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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9월 1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샘과 저수지"
(Wellspring and Reservoir)
--예레미야 (Jeremiah) 2:4-13

1.

지난 화요일, 밴쿠버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밤 늦게 와싱톤-덜레스 공항에 도착하여 꺼 놓았던 휴대 전화를 켰습니다. 켜자 마자 음성 메시지가 떴는데, 그동안 위암으로 투병하시던 교우께서 오후 5시에 소천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임종 전에 뵙고 싶었는데, 하루를 안 기다려 주시고 가셨습니다. 한 편으로 아차 싶으면서, 누군가가 저 위에서 "Welcome to Reality!"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또 다른 부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제 아내의 가장 친한 친구의 남편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이었습니다. 52세의 열정적인 감리교 목사입니다. 저에게도 3년 후배가 되기 때문에 신학교 시절에 보았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수염이 많아서 항상 아래턱이 검어 보였고, 늘 웃으며, 무엇이든 열심히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목회도 잘 했지만, 주로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지역으로 청년들을 이끌고 다니며 선교 활동에 열심을 냈습니다. 그러던 중 며칠 전에 중국 심양에서 뺑소니 차에 치어 중상을 입었고, 국내로 호송되어 치료를 받았으나, 지난 화요일 끝내 하나님 곁으로 떠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제 아내는 말할 것도 없고 많은 감리교 목회자들이 충격 속에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는 선배들에게 사랑받고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목회자였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아직도 손길이 필요한 아내와 자녀들 그리고 교인들을 남겨 두고 너무도 갑작스럽게 떠났습니다.

홀로 남겨진 친구에게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몰라 발을 동동 구르는 아내에게 위로가 될까 싶어 말했습니다. "그 친구는 워낙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남들의 두 배는 살았다고 볼 수 있어!" 그 말에 아내는 수긍합니다. 물론, 그 말로 그의 이른 죽음을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위로가 됩니다.

그를 생각하면, 다른 것에 한 눈 팔지 않고 한 가지 목적만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한 가지 방향으로 줄기차게 달려온 사람에게만 느껴지는 거룩함을 느낍니다. 그것이 그 죽음의 충격을 상쇄하고도 남는다는 느낌입니다. 확실히, 그 사람이 헌신했던 목적이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 짓고, 그 사람이 섬겼던 신이 그 사람의 삶의 궤도를 결정 짓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목적 없는 인생은 그럭 저럭하다가 아무렇게나 됩니다. 그렇게 살다 가면,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그 인생의 자취에서 거룩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허무함만 진하게 느낍니다.


2.

오늘은 '교회력에 따른 성서 일과'(Lectionary)에 맞추어 예레미야 2장을 읽었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북왕국 이스라엘이 패망한 지 한 참 후에 그리고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패망하기 약 50년 전에 예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남왕국 유다가 북왕국 이스라엘과 같은 멸망의 길을 걷는 것을 보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고하면서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유다 백성의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는 데 있었습니다. 그들을 가나안에 인도하신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거룩한 백성'이요 '제사장의 나라'가 되게 하려는 데 있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온갖 잡신을 섬기며 혼잡스러워진 가나안 주민들과 달라야 했습니다. 그들은 사랑과 진리와 정의와 아름다움의 근원이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그들이 이루어야 할 '가나안 드림'(Canaan Dream)은 그 땅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은 자주 그들의 뜻과 어긋났습니다. 가나안 토착민들은 모두들 자기 좋을 대로 사는데, 하나님은 그렇게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살아있을 때에는 기쁘게 하나님의 뜻을 따랐지만, 그 사랑이 식어가면서 그들은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리고 등을 돌렸습니다. 처음에는 하나님 눈치를 보면서 야금야금 죄를 탐하더니, 나중에는 아예 보란듯이 죄를 즐깁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예레미야를 통해 유다 백성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하나님의 절절한 마음이 뭍어납니다.

나 주가 말한다.
너희의 조상이 나에게서 무슨 허물을 발견하였기에,
나에게서 멀리 떠나가서
헛된 우상을 좇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5절)

내가 너희를 기름진 땅으로 인도해서,
그 땅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가장 좋은 것을 먹게 하였다.
그러나 너희는 들어오자마자 내 땅을 더럽혔고,
내 재산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7절)

너희는 한 번 키프로스 섬들로 건너가서 보고,
게달에도 사람을 보내어서,
일찍이 그런 일이 일어났던가를 잘 살피고 알아 보아라.
비록 신이라고 할 수 없는 그런 신을 섬겨도,
한 번 섬긴 신을 다른 신으로 바꾸는 민족은 그리 흔하지 않다.
그런데도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 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10-11절)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순종하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더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그리고 그들 아래에 있는 신들은 물질적인 번영과 다산의 복을 약속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조건이 없었습니다. 그 신들에게 풍성한 제물을 바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악하게 살아도, 아무리 부도덕하게 살아도, 그리고 아무리 제 멋대로 행동해도 그 신들은 눈 질끈 감고 복을 내려 준다는 것입니다. 유다 백성에게는 풍요의 신, 번영의 신, 쾌락의 신을 섬기는 것이 더 '쓸 모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 달리 말씀하십니다.

내 백성은 그들의 영광을
전혀 쓸 데 없는 것들과 바꾸어 버렸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바알을 섬기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하십니다. 유다 백성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쓸 모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힘쓰는 것이 '쓸 모 없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뿐 아닙니다. '쓸 모 없는 일'을 위해 살다 보니, 그들의 인생까지도 쓸 모 없게 되어 버렸다고 하십니다. 5절 마지막에서 이렇게 물으십니다.

