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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26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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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일어난다”
(Still I Rise)
--에베소서 3:14-21

                                                             (김 영봉 목사)

1.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보통 이름을 밝히거나 직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말해 주려면 뭐라고 소개하면 될까요?

이 질문은 실상 우리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대답해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질문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통과하여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과 관계하여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것에 따라서 우쭐해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어릴 적, 내 부모가 친구의 부모보다 더 잘 나 보이면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우쭐했습니다. 내 키가 친구보다 크거나, 생김새와 몸매가 친구보다 나아 보이면, 혹은 내 성적이 친구의 그것보다 더 나으면, 우리는 우쭐해졌고, 그렇지 않으면 열등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자존감을 높여 주었던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공부를 잘 해.” “나는 키가 커.” “나는 운동을 잘해.” “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어.”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자존감을 세워주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내 자존감에 상처를 냈던 것들도 대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못났어.” “나는 실수 투성이야.” “나는 키가 작아.” “나는 못생겼어.” “나는 지질이도 가난해.”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에 재빠르고, 우리 사회는 그같은 비교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내려는 악착같은 노력으로 인해 움직여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기면 물질적으로 얻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만, 가장 큰 소득은 자존감입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봐,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진 사람은 ‘그래, 이번에는 졌지만, 두고 보자.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마’라고 생각하며 절치부심, 칼을 갑니다. 그래서 싸움 중에서도 가장 추한 질긴 싸움이 자존심을 건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 없이 나 자신만을 두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을 두고 생각할 때,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들어다 보고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질문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을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한 번도 대면해 보지 않은 자신을 대면하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자존감을 세워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바깥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세워줄 희생양을 찾는 것인지 모릅니다.

2.

정신분석학자 칼 융에 얽힌 일화입니다. 한 중년 남자가 만성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어서 융을 찾아왔습니다. 첫 상담을 마치면서 융은 그 남자에게 하루 14시간 일하는 것을 8시간으로 줄이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머지 시간을 서재에서 홀로 보내 보라고 주문했습니다. 그 남자는 융의 지침대로 일을 줄이고 저녁이면 서재에서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책을 읽거나 쇼팽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몇 주일을 보낸 다음, 그 남자는 다시 융을 찾아가서, 당신의 말대로 해 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융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제 말은 헤세나 만이나 쇼팽이나 모짜르트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우울증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자신보다 더 같이 있기 힘든 상대는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대면하기 싫습니다.” 융은 그 사람의 눈을 응시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하루 14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당신의 자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가끔씩이라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고 사십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오직 나 하나만을 두고 생각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 존재의 중심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으며 사십니까? 장차 내가 무엇이 될지를 가끔 생각해 보십니까?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것은 사춘기 때나 하는 질문이지, 지금 이 나이에도 그런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저도 그런 질문을 붙들고 씨름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질문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왜 짐을 더하십니까?”

제가 이 질문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혔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이 문제,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못 알고 살아가는 이 문제가 평생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질병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바른 대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비교하고 그 결과로 인해 일희 일비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내가 나아 보이는 점이 좀 있습니까? 그래서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뛰어난 미모가 여러분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것 때문에 당당하게 살 이유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 미모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미모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자랑하는 미모가 추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을텐데, 당신의 미모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 그 사람 앞에서는 어쩌시렵니까?

많은 재산이 당신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 재산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재산이 많다는 것 하나로 인해 으스대는 태도를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자존감을 세우시렵니까? 머리 좋은 것이 당신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 머리로써 인정받는 것도 한 때 뿐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을 근거로 자존감을 지탱하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 앞에 서면 어쩌겠습니까? 정신 질환을 겪는 학생들이 가장 많은 곳이 일류 대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머리 좋은 것 하나에 모든 자존감을 걸고 그곳까지 갔는데,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아무리 찾아 보아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사람들의 인생에 헐값을 메깁니다. 어떤 야구 선수는 능력이 좋아 공 하나 던질 때마다 4만 달러를 번다는데, 나는 한 시간에 10 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자존감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는 것이 비참하지만, 먹여 살릴 자식들이 있으니, 하루 하루 연명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3.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관성에 밀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자존감을 세울만한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대로 오래도록 그것을 부여잡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세울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인생이 다 그런 거려니 생각하고, 사는 것이 때로는 치사하고 고통스럽지만, 가끔 느끼는 작은 행복을 찾으며 견디는 길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행복감을 누리게 해 주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대면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면, 자존감을 세우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조건에 속아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세울만한 조건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학대해 왔는지 깨닫게 됩니다.

누구 하나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홀로 자신을 대면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신을 본 사람이라면, 한 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을 대면해야 하고 끌어 안아야 합니다. <마음의 귀향> (The Heart’s Journey Home)이라는 책을 쓴 니콜라스 하난(Nicholas Harnan)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망가진]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실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거기서 지독한 자기혐오의 씨앗이 뿌려진다. 아프도록 연약한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 조건을 치유 상태로 회복하려면 모두가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모습이다.

이것이 출발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대해 한 없이 절망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을 찾는 첫 걸음입니다. 대면하기 두려운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초라한 자아를 끌어 안는 것, 그것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정한 자아 회복과 자존감의 회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납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그 초라한 자아를 부둥켜 안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우려야 합니다. 그렇게 귀 기우리면 필경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들려 주셨던 바로 그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용히 머물러 우리의 초라한 자아를 대면하고 있노라면, 틀림 없이 이 음성을 들립니다. 마음에 느낌으로 들리든지, 또렷한 음성으로 들리든지, 필경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이며, 또한 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 자신을 열고 머물러 있으면, 그리고 그 음성이 들릴 때까지 충분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으면, 이 음성은 더욱 분명하게 들립니다. 누구에게나 들립니다. 천사처럼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에게도, 똑 같이 들립니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슬처럼 있다가 사라질 존재인 나를 찾으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신다면, 그것이 보통 일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은 바로 이 하나의 사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실이면, 이 세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짓눌리지 않을만한,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4.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야 안젤루(Maya Angelou)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노스 캘롤라이나에 있는 Wake Forest University에서 미국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인권 운동가이며, 댄서이자 또한 시인입니다. 그가 한 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시인의 언어와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나, 마야 앙겔루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훨씬 더 대단한 일입니다. 그 생각은 내 마음을 가득 채워줍니다. 내 마음을 마치 풍선처럼 부풀게 합니다. 진실입니다. 그것은 가장 엄청난 사실입니다. 저는 그 생각을 늘 내 마음에 품고 있을 수 없고, 그 생각이 저를 완전히 지배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가슴은 아마 터져 버릴 것이며, 제 혈관과 그 안에 있는 피가 끓어 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눈알은 튀어 나올 것이고, 배꼽이 터지려고 불쑥 튀어 나올 것입니다. 제 양 다리는 6인치 정도 늘어날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나는 지난 주에 혹은 지난 해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바로 이 경험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그 지식이 제게는 매 번 새롭게 다가옵니다. 마치 과거에는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체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 마야 안젤루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어릴 적,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여덟 살 때, 그는 어머니의 남자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 남자는 나중에 마야의 삼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마야는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는 그로부터 6년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홀어머니와 할머니 사이를 오가며 자랐습니다.
십대 후반이 되어 그는 바깥 세계와 소통을 시작하면서 댄서가 되었고, 매우 세속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열 여섯에 미혼모가 되었고, 20대 중반까지 수 많은 직업을 전전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심지어는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할 위험에까지 다다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성악 레쓴을 받고 있었는데, 성악 선생이 ‘Lessons in Truth’라는 책을 주면서 그 중의 한 부분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이었습니다. 마야가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은 다음 선생을 쳐다 보니, 그는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마야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고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선생은 “한 번 더!”라고 말했고, 마야는 또 그 문장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반복하여 읽게 했습니다. 이 당시를 회고하며 마야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일곱번째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어쩌면 이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진실로 사랑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말입니다. 마야 앙겔루를 말입니다. 저는 갑자기 그 느낌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저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지식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제 뼈를 녹이고, 제 눈을 감게 하고, 제 치아가 잇몸에서 분리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저는 무한한 자유를 느낍니다. 저는 높은 산 위를 나르고 깊은 골짜기를 비행하는 새와 같은 느낌이 됩니다. 저는 은빛 바다의 파도 물결이 됩니다. 저는 마치 봄의 새 순처럼 기대감에 가슴 설렙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비록 마야 안젤루가 상상력 가득한 시인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 우리는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나 자신만으로는 보잘 것 없는 허망한 존재이지만, 그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마야 안젤루가 죄와 타락의 진창으로부터 헤어나와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일생동안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건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은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인 조건 때문에 우쭐해지지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교만해지지도, 그런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잠을 설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영원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그것만으로 자신이 충분히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깨달음과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이유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마야 안젤루의 시를 한 편 소개하렵니다. ‘그래도 나는 일어난다’(Still I Rise)라는 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품은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린 시입니다. Youtube에 마야 앙겔루가 직접 이 시를 낭송한 영상이 있어서 보여 드리려 합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매정하고도 왜곡된 거짓말로
나에 대한 역사를 기록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나를 먼지 구덩이에 짓밟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먼지처럼 일어날 겁니다.

내가 건방진 것 같아 기분이 나쁩니까?
왜, 당신은 우울한 기분에 눌려 삽니까?
내가 걸어다니는 모습은
안방에 있는 유전에서 석유를 퍼내는 사람의 걸음걸이 같습니다.

달처럼, 그리고 해처럼,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분명하게,
희망이 높이 솟아 오르는 것처럼,
그래도 나는
일어날 겁니다.

내가 깨어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고개를 떨구고 눈을 내리 깐 모습을?
어깨가 눈물처럼 흘러 내리고
통곡으로 인해 혼절한 모습을?

그런데 내가 당당해 보여서 기분이 나쁩니까?
내가 뒷마당에 금광을 가진 사람처럼
웃고 다니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가요?

당신은 말로 나를 사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눈빛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증오심으로 나를 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공기처럼 나는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매력 때문에 기분이 나쁜가요?
허벅지 사이에 다이아몬드를 찬 사람처럼
춤을 추는 내 모습이
당신에게 놀랍게 보이나요?

수치스러운 역사의 초가집으로부터 나와, 나는
일어납니다.
고통 속에 뿌리를 둔 과거로부터,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출렁이는 드넓은 바다,
검은 바다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물의 출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의 밤을 뒤로 하고, 나는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이 쾌청한 새벽을 향하여, 나는
일어납니다.
나의 선조들이 준 선물을 가지고 있는 나는
노예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 낙관주의’(absolute optimism)가 이 시에 그리고 마야 안젤루의 표정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 적어 놓은 고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5절, 37-39절).

6.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믿어지십니까? 그 믿음이 내 우울한 기분을 바꾸어 줄만큼, 마야 안젤루 말대로 내 육신에 영향을 미칠만큼, 내 얼굴 표정과 발걸음을 바꿀만큼 깊고 강합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내 발걸음이, 마치 안방에 있는 유전에서 석유를 파내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힘이 있습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내 목소리가, 마치 뒷마당에 금광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밝습니까?

저는 지난 한 주일,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제 믿음을 측량해 보았습니다. 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아무런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믿음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걸어나올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믿음이 든든한가? 내가 한 순간의 실수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그분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그분의 자비를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을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믿음은 뿌리가 깊은가?” 이런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 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저는 마야 앙겔루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수 없이 반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오늘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바울이 기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만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것 외에 달리 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하면서 바울은 그들이 그 사랑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3장 20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엡 3:20)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며,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게 제일 중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써 인생 길의 어느 길목에 있든지, “그래도 또 다시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
저희로 이 사랑을 믿게 하소서.
이 사랑을 맛보게 하소서.
이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주님께 사랑받는 한 가지 사실,
그것으로 인해
평탄하고 높은 인생길을 겸손히 걷게 하시고,
험한 인생길을 가뿐히 걷게 하소서.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을
항상 들으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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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19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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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아니라 나다”
(Not You But I)
--사무엘하 7:1-17

                                                              (김 영봉 목사)

1.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미국민의 82%가 이 격언을 성경 말씀이라고 여긴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 시대의 속담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미국 사회의 정신적인 유산처럼 만든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며 영성가인 제랄드 메이(Gerald May) 박사는 이 격언이 성경의 사상과 매우 닮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격언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세울 때 이 격언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격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강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격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Pray as though everything depended upon God and act as though everything depended upon you). 이 격언도 역시 성경 말씀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말은 아닙니다. 누가 한 말인지 정확히 밝힐 수 없을만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이 격언을 사용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같은 분들이 이 격언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했을 터인데, 오늘날 이 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제랄드 메이 박사는 이 두 격언이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생각에, 이 격언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운명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정당화시켜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이 격언들은 제 의지대로 살려는 욕구를 부추긴다” (I think such sayings are popular because they rationalize our mistrust of God and our subsequent desire to master our own destinies. They are propaganda for willfulness.) 그렇기 때문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격언을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radical trust in God)를 손상시키고, 우리의 죄성 안에 있는 ‘통제의 욕망’을 부추기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우리의 인생길을 제대로 걸어가려면, 매일, 매 순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성에 숨어 있는 ‘주인에의 의지’ 혹은 ‘통제에의 욕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의지하고 살려고 힘쓰는 사람조차도, 너무도 자주, 마치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양,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린 양,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인 양,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 7장의 이야기를 보면, 다윗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다윗이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 태평 성대의 시기로 진입하던 즈음이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 왕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으므로, 왕은 이제 자기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1절) 여기서 저자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윗이 영광스러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서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왕 위에 오른 다음 전임금 사울의 추종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해야 했는지, 제국을 위협해 오는 나라들을 제압하고 통합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싸워야 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자주 죽음을 각오했었는지를 거론하며, 다윗의 공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을 고초를 수 없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이룬 것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경 저자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시당초 다윗을 왕으로 택하지 않았다면, 사울 왕의 집요한 살해 음모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지 않으셨다면, 다윗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윗을 통해 영광스러운 나라를 일으키실 마음을 먹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선한 임금으로써 계속하여 선정을 펼치려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법궤을 제국의 중심으로 모셔 들일 때의 그 믿음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제 아무리 큰 일을 이루어도 다만 스스로를 들볶는 일일 뿐이요,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으면 실패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복 받은 사람이다라는 믿음, 말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과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 떨만한 강대국을 건설하고 나서 이 믿음을 잠시 망각했습니다. 자신의 성공으로 인해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못할 것이 없었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룬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국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 업적으로 인해 그는 그 믿음으로부터 미끄러질 찰나에 있었습니다.

3.

오늘의 본문을 주의깊게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다윗은 궁정 예언자였던 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왕국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2절) 그러자 나단도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3절). 예언자 나단으로서는 성전을 짓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배려가 갸륵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5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긴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집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 너냐, 나냐?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냐? 목동인 너를 택하여 기름 부은 것도 나요, 네가 싸울 때 승리를 안겨 준 것도 나다. 과거에 그랬듯이, 내가 장차 너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 것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뿐 아니라, 너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에 올라 이 나라를 견고히 다스리도록 내가 지켜줄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 네가 아니라 나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을 말씀을 읽으면서 주의깊은 독자라면 뚜럿한 특징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나의”, “내가”, “나를”이라는 표현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다윗은 자아 도취에 빠져서, 타락한 권력자들이 자주 그렇게 하듯, 말끝마다 “내가”, “나는”, “나의”, “나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요 제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겨냥하셨습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말씀을 전해 들은 다윗은 정신이 번쩍 났던 것 같습니다. 18절 이하에 보면, 그는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꿇어 앉아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쉽게 교만해지기도 했지만,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에도 민첩했습니다.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한껏 부풀었던 마음으로부터 바람을 빼어 내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확인하며 고백했고, 처음 가졌던 믿음의 눈을 되찾았습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께서 몸소 이 계시를 이 종에게 주시고 ‘내가 너의 집안을 세우겠다!’ 하고 말씀하여 주셨으므로, 주님의 종이 감히 주님께 이러한 간구를 드릴 용기를 얻었습니다.”(27절) 그는 나단이 전해 준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생각해고 꿈 꾸는 것보다 더 놀랍게 계획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다윗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셔서, 나의 자손이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대를 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 직접 그렇게 약속하여 주셨으니, 주님의 종의 집안이 영원토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게 해주십시오.

다윗은 그 전에는 감히 이러한 기도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꼈습니다. 어떻게 염치 없이 내 집안 문제를 두고 기도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내가 하나님께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어찌 나는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느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난 다윗은 전 같으면 게면쩍어서 꺼내놓지 못했던 기도 제목을 꺼내 놓았습니다.

4.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울림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도 다윗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면 다 된다!”고 장담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주인으로서의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무능한 주인에게 인생을 맡기고 회의와 절망과 한숨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주 고백하고, 또 가끔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잠시뿐, 나는 다시금 내 삶의 주인으로 등극하여 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모든 것이 마치 자신에게 달려 있는 듯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어느 쪽에 속하든 상관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매일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 내 가정 그리고 내 직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원보다 더 좋은 계획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나의 제국의 주인이시며,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며, 또한 온 우주의 운행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실에 역행하여 살면, 그것은 마치 가시채를 발길로 걷어 차는 것과 같은 꼴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다 보면, 결국 내 스스로 내 숨통을 옭죄는 결과에 빠집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스트레쓰와 불안, 초조, 우울증 등을 앓고 있습니까?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가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습니까? 카운슬러와 상담 치료사와 정신분석가와 정신과 의사들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더욱 심해지고 많아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다 밝힐 수야 없겠지만,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서두에서 인용한 격언처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걸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려 몸부림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는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주인으로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필경 지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버티고 어떤 사람은 이내 지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집안을 맡긴 것과 같은 일입니다. 가끔 소년 혹은 소녀 가장이 집안을 훌륭히 이끌고 사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지만, 그들이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받은 지나친 부담이 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려고 버둥대면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5.

한 여름 낮에 시골 길에서 어떤 사람이 소달구지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장에 가서 물건을 팔고 빈 달구지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참을 가는데, 저 앞에서 어느 여인이 짐을 머리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습니다. 달구지를 끄는 사람은 그 여인 옆에서 멈추어 서서 말을 건넵니다. “아주머니, 어디까지 가시나요? 그곳까지 실어다 드릴테니, 달구지에 타세요.” 여인은 ‘이제 살았다!’ 싶은 표정을 지으며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달구지에 올라탑니다. 주인은 “이랴!” 소를 몰아 떠납니다. 얼마 가다가 주인이 뒤를 돌아 보았더니, 이 여인이 짐 보따리를 이고서 달구지에 앉아 있는 겁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아니, 아주머니, 왜 짐을 이고 계셰요. 옆에 내려 놓으세요.”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제 몸만 실어 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짐까지 신세를 지나요.”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버둥대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짐보따리를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불쌍할지 모릅니다. 달구지에 앉아서 짐을 이고 있으면, 덜컹 거릴 때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어쩌면 걸어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분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보다 더 삶의 형편이 나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니다. 나다. 네 삶의 주인은 나다. 네 제국의 주인은 나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가 다스린다.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너는 이슬처럼, 풀처럼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이다. 네가 무엇을 하여 나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그런 걱정 하지 말아라. 너를 창조하고,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고, 너를 구속하여 지금껏 너를 살게 한 것은 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너를 위해 일할 것이다. 너와 네 직장과 네 가정을 위해 내게 특별한 계획이 있다. 네가 몸부림쳐 얻으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내가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다만 나를 의지하여라. 나를 신뢰하여라. 네가 진 짐을 내게 내려 놓아라. 너는 다만 내 안에서 쉬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잊지 말아라. 네가 아니라 나다. 나다. 나, 바로 나란 말이다.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선포하며,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며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복 있을진저! 그분의 친절한 팔에 안겨 쉴 줄 아는 이에게 복 있을진저!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에게 열어주시는 미래를 보는 이들에게 복 있을진저! 다윗처럼,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확신하고, 마음 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간구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이에게 복 있을진저!

