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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 5-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가정의 달을 위한 특별 연속 설교
                             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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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5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 “엄마를 부탁해”
에베소서 5:21-33

1.

<엄마를 부탁해>라는 제목을 신문 기사에서 처음 보았을 때, 왠지 약간 어색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뭔가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처럼 느껴졌습니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자가 그것을 의도했는지 어떤지는 모르지만, 이 제목은 우리의 ‘엄마 이미지’와 맞지 않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우리의 ‘엄마 이미지’에 어울리는 말은 ‘엄마에게 부탁해’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가족들이 내미는 온갖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시는 분이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박소녀씨도 그렇습니다만, 가난한 시절의 어머니들에게는 불가능한 것이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특히, 자식들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만들어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부탁하는 것은 자신의 살을 베어서라도 만들어 내려고 했습니다. 아버지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는 문제도 엄마에게는 부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문제가 생기면 ‘엄마에게 부탁해야지!’라는 생각을 하고 자랐습니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이 제목으로써 그리고 소설의 이야기로써 독자에게 아주 은밀한 그러나 아주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그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일평생 엄마에게 부탁만 하고 산 당신에게 부탁합니다. 이제는 당신이 엄마를 돌볼 차례입니다. 이미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다면, 그분을 잊지 마십시오.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분을 기억하십시오. 아직 엄마가 살아 계시다면, 그분을 찾으시고 돌보시고 감사하십시오. 일평생 그분의 어깨에 지웠던 짐들을 벗겨 주시고, 그 짐을 나누어 지십시오. 그분이 이제는 한 여자로, 한 사람으로 돌아가 쉴 수 있도록 도와 주십시오. 당신의 엄마를, 당신께 부탁합니다.”

우리말의 ‘부탁하다’라는 말은 특별한 말입니다. 시집가는 딸을 사위에게 넘겨 주며 아버지가 “내 딸, 잘 부탁하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가지고 있는 사랑이 느껴지고, 장인이 사위에 대해 거는 기대와 신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또한, ‘부탁하다’라는 말에는 부탁하는 사람이 느끼는 한계성이 담고 있고, 그 한계성을 기꺼이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허한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시집가는 딸을 사위에게 맡기며 “잘 부탁하네!”라고 말할 때, 그 딸의 아비는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딸을 언제까지고 데리고 살아서는 안 된다는 한계,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아프지만 떼어 보내야 된다는 한계, 그리고 결혼한 딸의 삶을 아비인 자신이 간섭하거나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 그러나 그 모든 한계를 당연한 것으로 인정하고 겸허히 받아들일 때에만, “내 딸을 부탁하네!”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렇게 보면, ‘부탁’이라는 말은 참 정겨운 말입니다. 누군가를 누구에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로부터 부탁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사람 다움’이 있는 사람이며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무엇을 혹은 누구를 믿고 맡기고 부탁할 대상이 아무도 없다면 참으로 불행한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에게 무엇을 혹은 누구를 부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은 인간미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고,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신세도 지지 않겠고 다른 사람 일에 관여하지도 않겠다’는 태도가 깔끔해 보이고 능력 있게 들리지만, 그것은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불행한 선택일 가능성이 큽니다.

2.

소설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골 집으로 내려온 박소녀씨의 남편이 서울에 있는 큰 딸과의 통화를 하면서 그 동안 엄마에게 있었던 일을 말해 줍니다.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엄마가 작가로 출세한 딸을 얼마나 자랑스러워 했는지, 그리고 문맹인 엄마가 딸이 쓴 글을 읽고 싶어 소망원 여직원에게 읽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에 아버지는 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지헌아, 부탁헌다……니 엄마……엄마를 말이다.”(198쪽) 이 한 마디 말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아내에 대한 남편의 숨겨진 사랑을 느낍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남편의 한계를 느낍니다. 잃어버린 아내를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그를 짓누릅니다. 그래서 가장 믿음직한 큰 딸에게 아내를 부탁합니다.