헛된 우상을 좇아다니며 자신들도 허무하게 되었느냐?


우리의 삶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신을 섬기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유다 백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고 잘 사는 백성'이 되기 원했고, 그래서 바알을 택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한 동안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육체적인 쾌락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로 그들은 '쓸 모 없고' '허무하게' 되었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3.

자, 여기, 두 가지의 상반된 견해가 대립하고 있습니다. 유다 백성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순종하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이요 허무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때론 손해를 보고 때론 박해를 받는 것이 의미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적으로 사는 것이 쓸 데 없는 일이요 허무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아마도 유다 백성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분들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제 후배 목사님에게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하나님 믿어야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우리 주변에서 자주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데, 그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데,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당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막대기와 지팡이'(시 23:4)로 지켜 주신다는데, 안 그러실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의 저자 중 하나인 아삽은 다음과 같이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이렇다면,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온 것과
내 손으로 죄를 짓지 않고 깨끗하게 살아온 것이
허사라는 말인가? (시 73:13)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 질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믿는 사람들이라면 그와 같은 흔들림의 순간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 때가 신앙적인 면에서 '위기'이면서 또한 '기회'입니다. 한자의 '위기(危機)'는 '위험'(危險)의 '위'와 '기회'(機會)의 '기'가 합쳐진 말입니다. 위기를 잘 활용하면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잘 못 다루면 위험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허사가 아닌가?"라는 질문이 드는 순간을 잘 못 다루면 불신앙으로 빠지고 유다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등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 위기를 잘 다루면 더 깊은 믿음으로 들어갑니다. 형식적이고 교리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던 믿음이 진실한 믿음으로 깊어집니다. 인과응보적인 단순한 사고에 머물던 믿음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격적으로 주님을 믿는 성숙한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유다 백성이 헛된 것을 추구하여 허무하게 되었다고 말합니까?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 왜 허무한 것입니까?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되었든, 아니면 바알의 축복이 되었든, 많은 재산을 모으고 자녀들이 잘 되고 원하는 대로 마음껏 즐기게 되었는데, 그것이 왜 쓸 모 없는 것이고, 그것이 왜 허무한 것입니까? 그것이 진짜가 아닙니까? 그것이 실속 있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 내 손에 쥔 것이 제일 믿을만한 것 아닙니까?

정말 그렇게 믿습니까? 그렇다면, 시간을 내어 자신의 부와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관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River Road를 타고 포토맥 지방을 지나다 보면, 거대한 대지에 성채와 같은 집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주인은 그 성채 안에 살면서 자신의 거대한 자아를 자랑하고 싶은지 모릅니다. 그런 모습을 지켜 볼 때, 여러분에게는 어떤 생각이 듭니까? "아, 나도 저렇게 되어 보고 싶다!"는 부러움이 들던가요? 혹은 "저게 뭘까?" 싶은 마음이 들던가요? 그 모습이 허무해 보이지 않던가요? 그 감정은 가지지 못한 자의 비틀린 심정일까요?

혹시 자신이 '가진' 권력 혹은 '가졌던' 권력을 자랑하는 사람을 만나 보셨습니까? 혹은 돈 자랑에 침이 마르지 않는 사람을 대해 보셨습니까? 입만 열면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사람과 한 자리에 앉아 보셨습니까? 어떻던가요? 그 앞에서 주눅이 들던가요? "나도 그런 권력을 가져 보았으면..." 싶던가요? "왜 나는 이렇게 돈이 없나?" 싶던가요? "내 자식들은 왜 저렇지 못한가?" 싶어서 한탄스럽던가요? 혹은 그 자랑이 헛되게 들리지 않던가요? 덧 없어 보이지 않던가요? 그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의 열등감의 표현일까요?

육체적인 욕구를 마음껏 충족시켜 본 적이 있습니까? 최고의 음식을 차려 놓고 마음 껏 먹어 본 일이 있습니까? 천국에 닿은 것처럼 느낄만큼 쾌락을 누려 보았습니까? 절경을 찾아 값비싼 호텔에서 여행을 즐겨 보았습니까? 그랬더니 어떻던가요? 늘 그렇게 살면 좋겠다 싶던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권태감과 허무감이 밀려 오지 않던가요?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느끼지 못하겠던가요? 제가 그런 기가막힌 즐거움을 못 누려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일까요? 정말 그럴까요?


4.

오늘 읽은 말씀의 마지막 절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귀가 번쩍 뜨이는 말씀을 하십니다.

참으로 나의 백성이 두 가지의 악을 저질렀다.
하나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이고,
또 하나는
전혀 물이 고이지 않는,
물이 새는 웅덩이를 파서,
그것을 샘으로 삼은 것이다. (13절)

하나님은 여기서 샘물과 물 웅덩이를 비유로 삼으십니다. 물 웅덩이를 저수지로 바꾸어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을 믿고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은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는 것과 같고,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을 위해 사는 것은 마치 저수지를 가지고 사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샘물'은 지하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물을 말합니다. 샘물은 맑고 깨끗합니다. 또한 샘물은 가물어도 마르지 않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 저장된 거대한 호수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시원한 만족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순종하며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힘쓰는 것은 마치 마르지 않는 샘물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언제든지 샘에서 물을 길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해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로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이 말한 바와 같이,
그의 배에서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올 것이다. (요 7:37-38)

반면, 저수지는 빗물을 저장해 두는 곳입니다. 저장된 물은 마실 수 없습니다. 굳이 마시려면 정수해야 합니다. 또한 가뭄이 들면 금새 마릅니다. 물이 마른 저수지 바닦은 보기에 흉합니다. 만일 저수지가 유일한 식수의 원천이라면, 그 사람은 늘 기갈에 허덕일 수밖에 없고 또한 가뭄이 들면 심한 위기를 만납니다.