6.

여기까지 들으시고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거라고 믿고 하늘만 쳐다보란 말인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니,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나는 태만하게 놀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반론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같은 질문은 자주, 마음을 파고 드는 말씀의 도전을 회피하기 위한 간교한 속임수입니다. ‘우리를 속이는 자’ 사탄이 그같은 속임수로 성령의 음성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초등학교 국어 실력만 가지고 있어도, 이 질문은 엉뚱한 트집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내 노력을 모두 내려 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와는 다른 태도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 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힘쓸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 편으로는,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아무 변고 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픔 없이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자신이 더 없이 귀중한 존재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해 드려서 귀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부터 귀한 존재로 여겨 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여기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큰 업적도 의미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거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들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불안감과 두려움에 눌리지 않습니다. 이루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기에, 그는 다만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전심을 다할 뿐입니다. 대단히 큰 일을 이루었다고 사람들이 칭찬해도 그 사람은 조용히 물러섭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설사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든지 그것을 복구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나에가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는 격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격언을 뒤짚어서 이렇게 생각하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 참 적절한 지적이다 싶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다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더 신실하게 삶을 대합니다. 분망하거나 허둥대는 일이 없이,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 섬겨 나갑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삶 속에는 ‘질서’가 생기고 ‘방향’이 서며 맛있는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신에게 손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거나 말거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생깁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바라는 이유는 우리가 참된 행복으로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그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은 며칠 가지 못하여 물리게 됩니다. 우리를 진실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는 행복입니다. 매일 그 행복을 맛보고 다른 사람까지도 맛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7.

이쯤 되면 회피할 수 없는 질문 하나를 대면합니다. “아니, 우리가 뭔데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사랑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어 하나님이 이토록 우리를 위하신다는 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아서는,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온갖 욕망과 우리의 과거에 숨겨져 있는 갖가지 죄들을 생각해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이유가 없듯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27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10절)

Too good to believe!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믿기지 않을만큼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런데 진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전하는 진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 입증한 진실이며, 저의 인생 경험을 통해 확인하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찬송 Amazing Grace라는 제목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랍습니다.’ 아니, 이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기지 않는다고 외면하시겠습니까? 믿기에는 너무 좋아 뭔가 미심쩍어 보이니, 조금 더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까? 그같은 조건 없는 은혜를 받아들이기에는 여러분의 자존심이 너무 강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조용히 물러 앉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것 중, 진실로 중요한 것들은 모두 값 없이 받은 것들입니다. 그냥 받기에는 너무나도 값비싸고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우주도 그렇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도 그렇고, 배우자에게 받고 있는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그분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염치 없어 보이지만,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매일, 그 사랑과 은혜에 젖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와 어느 정도 정신이 들면,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느꼈던 ‘염치없음’을 보상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이요 보답입니다. 이 시간에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것도 그렇고, 피땀 흘려 번 수입의 일부를 떼어 바치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게 하여 무엇을 더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 재산을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는 달라질 것이 전혀 없지만, 내가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 받을 은혜를 생각하면 때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것이고, 그래서 희생하는 것이고, 그래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모두를 깊이 만지셔서, 햇살처럼 혹은 공기처럼 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깨닫고, 그분의 주권을 매일 선포하고 고백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
저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오, 주님,
저희를 도우시어
이 진실을 깨닫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시며
또한 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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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12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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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국의 중심에 법궤를 모시라”
                                                              (At the Center of Your Empire)
                                                                     --사무엘하 6:1-5, 16-19
                        
                                                                           (김 영봉 목사)

1.

몇 년 전, 세간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라는 소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사용했던 ‘거룩한 잔’ 즉 ‘성배’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잔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는 없으나, 그 잔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의미 깊어 보이기 때문에 ‘혹시나 어디엔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은 이같은 소설을 쓰고, 또 어떤 사람은 탐험가로 나섭니다.

예수님의 성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온 것이 법궤입니다. 영어로 보통 the Ark of Covenant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로는 ‘법궤’라고도 하고 ‘증거궤’, ‘언약궤’, 혹은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10절부터 22절에 모세가 언약궤에 대한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 37장 1절부터 9절에 법궤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각목으로 상자를 만들고 그 외면에 금을 입힌 다음, 그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두게 했습니다. 학자들이 재현해 낸 법궤의 모양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그 행군의 중심에는 언제나 법궤가 있었습니다. 이 법궤는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습니다. 법궤가 나아가면 백성도 나아갔고, 법궤가 멈추면 백성도 멈추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면 법궤를 메고 나갔습니다. 보통 때, 이 법궤는 성막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성전이 지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가 안치되었던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들어가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을 때 사라졌을 것으로 봅니다. 파괴되어 없어진 것인지, 어느 누가 감추었는지, 혹은 어딘가에 묻혀 버렸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행방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주제를 가지고 1981년에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한 편으로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의 일만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다니는 실제 인물들도 있습니다. 론 와잇(Ron Wyatt)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그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법궤가 감추어져 있는 곳을 발견했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피까지 찾아냈다고 주장합니다. 아직 다 공개하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정부의 방해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전문가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김성호라는 분이 여행기를 올려 놓았는데, 에티오피아에 있는 ‘시온의 성 매리 교회’(St. Mary of Zion Church)에 대한 방문기가 있습니다. 법궤가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 성당입니다. 김성호씨가 안내원에게 법궤를 꼭 보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안내원은 마지 못하는 몸짓을 짓다가, “보통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데, 정 그렇게 원하니 특별한 친절을 베풀겠다”면서 깊은 지하 보관소로 인도해 줍니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 어느 방문 앞에 당도하더니, 안내자는 그 방문 틈을 들여다 보라고 합니다. 방문자는 눈을 수 없이 껌뻑거리며 들여다 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안내원에게 말했더니, 그 안내원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 법궤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성직자들의 눈에만 보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에는 이 법궤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6장을 다 읽어야 하겠지만, 시간 제약으로 인해 두 부분만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위에 오르고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정권을 안정시켜 나갈 즈음의 일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울 임금의 추종자들 편에서 보면 구테타를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더 공고히 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을 찾던 중에 그에게 법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놓으면, 예루살렘은 수도로서의 위엄을 갖출 수 있고, 자신의 왕권은 신적인 아우라(aura)를 덧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기럇 여아림으로부터 법궤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새로 만든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예루살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다윗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합니다. 법궤를 끌고 가던 소들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법궤가 땅에 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레를 몰던 사람 중 하나가 황급히 손을 뻗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법궤에 손을 댄 웃사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다윗은 당황했고 또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9절) 다윗은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기를 포기하고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보관하게 했습니다.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거룩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웃사가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법궤를 자기 집에 보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인지, 오벳에돔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왕의 명령이니 억지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법궤를 집안에 모셔 들이면서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법궤는 그의 집에 3개월 동안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의 집안에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자, 여기서 잠깐 멈추어,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댐으로 인해 즉사한 사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참, 이해하기 힘 든 사건입니다. 하지만 웃사라는 사람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윗의 의도를 함께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권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목적으로 법궤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의 상징으로서 법궤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법궤를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그의 잘못된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법궤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정결례를 행한 후에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수레에 싣고 소가 끌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상징물로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웃사의 죽음은 자신의 승리와 권력에 기고 만장하여 하나님까지 우습게 생각하려는 찰나에 있었던 다윗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법궤를 오벳에돔의 집에 맡겨 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단순한 상징으로 알았던 법궤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소홀히 다루어 애꿎은 웃사를 희생시킨 잘못에 대해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법궤를 포기해야 하는가? 법궤는 과연 ‘화 덩어리’인가? 과거에 법궤를 통해 조상들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 조상들처럼 법궤를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볼 셈이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가 오벳에돔의 집에 일어난 변화를 다윗에게 전해 줍니다. 법궤를 그 집으로 옮긴 후에 그 집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과연, 법궤는 ‘화 덩어리’가 아니라 ‘복 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 이유는 하나님께 합당한 위엄으로써 그것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위엄으로써 그것을 대하면 법궤는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하나님께 합당한 모든 위엄과 정성과 예의를 갖추어 법궤를 옮겼습니다.
이 때, 다윗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는 ‘에봇’이라고 불렸던, 오늘로 하면 앞치마 같이 생긴 옷 하나만 걸치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에봇은 거룩한 의식을 위해 만든 예복입니다.


이 때, 다윗은 속에 아무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왕으로서는 체신이 떨어지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14절)고 합니다.

그렇게 법궤를 옮겨 예루살렘에 있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빵 한 덩어리와 고기 한 점과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윗과 예루살렘 주민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가족들에게도 똑 같이 주님의 축복을 빌어 주려고 궁궐로 뛰어 들어가는데, 첫째 임금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마중 나옵니다. 미갈은 냉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20절) 미갈은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 가운데 옮겨졌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것보다는 임금의 체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차갑게 응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21-22절) 절대 권력을 손에 쥔 다윗은 잠시 잠깐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착각했으나,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앞에서 제 정신을 찾았습니다.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은 한낱 천한 사람일 뿐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임금으로서의 체통을 괘념치 않고 춤을 추고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4.

오늘의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다윗이 법궤를 그의 제국의 중심에 옮긴 것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법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하시는 통로입니다. 법궤가 없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셨습니다만, 법궤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있어 법궤가 차지하는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의미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특별한 방법으로 만납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은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마 1:23).

어찌 보면, 법궤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신앙적인 열심으로 사라진 법궤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같은 노력과 헌신을 영적인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바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갈 길이 열린 마당에 법궤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지성소를 두르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 27:51)고 합니다. 지성소는 법궤를 두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강력하여 보통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말은 지성소 안에 특별히 임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특별하게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지성소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만일 예수님 당시까지 법궤가 지성소 안에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는 동시에 법궤가 산산조각 났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느 한 장소 혹은 어느 한 물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법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해도,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그 법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법궤는 더 이상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저 변방에 있는 산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그곳에 모셨습니다. 자신이 통치할 제국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우리의 존재의 중심에,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처음, 아미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기려 할 때 다윗이 범한 실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하나의 ‘상징’으로만 알았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옮기려 했지만,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왕권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려는 그의 의도는 일종의 ‘구색 갖추기’였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대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홀히 법궤를 취급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법궤가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살아있는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나의 ‘의식’으로, 하나의 ‘문화’로, 하나의 ‘형식’으로,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신앙 생활을 하는 태도에 정성이 없고 진실성이 부족합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리 아쉽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태도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이 아닙니다. 실체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형식이나 의식이 아닙니다. 문화 생활이나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요 과제입니다.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을 잘 못 대했다가는 큰 재앙을 만날 수 있지만, 제대로 섬기고 살 때는 오벳에돔의 집에 내렸던 것 같은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5.

예루살렘 안으로 법궤를 모셔 들이는 것이 다윗의 공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치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업적이라 할 수 없었지만, 법궤를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모셔 들임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그는 선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 가운데 모셔 들이는 일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나의 그 많은 업적들은 덤불로 지은 집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들에게 내세울 업적이 별로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든든한 토대 위에 세워진, 그 어떤 불로도 타지 않을 집을 마련한 셈입니다.

진실로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 속에는 마르지 않는 기쁨이 항상 넘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뚜렷한 차이를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모셔들일 때 그는 세상은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춤을 추웠습니다.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왕의 체면이나 체통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에봇 하나만을 걸치고 춤 추는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 모습은 그래도 볼만 했지만, 그 뒷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왜 그래도 다윗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토록 신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왕의 위신과 체통이 더 중요했습니다. 법궤가 무엇이며, 법궤가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갈은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가깝습니까? 혹시 미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춤 추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춤 추고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사는 세상과 그 사람의 삶은 따분함과 권태로움과 피곤함이 특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 안에서는 ‘예측 가능한 일들’과 ‘예측할 수 없는 사고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 높아지는 것과 더 부해지는 것과 더 유명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데서 오는 기쁨은 몇 일도 지속되지 못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미갈처럼 이같은 삶을 전부로 여기고 투정과 불평과 한숨으로 세월을 허비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윗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알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안에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신비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온 천하에 가득한 하나님의 율동을 보고 그분과 함께 춤 추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이같은 믿음, 이같은 눈, 이같은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저는 지금 영적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50년 동안 믿어온 사람으로서 현실이 어떤지 잘 압니다. 다윗처럼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해서, 손에 대는 일마다 잘 풀리고 무병장수하며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안에서 살아간다 해도,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갈되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흥분된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권고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이 어떻게 명령형이 될 수 있습니까? 기쁨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기뻐하려고 힘쓴다고 될 일입니까? 바울 사도가 이것을 모르고 말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라.”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춤 추시는 것을 알아 차리고 그분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그것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의 비밀입니다.

6.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시는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영적인 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내가 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아 차리고 사십니까?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 일을 시작하십니까? 오늘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또 어떤 ‘사고’를 치실지, 가슴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십니까? 직장을 향해 갈 때,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설레임으로 출렁입니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디를 가나, 언제든지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보고 사십니까? 경험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다윗처럼, 때로 체통과 체면을 잊고 기뻐 뒤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저는 예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마음이 설레입니다. 제가 잘 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예배를 통해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세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배자들이 모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 때,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역사하시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는 이같은 영적 기대감이 항상 제 마음에 출렁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무덤덤하게,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냥 하는 것이니 하는 마음으로, 혹은 축 쳐진 모습으로 예배에 임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루에 네 번 설교를 하지만, 매 번 처음 설교하는 것처럼 깨어 있으려 힘씁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에 임하는 저의 마음은 언제나 설레고 제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이와 동일한 마음 자세로 다른 일에도 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 많은 경우에 저는 마음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옵니다. 비록 피곤에 짓눌려 있을 때도 있지만, 목사님들의 말씀 묵상을 통해 혹은 기도를 통해 받을 은혜를 생각하면,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저의 마음은 잔잔한 기쁨에 설레입니다. 심방이나 상담을 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수술을 앞에 둔 교우를 향해 갈 때에도, 산책할 때에도,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을 때에도, 가족들과 함께 식탁을 대했을 때도, 언제나 제 마음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설레이기를 소원합니다. 밝고 희망찬 때만이 아니라, 어둡고 희망 없어 보이는 시기에도 이 믿음으로 찬양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저 자신도 언제나 다윗처럼 춤추듯 살고, 저의 기쁨이 저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염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의 특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 법학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 중 하나가 올리버 웬델 홈즈(Olive Wendell Holms, Jr.)라고 합니다. 그는 1902년부터 32년까지 미국 대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의 직업 선택에 대해 말하면서, 판사가 되기보다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목사가 되기를 포기했느냐?”고 물었을 때, 홈즈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알았던 몇몇 목사님들이 장의업자들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목회를 했을지 모릅니다.”(I might have entered the ministry if certain clergymen I knew had not looked and acted so much like undertakers.) 목사로서 저에게는 홈즈의 이 말이 커다란 경고가 됩니다. 영적 법궤를 마음의 중심에 모신 사람다운 기쁨이 제게 늘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홈즈 판사가 한 말 중에 “장의업자들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대목을 더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장의업자들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셔 들인 사람이라면 장의업자라 해도 이 기쁨의 비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 일로 ‘밥 벌어 먹고 산다’면 삶이 비참해질 수 있겠지만, 시신을 다루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며,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놀래키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믿는다면, 그 장의업자는 예배실로 들어가는 저의 마음처럼 기쁨으로 설레일 것입니다. 장의업자도 이럴 수 있다면, 이 세상 직업 중에 이럴 수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미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이토록 철저히 변화시키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정진하십시다. 미갈처럼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늘 예배에 전심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자주 머물러 기도하고 말씀에 귀 기우립시다. 이같은 믿음과 눈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눈 뜨면 방치해 두어도 그 시력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매일 닦아야 합니다. 매일 무릎 꿇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기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기에 민첩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헌신과 희생에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신비로써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하여,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이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다윗이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다른 것이 아니라 법궤를 모셔 들였던 것처럼, 여러분의 제국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영접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마음의 가장자리에 모셔 두고 계시는 분들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영토 가운데, 그 제국의 중심에 그분이 오실 수 있도록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미갈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후의 지위에 올랐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그의 삶은 초라하고 불행했습니다.

더 미루지 마시고, 마음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중심에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의 제국의 수도에 임하셔서 저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저를 다스려 주옵소서. 제가 사는 곳 어디서나, 언제나, 주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함께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진실하게 기도하시고 진실하게 여러분의 삶의 통치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드린다면, 마치 상징처럼 보였던 그분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 여러분의 삶을 속에서부터 철저하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그룹 U2의 가수 보노(Bono)가 말했듯, “내가 한 일 중 가장 급진적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었다”(The most redical thing I have done was to accept Jesus Christ as my Lord)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오, 주님 예수시여,
제 마음의 중심에 임하소서.
제 나라의 수도에 임하소서.
주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주인이 되소서.
제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의 율동을 보게 하시고
저도 주님과 함께
춤추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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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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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5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 “엄마를 부탁해”
에베소서 5:21-33

1.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신문 기사에서 처음 보았을 때, 왠지 약간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자가 그것을 의도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제목은 우리의 ‘엄마 이미지’와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우리의 ‘엄마 이미지’에 어울리는 말은 ‘엄마에게 부탁해’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족들이 내미는 온갖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도 그렇습니다만,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살을 베어서라도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문제도 엄마에게는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엄마에게 부탁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자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이 제목으로써 그리고 소설의 이야기로써 독자에게 아주 은밀한 그러나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일평생 엄마에게 부탁만 하고 산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엄마를 돌볼 차례입니다. 이미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다면, 그분을 잊지 마십시오.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그분을 찾으시고 돌보시고 감사하십시오. 일평생 그분의 어깨에 지웠던 짐들을 벗겨 주시고, 그 짐을 나누어 지십시오. 그분이 이제는 한 여자로, 한 사람으로 돌아가 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의 엄마를, 당신께 부탁합니다.”

우리말의 ‘부탁하다’라는 말은 특별한 말입니다. 시집가는 딸을 사위에게 넘겨 주며 아버지가 “내 딸, 잘 부탁하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이 느껴지고, 장인이 사위에 대해 거는 기대와 신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한, ‘부탁하다’라는 말에는 부탁하는 사람이 느끼는 한계성이 담고 있고, 그 한계성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허한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시집가는 딸을 사위에게 맡기며 “잘 부탁하네!”라고 말할 때, 그 딸의 아비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딸을 언제까지고 데리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한계,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프지만 떼어 보내야 된다는 한계, 그리고 결혼한 딸의 삶을 아비인 자신이 간섭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그러나 그 모든 한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때에만, “내 딸을 부탁하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부탁’이라는 말은 참 정겨운 말입니다. 누군가를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로부터 부탁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람 다움’이 있는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무엇을 혹은 누구를 믿고 맡기고 부탁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을 혹은 누구를 부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인간미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고,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세도 지지 않겠고 다른 사람 일에 관여하지도 않겠다’는 태도가 깔끔해 보이고 능력 있게 들리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불행한 선택일 가능성이 큽니다.

