어도 한 번은 하나님 앞에서 결산할 날이 올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벌을 주시기 훨씬 이전에, 죄 안에 숨겨져 있는 벌이 먼저
우리를 징계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 속에 숨겨져 있는 벌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더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면 죄로부터 해방되는 길이 열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혹은 보지 않고, 마지막에 하나님에게 받을 벌만을
생각하고 두려워하며 피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을 율법적으로
만드는 원인입니다.

얼마 전, 미국과 영국에서 2년 전부터 시작된 무신론 광고가 한국에도 상륙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무신론자들이 종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기독교를 반대하기
위해 돈을 모금하여 버스 바깥 면에 무신론 광고를 붙인 것입니다. 기독교계의
반발로 버스운송조합에서 이틀만에 그 광고를 내렸다고 합니다만, 그 광고
문안이 이렇습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이 한 말, 즉 “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에서 따 온 말입니다. 한국의 무신론자들이 이같은 문구를
내걸어 기독교를 비판했다는 사실은 한국 교회가 얼마나 하나님의 심판을
강조했는지를 반증해 줍니다. 전도할 때,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강조하면서,
그 심판을 피하려면 예수 믿으라고 위협해 왔기 때문입니다.

3.

이것은 큰 잘못입니다. 그렇게 협박하고 위협하여 믿게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렇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만을 강조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전도했기 때문에 한국 교인들의 믿음이 율법주의적인 태도에 빠져 있습니다.
마치 돈을 위해 운동하는 선수들처럼,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한 목적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았는데도 여전히 죄가 좋습니다. 죄를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죄에 대한 벌은 두렵습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벌을 해결할 방법을 찾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혼나지 않을 만큼만 하고 맙니다. 돈을 위해
운동하는 선수들이 1등을 하고 나면 더 이상 노력을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어떤 아이가 있습니다. 그는 엄한 아버지에게 칭찬받는 것을 목적으로 공부합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그 아이는 아버지에게 칭찬을 받기에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에는 아버지에게 혼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삼습니다. 누구는 “공부가 제일 쉬웠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공부가 제일
재미있다”고도 말하는데, 이 아이는 공부가 어렵고 또 재미도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혼나지 않을 만큼만 합니다. 그 결과, 그 아이의 성적은 늘 적당한 정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래서 변변치 못한 대학에 입학합니다. 그런데 대학에서부터
그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자신의 적성에 맞는 전공을 만나 공부에
재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벌을 피할 목적으로 혹은 하나님의 징벌이 두려워서 신앙 생활을
한다면, 그 결과는 뻔합니다. 그 사람은 결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죄의 맛이 거룩한 삶의 맛보다 더 좋은데, 어떻게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에게 혼나지 않을 만큼만 하는 신앙 생활에 무슨 기쁨이 있을 것이며,
그러한 영적 생활에 무슨 성장과 성숙이 있겠습니까? 늘 하나님의 눈치를 보며,
죄의 경계선을 넘나들며 위험한 곡예를 하고 살아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살다가,
마음에 죄책감이 몰아치면 하나님 앞에서 울며 불며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마음이
개운해지면 다시 돌아서서 죄를 탐하며 입맛을 다시는 것 아닙니까?

죄 속에 벌이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우리 모두가 “죄의 종”이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보통 마음껏 죄를
즐기는 사람을 ‘자유한 사람’이라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죄는 우리를 노예로 만드는
‘악한 힘’입니다. 우리가 죄를 즐긴다고 하지만, 그 죄는 곧 우리를 노예로 만들어
인생을 파괴시킵니다. 술에 대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술을 먹고,
그 다음에는 술이 술을 먹고, 마지막에는 술이 사람을 먹는다.” 이것처럼 죄의
본질을 잘 표현한 말이 없다 싶습니다. 처음에는 사람이 죄를 탐합니다. 하지만 곧
그 죄는 그 사람을 노예로 만듭니다. 그리고 그 죄가 그 사람의 인생을 결박합니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대로, “죄의 종이 되어 죽음에 이르는”(롬 5:16) 것입니다.

오래 전, 제가 개인 홈 페이지를 열고 방문자들의 질문에 대해 답을 올리는 일을
할 때의 일입니다. 어느 젊은이가 인터넷 포르노에 대한 고민을 올렸습니다. 그는
교인들이 알기에 ‘새벽 이슬같은 청년’입니다. 하지만 밤마다 혹은 낮에 홀로 있는
시간마다 인터넷 포르노에 거의 중독되다 시피 살고 있습니다. 때로 이 문제로 인해
예배당에 가서 눈물 콧물 쏟으며 회개의 기도를 드려 보지만, 그 약발이 며칠 가지
못합니다. 자신의 위선적인 모습이 너무도 가증스럽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나가지
않을 수도 없고, 그 죄를 청산할 수도 없어, 상담해 왔습니다.