이런 빛에서 보면,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만족과 쾌락을 저수지 물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일입니다. 물질적으로 번영하는 것, 많은 돈을 버는 것, 세상적으로 유명해지는 것, 자식이 잘 되는 것, 권력을 가지는 것, 건강해지는 것, 예뻐지는 것, 공부 잘 하는 것, 잘 먹고 잘 사는 것, 값비싼 여행을 즐기는 것, 육체적 쾌락을 누리는 것--이 모든 것은 저수지의 물과 같습니다. 그것은 잠시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게 해 주지만, 쉽게 권태롭게 만들고 지치게 만듭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들은 마치 저수지의 물처럼 환경에 따라 흘러 넘치기도 하고 바닦까지 말라 버리기도 합니다.

유다 백성들은 저수지 물만으로 충분할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물질적인 번영으로, 육체적인 쾌락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샘물을 버렸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얻고 그분에게 힘을 얻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뜻을 찾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곧 영적 기갈에 지치게 되었고, 그들의 희망이던 저수지 물은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저수지 물도 필요하지만, 샘물이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제가 시골에 살아 보아 아는데, 좋은 샘물을 가진 사람에게도 저수지 물은 필요합니다. 저수지 물은 나름대로의 용도가 있습니다. 농작물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고, 가축을 기르는 데도 저수지 물이 좋습니다. 샘물은 없고 저수지 물만 있다면 그 사람은 늘 갈증에 시달릴 것이고, 머지 않아 병에 걸려 큰 어려움을 당할 것입니다. 반면, 샘물은 있는데 저수지 물이 없다면, 생명에는 지장이 없겠지만 생활에는 불편이 생깁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것은 저수지 물을 다 버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만, 동시에 육적인 존재요 땅의 시민입니다. 우리는 육신을 입고 살고 있으며 하루 세 끼 밥을 먹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물질이 있어야 하고, 우리 육신의 욕구는 적당한 정도로 충족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권력은 잘 활용하면 좋은 도구가 되고, 유명해지는 것도 위험하기는 하지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도 기뻐하시는 일이며, 결혼의 제도 안에서 육체적인 사랑을 주고 받는 것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자식이 잘 되는 것도 축하하고 축하받을 일이며, 때로 좋은 곳을 여행하는 것도 바랄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저수지 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만족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저수지의 물은 흘러 넘치기도 하지만 자주 마릅니다. 우리 영혼의 진정한 만족은 오직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는 것이 곧 생수를 마시는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되고 또한 그렇게 살도록 힘쓸 때, 우리에게는 마르지 않는 생수가 터져 납니다.

생수를 통해 진정한 만족을 얻으면, 저수지 물에 목 매지 않고 살게 됩니다. 저수지 물이 넘친다고 하여 교만해지거나 자랑삼아 떠들지 않습니다. 저수지 물이 고갈되었다 하여 절망하거나 한탄하지 않습니다. 저수지 물에 대해서는 자족하면서 샘물에 의지하여 살아가게 됩니다. 그럴 때, 물질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5.

두 주일 전, '신학생/목회자 멘토링 컨퍼런스'를 섬기느라고 사흘 동안 침묵과 묵상과 기도에 많은 시간을 쏟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저의 영혼이 점점 목말라가고 있었던가 봅니다. 목요일 새벽, 기도회를 마치고 저의 기도의 자리에 앉아 기도를 시작했는데, 아, 샘물에 목을 추긴다는 말이 그런 뜻임을 새삼 경험했습니다. 충분한 시간 동안 기도하고 난 다음, 저의 영혼에 기쁨이 들어찼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저의 페이스북에 올렸습니다.

우주의 중심

며칠 만에
강단 뒤
내 기도의 자리에 앉다

아,
여기가 내 자리다
나는 여기에 있어야 나다
이 자리에 앉을 때
내가 바로 보인다

여기가
내 우주의 중심이다
여기 앉으니
세상이 바로 보인다
나를 위협하던 거대한 근심들이
바람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든다

여기가
어머니의 품이다
이곳에 앉으니
따뜻한 품이 나를 감싸고
나는 어린아이처럼
그 품을 파고 든다

아,
여기서 죽어도 좋겠다

이 기도문에서 저는 하나님 안에서 생명수를 마시는 만족감을 표현하려 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준비하며 이 기도문을 다시 읽고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다른 무슨 경험을 했다 하여 이토록 깊은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감사드립니다. 제게 영혼의 생수를 주신 주님께,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도 이 생수의 맛을 보시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해갈을 얻고 나면, 내가 가진 다른 모든 것은 저수지의 물과 같음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내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압니다. 내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 빚어져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사는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한 번 주어진 인생을 가장 알차게 사는 길임을 압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52세의 이른 죽음에도 불구하고 꽉 채워진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은 100세를 살아도 허탕 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생수를 마시고 영혼의 만족을 얻은 사람은 저수지 물에 대해 자족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사막으로 만들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지 않습니다. 물질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해서 오만해지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이 부족하다 하여 주눅이 들거나 낙심하지 않습니다. 물질이 넉넉하다 하여 한 없이 사치를 즐기지 않고, 물질이 부족하다 하여 한 없이 쪼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에게서 감사와 기쁨의 원인을 찾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기원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의 샘이 터지기를! 생수의 샘으로 영혼의 목마름을 채우고 하나님께서 주신 저수지 물을 잘 활용하여 저와 여러분의 인생도 꽉 찬 인생이 되기를! 그럴 때,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며,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진실로 행복할 것입니다. 또한 그 행복이 우리 안에 머물지 않고 이웃에게로 번져 나갈 것입니다. 이 은혜와 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 안에 생수가 강물처럼 흘러나도록
저희를 주님 안에 붙들어 매어 주소서.
헛된 것을 좇아 살다가 허망해지지 않도록
저희의 마음과 생각을 붙들어 주소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만족을 찾고
주님 안에서 삶의 방향을 찾으며
주님 안에서 삶의 이유를 찾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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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3/audio042813kim_c.mp3