큰 딸이 로마의 베드로 대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과 마주쳤을 때,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은 아들을 끌어안고 있는 마리아의 모습에 사로잡힙니다. 그는 마리아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낳았을 뿐 아니라, 십자가에 달린 메시야도 낳으신 분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와 악을 흡수하여 새로운 생명을 낳은 십자가의 기적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모든 어머니들의 사랑의 원형(archetype)임을 깨닫습니다. 그렇게 한 참 동안 피에타 상에 사로잡혀 있던 큰딸은 성당 밖으로 나오면서, 피에타 상 앞에서 하고 싶었으나 하지 못했던 말 한 마디를 독백처럼 내뱉습니다. “엄마를, 엄마를 부탁해!”

이 마지막 말은, 우리 신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에 가깝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상, 작가는 큰 딸이 피에타 상 앞에서 무릎꿇고 “신이시여, 제 엄마를, 엄마를 부탁합니다! 제 엄마에게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기도하는 장면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특정 종교의 색체를 진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작가의 선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대신, 큰 딸이 신의 현존 앞에서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엄마의 사랑이 신의 사랑에 뿌리를 둔 것임을 깨닫고 그 신에게 독백처럼 기도하는 모습으로 마지막을 그립니다.

한 없이 약해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부탁한 엄마, 그러나 자신도 그 엄마에게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서 큰 딸은 괴로왔을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 자신보다 더 큰 분에게 자신의 마음의 짐을 맡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누구인지, 큰 딸은 알지 못했습니다. 피에타 상 앞에 섰을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이 의지하고 의뢰할 대상이 누구인지 알았습니다. 큰 딸은 그 낯선 초월자에게 어색하지만 절박하게 기도합니다. 우리 엄마를 돌보아 달라고……

3.

인간은 홀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서로를 의지하고 맡기고 돌보며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정은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부탁하고 부탁받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모두 다 자기 앞을 챙기는 데에만 몰두하면 가정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가정 붕괴의 원인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가정에 모성이 회복되기를 갈망합니다. 과거처럼 한 여성이 모든 희생을 감당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가족 구성원 모두가 모성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알고 보면, 성경은 가정의 모성적 차원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남성 중심적인 시대에 쓰였음에도 불구하고, 부모와 자녀가 그리고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위해 돌보고 섬기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의 대표적인 가정 지침은 오늘 읽은 에베소서 5장에 나옵니다. 이 가르침을 요약하자면, 아내들에게는 “남편에게 하기를 주님께 순종하듯 하십시오”(5:22)라는 것이고,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내주심 같이 하십시오”(25절)라는 것입니다.

아내에게 주어진 요청과 남편에게 주어진 요청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쪽의 무게가 더 큽니까? 남편에 대한 요청이 훨씬 더 무겁습니다. 남편에게 주어진 요청,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마치 “어머니와 같은 심정으로 아내를 보살피십시오”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교회를 위해 생명을 바치신 그리스도의 사랑은 어머니의 사랑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아내들에게는 그렇게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대부분의 아내들이 그렇게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이 가정 지침의 대원리를 기억해야 합니다. 21절에 그 원리가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순종하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타쏘’는 원래 군대 용어인데, 부하가 자신을 상관에게 내어 맡겨 필요에 따라 자신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21절의 말씀은 가족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의 필요를 위해 자신을 내어 줄 마음 자세를 하고 살아가는 뜻입니다. 그런 태도가 가정의 기초라는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남편과 아내가 서로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식과 부모가 서로에게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언제고, 무슨 부탁이고 기꺼이 받아서 해결해 주는 어머니의 역할을 모든 가족이 떠맡으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여인에게서 나오는 ‘생물학적 모성’(biological motherhood)에 만족하지 말고, 혹은 그것을 당연시하지 말고, 믿음에서 나오는 ‘영적 모성’(spiritual motherhood)을 계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정 안에는 물론 부성적인 면도 있어야 하지만, 가정의 기초는 모성적인 사랑과 돌봄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경험하면, 이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비로소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으로 살피고, 그 사람의 필요을 위해 자신을 내어 줄 수 있게 됩니다. 이같은 변화가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4.