그 청년에게 저는 몇 가지 도움의 말을 적어 보냈습니다. 그 중에서 제일 강조했던
말이 바로 “그 죄 속에 벌이 있음을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죄로 인한 죄책감에만
붙들리지 말고, 그것을 보고 나서 자신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잘 관찰해
보라고 했습니다. 포르노를 보고 난 다음에 마음에 일어나는 혼탁한 변화,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미치는 악영향, 영성에 미치는 악영향, 여성을 보는 눈에 미치는
악영향, 그리고 생활에 미치는 악영향 등을 따져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리고
포르노에 중독될 때 장기적으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문제들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만일 그 청년에게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순간적인
쾌락 속에 숨겨진 그 엄청난 벌을 깨닫고 그 죄의 올무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죄는 무엇입니까? 저는
지난 주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로써 우리의 모든 죄가 다 도말되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됩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만 듣고는 이렇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 무슨 죄든 값없이
용서받을 수 있다니, 이제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구나!” 이같은 오해는 이미
바울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서두에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다고
해서, 마음 놓고 죄를 짖자는 말입니까?”(15절)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16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여기에 쓰인 헬라어 표현은 매우
강한 어조로 부정하는 표현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By no means!)라고
강세를 주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값 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죄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거나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이 아님을,
결코,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로, 죄는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대한
문제입니다.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대한, 하나님과의 관계를 해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놓고 죄를 지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죄를 소홀히
취급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값싼 것으로 만드는 악한
행동입니다.

이 대목과 관계해 주의해야 할 이단적인 해석이 하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완전하고도 영원한 제사를 드렸기 때문에,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할
때, 우리의 과거의 죄와 현재의 죄와 미래의 죄가 모두 용서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가 앞으로 무슨 죄를 짓든 우리의 구원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해석입니다. 미래에 내가 지을 죄까지 미리 다 용서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해석은 바울 사도 당시에도 있었고, 지난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믿는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으며, 지금 이 와싱톤 지역에도 이같은 거짓 교리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이단들이 있습니다. 이 교리가 처음에는 매우 해방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그것은 우리를 죄의 물결 속에서 조난 당하게 만드는 속임수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죄는 아직도 우리에게 가장 싸우기 힘든 적이며,
우리의 삶에 가장 큰 위협이며, 우리의 미래에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죄는 그것
자체로 힘이 있습니다. 사탄이 죄를 사용하여 우리를 노예로 만듭니다. 그래서
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죄에 노예가 되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죄에
물들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합니다. 죄책감을 씻는 일에 붙들릴
것이 아니라, 죄 자체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죄를 권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습니다. 죄를 자랑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아니, 죄라는 말을 아예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숨어서 행하던 죄들을 이제는 버젖이 드러내고 자랑합니다. 그렇게
하여 죄책감을 외면해 보려는 것입니다. “이것도 죄가 됩니까?”라고 따져가며
죄를 정당화 하려 하고, “누구는 죄가 없느냐?”면서 자신의 죄를 하찮게 만들려
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도 이같은 분위기에 편승하고 싶어집니다. 할 수 있는
한 죄를 사소하게 만들고, 그 죄 속에서 은밀한 쾌락을 즐기고 싶어합니다.

5.

하지만 죄는 죄입니다. 그 어떤 설명을 갖다 붙이고 아무리 자신을 속이려 해도,
죄는 죄로 판명나게 되어 있습니다. 스스로 죄가 아니라고 속이고 죄 속에서 뒹군
사람은 결국 그 죄 속에 숨겨진 쓰디 쓴 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그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심각성을 평가절하해서는 안 됩니다. 죄에 대해 더욱 예민해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참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거룩한 삶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물로 세례를 베풀 때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참 세례’입니다. 로마서
6장 10-11절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죽음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이요, 그분이 사시는
삶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를 받고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한 우리는 매일, 매 순간, 그분의 다스림에 우리 자신을 내어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 사탄은 그 힘을 잃어 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다스림이 있는 곳에 죄는 그 힘을 잃습니다.