2.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골 집으로 내려온 박소녀씨의 남편이 서울에 있는 큰 딸과의 통화를 하면서 그 동안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 줍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작가로 출세한 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그리고 문맹인 엄마가 딸이 쓴 글을 읽고 싶어 소망원 여직원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헌아, 부탁헌다……니 엄마……엄마를 말이다.”(198쪽) 이 한 마디 말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남편의 숨겨진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남편의 한계를 느낍니다. 잃어버린 아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음직한 큰 딸에게 아내를 부탁합니다.

큰 딸이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과 마주쳤을 때,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도 낳으신 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흡수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은 십자가의 기적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의 원형(archetype)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피에타 상에 사로잡혀 있던 큰딸은 성당 밖으로 나오면서, 피에타 상 앞에서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 한 마디를 독백처럼 내뱉습니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이 마지막 말은, 우리 신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상, 작가는 큰 딸이 피에타 상 앞에서 무릎꿇고 “신이시여, 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합니다! 제 엄마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특정 종교의 색체를 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큰 딸이 신의 현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엄마의 사랑이 신의 사랑에 뿌리를 둔 것임을 깨닫고 그 신에게 독백처럼 기도하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그립니다.

한 없이 약해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탁한 엄마, 그러나 자신도 그 엄마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큰 딸은 괴로왔을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 자신보다 더 큰 분에게 자신의 마음의 짐을 맡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큰 딸은 알지 못했습니다. 피에타 상 앞에 섰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의지하고 의뢰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큰 딸은 그 낯선 초월자에게 어색하지만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우리 엄마를 돌보아 달라고……

3.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맡기고 돌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부탁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두 다 자기 앞을 챙기는 데에만 몰두하면 가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정 붕괴의 원인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가정에 모성이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과거처럼 한 여성이 모든 희생을 감당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성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알고 보면, 성경은 가정의 모성적 차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위해 돌보고 섬기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가정 지침은 오늘 읽은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이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순종하듯 하십시오”(5:22)라는 것이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25절)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주어진 요청과 남편에게 주어진 요청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쪽의 무게가 더 큽니까? 남편에 대한 요청이 훨씬 더 무겁습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요청,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마치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아내를 보살피십시오”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가정 지침의 대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21절에 그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타쏘’는 원래 군대 용어인데, 부하가 자신을 상관에게 내어 맡겨 필요에 따라 자신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21절의 말씀은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줄 마음 자세를 하고 살아가는 뜻입니다. 그런 태도가 가정의 기초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식과 부모가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고, 무슨 부탁이고 기꺼이 받아서 해결해 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모든 가족이 떠맡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인에게서 나오는 ‘생물학적 모성’(biological motherhood)에 만족하지 말고, 혹은 그것을 당연시하지 말고,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 모성’(spiritual motherhood)을 계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는 물론 부성적인 면도 있어야 하지만, 가정의 기초는 모성적인 사랑과 돌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경험하면, 이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비로소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살피고, 그 사람의 필요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같은 변화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4.

가족들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은 가족 아닌 사람에게까지 넘어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랑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면 그 사랑은 병이 들었거나 불완전한 것입니다. ‘가족 이기주의’로 귀착되는 가족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모성적 사랑은 가정 바깥으로 흘러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박소녀씨, 그는 모든 가족을 끝없이 사랑했고, 끝없이 용서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퍼 주며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먼저 가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자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갔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소망원 이야기입니다. 장성한 자식들이 돈을 추렴하여 매 달 60만원의 용돈을 보내 오는데, 박소녀씨는 남편에게 그 돈을 자기 몫으로 달라고 청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 중에서 45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십 년 동안, 한 번도 빠짐 없이, 매달 고아들을 돌보는 소망원에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씻겨주고 청소를 해 주었습니다. 박소녀씨는 그 아이들을 친손주들처럼 돌보았고, 그 아이들은 그를 친할머니처럼 따랐습니다.

서울에서 중국집을 하는 태섭이라는 사람의 아이들 이야기도 박소녀씨의 사랑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태섭은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노모에게 아이 둘을 맡겨 놓고 서울로 가 버립니다. 아마도 가정이 파탄 난 것 같습니다. 박소녀씨는 그 아이들이 할머니로부터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데려다가 밥을 해 먹입니다. 처음에는 몇 끼니를 도와 준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끼니마다 식탁을 같이하는 식구가 되었습니다.

박소녀씨의 사랑의 폭은 이은규라는 ‘숨겨진 남자’ 이야기에서 더욱 감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식들을 먹이려고 방아간에서 밀가루를 빻아가지고 오는데, 그 남자가 자전거로 실어다 준다며 접근합니다. 이은규라는 그 남자는 해산을 앞둔 아내와 노모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박소녀씨를 속여 밀가루가 담긴 함지를 자전거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박소녀씨는 수소문을 하여 그 집을 찾아냅니다.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그 집에 도착한 박소녀씨는 해산통을 겪는 이은규의 아내와 노모를 발견합니다.

그는 얼떨결에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아냈고, 도둑 맞았던 밀가루로 급히 수제비를 만들어 온 가족을 먹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먹이려고 준비했던 밀가루였습니다. 박소녀씨는 모른체 하고 지내려 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삼칠일이 지나서 미역 몇 가닥을 마련해 그 집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 때 산모는 해산 후유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박소녀씨는 한 밤중이든 꼭두 새벽이든 틈 나는대로 그 집에 찾아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곤 했습니다. 자기 딸이 배불리 먹기에도 부족한 젖이었지만, 내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알게된 이은규씨. 박소녀씨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의 빚을 진 그는 박소녀씨가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의지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박소녀씨의 모성적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식을 먼저 챙기고 싶은 본능이야 그에게도 있었겠지만, 그의 사랑은 가족들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 즉시 그 사람이 그의 손자손녀가 되고, 아들 딸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이제 멸종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5.

만일 박소녀씨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서울이었다면, 그는 실종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서울은 모성이 완전히 증발되어 버린 도시였습니다. 파란 슬리퍼 위에 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상처를 가지고 방황하는 노인에게 눈길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보았다는 사람들은 몇 있었으나,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자기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제 한 몸만을 생각하고 제 한 몸만을 위해 사는 사회 속에서 박소녀씨는 실종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모성의 증발’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비정한 사회에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 두 해 동안 연거퍼 아이들을 대학에 떠나 보냈습니다. 캠퍼스에 데려다 놓고 돌아오면서, 마치 넓고 황량한 광야에 아이를 혼자 덩그라니 떨어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즈음의 캠퍼스가 얼마나 위험 천만한 곳이 되었습니까? 총격 사건이나 성폭행 같은 물리적 위험도 많고, 정신적, 윤리적, 문화적, 영적 위험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누군가를 만나, “우리 아이를 좀 부탁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제 아들을, 제 딸을 부탁합니다.”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하고 중요한지요! 박소녀씨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회적 모성’(social motherhood)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고 섬기고 돌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19:19)고 말씀하신 것은 사회적 모성을 바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고 말씀하실 때, 우리 사회가 모성적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모성이 충만한 사회’를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시인 김사인씨는 ‘딸년을 안고’라는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성의 회복을 갈망하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을, 냈다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 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번만 들여다 보아라
부탁한다

굳이, 칼을 쥔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이 부탁에 한 번쯤 귀 기우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가족을 제대로 보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보는 길입니다. 내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는 ‘가족 사랑’은 사이비 사랑입니다. 내가 내 자식 귀한 줄 안다면 다른 자식도 귀한 줄 아는 것이 진품 사랑입니다. 이렇게 참된 사랑이 가정에서부터 사회로 흘러 넘칠 때, 사회적 모성은 서서히 회복될 것입니다.

6.

‘가정에서의 모성의 회복’ 그리고 ‘사회에서의 모성의 회복’을 생각하면서, 믿는 사람으로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알고 보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모성 공동체’입니다. 모성적 사랑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성경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께서 십자가 아래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신 장면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죽음의 언덕을 넘어가고 있던 예수님은 비통하게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또한 그 옆에 있던 제자 요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술을 뗍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 이어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말하자면, “요한, 내 어머니를 부탁하네”라고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라는 동생은 사도들과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활동했고,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있는 짧은 편지 ‘유다서’도 예수님의 동생이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도 어머니를 돌볼 동생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그 날로부터 제자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집에 모셨다고, 요한복음 19장 2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셨다 할 수 있습니다. 혈연을 뛰어 넘는 가족을 새로 구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교회의 존재 이유는 ‘돌봄’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여 서로를 돌보고 살피고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처음부터 모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대로부터 ‘영적 어머니’(spiritual mother)라고 불려졌습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훈으로 그 새 사람을 키워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한 교회의 교인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가정을 얻는 것입니다. 아니, 잃어버렸던 원래의 가정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한 분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영원한 가정에 ‘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이 제 육친의 아버지됨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원하듯,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보다 믿음으로 맺어진 가정이 더 근원적이고 영원합니다. 육신적인 가정은 기껏해야 80년 내외 우리를 붙들어 주지만, 교회를 통해 맺어진 영적 가정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 전까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교회로 모여 서로 돌보며 그 영원한 가족됨을 맛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이기에 성경에 보면 모성적 사랑을 요청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 사는 교인들에게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 4:19). 바울뿐 아니라 대부분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하여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부성적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해 교회의 모성이 억압되거나 상실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돌보는 영적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성적 사랑을 경험하고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또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6:2). 이런 말씀도 합니다.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6:10).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분의 사랑은 모성에 더 가깝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이 두드러집니다. 부성적인 경향이 강했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지나치게 모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병아리들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의 사랑(마 23:37)과 같고, 젖 뗀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시 131:2)과 같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생긴 교회이기에,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도록 세움을 받은 교회이기에, 교회는 근본적으로 모성적인 것입니다.

7.

지난 다섯 주일 동안 기도와 관심을 가지고 <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를 경청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소설을 써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해 주신 신경숙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작품들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우리에게 근원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연속 설교를 마치며, 우리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안겨준 그리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커다란 과제 하나를 품어 안아야 하겠습니다. ‘모성의 회복’이 그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모성이 회복되도록,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되도록, 그리고 우리 교회가 모성 공동체로서 든든히 서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마다에서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품과 온화한 미소 그리고 조용한 희생이 느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할 일을 찾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성적인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아니던가요? 이것이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보고 싶어하는 현실이 아니던가요?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개인 홈 페이지에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는데, 진실로 ‘사람 사는 세상’이란 이렇게 ‘모성이 충만한 세상’이 아닐까요? 이생을 다하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본받아 이같은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이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조국에 그리고 우리가 몸 붙여 사는 이 나라에 모성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모성적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한 공동체마다에 모성이 회복되고 ‘사람 사는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믿고 의지하고 서로 부탁하며 서로 섬기고 돌보는 세상이 이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누리는 행복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주님,
그 때가 오기 전,
먼저 제 마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소서.
제가 속한 가정에,
제가 속한 사회에,
그리고 저를 낳고 길러준 교회에
진정한 모성이 회복되도록,
저로 하여금 썩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밀알로 썩는 삶을 통해
더 행복하게 하소서.
더 많은 이들을 행복해지게 하소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실로 사람 사는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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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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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24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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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4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나 이제 갈라요”
마태복음 18:21-35

1.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등장 인물 중 미운 사람이 둘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박소녀씨에 대해 동정을 하면 할수록 이 두 사람이 더 미워집니다. 아마도 대개는 저와 같은 느낌일 줄 압니다. 그 한 사람은 박소녀씨의 남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박소녀씨의 시누이입니다.

박소녀씨의 남편은 결혼하여 50년을 넘게 사는 동안, 집안 일을 모두 아내에게 맡겨놓고 밖으로 떠돌다가, 제사 때가 되면 잠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자식 넷을 낳는 동안 남편은 늘 밖에 있었고, 넷째가 죽어서 태어났을 때도 그는 집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오랜 가출 끝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분 냄새가 진한 여자’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깥으로만 떠돌던 그는 늙고 힘 없어 지자 집으로 찾아듭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계속 무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아내가 장탈이 나서 며칠 씩이나 곡기를 끊고 누워 있어도 물 한 컵 가져다 준 일이 없습니다. 시시 때때로 두통으로 인해 몸져 누워 있어도 깊이 살펴 준 일이 없습니다. 어딜 함께 갈 때면, 남편은 늘 몇 걸음 앞 서 갔습니다. 뒤따라 오는 아내가 힘들어 “좀 천천히 가먼 좋겄네, 함께 가먼 좋겄네……무슨 급한 일 있소?”라고 말해도, 그는 늘 그렇게 앞 서서 걸었습니다. 그 습관이 결국 아내를 실종시키는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서 동생의 집 근처에 살아갑니다. 출가했으나 여전히 친정의 한 식구처럼 살아갑니다. 매일같이, 아침 나절이면 친정집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박소녀씨에게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해 수행합니다. 칭찬은 없고 핀잔과 박대로 일관합니다.

박소녀씨가 시집을 와서 이태 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시누이의 타박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첫 아이를 낳고 온 가족이 좋아하자 그는 “어디, 남들이 안하는 일이라도 했다냐?”라면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박소녀씨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땔감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형수를 끔찍하게 여기던 시동생이 집 마당에 있던 살구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불을 지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누이는 박소녀씨가 누워있는 방문을 열어제치며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나무를 함부로 베었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어느 핸가, 박소녀씨가 해산을 하고 나서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설사를 계속하여 심하게 탈진되었습니다. 그 때도 남편은 밖에 있다가 해산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그는 누나에게 돈을 내어 주면서 약을 좀 지어다 먹이라고 부탁했습니다. 시누이는 그 돈으로 약 세 첩을 지어다 먹였습니다. 어느 정도 차도가 있자 조금 더 달여 먹이자고 했지만, 시누이가 반대했습니다. 그로 인해 박소녀씨는 평생 간헐적인 장탈로 고생합니다. 박소녀씨가 한 번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 한약을 두첩만 더 먹었시믄 좋겠더만……무심헌 당신조차두 산모니께 깨끗이 나아야 쓴게 두어첩 더 지어다 먹이라고 했건만 애덜 고모가 그 쌩한 얼굴로 무신 약을 더 먹는다냐! 이만하먼 됐담서 안 지어주었소……그때 그거 두 첩만 더 먹었시믄 이런 고생은 안 할 것인디.”(173쪽)

2.

가정 안에서 어느 정도의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가정일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도 남을 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넉넉하고 진한 사랑 안에서 사소한 상처와 아픔들을 극복해 가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할 때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더 큰 상처와 아픔을 감수하면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약하고 얕은데 상처와 아픔은 강하고 깊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가족이 때로는 서로에게 야속할 정도로 무심할 수도 있고, 철두철미 이기적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서로에게 잔인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가 받은 상처 중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가족에게서 받습니다. 우리 마음에 담겨 있는 분노 중에서 가장 강하고 뿌리 깊은 분노가 가족에 대한 분노인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원수가 다름 아닌 가족 안에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박소녀씨가 살던 시기는 모든 것이 열악했기 때문에 이같이 가족들끼리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다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살아야 했고, 어느 정도는 좌절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모두 다 어느 정도는 희생해야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기꺼이 그것을 감당할 경우에는 가난 속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지만, 누구 하나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외치는 순간 가정은 불화에 휩싸이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박소녀씨의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졌고,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희생의 필요성도 적어졌고, 좌절의 기회도 적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불화가 훨씬 더 적어져야 마땅하고, 가정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훨씬 줄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박소녀씨가 살던 시대보다 가정 안에서 주고 받는 상처는 더 깊어졌고 분노는 더 강해졌습니다. 반면, 가정 안에서 나누는 사랑은 과거에 비해 훨씬 얕고 얇고 약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의 삶이 너무 바빠졌다는 데 문제가 있기도 하고, 우리의 욕심이 너무 커졌다는 데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전 세대 사람들보다 내면적으로 훨씬 약하다는 데도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그 원인이 어떻든, 우리 시대에 가정의 문제는 더 심해졌습니다. 각자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축적된 분노를 품고 살아갑니다. 모두들 자신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합니다. 그 분노는 언제 누구에게 터질지 모릅니다. 미국의 경우, 슬럼가에서만 일어나던 총격 사건이 이제는 학교와 교회에서까지 빈번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노가 이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의 경우를 보면서 옛날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그 시누이처럼 가까운 가족에게 악의적으로 상처를 주는 가족들은 오늘날에 더 많아졌습니다. 박소녀씨의 남편 이야기를 읽으며 옛날 이야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남편처럼 자기만 알고 무심하게 행동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3.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약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지고 이기고’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사랑을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그 마음에 쌓인 분노를 푸는 길은 그에게 진실하게 용서를 비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행동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을 안겨 줍니다.

내 용서를 받아줄 사람이 언제고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내를 잃어버리고 아들 집에 머물러 있던 박소녀씨의 남편과 시누이가 나누는 대화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시누이가 말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한번은 말을 하고자 했었는디……사람이 없으니 얻다 대고 말을 하누.”(178쪽)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살먼 인자 얼마나 더 살겄능가. ……내가 죽기 전에 형철 에미한티 세 가지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가렸는디……균이 일이랑……살구나무 베었다고 지랄떤 일이랑……장탈 났을 때 그때그때 약 더 못 지어준 거랑……”(181쪽)

박소녀씨의 남편도 그렇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아내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절감합니다. 텅 빈 집에 홀로 누워 있으려니 무심하고 야속하게 행동했던 일들이 하나 하나 떠오릅니다. 진작에 사과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일들입니다. 그는 서울에 사는 큰 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198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살지 마십시다. 자신의 잘못에 눈 먼 사람이 되지 마십시다. 용서받지 못한 심령으로 살아가지 마십시다. 혹,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는지, 늘 반성하며 사십시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혹시나 부지 중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때가 너무 늦기 전에,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떠나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으십시다. 박소녀씨의 남편처럼,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언제고 있어줄 거라고, 알아 주겠거니, 괜찮겠거니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직 기회 있을 때, 아직 그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아직 그 사람의 마음이 굳게 잠겨지기 전에 <미/고/사> 즉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십시다. 잘못 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보험 드는 셈치고 “여보, 미안해!”라고, “얘들아, 미안하다!”라고 말하며 사십시다. 미국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는 “I am sorry!”라고 아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냉정하게 입을 굳게 다뭅니다. 가정에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 일에 대한 나의 책임이 커 보이든 작아 보이든, “여보, 내가 미안해!”라고, “얘들아, 내가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이번에는 용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상처를 입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아픈 법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하는 것은 상처를 견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앙심도 생깁니다. 때로는 원한이 맺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는 미움과 앙심과 원한을 즐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기’란 ‘용서를 구하기’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용서할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마음을 휘젖습니다. “저 사람은 뭔가 배워야 해. 무책임한 행동을 조장하고 싶진 않아. 한동안 속 좀 끓이게 내버려둬. 본인한테도 이로울 거야. 행동엔 결과가 따른다는 걸 배워야 해. 잘못한 건 저쪽이야. 내가 먼저 나설 일은 아니지, 잘못한 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필립 얀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놀라운 은혜>, 110쪽).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차갑게 식히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응분의 벌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미움과 앙심과 원한을 품음으로써 우리가 징벌하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를 할 때 가장 큰 덕을 입는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때로, 나는 용서하려는데 용서 받을 사람이 냉담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우선적으로 나 자신을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필립 얀시는,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용서하지 않는 것”(115쪽)이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용서하는 순간은 어렵지만, 용서하고 난 다음에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쉽지만, 용서하지 않은 채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살아가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두 가지의 용서의 비결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유명한 <인생수업>(Life Lessons)의 저자요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는 “용서의 첫 단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232쪽).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실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숨겨진 깊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필경, 이상 행동은 이상 심리에서 나오고, 이상 심리는 그 사람이 과거에 받은 심한 상처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참 못된 사람입니다. 특별히 올케인 박소녀씨에게는 평생 못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누이의 삶의 이력을 살펴 보면, 그의 이상 심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는 어릴 적에 전쟁 통에 오빠 둘을 한꺼번에 잃고, 부모마저 이틀 간격으로 잃었습니다. 그는 전쟁 후에 결혼을 하여 남동생 집 근처에서 살림을 차렸으나, 집에 불이 나서 전 재산을 잃고, 남편이 타 죽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박소녀씨의 남편은 말합니다. “그 상처가 누님에겐 뿌리깊이 박혀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베어낼 수 없는 고목이었다”(177쪽). 그 시누이는 어떤 점에서 보면 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서야 어찌 그 시누이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고인이 된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의 글에 보니 재미있는 수식을 소개했습니다. (5 ? 3 = 2)라는 수식입니다. 오해(5)에서 세 발자국(3)만 떨어지면 이해(2)가 된다는 뜻이랍니다. 또 다른 수식도 있습니다. (2 + 2 = 4)라는 수식입니다. 이해(2)에 이해(2)를 더하면 사랑(4)이 된다는 뜻이랍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을 때, 세 발자국만 물러나 보면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이해에 이해를 거듭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5.