가족들 사이에서 나누는 사랑은 가족 아닌 사람에게까지 넘어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그 사랑이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하면 그 사랑은 병이 들었거나 불완전한 것입니다. ‘가족 이기주의’로 귀착되는 가족 사랑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모성적 사랑은 가정 바깥으로 흘러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박소녀씨, 그는 모든 가족을 끝없이 사랑했고, 끝없이 용서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것을 다 퍼 주며 사랑했습니다. 그 사랑은 먼저 가족을 위한 것이었지만, 자주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갔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소망원 이야기입니다. 장성한 자식들이 돈을 추렴하여 매 달 60만원의 용돈을 보내 오는데, 박소녀씨는 남편에게 그 돈을 자기 몫으로 달라고 청합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는 그 중에서 45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십 년 동안, 한 번도 빠짐 없이, 매달 고아들을 돌보는 소망원에 보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주 그곳에 가서 아이들을 씻겨주고 청소를 해 주었습니다. 박소녀씨는 그 아이들을 친손주들처럼 돌보았고, 그 아이들은 그를 친할머니처럼 따랐습니다.

서울에서 중국집을 하는 태섭이라는 사람의 아이들 이야기도 박소녀씨의 사랑의 속성을 잘 보여줍니다. 태섭은 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는 노모에게 아이 둘을 맡겨 놓고 서울로 가 버립니다. 아마도 가정이 파탄 난 것 같습니다. 박소녀씨는 그 아이들이 할머니로부터 밥도 못 얻어먹는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들을 데려다가 밥을 해 먹입니다. 처음에는 몇 끼니를 도와 준다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결국은 끼니마다 식탁을 같이하는 식구가 되었습니다.

박소녀씨의 사랑의 폭은 이은규라는 ‘숨겨진 남자’ 이야기에서 더욱 감동적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자식들을 먹이려고 방아간에서 밀가루를 빻아가지고 오는데, 그 남자가 자전거로 실어다 준다며 접근합니다. 이은규라는 그 남자는 해산을 앞둔 아내와 노모를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나갔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는 박소녀씨를 속여 밀가루가 담긴 함지를 자전거에 싣고 자기 집으로 도망쳤습니다. 박소녀씨는 수소문을 하여 그 집을 찾아냅니다. 분기탱천한 마음으로 그 집에 도착한 박소녀씨는 해산통을 겪는 이은규의 아내와 노모를 발견합니다.

그는 얼떨결에 산모를 도와 아기를 받아냈고, 도둑 맞았던 밀가루로 급히 수제비를 만들어 온 가족을 먹입니다. 자기 자식들을 먹이려고 준비했던 밀가루였습니다. 박소녀씨는 모른체 하고 지내려 했지만 마음이 불편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삼칠일이 지나서 미역 몇 가닥을 마련해 그 집을 다시 방문합니다. 그 때 산모는 해산 후유증으로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때부터 박소녀씨는 한 밤중이든 꼭두 새벽이든 틈 나는대로 그 집에 찾아가 엄마 잃은 아이에게 젖을 먹이곤 했습니다. 자기 딸이 배불리 먹기에도 부족한 젖이었지만, 내 몰라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알게된 이은규씨. 박소녀씨에게 갚을 수 없을 만큼의 사랑의 빚을 진 그는 박소녀씨가 외롭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의지처가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박소녀씨의 모성적 사랑에는 울타리가 없었습니다. 물론, 자기 자식을 먼저 챙기고 싶은 본능이야 그에게도 있었겠지만, 그의 사랑은 가족들에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싶은 사람을 만나면 그 즉시 그 사람이 그의 손자손녀가 되고, 아들 딸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참된 사랑의 속성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이제 멸종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5.