 

 

"창조주 앞에 서다" Stand Before the Creator
--나는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 시편 Psalms 33:1-9
1.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관해 사람들의 의견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립니다.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에는 처음도 끝도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런 상태였고 영원히 그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이 시작된 때가 있으며 따라서 끝날 때도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이 어느 때인가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크게 두 편으로 갈립니다. 한 편에는 저절로, 우연히, 자연 선택의 법칙에 따라 진화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한 편에는 우주와 생명은 초월자(the Transcendent Being)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앞의 입장을 '진화론'(evolutionary theory or evolutionism)이라고 부르고, 뒤의 입장을 '창조론'(creationism)이라고 부릅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책이 나온 이래 지금까지 진화론과 창조론은 치열한 혈투를 벌여 왔습니다.

진화론과 창조론의 싸움 사이에서 저는 한 참 동안 갈팡질팡 했던 적이 있습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한 과학자들의 정직한 연구 결과들을 무시하는 것은 신앙적으로 옳지 않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신앙의 적이 아닙니다. 과학은 다른 지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진화론도 과학을 통해 얻은 지식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진화론을 포함하여 과학 전체를 신앙의 적인 것처럼 가르치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알고 보면, 이것은 아주 큰 아이러니입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세월 동안 축적된 과학적 지식으로 인해 발달된 문명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아미쉬(Amish) 공동체 사람들이 아닌 다음에야, 기독교인들도 모두 과학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과학의 혜택을 입고 살아가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신앙의 이름으로 과학을 정죄하고 비난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그렇다면, 진화론에 대해 교회가 제시하는 대안은 과연 받아들일만 합니까? 그것을 소위 '창조 과학'(creation science)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성경을 과학 텍스트로 간주하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우주와 생명의 기원을 설명하려는 '하나의 이론'(a theory)입니다. 창조 과학자들은 그들의 입장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그 입장은 '하나의 해석'이요 '하나의 이론'입니다.

한국 교회와 이민 교회들이 대부분 창조 과학을 유일한 신앙적 대안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저도 한 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오래 전에 이 분야에 대해 얼마간의 연구를 하고 나서는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창조 과학'은 유일무이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론입니다. 이 이론에는 무시하지 못할 여러 가지 결함과 함정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모두, 자동적으로 창조 과학의 이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화론(evolutionism)은 무신론(atheism)과 동의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생명을 창조하셨다고 믿으면 자동적으로 진화론을 부정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과학자들 가운데 진화론을 연구하며 하나님의 창조 과정을 탐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의 연구 결과는 우리의 믿음에 대한 위협이 아닙니다. 물론, 리차드 도킨스와 같이 진화론을 가지고 무신론을 증명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진화론을 가지고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과학자들도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의 질문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질문은 "우주와 생명 현상 배후에 창조자가 있는가?"라는 것입니다.

우주와 생명 현상의 배후에 창조자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부인하느냐의 문제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증거를 보고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과학이 더 발전되면 신의 존재를 확실하게 입증하거나 부정할 때가 올지는 모릅니다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리고 앞으로 오랫 동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창조자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는 각자의 경험과 지식과 직관과 통찰과 영감을 총동원하여 선택할 문제입니다.

인간이란 참 간사합니다. 또한 매우 유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다 그렇게 보입니다. 누군가를 의심해 보았습니까? "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라는 입장을 정하고 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누군가를 좋게 보기로 마음 먹으면 매사가 예뻐 보입니다. "아내가 예뻐 보이면 처갓집 말뚝까지 예뻐 보인다"는 속담이 그래서 나온 것입니다. 창조자가 있다는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이 모두 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줍니다. 반대로, 신을 부정하는 입장을 선택하고 보면, 그런 증거들이 끊임없이 눈에 나타나게 됩니다.

때로,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신의 존재에 대해 어떤 말을 하면, 언론에서 그것을 대서특필합니다. 마치 그것이 그 사람의 과학적 연구의 결과인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에 대한 입장은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니라 그 사람이 선택한 세계관입니다. 과학자는 하나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과학자가 하나님에 대해 무슨 말을 하면 맹목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과학이 현대인들의 우상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신의 존재에 대해 누가 어떤 말을 했다 해서 그것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과학적인 연구로는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우주와 생명 현상의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는 쪽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이며 지금도 성령을 통해 온 우주를 운행하시고 주관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입장이십니까? 혹시, 진화론에 대해 기독교가 취해 온 잘못된 태도 때문에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데 어려움을 겪고 계신 것은 아닙니까? 무신론적 진화론자들을 무조건 따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현대 과학을 모두 부정할 수 없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문제는 진화론을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창조주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냐 말 것이냐에 있습니다. 창조주에 대해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은 하늘과 땅을 지으신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분을 통해 하나님에 관한 비밀이 계시되었다고 믿는다면, '창조 신앙'(creation faith)은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우리는 창조주를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을 때, 우리에게는 어떤 변화가 일어납니까? 얼마 전에 제가 겪었던 경험을 통해 그 의미를 나누어 보려 합니다.