둘째,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는 것이 또 하나의 용서의 비결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인 비결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은 바로 이 비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21절) 예수님 당시 경건하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이 제시한 기준 3을 곱하고 거기에 하나를 더하여 완전수 일곱을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일곱 번 용서해 준다면 예수님이 칭찬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22절). 한 사람이 나에게 동일한 잘못을 490번 저지르더라도 490번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490번 정도 지속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군가 나와 함께 오래도록 사는 사람, 즉 거듭 거듭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자녀들 혹은 배우자 외에는 이렇게 많은 잘못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가장 먼저 가족 관계 안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가족을 용서할 수 있으면, 가끔 상처를 주는 다른 사람들 용서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끝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사용하여 답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당시 로마 화폐로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한 성인 노동자의 15년 품삯입니다. 2008년 한국의 통계에 의하면, 대기업 남자 사원의 평균 연봉이 5천 6백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5천만원만 잡아도, 한 달란트는 7억 5천만원입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는7조 5천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입니다.

왕은 그 종에게, 모든 식구를 노예로 팔고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것을 다 팔아 보아야 한 달란트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자기의 돈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그 종의 인생을 망가뜨려서라도 응분의 벌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합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모습을 본 왕에게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고, 그 사람을 자유케 해 주었습니다. 이 종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수 없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왕의 눈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좋아라 하면서 가고 있는데, 얼마 전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한 데나리온은 성인 남성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하루 백 달러만 잡아도 일백 데나리온은 만 달러 정도, 즉 한국 돈으로 천만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아내라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사정을 합니다. 조금만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말입니다. 그 정도의 돈은 얼마의 시간만 주면 능히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작은 빚을 이유로 하여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고소하여 감옥에 쳐넣습니다.

이 소식을 나중에 왕이 듣습니다. 왕은 그 종의 처사를 듣고 분노했고, 그 종을 다시 불러 들입니다. 그 종에게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32-33절). 그리고는 그 종을 하옥시켰습니다.

6.

여러분은 이 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호의를 악의로 갚는 사람’으로, ‘아무런 동정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당신이 바로 그 배은망덕하고 호의를 악의로 갚는, 아무런 동정의 여지가 없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오!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시오! 그 용서를 기억한다면, 당신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 그토록 완악하게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용서를 철회하실지도 모르오!”

나의 가족이 혹은 나의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란 기껏해야 천만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는 7조 5천억원이나 됩니다. 나에게 490번이나 끊임없이 상처를 줄 사람은 가족 중에도 별로 없지만, 나는 하나님께 사만구천번도 넘게 상처를 드렸습니다. 그 많고 큰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내가 받을 벌을 당신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지셨고, 나의 죄책을 벗겨 주셨습니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은 엄청난 손해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혹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진 빚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진실하시며 순결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온전히 자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다 보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에 눈을 뜹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이 첫 대면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늘 동일합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죽을 수밖에 없구나!” 그런 다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도 혹시 살 길은 없을까?”

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철두철미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가 좋아 죄를 탐하며 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나서 그 죄로 인해 죽을 것 같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뻔뻔한 일같지만, 사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자존심 내려 놓고 낮아지고 약해져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느니 차라리 죄 속에서 죽는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기도 아니고, 만용도 아닙니다. 어리석음 중에도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7.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십시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아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픔을 드렸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십시다. 그 용서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손해를 보셨는지를 묵상해 보십시다. 그렇게, 그분의 용서와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손해와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같은 능력에 힘입어 용서를 구하는 일에 민첩해 지십시다. 조금이라도 잘못한 일이 생각나거든 용서를 구하기에 지체하지 마십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기회가 있는 동안, 내가 아는 잘못에 대해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준 상처에 대해 용서를 구하십시다. <미/고/사>를 노래하며 삽시다.

용서하는 일에도 용기를 내십시다. 죽기보다 어려운 용서를 가능하게 해 주는 두 가지의 비결을 기억하십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서너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면, 죽기보다 어려운 용서가 가능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가지고는 490번은 고사하고 일곱 번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의 첫 번째 비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두 번째 비결, 즉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진실로 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용서할 힘을 구하십시다. 진실로 용서할 날이 이를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나를 용서해 줄 사람 혹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낙심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늦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야 하지만, 혹시 그 기회를 놓쳤다 해도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상처는 가장 먼저 하나님에게 아픔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진실하게 반복하면, 언젠가 우리는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받은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에게 심한 상처를 받은 분들 가운데는 부모님들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하나님께 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쓰는 이런 경우 죽은 사람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합니다. 편지를 써서 태우거나 혹은 무덤가에 뭍으면 됩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우리는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 받고 용서하며 사십시다. 나의 마음에 아무 것도 맺힌 것 없도록, 아무 것도 묶인 것 없도록, 아무 것도 비틀린 것 없도록 용서하며 사십시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눈물짓지 않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억울해 하지 않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밤 잠 자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눌리지 않도록, 용서를 구하며 사십시다. 이 연습을 가정에서부터 행하십시다.

상처와 아픔과 미움과 원한으로 말하자면 박소녀씨보다 더 많을 인생도 드물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떠날 때 그는 아무 것에도 붙들리지 않고 “나, 갈라요!”라고 말하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그의 남편과 시누이는 용서할 것을 용서하지 못하여, 그리고 용서 받을 것을 용서받지 못하여, 떠날 때가 되어도 떠나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 되어 버렸습니다. 떠날 때가 되어 아무 것에도 묶이지 않고 떠나려면 지금 시간 있을 때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임종의 시간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은 오직 하나, 용서하지 못한 일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임하셔서 회개와 용서의 일에 능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며, 용서를 구하는 일에 민첩하고 용서하는 일에 재빠른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주님께서는 저희를 아십니다.
용서를 구하기에 너무 뻣뻣하고
용서를 하기에 너무 게으른
저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저희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치루신 비용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하시고
그 은혜에 젖어 살게 하소서.
그 용서의 은혜로써
저희도 용서하며
또한 용서를 구하게 하소서.
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요 노래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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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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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7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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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3
마음은 누구나 같다
--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
누가복음 2:41-50

1.

얼마 전, <엄마를 부탁해>의 작가 신경숙씨가 어느 일간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내 소설을 읽고 자신을 한번 거울 보듯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어요. 그래서 힘들어도 계속 글을 쓰게 되나 봐요." 이번 연속 설교를 통해서 일어나기를 바라는 일도 바로 이것입니다. 이 소설이 던져 준 문제의식을 붙들고 성서의 말씀을 비추어 보면서 나 자신을 보자는 겁니다. 만일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혹은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아니라 다른 누구를 생각한다면, 그래서 자신이 변화될 부분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변화되어주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소설을 오독하는 것이며, 설교를 잘 못 듣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저 자신도 자기 성찰의 과정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다"는 문장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는 서울역에서 실종되기 전에 이미 가족들에게서 잊혀졌을 뿐 아니라, 가족들로부터 일평생 하나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하고 살았습니다. 남편에게 박소녀씨는 ‘형철 엄마’일 뿐이었습니다. 자식들에게 그는 언제나 ‘엄마’였습니다. 자식들은 박소녀씨가 늘 엄마로만 자신들 곁에 있어 주기를 기대했고, 남편은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역할을 감당해 주기만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박소녀씨는 엄마, 그 이상이었습니다. 엄마이기 이전, 아내이기 이전, 그는 하나의 인간이었습니다.

둘째 딸이 로마로 여행을 떠나는 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엄마를 처음부터 엄마인 사람으로 여기며 지냈을까. 내가 엄마로 살면서도 이렇게 꿈이 많은데, 내가 이렇게 나의 어린 시절을, 나의 소녀시절을, 나의 처녀시절을 하나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데, 왜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인 것으로만 알고 있었을까. 엄마는 꿈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시대가 엄마 손에 쥐어 준 가난하고 슬프고 혼자서 모든 것과 맞서고, 그리고 꼭 이겨나갈 밖에 다른 길이 없는 아주 나쁜 패를 들고서도 어떻게든 최선을 다해서 몸과 마음을 바친 일생이었는데, 난 어떻게 엄마의 꿈에 대해서는 아무런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을까?

언니, 감나무를 옮겨 심느라 파놓은 구덩이 속에 그만 얼굴을 처박고 싶었어. 나는 엄마처럼 못 사는데 엄마라고 그렇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가 옆에 있을 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딸인 내가 이 지경이었는데 엄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얼마나 고독했을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채로 오로지 희생만 해야 했다니 그런 부당한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어."(261-62쪽)

2.

큰 딸에 관한 첫 번째 장에 보면, 외삼촌 즉 박소녀씨의 오빠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박소녀씨의 오빠는 매형에게 적지 않은 돈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그 돈을 갚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엄마는 아버지와 고모에게 죄인이 되었고, 외삼촌은 동생 박소녀씨에게 죄인이 되었습니다. 외삼촌은, 돈을 갚을 도리는 없고,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동생이 어려움을 당할 것 같은 걱정이 들어, 수요일마다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동생 집을 방문합니다. 별 일 없는지 휘 둘러보고는 "동생, 잘 있었는가? 나 가네"하고 사라집니다.

그러다가 언젠가, 외삼촌이 사오년간 소식도 없이 종적을 감춥니다. 어떻게든 돈을 벌어 매형에게 진 빚을 갚아서 동생을 편하게 해 주려고 먼 길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그 기간 동안 박소녀씨는 "니 외삼촌은 대체 어디서 뭘 한다니!"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가 걱정이 되었던 겁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큰 딸이 잠시 집에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간만에 만난 모녀가 방에서 귤을 까먹으며 정담을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인기척이 나면서 "동생, 있는가?"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 때 박소녀씨는 화다닥 일어나 쏜 살같이 밖으로 나갑니다. 뒤따라 나간 큰 딸은, 외삼촌의 가슴팍에 안겨 그 가슴을 주먹으로 때리면서 "오빠! 오빠!"라고 울며 앙탈 아닌 앙탈을 부리는 엄마의 모습을 봅니다. 큰 딸은 이 때 엄마에게서 매우 낯선 느낌을 받습니다. 큰 딸은 이 때 처음으로 "아, 엄마에게도 오빠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 대목에서 소설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당연한 일을 왜 그제서야 깨달았는지. 너에게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였다. 너의 엄마에게도 첫걸음을 뗄 때가 있었다거나 세살 때가 있었다거나 열두 살 혹은 스무 살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너는 처음부터 엄마를 엄마로만 여겼다.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난 인간으로. 엄마가 너의 외삼촌을 두고 오빠! 부르며 달려가는 그 순간의 엄마를 보기 전까지는. 엄마도 네가 오빠들에게 갖는 감정을 마음속에 지니고 사는 인간이란 깨달음은 곧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었겠구나, 로 전환되었다."(36-37쪽)

박소녀씨는 마지막에 엄마의 집으로 돌아갑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죽어가는 중에 가물가물한 의식 속에서 일어난 일처럼 보입니다. 박소녀씨는 파란 슬리퍼를 끌고 넝마가 된 육신을 이끌고 자신이 태어난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루에 앉아 있던 박소녀씨의 어머니는 뼈가 드러나 보이는 딸의 발등의 상처를 보고는 팔을 벌려 오라 합니다. 박소녀씨는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기듯 그 품에 안깁니다. 그 때 박소녀씨는 생각합니다.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254쪽)

박소녀씨, 그는 아내이기 이전에, 엄마이기 이전에, 하나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의 사람으로서 그에게도 남편이 필요했고, 아버지도 필요했고, 엄마도 필요했습니다. 오빠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습니다. 박소녀씨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 아이도 있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눈물짓는 문학소녀도 있었으며,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처녀도 있었고, 멋지게 차려 입고 여행을 떠나보고 싶은 중년 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박소녀씨 자신도 그것이 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요!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나에게도 일평생 엄마가 필요했다는 것을"이라는 박소녀씨의 마지막 말이 마음을 아리게 합니다.

3.

이 소설을 읽으면서 저도 제 어머니를 늘 ‘엄마’로만 생각해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분 안에도 못 피운 꿈들이 많고, 아직도 마음으로는 그 꿈을 꾸고 계실 터인데, 저는 어머니를 오직 ‘엄마’로만 생각해 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 제 경험을 나눕니다.

제가 초등학교 즈음의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삼촌 중 한 분이 가끔 집을 나가서 한 참 동안 방랑을 하다가 돌아오곤 하셨습니다. 어떤 때는 외항선을 타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공사장을 떠돌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혹은 몇 년 동안 객지로 떠돌다가 선물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삼촌이 돌아올 때면 가족들은 그분이 가져 온 신기한 물건들을 구경하는 재미에 빠지곤 했습니다.

그러고 나면, 삼촌의 옷가방을 정리하는 것은 큰 며느리인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그 날도 저희 형제들은 대청마루에서 놀고 있었고, 어머니는 어느 새 친구들을 찾아 사라져 버린 삼촌의 옷가방을 열어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옷가지를 정리하던 어머니께서 "어머, 곱기도 해라!"라고 탄성을 지르십니다. 우리 형제는 일제히 고개를 돌려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시골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화사한 여성 옷가지가 있었습니다. 새 옷이 아니라, 누군가 입던 옷입니다. 그 옷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어머니는, "아이구, 네 삼촌이 또 사고를 쳤나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직 그런 것에 관심을 둘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저희 형제들은 다시 중단했던 놀이를 계속했습니다.

정리된 옷을 가지고 뒷방으로 가신 어머니께서 한 참 지난 후에 저희들을 부르십니다. "얘들아, 엄마, 어떠냐?" 우리 앞에 나타난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저희 형제는 그만 숨이 넘어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께서 삼촌 가방에 있던 그 화사한 (실은 매우 요사한) 옷을 입으시고는 마치 모델처럼 몸짓을 해 가며 저희들에게 보여 주시는 겁니다. 저의 머리에는 순간 동네 가까이에 있던 미군부대 앞에서 본 여자들이 생각났습니다. 저와 제 동생들은 일제히 소리쳤습니다. "엄마, 미쳤어? 왜 그래? 빨리 벗어!" 그랬더니 어머니께서는 "왜? 나는 이런 거 입으면 안 된다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도 어머니 나이 30대 초반 혹은 중반이었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잠시 후 그 옷을 벗어 장롱 깊숙이 숨겨 놓으셨고, 그 옷을 입은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했습니다.

불행히도, 그 모습을 보고 "아, 어머니에게도 멋지게 치장을 하고 거리를 활보하고 싶은 마음이 있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기에 제가 너무 어렸습니다. 이제 생각하니, 어머니께서 가끔 아무도 없을 때 그 옷을 입어보고 잠시 동안 춤을 추곤 했다면 참 좋았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저는 그 이후 지금까지 이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그런 모습이 어머니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엄마로만 있어 주기를 바랐던 이기적인 불효자가 바로 저입니다.

4.

그런데 알고 보면 그런 잘못을 어머니에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에게도 그렇게 합니다. 아버지 안에도 응석을 부리고 싶은 어린 아이가 있고, 장난기 심한 소년도 있으며, 꿈으로 가슴이 터질 듯 한 청소년도 있고, 백마를 탄 왕자가 되고 싶은 청년도 있음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늘 아버지의 모습으로, 그 역할에 충실한 분으로만 있어 주기를 기대합니다. 자식들이 모두 아버지를 그렇게만 여기고 대하는 동안, 아버지는 외로움에 시름이 깊어집니다. 아버지가 마시는 술잔에 눈물이 반이라는 사실을 알아주는 가족이 있어야 했습니다.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남편으로만 알고 남편으로만 있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남편을 무척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 안에 어리광쟁이 어린아이도 있고, 장난기 가득한 소년도 있으며,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청소년도 있고, 영화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청년도 있고, 세상을 호령하고픈 남성도 있음을 알아주어야 합니다. 가출하여 밤거리를 휘젓고 다니고 싶은 불량아도 그 안에 있고, 선교사가 되어 인생 전체를 묶어 바치고 싶어 하는 거룩한 사람도 그 안에 있습니다. 지금 아내의 눈에 남편이 아무리 초라하게 보여도, 그 마음 안에는 식지 않은 열정이 있고 포기할 수 없는 꿈이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아내들이여, 남편을 단순히 남편이 아니라 남자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남자 안에 담겨 있는 여러 종류의 꿈들을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남편을 대하되, 때로는 철없는 아이로, 때로는 꿈 많은 소년으로, 때로는 가출을 꿈꾸는 불량아로, 때로는 백마 탄 왕자로, 때로는 세상을 호령하는 대장부로 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휴, 목사님, 그렇게 하면 기고만장해서 무슨 사고를 칠지 몰라요!" 저도 사고뭉치 남편들을 많이 보아 왔습니다만, 아내의 인정과 존경을 받는 남편들 가운데는 그런 경우를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남편의 숨겨진 꿈들을 아내가 알아주고 다독여 주면 큰 사고는 치지 않습니다. 아내가 무시하고 억압하고 외면하니 대형 사고를 치는 겁니다.

남편들이여, 아내를 단순히 아내로 대하지 마십시다. 우리의 아내들은 아내, 그 이상입니다. 엄마, 그 이상입니다. 당신의 눈에는 혹시 모든 가능성이 다 사라져버린 하찮은 사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만, 그 사람 안에도 다 살아 있습니다. 시인이 되고 싶은 소녀도 살아 있습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싶은 숙녀도 살아 있습니다. 당신의 아내 안에는 마음껏 망가져 보고 싶어 하는 탕녀도 있고,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거룩하게 일생을 바치고 싶은 수녀도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 주셔야 합니다.