만일 박소녀씨 같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서울이었다면, 그는 실종된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불행히도, 서울은 모성이 완전히 증발되어 버린 도시였습니다. 파란 슬리퍼 위에 뼈가 허옇게 드러나는 상처를 가지고 방황하는 노인에게 눈길 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습니다. 보았다는 사람들은 몇 있었으나, ‘제대로’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를 자기 어머니처럼 생각하고 대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제 한 몸만을 생각하고 제 한 몸만을 위해 사는 사회 속에서 박소녀씨는 실종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의 ‘모성의 증발’에 대한 강력한 고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같은 비정한 사회에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을 맡기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는 지난 두 해 동안 연거퍼 아이들을 대학에 떠나 보냈습니다. 캠퍼스에 데려다 놓고 돌아오면서, 마치 넓고 황량한 광야에 아이를 혼자 덩그라니 떨어뜨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요즈음의 캠퍼스가 얼마나 위험 천만한 곳이 되었습니까? 총격 사건이나 성폭행 같은 물리적 위험도 많고, 정신적, 윤리적, 문화적, 영적 위험도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 누군가를 만나, “우리 아이를 좀 부탁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럴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별 수 없이,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제 아들을, 제 딸을 부탁합니다.”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되는 것이 얼마나 절실하고 필요하고 중요한지요! 박소녀씨와 같은 사람들이 많아지면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회적 모성’(social motherhood)이라고 부르는 것 같습니다. 서로 믿고 의지하고 섬기고 돌보는 사회적 분위기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마 19:19)고 말씀하신 것은 사회적 모성을 바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분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 5:44)고 말씀하실 때, 우리 사회가 모성적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열망하셨던 것 아니겠습니까?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 25:40)라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모성이 충만한 사회’를 생각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시인 김사인씨는 ‘딸년을 안고’라는 시에서 우리 사회의 모성의 회복을 갈망하면서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한 살배기 딸년을 꼭 안아보면
술이 번쩍 깬다 그 가벼운 몸이 우주의 무게인 듯
엄숙하고 슬퍼진다
이 목숨 하나 건지자고
하늘이 날, 세상을, 냈다 싶다
사지육신 주시고 밥도 벌게 하는가 싶다
사람의 애비 된 자 어느 누구 안 그러리
그런데 소문에는
단추 하나로 이 목숨들 단숨에 녹게 돼 있다고도 하고
미친 세월 끝없을 거라고도 하고
하여, 한 가지 부탁한다 칼 쥔 자들아
오늘 하루 일찍 돌아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잠든 너희 새끼들
그 바알간 귓밥 한번 들여다 보아라
귀 뒤로 어리는 황홀한 실핏줄들
한번만 들여다 보아라
부탁한다

굳이, 칼을 쥔 사람이 아니라도, 우리 모두가 이 부탁에 한 번쯤 귀 기우려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 가족을 제대로 보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보는 길입니다. 내 가족을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길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길로 인도하지 않는 ‘가족 사랑’은 사이비 사랑입니다. 내가 내 자식 귀한 줄 안다면 다른 자식도 귀한 줄 아는 것이 진품 사랑입니다. 이렇게 참된 사랑이 가정에서부터 사회로 흘러 넘칠 때, 사회적 모성은 서서히 회복될 것입니다.

6.

‘가정에서의 모성의 회복’ 그리고 ‘사회에서의 모성의 회복’을 생각하면서, 믿는 사람으로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모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알고 보면, 교회는 근본적으로 ‘모성 공동체’입니다. 모성적 사랑이 교회의 기초라는 뜻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성경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예수께서 십자가 아래에 있던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신 장면이 그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물과 피를 다 쏟으시면서 죽음의 언덕을 넘어가고 있던 예수님은 비통하게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또한 그 옆에 있던 제자 요한을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어렵게 입술을 뗍니다.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19:26). 이어서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말씀하십니다. “자,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27절). 말하자면, “요한, 내 어머니를 부탁하네”라고 뜻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에게는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야고보라는 동생은 사도들과 함께 초대 교회의 기둥으로 활동했고, 신약성경의 후반부에 있는 짧은 편지 ‘유다서’도 예수님의 동생이 쓴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누이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아니라도 어머니를 돌볼 동생들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합니다. 그 날로부터 제자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집에 모셨다고, 요한복음 19장 27절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은 새로운 가족을 창조하셨다 할 수 있습니다. 혈연을 뛰어 넘는 가족을 새로 구성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교회’를 창조하셨습니다. 그 교회의 존재 이유는 ‘돌봄’에 있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합하여 서로를 돌보고 살피고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처음부터 모성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고대로부터 ‘영적 어머니’(spiritual mother)라고 불려졌습니다. 세례를 통해 성령의 능력으로 새 사람을 낳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교훈으로 그 새 사람을 키워내는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한 교회의 교인이 될 때, 우리는 새로운 가정을 얻는 것입니다. 아니, 잃어버렸던 원래의 가정에 ‘복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창조주 하나님을 한 분의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영원한 가정에 ‘귀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버지됨이 제 육친의 아버지됨보다 더 근원적이고 영원하듯, 혈연으로 맺어진 가정보다 믿음으로 맺어진 가정이 더 근원적이고 영원합니다. 육신적인 가정은 기껏해야 80년 내외 우리를 붙들어 주지만, 교회를 통해 맺어진 영적 가정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영원한 나라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리기 전까지 이 지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교회로 모여 서로 돌보며 그 영원한 가족됨을 맛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것이기에 성경에 보면 모성적 사랑을 요청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에 사는 교인들에게 한 말을 들어 보십시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 4:19). 바울뿐 아니라 대부분의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교인들을 위하여 모성애적인 사랑으로 섬기고 헌신했습니다. 불행하게도,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교회 지도자들이 부성적 권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해 교회의 모성이 억압되거나 상실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면, 서로를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돌보는 영적 가정의 일원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모성적 사랑을 경험하고 배워 실천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의 권면을 들어 보십시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갈 5:13). 또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6:2). 이런 말씀도 합니다.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6:10).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분의 사랑은 모성에 더 가깝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이 두드러집니다. 부성적인 경향이 강했던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 지나치게 모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잘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병아리들을 품고 있는 어미 닭의 사랑(마 23:37)과 같고, 젖 뗀 아이를 품고 있는 어머니의 사랑(시 131:2)과 같습니다. 그 사랑으로 인해 생긴 교회이기에, 그리고 그 사랑을 전하도록 세움을 받은 교회이기에, 교회는 근본적으로 모성적인 것입니다.