저는 지난 해 3개월 동안의 안식월을 지내면서 새로운 취미를 하나 개발했습니다. 그 기간 동안에 멀리 여행할 수가 없어서 어찌할까 궁리하다가 쉐난도(Shenandoah)에서 등산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 이전에는 걷기를 즐겼지만, 본격적인 등산은 별로 한 적이 없습니다. 안식월 동안에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 제일 큰 과제라고 생각했기에 아내와 함께 자주 산을 올랐습니다. 처음에는 서 너 시간으로 단련한 후 나중에는 다섯 시간에서 일곱 시간 정도를 걸었습니다. 경험을 해 보니, 등산이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제는 가끔씩이라도 등산을 하지 않으면 몸이 쑤시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행할 기회가 있으면 등산할 곳을 찾아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입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산에 올랐는데, 세 시간 정도 걸어 올라가니 정상에 닿았습니다. 산 위에는 아직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가 남아 있었습니다.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가슴이 확 트였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마땅한 말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참을 감상하는데, 문득 예배를 드리고 싶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손수 지으신 대자연의 성전, 그 성전의 지성소인 정상에서 예배 드리는 것처럼 멋진 것은 없다 싶었습니다.

제 아내와 저는 한적한 곳으로 가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잠시 묵상으로 기도 드리고, "참 아름다와라 주님의 세계는"과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 찬송의 가사가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그 찬송은 예배당 안에서 부르라고 지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찬송을 끝내고, 아내가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하던 중에 아내가 목이 메어 멈칫 거립니다.

기도를 마치고 성경을 읽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읽고, 이어서 요한복음 1장을 읽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창 1:1-2)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여라. 씨를 맺는 식물과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땅 위에서 돋아나게 하여라" 하시니, 그대로 되었다. 땅은 푸른 움을 돋아나게 하고, 씨를 맺는 식물을 그 종류대로 나게 하고, 씨 있는 열매를 맺는 나무를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였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창 1:11-12)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창조된 것은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니, 어둠이 그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요 1:1-5)

아, 이 말씀들도 예배당 안에서 읽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연구실에서 책을 붙들고 씨름할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대자연의 위엄에 둘러 싸인 채로 읽어야 할 말씀인 것을 그제서야 알 수 있었습니다.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말씀이요, 수 없이 읽은 말씀인데, 그 날, 이 말씀들이 제게 전혀 새로운 무게와 빛깔로 다가왔습니다. 마치, 저를 둘러싼 산과 나무와 새들이 "아멘! 아멘!"하고 응답하는 것 같았습니다. 시편 19편의 말씀이 제 마음에 메아리쳤습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 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 준다.
그 이야기, 그 말소리,
비록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소리 온 누리에 울려 퍼지고,
그 말씀 세상 끝까지 번져 간다. (시 19:1-4)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대자연의 성전 안에서 창조에 관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몇 가지 제 마음에 차오르는 감정과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첫째,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겸손해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제가 앉아 있는 바위는 수백만년 전에 바다 속에 있었습니다. 거대한 지형 변화로 인해 바다 바닦이 산이 되고 산이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그로부터 또 수백만년이 흐른 후, 거대한 빙하가 밀려가면서 계곡이 만들어지고 기암괴석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산 꼭대기에서 주은 조개 껍질은 백만년의 신비를 담고 있는 듯하여 보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자연 앞에서 저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저와 제 아내가 한 순간에 자취를 감춘다 해도 이 세상은 무심히 제 갈 길을 갈 것입니다.

보통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생각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진정한 겸손은 '자신을 제대로 보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은 우리 자신을 스스로 깎아 내리는 것을 마음 아파하십니다. 자식이 자신을 비관할 때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픕니까? 하나님도 같은 마음이십니다. 겸손을 행한다는 구실로 자신을 비관하고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실 일입니다.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위치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대자연의 성전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하니, 제가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도 선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창조주의 임재 앞에서 저는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오, 주님, 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 고백이 얼마나 저 자신을 자유하게 하던지요! 마치 새털처럼 저의 존재가 가벼워지는 것 같았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면 날아갈 듯했습니다. 팔을 흔들면 새처럼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아무 것에도 매어있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주님, 지금 데려가셔도 좋겠습니다"라는 고백이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니 저절로 찬양이 흘러 나왔습니다. 우리는 작가를 직접 보지 못해도 작품을 보고 감동을 받을 때 그 작가에게 영광을 돌리고 찬양합니다. 미켈란젤로가 그린 위대한 성화를 보고 감동할 때, 우리는 그 작가를 생각합니다. 전원교향악(The Pastorals)을 들으면서 봄의 풍경이 선명하게 연상될 때, 우리는 베에토벤을 찬양합니다. 감동스러운 영화를 보고 나서 감독을 칭찬합니다. 그것처럼, 대자연의 성전에 서서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압도 당하고 보니, 저절로 "오, 주님, 당신이 어떤 분이시기에!"라고 감탄하게 되었습니다.

대자연의 신비 앞에서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를 부르고 "참 아름다와라"를 부르니, 제 눈 앞에 보이는 자연이 모두 함께 찬양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찬양은 모름지기 하나님이 어떤 분임을 느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시편의 말씀에서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의인들아, 너희는 주님을 생각하며 기뻐하여라.
정직한 사람들아, 찬양은, 너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수금을 타면서, 주님을 찬양하여라.
열 줄 거문고를 타면서,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면서, 아름답게 연주하여라.
주님의 말씀은 언제나 올바르며, 그 하시는 일은 언제나 진실하다.
주님은 정의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온 땅에 가득하구나.(시 33:1-5)

여기에 나오는 명령형들을 보십시오. "기뻐하여라", "찬양하여라", "노래하여라", "연주하여라"--이것이 명령한다고 되는 일입니까? 억지로 기뻐해 보았습니까? 억지로 찬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까? 노래와 연주는 신나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명령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명령을 합니까? 이 명령은 기뻐할만큼, 찬양이 터져 나올만큼, 노래하고 연주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만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라는 말입니다. 온 땅에 가득한 창조주의 위엄과 영광을 볼 때, 찬양은 저절로 터져 나옵니다.