모처럼 나들이 나갈 때, 시뻘겋게 입술연지를 바르고 나와도 곱게 봐 주십시오. 어쩌다가 비싼 원피스를 사 가지고 들어오면 "잘 했어. 아주 잘 어울리는데."라고 칭찬해 주십시오. "아휴, 목사님. 그러다가 살림 거덜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 동안 낭비벽이 심한 여성들을 보아 왔지만, 남편의 사랑과 인정을 받는 여성들 중에는 그런 사람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치와 낭비의 습관은 모두 사랑 받지 못한 욕구 불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5.

자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을 늘 어린애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어리다 해도, 그 아이를 독립적인 한 인간으로 대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 아이의 마음 안에 다 있습니다. 어린아이도 있고, 소년도 있으며, 청년도 있고, 장년과 노년도 있습니다. 모범생도 있고, 부랑아도 있습니다. 악한도 있고, 성자도 있습니다. 부모의 꿈보다 더 대단하고 놀라운 꿈이 그들 안에 있습니다. 부모는 그것을 알아주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응석을 받아 주기도 해야 하지만, 또 때로는 어른처럼 거리를 두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에 나오는, 열두 살 때의 예수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늘 ‘예수 실종 사건’으로만 읽어 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의 가장 탁월한 영성신학자인 유진 피터슨(Eugene Peterson)은 이 이야기를 ‘예수 가출 사건’으로 읽습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예수님의 부모가 예수님을 잃어버린 데 있다기보다, 예수님이 부모님의 곁을 잠시 떠났다는 데 있다는 겁니다.

열 두 살짜리 아들을 잃어버리고 나서 사흘 동안 예루살렘 곳곳을 뒤지다가 성전에서 아들을 발견한 마리아와 요셉의 심정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 마리아가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2:48)고 말했을 때의 그 심정을 헤아려 보기 바랍니다. 소년 예수는 어쩌면 당돌하게 들릴만한 대답을 던집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을 들었을 때의 부모의 심정이 어땠을까요? 십대 자녀를 둔 분이라면 능히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소년 예수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었을까요?

유진 피터슨은 소년 예수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것 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주 설득력 있는 분석입니다.
"왜 저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통제하려고 하십니까? 제가 어렸을 때는 그렇게 해도 괜찮았지만, 저는 이제 더 이상 부모님이 항상 지켜보아야 하는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제게는 부모님과는 다른 저만의 삶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저의 관계는 부모님이 예상할 수 없는 길들로 저를 인도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부모님이 기대하는 영역을 넘어서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제 인생에는 부모님이 지우시지 않은 다른 요청들, 제가 순종해야만 하는 요청들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는 그저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제게 주어진 것보다 더 많은 의무들을 제가 담당해야 한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은 나사렛에 있는 집과 나사렛에서 드리는 예배가 전부가 아닙니다. 저는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더 넓은 세상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모님께 순종하여 성전으로 왔습니다. 부모님을 따르는 데서 시작된 순종이 이제는 부모님을 떠나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십니까?"(Like Dew Your Youth, <거북한 십대, 거룩한 십대>, 67-68쪽)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의 내면에 무엇이 들어 있으며 그 속에서 어떤 꿈들이 꿈틀대고 있는지를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당시에 예수님을 ‘열 두 살짜리 꼬마’로만 여기고, 그렇게 대했으며, ‘우리 자식’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소년 예수의 마음 안에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정체성과 소명의식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그 사실에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50절에 보면, "그러나 부모는 예수가 자기들에게 한 그 말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행히, 모든 일을 마음에 두고 그 뜻을 살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있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간직"(51절)했습니다. 아마도, 이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내면을 보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30세 즈음에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아들과 함께 살면서, 마리아는 예수님 안에 있는 많은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에 맞게 행동했을 것입니다. 때로는 아들처럼 대하고, 때로는 낯선 예언자처럼 대했을 것입니다. 그러한 훈련이 결국 마리아로 하여금 하나님의 일을 위해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 놓게 했고, 십자가에 이르는 그 험하고 고통스러운 길을 아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어머니를 대할 때, 때로는 많은 여인들 중 한 사람으로 대하기도 했고, 때로는 아들로서 그 어머니의 품에 기대어 쉬기도 했을 것입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이 그 모습을 처연하게 그려놓았습니다.

6.

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이런 것인지, 이제야 깨닫습니다. 내게 필요한 하나의 역할로 그 사람을 묶어 놓고, 그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박해요 착취요 억압임을, 이제 확실히 알겠습니다. 한 여자가 저에게 아내의 역할을 해 주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가능성을 알아보고 그 모든 것을 인정하고 살펴 주어야 합니다.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애인으로, 때로는 소녀로, 때로는 어린애로, 때로는 성녀로 그 사람을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한다 해도 아내로만 대한다면, 그 사람의 일부분만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일부분만을 사랑받고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남편도 마찬가지고, 부모도 마찬가지며,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우도 마찬가지고, 이웃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대하든,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의 역할로 그 사람을 제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 마음 안에 담긴 것들을 살펴야 합니다. 그렇게 살피고 그렇게 대할 때, 그 사람은 전체로 사랑받게 됩니다. 그렇게 전체로서 사랑받을 때에만 우리는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중심을 보고 그 사람을 전체로서 사랑하는 것이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특징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모두가 진실로 원하는 진정한 ‘사람대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람대접이 곧 사랑입니다.

오래 전, 영국의 던디(Dundee) 시 근처에 있는 애쉬루디 병원(Ashludie Hospital)의 노인 병동에서 어느 노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간호원들은 그 병약하고 가난했던 할머니의 소지품을 정리하다가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쪽지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그 쪽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간호원 아가씨들,
당신들 눈에는 누가 보이나요
제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를 묻고 있답니다.
당신들은 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나요.
그다지 현명하지도 않고, 성질 머리 까다로운
눈초리마저도 흐리멍덩한 할망구로 보일 테지요.
먹을 때 칠칠치 못하게 음식을 흘리고
당신들이 큰소리로 "한번 노력이라도 해봐욧!" 소리 질러도
아무런 대꾸도 못하는 노인네.
당신들의 보살핌에 감사 할 줄도 모르고
늘 양말 한 짝과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다니는 답답한 노인네.
아무런 저항 없이, 아무 생각 없이
씻기든 먹이든
당신들이 하는 대로 맡기고 사는 반송장.
그게 바로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 인가요.
그게 당신들 눈에 비쳐진 '나' 인가요.

그렇다면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제발 저를 한번만 제대로 바라봐주세요.
이렇게 여기 가만히 앉아서
당신의 분부대로 고분고분 음식을 씹어 넘기면서
제가 과연 누구인가를 말해줄게요.

저는 열 살짜리 어린 소녀랍니다.
사랑스런 엄마와 아빠, 그리고 오빠, 언니, 동생들도 있지요.
저는 발에 날개를 단 열여섯 처녀이기도 합니다.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꿈을 꾸고 있지요.
저는 또한 스무 살의 꽃다운 신부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면서 콩닥콩닥 가슴이 뛰는
아름다운 신부 말입니다.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스물다섯의 엄마도 제 안에 있습니다.
포근한 안식처가 되어 보살펴 주는 엄마.
마흔 살의 저도 있네요.
이젠 아이들이 다 자라 집을 떠났어요.
하지만 남편이 곁에 있으니 울지 않습니다.
제 안에는 다시금 무릎 위에 아가들을 안고 있는
쉰 살의 할머니도 있습니다.
사랑스런 손주들과 나, 행복한 할머니입니다.
제 안에는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나 우울해 하는 저도 있습니다.
저는 홀로 살아갈 미래를 생각하며 떨고 있어요.

제 아이들은 자신들의 아이들을 키우느라 정신들이 없답니다.
지나간 날들을 기억하고
그 때 나누었던 사랑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어느새 제가 노파가 되어버렸네요.
세월은 참으로 잔인하지요.
노인을 바보로 만드니까요.
몸은 쇠약해가고 우아했던 기품과 정열은 저를 떠나버렸어요.
한때 힘차게 박동하던 심장은 돌덩이가 되어 버렸네요.
하지만 아세요?
제 늙어버린 몸뚱이 안에 아직도 열여섯 처녀가 살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따금씩 쪼그라든 저의 심장이 다시 부풀어 오른다는 것을.
젊은 날들의 기쁨을 기억해요.
젊은 날들의 아픔도 기억해요.
저는 기억 속에서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지나간 삶을 다시 살고 있어요.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너무나도 짧았고
너무나도 빨리 가 버렸네요.
세상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엄연한 진리를
이제 받아들입니다.

그러니 간호원 아가씨들,
이제 눈을 떠보세요.
그리고 절 바라보세요.
겉으로 보이는 ‘괴팍한 할망구’ 말구요.
자세히 보세요.
이 속에 있는 ‘진짜 나’를
좀 보아 주세요.

7.

저는 지난 주간, 오늘의 설교를 준비하면서 회개의 기도를 특별히 많이 드렸습니다. 제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제가 누구도 ‘전체로서’ 대하고 사랑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교우에게도, 언제나 부분으로만 대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부분으로만 인정받고 사랑받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은 누구를 대하든지 그 사람의 내면을 보고 그 사람 전체를 사랑하라는 것임을, 이제야 분명히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잘못은 저만의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읽어 보거나, 앞에서 읽어드린 어느 노인의 글을 보거나, 이것은 우리 모두가 너무도 쉽게 저지르는 허물임을 알겠습니다. 서로를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부분으로만 대하고 사는 점에서 우리 모두는 별로 예외가 없는 듯합니다. 하여, 참된 사랑이신 하나님, 우리의 중심을 보시며, 우리를 부분으로가 아니라 전체로 대하시고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 주시는 하나님 앞에 머리 숙여 은혜를 구합니다.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가장 가까운 가족에서부터, 누구를 대하든 그 내면을 볼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그리하여 그 사람 전체를 보고 전체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하시기를! 그렇지 않고는 우리는 감히 사랑을 입에 담을 자격도 없음을 인정합니다. 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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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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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10 (김 영봉 목사)

 

<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2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 "형철아, 미안하다"
호세아 11:1-9


                                                                        
                                                                        (김 영봉 목사)      

1.

Happy Mother’s Day! 모든 어머니들에게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어머니’라는 말 하나만으로도 가슴이 찡해지는 분들이 많으십니다. 오늘 하루, 어머니 생각에 특별한 행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편찮은 분들도 계신 줄 압니다. 주님의 성령이 그분들의 마음에 임하여 용서와 화해의 은총을 허락하시기를 빕니다. 어머니를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하고, 불러 보아도 대답이 없는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위로부터 임하는 은총이 그 허전한 마음에 채워지기를 기도합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대개 무한에 가까운 사랑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던 것처럼 보입니다.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주인공 박소녀씨가 그렇습니다. 엄마로서의 그의 사랑과 희생은 한도 끝도 없어 보입니다. 그 사실은 박소녀씨의 둘째 딸의 말에서 잘 드러납니다. 둘째 딸은 약사인데, 세 아이를 데리고 얼마나 야무지게 사는지, 다들 요즘 엄마 같지 않다고 입을 모읍니다. 그 둘째 딸이 로마로 여행가는 언니에게 편지를 써 주는데, 이 편지에서 둘째 딸은 엄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해 이렇게 술회합니다.

"엄마의 힘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나는 그걸 모르겠어. 생각해봐. 엄마는 상식적으로 한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살아온 인생이 아니야. 엄마는 엄마가 할 수 없는 일까지도 다 해내며 살았던 것 같아. 그러느라 엄마는 텅텅 비어갔던 거야. 종래엔 자식들의 집 하나도 찾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된 거야. …… 언니는 나보고 요즘 젊은 엄마 같지 않게 특이하다고 했지만, 내게 조금은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언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엄마처럼 할 수 없어. 엄마를 잃어버리고 자주 생각했어. 나는 엄마에게 좋은 딸이었나? 나는 내 아이들에게 엄마가 내게 해 준 것처럼 할 수 있나. 한 가지는 알아. 나는 엄마같이 못해. 할 수도 없어. 나는 내 아이들 밥 먹이면서도 자주자주 귀찮아. 아이들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거같이 느껴져서 부담스러울 때도 있어. 내 아이들을 사랑하고 이 아이들을 진짜 내가 낳았나? 싶어 감격하지만 나는 엄마처럼 인생을 통째로 아이들에게 내맡길 순 없어. 나는 상황에 따라 내 눈이라도 빼줄 수 있을 것처럼 굴지만 그렇다고 엄마처럼은 아니야."(260-61쪽)

엄마의 사랑을 이같이 느낀 것은 둘째 딸만이 아닙니다. 네 자식 모두가 그렇게 느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연약한 여인에게서 그토록 진한 사랑이 마르지 않고 흘러나올 수 있을까? 그것이 엄마의 입장이 된 작은 딸의 질문이었고, 다른 자식들의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오늘 어머니를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많은 자녀들의 마음에 있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2.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한 없이 사랑을 쏟아 부으시면 서도 어머니들이 하는 말은 "이것밖에 못해 줘서 미안하다"는 것입니다. 큰 아들과의 일화에서 이 사실은 잘 드러납니다.

큰 아들 형철은 어릴 적에 아버지에게 외면당하고 사시는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기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하여 검사가 되겠다고 약속합니다. 하지만 ‘시골 천재’ 형철은 대학 입시에 낙방을 합니다. 그는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돈을 모아 법대에 진학하고 고시에 합격하여 검사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그 꿈을 향해 도전도 해 보기 전에 엄마는 큰 딸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아들에게 맡깁니다. 어머니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간신히 떼어 형철에게 말합니다. "야는 여자애니까……학교를 더 다녀야 써. 어짜든 여기서 야가 학교에 다닐 길을 니가 맨들어봐라. 난 야를 나처럼 살게 할 순 없어야."(109쪽)

큰 딸을 아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는 길에 들른 서울역 근처 어느 식당. 박소녀씨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국밥에 있는 고기를 아들의 그릇에 옮겨놓습니다. 그러다가는 힘없이 말씀하십니다. "근디 너는……너는 어쩐다냐?" 딸 때문에 아들의 꿈이 꺾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엄마는 국밥이 묻은 숟가락을 내려놓으면서 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엄마가 죄가 많다. 너에게 미안하다, 형철아."(110쪽)

그 때부터 엄마는 큰 아들에게 큰 죄를 지은 사람처럼 늘 "미안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따지고 보면, 미안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박소녀씨는 큰 아들 형철에게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박소녀씨는 자신이 해 준 것은 생각도 하지 않고, 더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줄 것이 이것 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나 같은 엄마에게 태어나게 된 것이 미안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박소녀씨는 자기가 알던 사람들 모두에게 인간의 한계를 넘어 사랑하고 희생하고 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할 말은 "미안하다"는 것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랑과 헌신을 알아주고 감사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조차도 당연하게 취급하거나 하찮게 생각합니다. 그 사랑이 사라지고 나서야 가족들은 자기 삶에 생겨난 커다란 공백을 발견하고는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깨닫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족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여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그것이 그 어머니 자신에게는 뼈를 깎는 것 같은 아픔이요 고통이었지만, 무한의 인내력으로 그것을 참아내며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시인 심순덕씨가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가 있습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제목의 시인데, 읽는 사람들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는 시입니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과 그 사랑을 당연시하는 자식의 모습을 너무도 잘 그려 놓았기 때문입니다.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 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3.

여기서 우리는 유사품 사랑과 진품 사랑의 차이를 봅니다. 유사품 사랑은 한계를 정해놓고 시작합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사랑하기를 포기합니다. 더 주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고, 이미 준 사랑을 계산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자주 합니다. "얼마나 더 해야 되는데?" "나보고 더 무엇을 어쩌라고?" "차라리 나보고 죽으라고 해라." 이런 마음이기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충분히 사랑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많은 어머니들이 보여 주신 진품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포기가 없습니다. 진품 사랑은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것을 다 쓰기 전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습니다. 진품 사랑은 모든 것을 다 주고 나서도 더 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합니다. 알아주지 않는다고 야속해 하지 않습니다. 이미 쏟아 부은 사랑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더 주어야 할 사랑에 대해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내가 죄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진실로 그렇게 느끼고, 그렇게 말하고, 그렇게 행동합니다.

저는 지난 설교에서 우리 중에 실재하는 박소녀씨들이 많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더 이상 우리 중에 박소녀씨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본인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희생과 복종을 강요당하는 일이 우리 가정에서 혹은 우리 사회에서 생겨나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박소녀씨가 보여준 그리고 많은 어머니들께서 보여 주신 진품 사랑만큼은 잃어서는 안 될 보화입니다.

참으로 아쉬운 것은 이 진품 사랑이 우리 시대에 보기 드문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 진품 사랑이라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목마른 것은 물이 없어서가 아니라 진품 사랑이 없어서입니다. 산해진미로 배를 가득 채워도 여전히 허기가 지는 것은 이 같은 진품 사랑이 부족해서입니다. 유사품 사랑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깊은 구멍이 우리 내면에 있습니다.

4.

지난 금요일 CBS News의 시사 프로그램인 <20/20>에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보도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믿어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2003년 12월 10일, 텍사스 주의 슈거랜드(Sugar Land)에서 일가족 네 명이 총격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인해 엄마와 둘째 아들이 죽고, 아버지 Kent Whitaker와 아들 Bart는 부상을 당했습니다. 큰 아들 Bart의 대학 졸업 축하 파티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 집에 숨어있던 괴한들에게 총격을 당한 것입니다.

경찰은 2년이 넘는 추적과 조사 끝에, 그 모든 일이 큰 아들 Bart가 꾸민 것임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스스로 가족을 살해할 계획을 짜고 동네 친구들을 매수하여 그 계획을 실행하게 했습니다. 그 전에도 두 번이나 가족을 살해할 계획을 꾸몄었다고 합니다. 그는 치밀하게 완전 범죄를 도모했지만, 결국 전모가 모두 밝혀졌습니다.

이 사건의 결말을 보면서 사람들마다 가지는 의문은 이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이 Bart로 하여금 이런 끔찍한 범행을 모사하고 결행하게 만들었을까?" 그 가족은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 가정입니다. 물질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중에도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경건한 부모였습니다. 이같이 풍요롭고 행복한 환경에서 자란 이 청년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 같은 범행을 저질렀을까요?

<20/20> 프로그램의 프로듀서가 사형수인 Bart에게 묻습니다. "왜, 무엇 때문에 부모와 형제를 살해할 생각을 했습니까?" 그 청년은 섬뜩할 정도로 무표정한 모습으로 답합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만족할 수 없었고, 그 이유가 가족들에게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복수하고 싶었습니다." 프로듀서가 다시 묻습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증거로 볼 때, 당신의 부모님은 당신을 사랑했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청년은 대답합니다. "물질적인 측면에서는 그렇다고 할 수 있겠죠." 프로듀서가 다시 말합니다.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과 당신의 동생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요." 그러자 그 청년은 대답합니다. "저는 그 정도로 깊은 유대(connection)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Bart Whitaker, 그는 물질적으로 유복한 환경 속에서 살았으나, 자신이 그 가족의 일부이며, 누군가에게 끔찍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 같은 정서적 고립이 그로 하여금 ‘반사회적 성격장애’(socio-path)를 앓게 했고, 속으로 증오심을 쌓아 가도록 만들었습니다. Bart의 증상을 모두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부당한 일입니다만,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정서적으로는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는 그의 말은 우리 모두가 주의 깊게 들어야 할 말입니다. 그는 진품 사랑을 경험해 본 일이 없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5.