둘째, 죄 속에 벌이 있음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경험하는
일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죄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때로 죄의 세력은 과거보다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특별히 영적으로 충만할 때 죄의 세력은 더 강해집니다. 하지만
우리를 유혹하는 죄 속에 숨겨져 있는 벌을 보게 되면, 우리는 죄를 혐오하게
됩니다. 죄를 탐하면서 죄를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죄를 혐오할 때
비로소 벗어날 희망이 보입니다.

셋째, 이미 지은 죄에 대해 진실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모든 죄를 도말하셨으니, 나는 이제 마음대로 죄를 지어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도를 ‘교리’로만 알았지,
‘인격적’으로 그 사랑을 알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아들이
철이 없을 때 어머니의 사랑을 업신 여기다가 철이 들고 나서 효자가 되는
이유는 어머니의 사랑을 인격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행한 잘못이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얼마나 큰 아픔이 되는지를 알기 때문에 모든 악행을
청산합니다. 이와같이, 진실한 회개는 죄에 대한 벌이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업신 여긴 것에 대해 자신의 마음을 찢는 것입니다. 동일한 죄를
반복하여 짓더라도, 그 때마다 마음을 찢고 회개하면 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그 죄가 점점 힘을 잃습니다.

넷째, 거룩한 삶을 ‘맛 보아 알아야’ 합니다. 죄를 혐오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삶의 맛이 얼마나 좋은지를 경험해야 합니다. 거짓이 얼마나
불편하며 정직이 얼마나 편한 것인지, 미움이 얼마나 무거운 것이며 사랑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이기심이 자신과 이웃을 얼마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나와 이웃을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 것인지, 부정한
이득이 얼마나 짐스러운 것이며 정직한 소득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분노가
얼마나 질식시키는 것이며 용서가 얼마나 해방감을 주는지, 부정한 관계가
얼마나 피곤한 것이며 순결한 관계가 얼마나 건강한 것인지, 그 차이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맛 보아 아는 수밖에 없습니다.

6.

이렇게, 네 가지 방법으로 우리는 죄의 유혹과 공격을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의 결박에서 자유를 얻고 거룩한 삶을 즐기는 법을 배웁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거룩하게 살면서 그 길에서 기쁨을 얻습니다. 때로 죄에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의 마음에 아픔을 드린 것을 깨닫고 통회하며 회개하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를 힘 입고 다시 일어섭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위해 삽니다.
거룩하게 사는 것이 나 자신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행복의 길이며 그렇게 살아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기에 그 길을 걸어갑니다.

운동을 즐기는 선수들은 훈련과 연습을 즐겁게 감당하고, 자신감을 가지고 실전에
대하며, 경기에 최선을 다하고, 어떤 결과를 얻었든지 최선을 다 한 것에 만족하고,
거기서 더 진보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은 이와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드리신 영원하고도 완전한 제사를 통해 모든 죄를
값 없이 용서 받은 것에 감사하여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거룩한 삶을 열망합니다.
거룩한 삶의 길에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에 감사하되 결코 자만하지 않습니다.
더 온전히 거룩함에 이르기 위해 주께서 주시는 능력을 힘 입어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자신을 살펴 보십시다. 우리는 율법주의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은혜의 복음에 가깝습니까? 우리는 돈을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을 닮았습니까?
운동 자체를 즐기는 선수들을 더 닮았습니까? 우리는 아버지가 화 내지 않을 만큼만
공부하는 아이와 같습니까? 아니면 공부 자체를 즐기는 아이와 같습니까? 우리는
죄로부터 얼마나 해방되었습니까? 우리는 죄를 진실로 혐오하고 있으며, 거룩한
삶을 진실로 즐거워 하고 있습니까? 그 길에서 진보하고 있습니까?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살아 있으며 뜨겁습니까? 거룩한 삶이 거북한 것이 아니라
신나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 모든 비밀이 십자가 위에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 안에 있습니다. 이제 시작된
사순절 묵상의 여정 중에 주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 하셔서,
죄로부터 더욱 더 멀어지고, 기쁨으로 거룩한 길을 걸어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저희를 낳으신 주님,
저희로 그 사랑, 그 은혜를 알게 하소서.
주님의 사랑에 철 들게 하소서.
매일같이 죄에 대해 죽게 하시고
의에 대해 살아나게 하소서.
죄를 짓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하시고
진실로 애통하는 마음을 주소서.
죄 속에 숨겨진 벌을 보게 하시어
죄를 혐오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주님께서 걸으신 거룩한 길을
기쁨으로 걷게 하소서.
거룩한 삶이 얼마나 자유로우며 기쁜 것인지,
저희로 깨달아 알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