5.

셋째, 대자연의 성전 앞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보니 무한한 감사가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이 아름다운 세상에 저를 있게 하신 것에 감사했고, 그 아름다움을 맛보게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한 번의 고귀한 인생을 허락하셨고, 제가 태어나기 전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마련하셔서 그것을 보게 하시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그 하나님께서도 나를 아신다니, 쉽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신 창조자께서 우리를 자녀로 삼으셨기에 그분 안에서 우리의 존재도 영원해진다는 겁니다. 그러니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넷째,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저의 자리를 찾고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에 감사하고 나니, 저의 마음에는 거룩한 책임감이 들어찼습니다. 제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고 그 은혜를 갚는 것이 제 삶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더욱 깨끗하게 살고, 더욱 거룩하게 살며, 더욱 사랑하며, 더욱 의롭게 살아야겠다는 결단과 고백이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하나님의 형상'(image of God)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 학설이 분분합니다. 대표적인 학설이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마치 알렉산더 대왕이 다른 민족을 점령할 때마다 자신의 동상을 그 나라에 세워 둔 것처럼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대리자로서 창조했다
는 해석입니다. 저는 이 두 가지 해석을 다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에게 당신의 형상을 주시어 당신을 대신하여 물질 세계를 다스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주셨습니다. 그 성품을 따라 창조주의 뜻을 살피며 물질 세계를 돌보는 것이 인간의 과제였습니다. 그 형상이 깨어지기 전, 즉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이전의 세상에 대해 창세기 1장 31절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엿샛날이 지났다.

이 모든 조화와 균형이 깨어진 것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죄는 단순히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죄로 인해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고, 하나님의 뜻에 반하여 자기의 욕심대로 하나님의 걸작인 이 물질 세계를 오염시키고 훼손시켰습니다. 이제는 돌이키기 어려울만큼 인간의 죄는 깊어졌고, 그로 인한 질병도 심해졌으며, 하나님의 위대한 걸작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최근에 겪은 몇 가지 사건 만으로도 인간의 죄가 얼마나 깊으며,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이 생겨나고 있고, 우리가 사는 피조 세계가 얼마나 망가졌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어느 과학 저널에 실린 보고서에 대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항우울제(anti-depressent)의 소비가 급증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결과로 바다로 유입되는 항우울제의 화학 성분도 급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환자들이 약을 먹지 않고 화장실에 버리는 양도 엄청나고, 소변이나 다른 분비물을 통해 바다로 흘러 들어갑니다. 그것을 물고기들이 먹고는 이상 행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같은 어종끼리 집단으로 몰려다니던 물고기들이 이탈하여 혼자 다니기도 하고, 전혀 나타나지 않던 곳에 나타나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통계로는 물고기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죄로 인해 심각해진 인간의 정신 질환이 물고기에게까지 피해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6.

이렇게, 대자연의 성전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한 다음, 축도로 예배를 마쳤습니다. 축도할 때 제 앞에는 한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실은 온 세상 사람들과 모든 생명을 두고 축도를 한 것입니다. 예배당 안에서 축도할 때는 예배당 안에 모여 있는 사람만 생각하게 되는데, 산 정상에서 축도를 하니, 모든 인류를 위해 그리고 모든 생명체를 위해 축복하며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유물론적 시각(materialistic view)으로 보면 착각처럼 보이지만, 영적인 시각(spiritual view)에서 보면 진실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나니, '헌금은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 "감사를 느끼기만 하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마치 누군가에게 줄 선물을 포장해 놓고 주지 않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렸으면, 구체적인 표현을 해야 마땅합니다. 그래서 어쩔까 생각했습니다. 그 때, 좋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점심을 사 먹을 때 우리에게 시중드는 사람에게 두둑한 팁을 주면 하나님께서 기뻐할 것 같았습니다.

산을 내려와 가까운 멕시칸 레스토랑에 가니, 앳된 처녀가 우리를 맞아 주었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마음 먹었던 대로 두둑한 팁을 남겨 두고 왔습니다. 난데 없는 두둑한 팁을 보고 기뻐했을 그 아가씨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주 좋았습니다. 그 아가씨는 분명 의아했을 것입니다. "저 사람이 계산을 할 줄 모르나? 돈이 많아서 물쓰듯 하는 사람인가? 다시 오지는 않겠지?" 그런 생각을 했겠지만, 기분은 좋았을 것입니다. 그 아가씨가 기분이 좋아졌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과 삶의 초점을 바로 잡으십시다. 우리의 믿음의 고백을 굳게 잡으십시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굳게 잡으십시다. 창조주가 계시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그 증거입니다. 그분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면 그분이 바로 우리의 창조자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온 우주를 지으신 그분, 그리고 나를 지으신 그분을 만나면 우리는 더 이상 같은 존재일 수 없습니다. 창조주 앞에서 우리의 분수를 찾고 겸손해질 것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기에 즐거워하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기에 마음을 다할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이 땅에서 구원과 영생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영혼과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기를 기뻐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물질을 나누며 때로는 삶과 죽음의 한계까지도 넘어섭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모든 것을 바로잡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 같은 믿음 그리고 이 같은 삶에 이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는 영원하신 창조주의 은총 안에 살고, 죽어서는 그분의 영원하신 품에 안기는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기원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님 앞에 머리 숙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창조주 하나님,
온 마음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창조주 하나님,
저희의 삶을 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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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6)

 

설교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3/audio010613kim_c.mp3

 


"우리가 속한 나라"
(The Kingdom We Belong)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Suffered Under Pontius Pilate)
--요한복음 18:33-40

 

1.