이와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난 4월에 LA에서 열렸던 한인연합감리교회 총회에 참석했을 때 어느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뉴욕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므로 그 목사님의 실명은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 목사님은 교회를 일구느라고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살펴 줄 시간을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 때문이었는지, 아들 하나가 계속 사고를 치고 다닙니다. 그것이 늘 마음에 짐이 되었는데, 어느 날 그 아들이 그만 대형 사고를 쳤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그 아들은 몇 년 동안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한 교회를 대형 교회로 일구고 능력 있는 말씀으로 존경받는 목사로서 참으로 견디기 힘든 시련을 만난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이 가장 먼저 목회해야 할 가족들에게는 목회를 소홀히 했던 것에 대해 회개했습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아들에게 대한 목회를 시작해야 하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매 주일, 예배가 끝나면 편도만도 2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감옥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만났습니다. 큰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이 같은 일을 지속적으로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은 거의 한 주일도 빼놓지 않고 아들을 찾아가 면회를 하고 이야기를 들어주고 기도해 주었습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어느 날, 면회를 끝내고 돌아서는 아버지에게 아들이 말하더랍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저를 진실로 사랑하는 줄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들의 방황과 방탕은 진품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탓에 생긴 공허감 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그 진품 사랑이 있었지만, 아들이 그 사랑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 때로부터 아들이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둘 사이의 관계는 급격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아들은 복역을 다 마치고 나와서, 아버지가 섬기는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청소년들을 선도하는 일을 맡아 섬기고 있습니다. 그 자신이 문제아였기 때문에 문제아들의 심리를 잘 알고 그들을 인도하는데 좋은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얼마 전, 그 아들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결혼을 하기 전, 아버지와 아들은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두고 많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에게 용서를 빌며 부둥켜안고 울었다고 합니다.

진품 사랑은 어머니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어머니들 가운데 그 같은 사랑에 무능한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어머니들을 탓하지 맙시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그분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반면, 아버지들 가운데도 이렇게 진품 사랑을 행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서든 진품 사랑이 전해지면, 그 사랑은 놀라운 변화의 능력을 나타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마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해 낼 수 있는 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유사품으로는 안 됩니다. 진품이어야만 합니다. 한계를 모르는 사랑, 다 쏟아 붓고도 할 말은 "미안하다"는 말 밖에는 찾을 수 없는 사랑, 그 사랑만이 굳게 닫힌 철문보다도 더 열기 어려운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그 사랑만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내면의 깊은 구멍을 채울 수 있습니다. 진정한 만족과 행복은 이 진품 사랑에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6.

어머니를 통해, 혹은 아버지를 통해, 혹은 아내나 남편을 통해, 혹은 자녀를 통해, 혹은 친구나 교우를 통해 이 같은 진품 사랑을 어느 정도 맛보신 분이라면, 스스로를 특별한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진품 사랑을 어느 누구를 통해서도 맛본 적이 없는 분이라 해도 크게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진품 사랑을 경험할 수 있는 다른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사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한 사랑이 우리를 위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에서 드러내신 그 사랑, 미켈란젤로가 피에타 상을 통해 보여주려고 했던 그 진한 사랑, 그 사랑이 우리에게 준비되어 있습니다.

신구약성서 66권에서 끊임없이 울려나는 메시지는 바로 ‘하나님이 우리 모두를, 우리 하나 하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결코 만족함이 없는 사랑, 결코 다함이 없는 사랑, 결코 공치사를 할 줄 모르는 사랑,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퍼 주고도 "더 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사랑, 그 사랑을 받는 사람이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외면하고 배반해도 포기하지 않는 사랑?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완전한 사랑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많은 어머니들이 보여 준 진품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모조품인 셈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곳에 다 계실 수 없어서 어머니를 창조했다"는 속담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표현한 것이 구약성서의 호세아서입니다. 하나님은 예언자 호세아에게 차마 순종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결혼을 하되 소문이 좋지 않은 여인, 성 매매를 하는 여인, 혹은 섹스 중독에 빠진 여인 중에서 한 사람을 택하여 결혼을 하라는 겁니다. 구약 시대의 예언자라면 오늘날로 하면 목회자쯤 됩니다. 세상에 어느 목사가 결혼 상대를 생각하면서 이런 여자를 생각하겠습니까? 호세아가 이 명령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하지만 호세아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성매매를 하던 여인 고멜을 데려다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는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낳습니다. 그 여인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에 익숙해지는 듯했습니다. 호세아는 죄의 소굴에 빠져 살던 한 사람을 구원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뿌듯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과거의 습성이 도지는 바람에 그 여인은 가출해 버립니다. 다시금 홍등가로 찾아 들었고 그곳에서 마음 가는대로 쾌락에 빠져 삽니다. 호세아는 실의에 빠집니다. ‘하나님, 이젠 어쩔 수 없지 않나요?’라고 말씀 드렸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 술 더 뜨십니다. 홍등가에 가서 그 여인을 다시 찾아오라는 겁니다. 사랑과 은혜를 배반한 여인을 다시 찾아다가 사랑해 주라는 겁니다.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이 명령에 호세아는 순종합니다. 적지 않은 몸값을 지불하고 부정한 아내를 다시 데려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당신의 종 호세아에게 이렇게 어려운 명령을 거듭 내리십니까? 아무리 말해도 깨닫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제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써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사랑했는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사랑을 얼마나 자주 당연시하고 무시하고 배반했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 철없는 백성을 사랑하시기에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호세아의 결혼 생활을 통해 보여 주시려 한 것입니다.

오늘 읽은 호세아서 11장에 하나님의 심정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직접 낳으시고 젖을 먹이시고 보살펴 길렀는데, 그 백성은 거듭 거듭 그 사랑을 무시하고 배반했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그들을 깨우치기 위해 징벌도 하셨지만, 끝내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는 사랑의 고백이 여기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이스라엘아, 내가 어찌 너를 원수의 손에 넘기겠느냐? 내가 어찌 너를 아드마[소돔, 고모라와 함께 파괴된 도시]처럼 버리며, 내가 어찌 너를 스보임[소돔, 고모라와 함께 파괴된 도시]처럼 만들겠느냐? 너를 버리려고 하여도, 나의 마음이 허락하지 않는구나! 너를 불쌍히 여기는 애정이 나의 속에서 불길처럼 강하게 치솟아 오르는구나. 아무리 화가 나도, 화나는 대로 할 수 없구나.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망시키지 않겠다. 나는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니다. 나는 너희 가운데 있는 거룩한 하나님이다. 나는 너희를 위협하러 온 것이 아니다."(8-9절)

7.

호세아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달콤한 결혼 생활의 꿈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호세아의 결혼은 ‘구약의 십자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행복한 결혼을 포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진품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이 무한대의 사랑을 십자가 위에서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히브리어로 ‘호세아’와 ‘예슈아’는 같은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호세아는 비극적인 결혼을 받아들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의 희생을 통해서 그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어머니 날, 우리는 어머니들의 보여 주신 사랑을 기억하면서 호세아의 결혼을 통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어머니의 진품 사랑을 받아가면서도 "어머니는 그래도 되는 줄 알고" 살았던 우리의 불효를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거나 망각하거나 배반하고 살았던 우리 자신을 돌아봅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인정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어머니의 사랑은 어떠했습니까? 그 사랑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솟아오를 정도로 진하고 뜨거운 사랑이었습니까? 이제 더 이상 그 사랑을 받을 수 없음에 안타까워하십니까? 그렇다면,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십자가 위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주신, 모든 것을 다 주고자 하시는,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주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이미 만나신 분들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시고 그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괴롭습니까? 불행하게도 어머니로부터 진품 사랑을 받아 본 일이 없어, 사랑에 목말라 하며 살아 오셨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어머니에 대해 특별한 감정 없이 살아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더 십자가를 바라보십시다. 십자가 위에서 바로 나를 위해 물과 피를 다 쏟으신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참된 사랑, 영원한 사랑, 순도 100%의 사랑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발견하면, 자라면서 사랑받지 못해 생긴 내면의 결핍이 한 순간에 채워지고도 남을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진품 중에서도 진품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우리도 그 같은 사랑을 꿈 꿀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는 ‘권리’를 찾느라 ‘희생’을 잊어버렸습니다. ‘평등’을 구현하느라 ‘섬김’의 도를 잊었습니다.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를 추구하느라 ‘자기희생’의 덕을 잃어 버렸습니다. ‘자유’를 추구하느라 ‘사랑의 구속’을 망각했습니다. 모두 다 십자가를 내려놓고 면류관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로 진품 사랑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질병이요, 우리가 앓고 있는 모든 질환의 원인입니다.

이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다시금 옛날 가정 제도를 회복시키고 그 제도 안에서 한 두 사람을 일방적으로 희생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을 받아, 그 사랑 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어, 마침내 그 사랑을 행할 수 있기까지 자라가야 합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루고 얻은 ‘권리’, ‘평등’, ‘자아실현’, ‘자유’와 같은 고귀한 가치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품 사랑을 회복하는 길은 바로 십자가, 그 영원한 사랑에만 있습니다.

이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길입니다. 그 사랑을 갈망하고 그 사랑을 얻기까지 십자가를 붙든다면, 누구에게나 이 사랑이 주어질 것입니다. 이 사랑이 복음입니다. 이 사랑이 구원입니다. 이 사랑이 능력입니다. 이 사랑이 영생입니다. 이 뜻 깊은 어머니 날, 하나님의 진품 사랑의 은총과 축복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기원합니다.

사랑의 원천이신 주님,
제 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제게 베풀어 주신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 사랑을 제가 갚을 길이 없으니,
저를 사랑해 주신 모든 이들에게 주님께서 복과 은총을 주소서.
저로 하여금 십자가를 붙들게 하시고
거기서 저에게 주신 주님의 완전한 사랑을 발견하게 하소서.
그 사랑으로 저의 빈 마음이 채워지게 하시고
그 사랑으로 가족과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진품 사랑이 증발된 이 시대에
저희를 통해 그 사랑을 회복시키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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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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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 1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
-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 주일째다”
(It's been a week since Mom is missing)
요한복음 12:23-26


                                                                       
                                                                        (김 영봉 목사)      

1.

지난 2월 초, 편찮으신 어머님을 뵈러 한국을 다녀 온 후, 아내가 어느 교우에게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빌려와 읽기 시작했습니다. 가끔 눈물을 훔치며 읽고 있는 아내를 지켜보면서, 저는 그 책에 대해 겁을 먹었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아버님과 어머님을 뵈면서 여러 번 울컥하는 순간을 직면했고, 그 순간들을 애써 잘 견뎌왔는데, 그 책을 읽었다가는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다 읽고 난 후 응접실 탁자에 놓여 있던 그 책은 며칠 동안 저를 괴롭혔습니다. "안 읽을 거라면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아내의 협박(?)에 밀려 며칠을 갈등했습니다. 며칠 후, 슬그머니 그 책에 손에 들었다가 그만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한국 방문 중에 회피하고 참았던 눈물이 자주 흘러내렸고, 때로는 혼자서 엉엉 울기도 했습니다. 울기에 지쳐 책을 덮어 두고 한 참 있다가 다시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독서였습니다.

이 소설은 읽고 난 후에도 저를 쉬이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제가 부모님에게서 받은 사랑과 은혜를 새롭게 생각하게 만들어 주었고, 저의 불효에 대해 뼈아픈 자각을 하게 했으며, 제 아내에 대한 저의 태도를 반성하게 만들었으며, 제 아이들에 대한 저의 사랑을 되짚어 보게 만들었습니다. 사랑과 용서와 이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이 충격과 감동과 회한과 반성을 교우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번 연속설교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이 소설을 읽도록 기회를 드렸습니다. 자칫 분주하고 건조해지기 쉬운 것이 이민자의 삶이기 때문에, 좋은 소설을 읽도록 기회를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신실한 신자는 성경만 읽으면 된다’는 오해가 있습니다. 참으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어느 시인이 그랬습니다. "까막눈보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 더 무서운 법"이라고 말입니다. 감리교회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님은 스스로를 가리켜 ‘한 책의 사람’(a man of one book)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한 책’은 성경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말한 존 웨슬리 목사님은 당시로서는 놀라울 만큼 여러 분야의 책들을 광범위하게 읽었습니다. 그렇게 안목이 열려야만 성경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성경을 제일 중요한 책으로 삼되 다른 좋은 책들을 벗 삼아 읽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속설교의 일차적인 목적은 이 소설을 읽도록 유도하는 데 있었습니다.

교우들이 보여 준 독서의 소감은 참으로 다양했습니다. 저처럼 한 번에 읽어 내려가기 어려울 만큼 감정 이입이 컸던 분들도 계십니다. 특히,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한 분들이 주로 그렇게 느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그 정도로 강한 감정 이입은 없었지만,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서 오랜만에 독서의 즐거움을 누린 분들도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아픈 상처를 다시 기억하게 되어 고통스러웠다고 하십니다. 이번 연속 설교가 진행되는 동안 하나님께서 그분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치유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오늘은 연속 설교의 그 첫 번째 시간으로서,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도구로 선택한 첫 문장, 즉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에 초점을 두려 합니다. 이 문장으로 시작한 소설은 마지막 장에서도 "엄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다"로 시작합니다. ‘엄마의 실종’이 이 소설의 중심 주제인 셈입니다.

새 집을 사서 이사하는 작은 아들집에 가기 위해 상경한 박소녀 할머니가 서울역에서 그만 실종되었습니다. 박소녀의 남편은 지하철 출입문이 열리자 당연히 아내가 따라 들어올 줄 알고 차를 탔는데, 차가 떠나고 돌아보니 아내가 없었습니다. 다음 역에서 내려 아내와 서 있던 그 자리에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서울에 사는 자식들은 어머니를 찾아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합니다만, 끝내 찾아내지 못합니다.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잃어버린 지 구 개월째라면,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실종된 박소녀씨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인상을 던져줍니다.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은 곧 "엄마를 잊고 산 지 일주일째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굳이 책 뒤에 첨부되어 있는 정흥수씨의 비평의 글이나 작가의 후기를 읽지 않더라도, 웬만한 안목이 있는 독자라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작가 신경숙씨는 집을 떠난 지 거의 삼십년 만에 고향집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보름 동안 지내면서 자신이 얼마나 엄마를 잊고 살았는지, 엄마의 존재를 무시하며 지냈는지를 절감하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것이 이 소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가 잊고 살았던 어머니를 찾는 과정이 되었을 것이고, 많은 독자들에게 그런 계기를 마련해 주고 있습니다.

보통의 소설들은 소위 ‘일인칭 작가 시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나는……"이라고 이야기를 이끌어 가거나,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여 "그는……"이라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특이하게도 매 장(chapter)의 주어를 다르게 만듭니다. 큰 딸에게 말하는 첫째 장에서는 "너는……"이라고 했다가, 큰 아들에 대해 말하는 둘째 장에서는 "그는……"이라고 합니다. 남편에 대해 말하는 셋째 장에서는 "당신은……"이라고 말하고, 둘째 딸에 대해 말하는 넷째 장과 큰 딸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에서는 다시 "너는……"이라고 합니다.

비평가들은 이 같은 설정에 대해, 마치 재판정에서 ‘박소녀 실종 사건’에 대해 가족들을 하나씩 불러내어 고발하는 것 같은 장면 설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작가는 마치 검사처럼 박소녀씨를 실종되도록 방치하여 객사하게 만든 가족들을 하나씩 데려다가 재판정에 세웁니다. 그리고는 "박소녀씨, 진술하세요. 큰 딸이 당신에게 어떻게 했지요? 남편은요? 큰 아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둘째 딸과 둘째 아들은요? 아, 여기 시누이도 있군요. 당신을 평생토록 종처럼 부려먹고 마침내는 방치하여 실종시키고 객사하게 한 이 비정한 가족들을 고발하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자 박소녀씨는 일어나 자신을 잊고 살았던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을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내용은 고발이 아닙니다. 아무런 원망도 없습니다. 박소녀씨는 자신을 객사하게 한 가족들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검사님, 제 가족들을 그냥 두세요. 다, 내 박복한 탓이고, 다, 저희들 살기 바빠서 그런 거지요. 그냥 두세요. 나는 아무도 탓하거나 고발할 마음이 없어요. 저를 그냥 보내 주세요."

3.

일평생 자신을 무시하고 살았던 가족들을 책망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고 오히려 더 사랑하지 못한 자신을 책하는 박소녀씨의 진술은 가족들의 마음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고 죄스럽게 만듭니다. 차라리, 목 놓아 울면서 "내 인생을 어쩔 거야? 내 인생을 돌려줘! 나를 이렇게 만들고 너희들은 잘 살 것 같아?"라고 원망했으면 좀 낫겠습니다.

남편에 관한 장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박소녀씨는 남편 모르게 십년 동안이나 매 달 고아원에 사십오만원을 후원금으로 보내고 직접 찾아가 아이들 목욕이며 청소를 거들어 주었습니다. 고아원 직원이 너무도 고마워서 뭔가 해 줄 것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읽어 주면 고맙겠다고 했습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박소녀씨는 소설가로 출세한 큰 딸의 소설을 고아원 직원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을 했던 것입니다. 그 대목에서 박소녀씨는 남편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내가 딸이 쓴 책을 읽어달라고 했으면 그 때의 당신이 읽어 주기는 했을까? 아내를 잃어버리기 전에 당신은 아내를 거의 잊고 지냈다. 잊고 지내지 않을 때는 대부분 무엇을 청하거나 탓하거나 방치했다. 습관이란 무서운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공손한 말씨를 쓰다가도 아내에게만 오면 말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가끔은 이 지방 사람들만이 쓰는 욕설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당신은 공손한 말투는 아내에게 써서는 안 된다고 어디 책에 나와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랬다."(147-48쪽)

우리나라 말로 ‘남편’이란 ‘남을 편하게 해 주는 사람’ 혹은 ‘남이 편하게 느끼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 다 편하게 해 주는 남편은 아내만은 결코 편하게 해 주지 않고, 그래서 다른 사람 다 편하게 느끼는 남편을 아내만큼은 편하게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박소녀씨의 남편은 남편 중에서도 남편이었습니다.