7.

지난 다섯 주일 동안 기도와 관심을 가지고 <엄마를 부탁해> 연속 설교를 경청해 주신 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직접 알지는 못하지만, 좋은 소설을 써서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제공해 주신 신경숙씨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모든 문학가들과 예술가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그들의 손에서 나오는 작품들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시키고 우리에게 근원적이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것을 기억하게 만드는 도구로 쓰임 받기를 기도합니다.

이제, 연속 설교를 마치며, 우리는 이 소설이 우리에게 안겨준 그리고 성경 말씀이 우리에게 확인시켜 준 커다란 과제 하나를 품어 안아야 하겠습니다. ‘모성의 회복’이 그것입니다. 우리 가정에 모성이 회복되도록, 우리 사회에 모성이 회복되도록, 그리고 우리 교회가 모성 공동체로서 든든히 서도록,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마다에서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따뜻한 품과 온화한 미소 그리고 조용한 희생이 느껴질 수 있도록, 우리가 먼저 할 일을 찾아 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모성적인 사랑을 깊이 경험하고, 그 사랑 안에서 자라,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을 그 사랑으로 대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이루고자 했던 하나님 나라의 현실이 아니던가요? 이것이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은 곳에서 보고 싶어하는 현실이 아니던가요? 고 노무현 대통령이 개인 홈 페이지에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제목을 달아 놓았다는데, 진실로 ‘사람 사는 세상’이란 이렇게 ‘모성이 충만한 세상’이 아닐까요? 이생을 다하고 천국에 이르기까지 혹은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기까지 하나님의 모성적 사랑을 본받아 이같은 ‘살 맛 나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과제가 아닐까요?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이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걱정하는 조국에 그리고 우리가 몸 붙여 사는 이 나라에 모성이 회복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고 이 땅의 모든 교회들이 모성적 사랑으로 충만해지기를 기도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속한 공동체마다에 모성이 회복되고 ‘사람 사는 세상’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믿고 의지하고 서로 부탁하며 서로 섬기고 돌보는 세상이 이루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이미 누리는 행복이 더욱 깊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새 하늘과 새 땅을 약속하신 주님,
그 때가 오기 전,
먼저 제 마음에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소서.
제가 속한 가정에,
제가 속한 사회에,
그리고 저를 낳고 길러준 교회에
진정한 모성이 회복되도록,
저로 하여금 썩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밀알로 썩는 삶을 통해
더 행복하게 하소서.
더 많은 이들을 행복해지게 하소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진실로 사람 사는 세상,
살 맛 나는 세상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