Happy New Year! 이 인사말 그대로, 2013년도에는 교우 여러분의 삶에 새로움이 가득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새로움을 통해 신선한 행복감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일신 우일신'(日新 又日新, Being renewed again and again)의 은총이 성령의 능력으로 일년 내내 지속되기를 기원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죄인의 대명사처럼 알려져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이 특히 유명한데, 가룟 유다와 본디오 빌라도가 그렇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주후 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 지방을 통치한 로마 총독이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황제가 총독을 보내어 우리 나라를 다스렸듯, 로마 황제는 점령한 나라마다에 총독을 보내어 통치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로마 황실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민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들은 그 유별난 민족을 잘 길들여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유대 총독의 자리는 승진을 위한 좋은 발판이었습니다.

빌라도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복음서 외에도 몇 가지 역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유대 역사가 유세푸스(Josephus)는 빌라도에 대한 몇 가지 기록을 남겨 두었고, 필로(Philo)라는 유대 작가 역시 간단하지만 빌라도에 대한 기록을 남겨 두었습니다. 1961년에는 소위 '빌라도의 돌'(Pilate Stone)이라는 것이 이탈리아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유물로 인해 빌라도가 실존 인물이었다는 점이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는 고백은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적인 인물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땅을 다스리고 있을 때 예수님은 활동하고 고난받고 죽임을 당하셨으므로, 그분은 아무리 일러도 26년 이후에 활동하셨고 아무리 늦어도 36년 이전의 어느 때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습니다. 그 사람들은 예수는 초대 교인들이 만들어 낸 상상의 인물이며 따라서 복음서의 이야기들은 모두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일종의 '음모설'(conspiracy theory)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의 마음은 음모설에 쉽게 기웁니다. 어떤 사건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지 않고, 뭔가 불순한 의도가 숨겨져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음모설에 솔깃하는 것을 보면 인간의 마음이 원죄에 깊이 물들어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가 실존 인물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세종대왕이 꾸며낸 인물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이나 얼토당토 않은 말입니다.


2.

본디오 빌라도가 많은 문학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그가 맡은 역할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 황실은 유대인들에게 상당한 정도의 자치권을 허락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자치 정부가 '공회' 혹은 원어로 '산헤드린'(Sanhedrin)입니다. 유대인들과 관련된 대부분의 일들은 이곳에서 처리하고 해결했습니다. 그런데 산헤드린이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형(capital punishment)을 집행하는 일이었습니다. 산헤드린은 사형 판결을 내릴 수는 있었지만 사형을 집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로마 총독만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죽게 한 궁극적인 책임이 빌라도에게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빌라도에게 그 모든 책임을 지우는 것이 부당해 보입니다. 복음서의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아무런 문제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로마의 통치에 전혀 위협이 될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여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핑게로든 그를 풀어주려 했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나옵니다. 가끔 뉴스에 보면, 경찰들이 '관할 싸움'이라는 것을 했다는 보도를 접합니다. 영등포에 사는 사람이 강남에서 골치아픈 사건을 저지르면, 강남 경찰서에서 그 범인을 영등포 경찰서에 떠넘기려 합니다. 그러면 영등포 경찰서에서는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 강남이니 강남 경찰서에서 담당해야 한다고 다시 돌려 보냅니다. 그와 동일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이 누가의 기록입니다. 예수가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서 빌라도는 그 골치아픈 사건을 헤롯 안티파스에게 보낸 것입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로마 황제로부터 갈릴리를 분할받아 통치하고 있던 왕입니다. 하지만 헤롯은 유대 땅에서 일어난 문제이니 자기 소관이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예수님을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

그 즈음에 빌라도는 아내에게서, 지난 밤 꿈에서 예수로 인해 몹시 괴로움을 당했으니 관여하지 말라는 전갈을 받습니다(마 27:19). 하지만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계속하여 빌라도를 압박합니다. 그들은 마침내 "이 사람을 놓아주면, 총독님은 황제 폐하의 충신이 아닙니다. 자기를 가리켜서 왕이라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황제 폐하를 반역하는 것입니다"(요 19:12)라고 협박합니다. 예수를 놓아주면 황제에게 고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총독으로서는 가장 공포스러운 협박입니다. 빌라도는 결국 물을 가져다가 손을 씻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책임이 없으니, 여러분이 알아서 하시오. (마 27:24)

이렇게 보면, 빌라도는 할 만큼 한 것 같습니다. 예수를 죽게 한 책임은 대제사장 가야바와 유대교 권력자들에게 있지, 빌라도에게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어찌 보면, 빌라도는 피해자처럼 보입니다. 그러니, 그의 이름을 '사도신경'에 올려, 세상 끝날까지 주일마다 세계 모든 교회에서 그의 이름을 불러 정죄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동정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저도 한 동안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동정론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세푸스나 필로같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을 통해 빌라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더 깊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는 로마 황제의 눈에 들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총독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가지고 있었던 유일한 관심은 출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폭도들을 잔인무도하게 진압했습니다. 황제에게 과잉 충성을 한 것입니다. 주후 36년에 폐위된 것도 사마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을 너무 잔혹하게 다루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절대로 '고뇌하는 양심'이 아니었습니다. 기껏해야 그는 교활한 정치인이었습니다.