자식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큰 딸에 대해 말하는 대목에서 박소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시로 나온 뒤의 너는 어땠는가. 너는 엄마에게 늘 화를 내듯 말했다. 엄마가 뭘 아느냐고 대들듯이 말했다. 엄마가 돼서 왜 그래? 책망하듯 말했다. 엄마가 알아서 뭐 할 건데? 무시하듯 말했다."(45쪽) 어느 교우께서는 이 대목에서 목 놓아 울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친정어머니에게 했던 말투와 너무도 닮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박소녀씨는 실종되기 이전에도 이미 실종 상태였다는 것이 작가의 고발입니다. 그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서 독자들에게 들이밀고 싶은 질문입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당신이 가장 사랑해야 하고 당신을 가장 사랑하는 그 사람을, 당신은 잊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서 진실로 사랑받고 사랑해야 할 그 사람을 잊고 사는 것이 가장 큰 실패이며 결함이고 문제임을 깨닫습니다. 엄마를 잃고 나서 소설가로서 큰 성공을 이룬 큰 딸의 삶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버렸습니다. 큰 아들도 건설 회사에서 나름대로 성공을 이루었지만, 그 모든 성공이 빛을 잃어 버립니다. 가끔 한 밤중에 일어나 밤거리를 쏘다니지 않고는 외면할 수 없는 큰 어둠이 그의 마음을 짓누릅니다. 아무 것도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박소녀의 남편과 시누이의 마음에도 채울 수 없는 큰 구멍이 뚫려 버렸습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사람을 잃는 것 혹은 잊고 사는 것이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상실인지를 여기서 발견합니다.

4.

그래서 저는 저 자신과 여러 교우들께 여쭙고 싶습니다. 혹시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잊고 산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린 것도 아니고 잊고 산 것도 아니라면, 무시하고 산 것은 아닙니까? 잃어버리지도 않고 잊지도 않았으며 무시한 것도 아니라면, 진실로 그 사랑을 감사하며 귀중히 여기고 마음 다해 사랑하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는 너 나 할 것 없이 아내를 무시하고 박대한 남편이거나, 제 사는 것에 매어 엄마를 잊고 산 자식들과 같습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만, ‘나는 예외다’라고 큰 소리 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시인 김시천씨가 동구 밖 고목나무를 보고 어머니를 생각하고 쓴 시가 있습니다. 이 소설만큼이나, 사랑하는 사람을 망각하고 살았던 우리의 허물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내가
그러진 않았을까?

동구 밖
가슴살 다 열어 놓은
고목나무 한 그루

그 한 가운데
저렇게 큰 구멍을
뚫어 놓고서

모른 척 돌아선 뒤
잊어버리진 않았을까
아예, 베어버리진 않았을까

이 시를 읽을 때 제 마음은 아리게 아팠습니다.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을 잊고 산다면, 나는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지요! 그 사랑에 감사하지 못하고 산다면, 나는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요! 얼마나 형편없는 사람인지요! 가장 가까이에서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하나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하고 그 사랑에 보답하지 못하고 산다면, 내가 세상을 다 얻는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시종일관 그렇게 사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설사 간헐적으로 그렇게 행동한다 해서 허물이 크게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무시당하고 희생을 강요당하다가 마침내 실종되어 객사한 박소녀는 바로 저의 부모일 수도 있고, 저의 배우자일 수도 있으며, 저의 자식일 수도 있습니다. 저를 아끼고 사랑해 주는 친구일 수도 있고, 교우일 수도 있고, 직장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나 같은 남편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해!"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나 같은 아버지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해!"라고 말하고 싶으십니까? 자식은 아버지에 대한 터질 듯 한 분노로 인해 괴로워하는데, 아버지는 "내가 못해 준 것이 무엇이냐?"고 답답해하는 가정이 한 둘이 아닙니다. 과연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고 있는지요? 이런 생각을 하면 때로는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잃어버린 사랑, 잊고 살았던 사랑, 무시하고 살았던 사랑, 당연시하고 언제나 있어 주려니 하고 살았던 그 사랑을 다시 찾아 나서라고 우리의 등을 떠밉니다. 잃었다면 찾고, 잊었다면 기억해 내고, 무시했다면 알아주고, 무심했다면 감사하라고 우리를 흔듭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을 찬찬히 읽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 숨소리를 귀기우려 들어 보라고 권합니다. 그 마음속을 들여다 볼 시간을 마련하라고 권합니다.

우리 모두 잃어버린 사랑, 잊어버린 사랑, 무시해 온 사랑을 찾아 나서십시다. 잃어버린 사랑, 잊혀진 사랑을 찾고 회복하는 길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대면하기 싫지만 대면해야 합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굳어지면 사랑 없음을 인정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기억하기 싫지만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풀어가야 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왜 이렇게 틀어졌는지, 아이들과의 관계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처음으로 돌아가 그동안 걸어온 자리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내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내게 쏟아 붓는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고 그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을 알 가능성도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거듭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요일 4:7-8). 그렇기 때문에 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집에서는 아내와 자식들을 질식시키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찬양하고 예배한다면, 그 찬양과 예배는 하나님 앞에 올려 질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겸손히 고개 숙이고 우리의 사랑 없음에 대해 통회하고 회개하십시다. 진실한 무너짐은 돌파구로 이어질 때가 많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쏟아 부어졌던 사랑에 대해 무심했고 둔감했으며 때로는 사랑을 배반했던 것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자복하고 회개의 영을 구하십시다. 진실로 뉘우치는 마음을 달라고 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영을 허락해 달라고 구하십시다. 나에게 주어지는 사랑을 감사히 여기고 받아들이며, 그 사랑으로 가족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그 사랑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하십시다.

5.

이번에는 방향을 돌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는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하지만 우리 중에 실제로 살고 있는 박소녀씨는 수 없이 많습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만 그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일관된 헌신과 순종과 사랑에도 불구하고 남편으로부터 무시당하고 가슴 졸이며 살아가는 아내들.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과 수고에도 불구하고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남편들.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 부었지만 이제는 "알았어요. 됐어요. 몰라도 돼요. 그만 하세요"라는 말로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는 부모들. 부모에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지만, 모든 것을 당연하게 취급당하고 따뜻한 말 한 마디 듣지 못하는 자식들. 이들이 모두 현실 속의 박소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그분들에게 몇 말씀 드리려 합니다. 여러분의 한숨과 근심이 풀어지는 날이 속히 오기를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그 사랑과 희생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알아주고 감사하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이 소설에서 진실로 초라한 사람, 불행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박소녀씨의 남편과 그 시누이와 자식들 아닙니까? 그들에 비해 박소녀씨는 오히려 거룩해 보이지 않던가요? 현실의 박소녀 여러분, 여러분은 거룩하신 분들입니다. 여러분은 위대하십니다. 여러분이 없었다면 이 세상은 얼마나 더 살기 어려운 곳이 되었을지요!

물론, 이 말로써 약자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우리 사회의 풍조를 두둔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이 소설이 전통적인 어머니상을 회복시키고 강요된 희생을 미화하려 한다고 비판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작가인 신경숙씨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비판에 대해 매우 안타까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기대했던 것은 과거에 엄마들이 져야 했던 짐을 모두가 나누어지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박소녀씨가 생겨나지 말아야 합니다. 그가 홀로 짊어진 짐을 모두가 함께 나누어 져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박소녀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저항하고 투쟁하여 자신의 권리를 찾아내는 것이 한 방법일 것입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진행된 여권 신장 운동이 바로 그 같은 노력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권 신장 운동의 덕을 많이 입었습니다. 그로 인해 세상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모릅니다. 1989년 10월, 제 딸이 태어났을 때, 저는 아내의 침상 곁에서 드렸던 감사 기도를 지금도 기억합니다. "하나님, 제 딸을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주신 꿈이 남김없이 꽃피어 나도록 도와주옵소서."

저항하고 투쟁하는 것과는 정반대의 방법도 있습니다. 그 고난과 희생과 아픔을 끌어안는 방법입니다. 권리를 위한 투쟁의 시대를 살아 온 사람에게 이 방법은 별 매력이 없어 보입니다. 별 희망도 없어 보입니다. 어리석은 선택처럼 보입니다. 자신을 버리는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진실로 큰 사람이 아니면 이 같은 선택을 할 수 없고, 이 선택은 많은 사람들을 살게 하는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는 진실을 우리는 이 소설을 통해 발견합니다. 소설의 종결부에서 로마 여행을 하는 큰 딸이 엄마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한 여자, 태어난 기쁨도 어린 시절도 소녀시절도 꿈도 잊은 채 초경이 시작되기 전에 결혼을 해 다섯 아이를 낳고 그 자식들이 성장하는 동안 점점 사라진 여인. 자식을 위해서는 그 무엇에 놀라지도 흔들리지도 않은 여인. 일생이 희생으로 점철되다 실종당한 여인. 너는 엄마와 너를 견주어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한 세계 자체였다."(275쪽) 소설가로서 나름대로 명성을 얻고 인정을 받은 큰 딸은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어머니 앞에서 초라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사람의 크기는 오직 사랑의 크기로 결정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6.

작가는 이 소설의 마지막을 성 베드로성당 안에 있는 ‘피에타상’에서 마무리합니다. 피에타상은 미켈란젤로가 남긴 명작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한 아들의 시신을 안고 내려다보고 있는 조각입니다. 왜 작가는 이 소설을 피아타상 앞에서 마무리했을까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 두 분이야말로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지는 고난과 아픔과 희생과 죽음을 끌어안으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두 분의 이 한 없는 ‘고난 흡인력’은 결국 모든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이 되었고, 참된 사랑의 능력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박소녀씨의 생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은 "네가 죽더라도 나는 살겠다"는 데까지 갔습니다만, 박소녀씨처럼 "내가 죽어 네가 산다면 나는 그 길을 가겠다"는 선택을 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 이 땅에 많은 박소녀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그분의 뒤를 따라 십자가의 길을 걷는 마음으로 지금 당하는 아픔과 고난과 희생을 끌어안아 보시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어서 이를 악물고 견디는 고난과 희생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조건 없는 희생으로 그것을 끌어안자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그 길을 걸으신 예수 그리스도께 힘을 구하십시다. 화를 복으로 바꿀 수 있는 큰 가슴을 구하십시다. 모든 아픔을 견딜만한 힘을 구하십시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 끝까지 걸어갈 수 있도록 힘을 구하십시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많은 열매가 여러분이 사랑한 그 사람들에게 맺힐 것입니다.

묵상: 이제 다 같이 눈을 감고 기도하십시다. 기도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잠시 살피는 시간을 가집시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박소녀입니까? 주님의 위로와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속히 여러분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한숨을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까지 여러분의 십자가를 지고 걸어갈 힘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사랑해야 할 그 사람을 박소녀가 되게 한 장본인입니까? 회개하십시다. 우리의 사랑 없음을 고백하고, 내게 부어진 사랑을 무시하고 망각하고 외면하고 살았던 것에 대해 회개하십시다.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주님, 제 완악한 마음을 깨뜨려 주셔서, 제 곁에서 눈물짓고 있는 박소녀를 돌볼 마음과 사랑을 주옵소서."

이 시간, 잠시 동안, 각자의 사정에 맞게 기도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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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3.15 (김 영봉 목사)

요한복음 연속설교 ‘생명의 복음’(115)
"내 기도엔 아무도 없다"
(Nobody Is in My Prayer)
요한복음 John 17: 9,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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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의 기도에는 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에는 무엇이 들어 있습니까?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도에 담겨 있는 것이 그 사람의 세계입니다. 그 사람의 기도에 담겨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면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진심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관심사가 기도에 담기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한 번 던져 보시기 바랍니다. 내 기도에 누가 있습니까? 내 기도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 중에는 "내게는 기도가 없다"고 말하실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혹은 기도가 너무나도 짧고 형식적이며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분들도 계실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개인적으로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기도를 배우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기도를 회피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대개 "나는 기도 할 줄 모른다"고 핑계를 대지만, 실은 기도하기를 꺼리는 겁니다. 몸은 예배에 나오지만, 일대일로 하나님과 대면하기를 피하려 합니다.

진실한 기도는 하나님과 일대일로 대면하여 나누는 사귐입니다. 그분의 임재 앞에 나 자신을 노출하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또한 내 말씀을 아뢰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한 기도를 시작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큰 도약을 하는 것입니다. 이 같은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합니다. 특히, 하나님을 두렵게 여기는 분들의 경우에는 더욱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기도를 시작하기 전까지, 하나님과 일대일로 마주 앉아 관계를 트기 전까지, 그 믿음은 불완전 상태에 머물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믿음은 구원하기에 충분하지 못합니다. 거기서 도약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에 타 죽을지라도 그분 품에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두둔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죗값을 치르셨기 때문에 그 은혜를 믿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아직 하나님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계십니까? 아직 하나님 주변에서 맴돌고 있습니까? 그렇게 믿어서 얻을 것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도약하시기 바랍니다. 떨치고 일어나십시오. 숨은 곳에서 나오십시오.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제게 말씀하옵소서. 제 말씀도 들어 주옵소서"라고 기도를 시작하십시오. 이 도약이 얼마나 중요한 전환인지,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2.

기도를 하지 않다가 기도의 문을 여는 것은 크나 큰 도약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환입니다. 하지만 기도에 있어서 또 한 번의 전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나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품는 전환입니다. "내 기도에는 나밖에 아무도 없다"고 말하는 단계에서 도약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사귀면 점점 내 기도가 넓어지고 깊어집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 기도에 담기게 되고, 내 기도에서 다루는 문제들이 점점 커집니다. 이웃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를 생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따라서 기도가 깊어지면서 자연히 내 기도 안에 담기는 것들이 많아집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중보기도’(intercessory prayer)라고 부릅니다.

반면, 기도를 통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구하기만 하면,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기도로써 무엇을 구하는 것이 잘못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기만 하는 기도가 잘못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가운데서 구하는 것은 좋지만, 사귐이 전혀 없는 가운데 구하기만 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그런 기도로는 하나님을 만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기도가 변화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늘 자신과 자신의 관심사 안에 묶여 있게 됩니다.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한 여자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그 여자는 "좋은 신랑감을 주시옵소서"라고 매일 열심히 기도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예배 중에 기도에 대한 설교를 듣습니다. 그 설교의 요지는, 기도가 자기의 관심사에만 묶이면 안 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가 너무 이기적으로 기도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도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꿉니다. "하나님, 우리 부모님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부모님에게 좋은 사위를 선물로 주시옵소서. 주님,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동생에게 좋은 형부를 선물로 주시옵소서."

하나님과의 참된 사귐이 없는 한, 기도가 바뀌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관심사를 나의 관심사로 품어 안는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과 만나 사귀는 일에 집중되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중보기도는 이렇게 하나님과의 사귐에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중보기도’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혹은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감히 중재자로 혹은 중보자로 자처할 수 있느냐?"는 것이 그분들의 주장입니다. 그분들이 걱정하는 바는 알겠는데,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신약성서의 빛에서 보면, 모든 믿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입니다. 제사장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백성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 혹은 중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제사장으로서의 권위를 믿고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합니다.

3.

예수님은 그 무엇보다도 기도하시는 분이었다고, 저는 몇 주일 전의 설교에서 말씀 드렸습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초점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기도 중에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20세기 영국의 신학자요 목회자였던 포사이스(P. T. Forsyth)는 <기도의 영혼>(The Soul of Prayer)이라는 책에서 "목회자가 자기 자신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모두 중보 기도에 속한다"고 말한 바가 있습니다. 목회자가 깊은 기도를 통해 충만한 영성에 이르면, 그 영성을 통해 다른 사람을 구원에 이르게 하고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데 더 큰 능력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진리를 목회자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믿는 사람들에게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믿음과 영성을 위해 드리는 기도는 모두 중보기도에 속합니다. 그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성장하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당신 자신의 영성, 즉 성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해 부단히 그리고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셨습니다. 동시에, 그분은 성부 하나님의 관심사들을 끌어안고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셨고, 앞으로 당신을 믿게 될 신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보면, 그분은 이 땅에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기를,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셨고,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이스라엘 민족을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한 공동체 전체를 두고 기도하기도 하셨고, 한 개인을 품고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기도에는 참으로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고,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담겨 있었는지, 그분은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해야 했습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말했던 바대로, 예수님은 할 일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많은 시간 동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너무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Too busy to pray)고 말합니다만, 기도의 사람들은 달리 말합니다. "너무 바빠서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Too busy not to pray)고 말입니다. 예수님도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에 일어나 기도에 전념했고, 때로는 밤늦게까지 기도하셨습니다.

4.

중보기도를 하기 어려운 이유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중보기도의 원리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중보기도가 어떤 경우에는 사생활 침해처럼 보입니다. 미국에 있는 내가 한국에 있는 내 부모를 위해 기도하는 것이 무슨 힘을 발휘할까 의문이 듭니다. 나라와 민족 혹은 아프리카의 질병과 가난 문제 혹은 훼손되고 있는 지구 환경을 두고 기도할 때면, "저 거대한 문제에 대해 나의 이 짧은 기도가 무슨 소용이 될까?" 싶습니다. 이 같은 많은 의문들 때문에 중보기도가 잘 되지 않습니다. 저도 그런 경험을 겪었습니다.

이런 의문 때문인지, 때때로 의학자들이 중보기도의 효과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하곤 했습니다. 한 병동의 환자들의 이름을 주변 교회들의 중보기도팀에게 나누어 주고 치유를 위한 기도를 부탁합니다. 유사한 질환을 앓고 있는 다른 병동의 환자들의 경우에는 그런 노력 없이 의료적인 치료만을 행합니다. 그런 다음, 두 병동의 환자들의 치유 과정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비교합니다. 이렇게 연구하고 비교한 결과, 중보기도와 함께 치료한 환자들에게서 뚜렷한 치유의 차이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고, 그렇지 않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저는 전에 이 같은 연구 결과들을 흥미롭게 보았지만, 이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 같은 연구 결과는 대개 연구하는 사람들의 목적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며, 이 같은 연구 결과에 설득 당해 중보기도를 시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보기도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물증’(물질적 증거)이 아니라 ‘영증’(영적인 증거)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해 가면서 영적 세계를 경험해 가노라면, 왜 중보기도가 필요한지 깨닫게 됩니다. 영적 세계를 몸소 경험했던 기도의 대가들은 모두 중보기도의 대가들이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저는 물증을 제시해 가면서 중보기도를 하라고 설득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 대신, ‘사귐의 기도’를 하라고 권면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사귀라고 권면합니다. 진실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사귐이 깊어지고 그로 인해 영적 세계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관심사를 알게 되면 자연히 중보기도는 터져 나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진실로 관심하게 되면, 그 관심사를 위해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서두에서 여러분에게 여쭌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 안에 누가 담겨 있습니까? 여러분의 기도 안에 무엇이 담겨 있습니까? 기도 중에, 나와 내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두고 눈시울을 붉히며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기도 중에, 나와 내 가족의 관심사가 아닌, 좀 더 커다란 문제를 두고 가슴 아프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아직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지 못했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직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상태에 있는지 모릅니다.

5.

중보기도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중보기도의 능력을 믿고 기도했을 때, 그 기도가 실제로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지 어떤지를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주 낙심합니다. 우리의 중보기도가 때로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응답되는 경우도 있지만, 또 때로는 아무리 기도를 해도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말썽 부리는 자식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지만, 아이는 좀처럼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질병 치유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지만, 병은 악화되기만 합니다. 어찌 보면 그런 경우가 더 많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 교회도 여러 교우들을 두고 중보기도를 해 왔습니다. 교우들이 각자 기도하기도 했고,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 팀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로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를 경험한 분도 계시고, 그렇게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떠나보내야 했던 분들도 계십니다. 응답된 기도를 생각하면 기도에 힘을 얻지만, 우리가 기도한 바대로 응답되지 않은 사례만을 생각하면 기도에 힘을 잃습니다. 그럴 때면, "중보기도란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하는 것일 뿐, 아무런 효력도 없지 않을까?" 라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중보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돌이키거나 꺾으려 하는 노력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응답을 얻어내기 위해 하나님을 굴복시키려는 집단 농성이나 연좌데모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으로 드리는 모든 중보기도는 하나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구하지만, 하나님은 그 기도 안에서 우리의 사랑을 받으십니다. 그 사랑을 그분의 방법대로 우리가 기도한 그 사람을 위해 사용하십니다.

기도로써 우리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그 사람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사투를 벌이는 환자를 위해 사랑으로 기도할 때, 나는 그 사람의 싸움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상징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실입니다. 질병과 노환으로 어려움을 겪는 어머님을 위해 간절히 기도할 때, 저는 미국 대륙과 태평양을 건너 어머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제가 이 단에 무릎 꿇고 우울의 늪에 빠져 고통 받는 교우를 위해 기도할 때, 저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서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과 함께 싸우게 됩니다.

그렇게,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결정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제대로 기도하려는 사람이라면 가장 먼저 마음에 대비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기도로써 구한 것과 다른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훈련입니다. "그러면 기도는 뭐 하러 합니까?"라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기도는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을 얻어내려는 싸움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과 사랑을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과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십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드리는 기도는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구했던 응답이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바랐던 응답을 받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믿음과 사랑으로 드린 기도는 어떤 방도로든 그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을 살려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는데 그 사람이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 "내 모든 기도가 소용이 없었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 기도는 분명 그 사랑하는 사람이 죽음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는 동안 크나큰 힘이 되었을지 모릅니다.

6.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적 세계를 믿고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의 오지랖이 넓어지도록 더욱 깊이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 안에 낯선 사람들이 담길 때까지 기도하십시다. 우리의 기도 안에 전혀 상관없다고 느꼈던 문제들이 담길 때까지 기도하십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이 사회에 끼칠 수 있는 가장 큰 공헌은 기도입니다. 우리가 조국을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기도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위해 할 수 있는 가장 큰 일도 기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기도의 도움이 필요할 때 선뜻 기도의 도움을 청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속담에 "병은 널리 알리라"고 했는데, 영적으로도 이 속담은 진실입니다. 여러분에게 어려움이 발생하면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알리기를 주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중보기도팀에도 알리십시오. 출석카드에 기도 제목을 써서 알리십시오. 기도의 도움을 얻는 것보다 더 큰 일은 없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것은 약함의 증거가 아닙니다. 진실로 강한 사람만이 자신의 약점을 드러내놓고 기도를 부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신앙 공동체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가 추구하는 ‘사귐과 섬김’의 본질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사장 공동체로서 교회는 교회 바깥의 문제들을 끌어안고 중보할 책임과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언제나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 17장 20절, 즉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라는 기도는 2천 년 전에 한 번 올려진 기도가 아니라, 지금도 그리고 영원히 성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기도입니다. 참되고 영원하신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하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십시다. 내가 아무런 기도도 할 수 없을 때조차 내 안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는 그분을 기억하십시다. 그분의 모범을 닮아 우리도 우리의 기도 안에 많은 사람들을 품고 큰일들을 품으십시다. 우리 또한 다른 사람들의 기도에 담겨지기를 기뻐하십시다. 서로 기도를 부탁하고, 기도로써 서로를 품어주십시다. 그것이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로 향해 나가는 첫 걸음입니다.

이 일이 우리 각자의 기도 생활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속회에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속회에서 서로를 믿고 자신을 열고, 서로 기도하며 하나가 되는 은총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중보기도 사역이 더욱 든든해지기를 기도합니다. 더 많은 성도들이 이 사역에 참여하여 기도로써 교우들을 돕고, 가정을 돕고, 교회를 돕고, 나라를 돕는 일에 헌신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우리 교회 자체적인 문제만을 붙들고 씨름하는 교회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제사장 공동체로써 바깥 사회의 문제를 끌어안고 기도하며 헌신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거룩한 열망이 우리 각자에게 그리고 우리 교회에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영원한 중보자이신 주님,
주님의 영원한 중보기도를 믿게 하소서.
그 중보의 힘으로 살고 있는 저희이오니
저희도 역시 중보의 삶을 살게 하소서.
더 깊은 기도로써 주님을 알게 하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기도로써 품게 하시며
더 많은 일들을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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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극복하는 지혜 1

감명깊은설교 2009.02.14 21:39 Posted by 대풍
전 세계 경제가 하나 같이 어렵습니다. 이런 때 슬기롭게 헤쳐 나가야 겠습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한 분들께 이 설교 듣기를 권합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음이 자꾸만 짓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당하고 있는 그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치 그것이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로 인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학 문제가 좌절되면 생애가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당한 그 문제가 자신의 전 생애를 집어 삼킬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포기해야 할 그것 말고도,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살아나가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2008.5.4 (와싱톤 한인교회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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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
(Life Is Worth Living No Matter What)
요한복음 John 20:19-21

1.

살다 보면, 그런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느낌! 어떤 사람의 상황이 너무도 처참해 보일 때, 그리고 그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 아무 의미도 없어 보일 때, 우리에게는 그런 느낌이 듭니다. 이 느낌은, 비록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으로 그렇게 느끼고 마는 것이니 큰 위험은 없습니다. 문제는 나 자신이 그런 처지에 처했을 때 동일한 느낌이 마음을 지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러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생각은 마음의 느낌으로 머물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취하는 행동으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참 위험합니다.

남의 일이건, 나 자신의 일이건,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제 마음 같아서는 오늘 설교 시간 내내 이 문장만 되풀이 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하여 이 진리가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지기만 한다면,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사람의 딱한 처지를 볼 때, 비교할 수 없는 생명의 가치를 인정하고 고귀한 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혹은 우리 자신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죽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상황에 직면할 때, 그 순간의 유혹을 능히 이겨 넘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영원불변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듯이, 죄가 많고 악이 판을 치며 오염되고 비뚤어진 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환난과 시험을 당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과제는 환난과 시험을 피하는 데 있다기보다는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나가는 데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평화는 바로 이 환난과 시험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그 평화의 능력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환난과 시험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와 담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환난과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셨다"(16:33)고 할 때의 그 이김은 바로 환난과 시험을 극복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가 없으면, 닥쳐오는 환난과 시험에 압도되기 쉬우며, 우리 마음은 불안해지고 두려움에 질리게 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질리게 되면 우리의 마음은 심히 움츠러들게 됩니다. 어려운 상황은 끝없이 지속되고, 그 두려움과 불안을 누구에겐가 털어놓지 않고 마음속으로 웅크리고만 있으면, 결국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넘어가 버립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한 순간의 충동적인 결심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오랜 시간 동안의 좌절과 번민과 질문의 결과로 생깁니다. 처음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다가, 중간에는 "차라리 죽는 게 더 나을지 몰라!"라고 수긍했다가, 결국 "그래, 죽는 게 더 나아!"라는 결론에 이르는 겁니다.

2.

말이 나왔으니, 자살과 관련하여, 한 가지, 아주 널리 퍼져 있는 믿음에 대해 말씀 드리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자살한 사람은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믿음입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것을 하나의 교리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회에서는 자살한 사람을 위해 장례 미사를 해 주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그 어떤 공식적인 예배 행위도 금하고 있으며, 심지어 교회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오직 돌아가신 분의 구원을 위해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것만을 허락할 뿐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개신교인들(Protestants) 사이에도 그런 생각이 퍼져 있습니다.

성서에는 그 어디에도 "자살한 사람은 구원 받을 수 없다"거나 혹은 "자살한 사람은 지옥에 간다."는 가르침이 없습니다. 천주교회에서 가르치는 이 교리는 고대 교회의 주교이자 신학자였던 어거스틴(Augustine)과 천주교 신학의 대부인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의 가르침에서 온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자살이 십계명의 제 6 계명 즉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을 위반하는 죄라고 설명했습니다. 천주교회 교리의 골격을 마련해 준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unforgivable sin)라고 규정했습니다. 첫째, 자살은 자기 보존의 욕구라는 자연법(natural law)을 거스르는 것이며, 둘째, 그것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거부하는 것이며, 셋째,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권리를 남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게다가, 자살은 자신의 죄에 대해 회개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가장 치명적인 죄(the most fatal sin)라고 말했습니다.

자살을 가장 심각한 죄로 생각하는 점에는 개신교도 이의가 없습니다. 하지만 자살한 사람은 아무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전제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교파마다 다르고 목회자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개신교회는 자살을 인간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실수요 해서는 안 될 일이라고 믿으면서도, 동시에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은총과 자비가 열려 있다고 믿습니다. 한 영혼에 대한 구원의 여부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일이지, 우리가 교리적인 잣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믿기에, 개신교회에서는 마음과 정성을 다해 장례 예배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한 처분을 믿고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자살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가족들은 이중고를 겪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낸 아픔에 더하여, 그 사람이 지옥 불에 영원히 고통당할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더 큰 시름을 앓아야 합니다. "자살한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그런 계획을 하는 사람에게는 강력한 제동 장치가 되지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유가족에게는 참으로 지기 힘 든 멍에입니다. 그게 실제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것이지만, 인간이 만든 교리적인 판단이므로 전적으로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자살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입니다. 성서에도 자살 이야기가 몇 개 나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자살입니다. 그런 경우는 누가 보더라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심리적인 혹은 정신적인 병을 앓는 사람이 생활고에 허덕이다가 한 순간 판단을 잘 못 하여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한 것이라면, 그 경우에도 같은 기준을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악한 것은 죄이지만, 약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신체적인 질병이 죄가 아니듯, 심리적인 질병도 죄가 아닙니다.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심리적인 병으로 그런 선택을 했는데, 그 앞에서 교리를 들이대며 "사정이 어쨌거나, 당신은 구원받을 수 없소"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을 눈물도 피도 없는 비정하고 편협하고 완고하며 앞뒤가 꽉 막힌 교리주의자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은 눈물도 많고 피도 펄펄 끓는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분의 넉넉한 품 안에는 한 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고귀한 생의 기회를 반납한 사람들을 위한 자리도 있음에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비극적으로 이별한 분들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위로와 용기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3.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도 구원의 여지가 남아 있다는 점을 말씀 드리는 동시에,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하겠습니다. 자살은 우리가 범할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하는 죄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생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살만한 가치가 있으며, 아무리 불우한 상황에서도 인간의 생은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취해 가시기까지는 그 생명을 감사하고 축하하며 기뻐해야 합니다. 상황이 어떻든지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심리적으로 자꾸만 짓눌리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나만 이렇게 당하고 산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질병이든 사고든 혹은 관계의 문제든, 우리는 어려움에 직면할 때 자주 "왜 나만 이러나?"라는 질문에 빠지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은데, 왜 나에게만 불행이 닥치느냐?"는 감정에 빠집니다. 교회를 가 보아도 다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이고, 속회로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모두 다 행복해 보이는데, 왜 나만 이럴까 싶습니다.

속고 있는 겁니다. 지난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아주 기가 막힌 사기꾼이거나, 아주 쉽게 속아 넘어가는 바보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누구나 그 나름의 아픔과 고민과 불행이 있습니다. 심방을 하여 교우들의 삶의 속을 들여다보면서 얼마나 자주 그런 자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교회에서 뵙기에는 아무 근심도, 아무 불행도, 아무 문제도 없어 보이는 분들입니다만, 사적으로 만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속에 감추어 두었던 아픔과 고민과 불행을 내어 놓습니다. 그런 것을 마음에 담고 어떻게 그렇게 태연하게 살고 있는지 놀라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 아픔을 보고 나면, 그분들이 더욱 귀하게 보이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종류가 다르고, 정도가 달라서 그렇지, 모두 다 나름의 불행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민자들 중에서 삶의 기본적인 욕구조차도 충족시키지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빡빡하고 분주한 살림살이 때문에 부부가 남남처럼 살아가는 분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런 분들에 비하면, 어떤 분들은 모두 다 가지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에게도 나름의 아픔과 불행이 있습니다. 옛말에 "꽃가마 속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꽃가마 안에 앉아있는 새색시야말로 가장 근심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까? 겉으로 화려해 보일수록 근심은 더 깊고 불행은 더 진할지 모릅니다. 반면, 겉으로 불행해 보이지만, 실은 그 불행이 보이는 것보다 연하고 그 근심이 보이는 것보다 얕을지 모릅니다.

나만 당하고 있다는 피해 의식이 마음을 짓누를 때, "또 내가 속고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 사기꾼을 떨쳐 버려야 합니다. 모두가 다 당하고 있는 아픔이요 불행이요 근심입니다.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이렇게 당당하게 서서 우렁차게 설교하는 제게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백악관의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도 있고, 청와대의 이명박 대통령에게도 있습니다. 영화배우보다 더 영화배우 같은 모습으로 수 만 명의 신도들에게 환각적인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에게도 있습니다. 세계 최대의 갑부인 빌 게이츠(Bill Gates)에게도 있고, 워렌 버핏(Warren Buffett)에게도 있으며, 도날드 트럼프(Donald Trump)에게도 있습니다.

4.

어려움을 당했을 때, 마음이 자꾸만 짓눌리는 또 다른 이유는 지금 당하고 있는 그 문제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마치 그것이 없으면 인생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마치 그것이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으로 인해 인생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재정에 문제가 생기면 그로 인해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진학 문제가 좌절되면 생애가 끝난 것처럼 생각합니다. 마치 지금 당한 그 문제가 자신의 전 생애를 집어 삼킬 것처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포기해야 할 그것 말고도, 인생의 기쁨과 행복을 느낄만한 요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살아나가면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습니다.

며칠 전, 인터넷 뉴스에서 이상우라는 가수의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는 가수로 혹은 연기자로 나름대로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얼마 전 KBS의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아픔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기독교방송의 <새롭게 하소서>라는 프로그램에 나와서 간증도 한 것으로 압니다. 다름 아니라, 발달 장애를 가진 14세의 아들에 관한 숨겨진 사정을 공개한 것입니다.

결혼 3년 만에 얻은 아들 승훈이가 30개월이 지나도 말을 하지 못하기에 병원을 찾았더니 발달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 진단을 받고 나서 이상우씨는 그 일로 인해 자신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생각하고는 3개월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습니다. 다행히,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아이를 위해 씩씩하게 살아가는 아내를 통해 그는 서서히 술독에서 빠져 나와 현실을 대면했습니다.

그렇게 정상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번에는 갑자기 아내가 절망에 빠져 한 달 동안 손을 놓아 버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아내가 그렇게 씩씩했던 것은 나을 줄 알았기 때문이었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아무리 노력해도 낫지 않을 것이라는 현실을 깨닫고 절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믿음으로써 그 절망감을 뿌리치고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둘이 함께 아이를 위해 헌신하며 행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숨겨진 이야기를 공개하게 된 원인을 묻는 기자에게 "장애아를 키우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제 마음을 찡하게 울린 대목이 있습니다. 기사를 그대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저희 부부는 승훈 이를 통해서 새 세상을 봐요. 남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일에도 감사하는 걸 배웠으니까요. 승훈 이가 어쩌다 단어 하나만 제대로 발음해도 행복했어요. 가장 감동했던 순간이 승훈 이가 거짓말을 했을 때예요. 다른 부모 같으면 아이가 거짓말을 하면 화가 났겠죠. 하지만 어느 날 양치질 안 하고서 '했다'고 말하는 승훈 이를 보고 눈물이 나올 만큼 감격했어요. 이제 내 아들이 거짓말을 할 줄 아는구나, 이제 이만큼 나아졌구나, 싶어서요." (조선일보 2008년4월 25일)

존경하는 교우 여러분,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더 낫지!"라고 말하겠습니까? 없습니다. 살아있는 것을 포기할 만큼 커다란 문제도 없고, 그만큼 무거운 짐도 없으며, 그만큼 고통스러운 아픔도 없습니다. 우리에게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살아있을 이유가 있으며, 그만한 가치가 있으며, 그 안에도 행복이 있습니다. 불행이 더 커 보일 때도 있지만, 우리의 눈을 불행의 반대편으로 돌리고 살아가다 보면, 그 불행보다 더 큰 기쁨을 찾을 수 있습니다.

5.

우리의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환난과 시험에 짓눌리지 않고 그것을 대면할 평화와 용기를 제공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한 죽음조차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우리는 우리를 위협하는 환난과 시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불행 속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불행으로 고정된 우리의 눈을 돌릴 수 있습니다. 눈에 눈물이 가득히 고여 있어도 마음으로 웃을 수 있는 이유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로 누워 있어도 마음에는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면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고귀한 삶의 기회를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오늘 저는 <팀 호잇>(Team Hoyt)으로 알려져 있는 아버지 딕 호잇(Dick Hoyt)과 아들 릭 호잇(Rick Hoyt)의 이야기로 끝마치려 합니다. 릭은 태어날 때 탯줄이 목에 감기는 바람에 뇌성 마비(cerebral palsy)를 앓게 되었습니다. 의사와 주변 친지들은 그 아이를 기관에 보내도록 권고했지만, 부모인 딕과 리즈(Liz)는 그 아이를 다른 아이와 동일하게 키우기로 결심하고 또한 그렇게 헌신합니다. 그러던 중 릭이 고등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장애인들을 위한 5마일 달리기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릭이 아버지에게 함께 달릴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휠체어에 싣고 밀면서 그 경기를 완주했습니다. 그렇게 달려서 골인 지점을 통과했을 때, 아버지는 17년 동안 아들이 그렇게 기뻐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아들은 휠체어에 실려 달리는 동안 자신의 장애를 잊고 자유를 만끽했다고 했습니다.

그 이후로 아버지는 아들을 싣고 2007년까지 950회의 달리기 경기에 참여했고, 마라톤 풀코스를 60회 완주했으며, 심지어 철인 삼종 경기(triathlon)에 여섯 번이나 참여하게 됩니다. 지금 그 아버지의 나이가 67세입니다. 아들은 보스톤 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특수교육 분야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천재 물리학자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처럼 뇌파를 사용한 컴퓨터를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아버지 딕은 "도대체 무슨 힘이 당신으로 하여금 아들과 함께 그토록 줄기차게 뛰게 만드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아들을 미는 것이 아니라, 아들이 나를 끌고 갑니다." 릭을 비롯한 이 가족 모두는 정말 비참하게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우리 가족은 더 이상 행복할 수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 영상을 하나 보시겠습니다. <팀 호잇>에 관한 영상입니다. 장애아들을 기르는 과정과,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경기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입니다. 아름다운 찬양 "I Can Only Imagine"이라는 곡이 배경으로 흐르는 이 영상을 보시면서, 죽는 것이 더 나은 인생은 없으며, 인생은 어떤 경우에도 살 가치가 있으며 살 이유가 있음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진리는 아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뼈저리게 느껴야 합니다. 그래서 이 영상을 준비했습니다.

우리 모두의 상황은 다 다르지만, 릭과 딕이 함께 뛰면서 그 모든 장애와 불행을 극복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그렇게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기를 바랍니다. 배경 음악의 가사가 말하듯이,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 갈 때,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오직 상상할 수 있을 뿐입니다(we can only imagine). 실제로 그렇게 주님과 함께 걸어갈 때, 상상도 못했던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영상 속에서 보시겠지만, 릭이 뇌파로 컴퓨터에 쓴 글(CAN)처럼, 주님 안에서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Yes, we CAN!

그러니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마십시다. 담대히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의 길을 걸어가십시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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