둘째는 빌라도를 동정하는 제 마음의 내면을 보고 나서 그에 대한 동정론을 내려 놓았습니다. 빌라도의 선택을 두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라고 두둔해 주려는 제 마음 안에는 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같은 핑게를 대고 싶은 흉계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제가 저지르는 죄들은 대부분 "어쩔 수 없어. 이럴 수밖에 없어. 누구라도 이렇게 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행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빌라도가 그렇게 선택한 것은 자신의 정치 생명을 위태롭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진실와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면 달리 선택했을 것입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진리를 따를 마음이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짓는 죄들도 모두 저의 욕심 때문임을 인정합니다. 때로 이런 저런 핑게를 대지만, 잘라 말하자면, 저는 손해 보기 싫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빌라도의 행동처럼 저의 행동에 대해서도 동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 진실을 깨닫고 나서부터는 더 이상 빌라도를 옹호하지 않고 있습니다.


3.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빌라도를 '사도신경'에 올려 정죄하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만일 예수님을 죽게 한 장본인으로 정죄하기 위해 빌라도의 이름을 올렸다면,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이 '사도신경'에 오른 이유는 그를 정죄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다른 데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모양의 권력자를 상징합니다. 그 자리에 헤롯이라는 이름을 넣어도 좋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이름을 넣어도 좋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았다"는 말은 고백은 ”예수께서 세상 권력에 의해 고난을 받았다"는 뜻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라고 고백하면서 "왜 빌라도지?"라고 질문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어, 왜 예수님이 세상 권력자들에게 고난을 받으셔야 했지?"라고 물어야 합니다. 이 물음은 우리가 믿는 믿음의 본질에 대해 아주 중요한 진실을 말해 줍니다.

지난 2천 년 동안 예수님을 정치 혁명가(revolutionary)로 그리려는 학자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가장 먼저 제자들이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분은 정치 권력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갈릴리의 군중들이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도 그분은 미련없이 몸을 감추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은 왕좌에 오른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올라 정치범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적인 구원자'로만 그립니다. 그분은 오직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믿어왔고 또한 생각해 온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아무 관심이 없고 오직 하나님 나라 그리고 개인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많은 교회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정치 권력을 탐하여 정치 혁명을 도모하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이지만, 그분이 오직 인간의 영혼에만 관심을 두셨다고 생각하는 것도 큰 오해입니다. 그분은 개인 개인의 영혼을 주목하셨지만 또한 하나님 나라를 보고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을 만나 그의 영혼을 들여다 보실 때 그분의 마음은 하나님 나라를 보고 계셨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되는 '작은 사건'들이 모여 온 세상이 하나님 나라로 변화하는 '거대한 사건'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 권력을 원하지 않으셨지만,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바꾸시기 원하셨습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고 살아 이 세상에 온전한 정의와 사랑이 실현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분은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 하셨습니다. 과거에 총과 칼로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돈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자기 나라'를 만들려는 사람들이 꾸미는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런 것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오직 섬김으로만, 오직 희생으로만 그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나라가 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왕이나 대통령같은 큰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고, 작은 권력을 가진 사람도 그렇습니다. 원죄의 굴레 속에 갇힌 사람들은 자기의 욕심대로 살기를 원하고, 그 수단으로서 권력을 얻으려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세상 권력과 충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빌라도만이 아니라, 당시의 모든 권력자들은 예수를 불편해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제거하는 데 대제사장들과 헤롯과 빌라도가 손을 맞잡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은 개인에게서 시작하지만 결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습니다. 믿음은 영적인 것이지만 영적인 것으로만 머물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이 하나님을 참되게 만나면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변화를 받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이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달라지고, 자녀들 혹은 부모와의 관계가 달라지며, 친구들과의 관계가 달라지며, 원수와의 관계까지 달라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이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가 달라집니다. 하나님 나라에 점점 더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욕심대로 살아가려는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의 믿음은 아주 불편하고 거북스러운 것이 됩니다.


4.

오늘 우리는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 받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유대인 지도자들이 고발하는 것이 맞느냐고, 스스로 왕이라고 주장했느나고 묻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면,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하였을 것이오.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 (36절)

이 구절의 첫 번째 문장에는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내 나라는 이 세상과 관계 없소. 내 나라는 다른 세상에 속한 것이오"라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눅 17:21)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나라는 이 세상을 초월하지만 또한 이 세상을 포함합니다. 이 세상 안에 이루어져야 하는 나라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오"라는 말은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아는 그런 나라와 종류와 성격이 다르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있는 혹은 총과 칼로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의 힘으로 빼앗고 지킬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히려, 모든 힘을 빼고 자신을 열 때 임하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지금 이곳에 임하지만 또한 영원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 나라에는 정의와 진리가 충만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그런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라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하던 빌라도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그러면 당신은 왕이오?(37절)

긴 말 하지 말고 딱 부러지게 대답해 달라는 뜻입니다. 나라는 하나의 종류 밖에 없고 왕은 모두 같은 왕이라고 생각했던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그쳐 묻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당신이 말한대로 나는 왕이오.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하여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세상에 왔소.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가 하는 말을 듣소. (37절)

뜻을 담아 이 말씀을 풀어 쓰자면 이렇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왕이오. 하지만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왕이 아니오. 내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요. 내 왕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오. 내가 왕인 것은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참된 진리를 알기 때문이고 진리를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오. 당신이 나를 몰라보는 이유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오. 진리를 구하는 사람들은 내 말을 알아듣고, 내 나라의 시민이 된다오. 당신도 진리에 눈 뜨면 내 나라의 시민이 될 수 있소. 그래 보지 않겠소?

그러자 빌라도가 다시 반문합니다.

진리가 무엇이오? (38절)

"이 대목에서 왜 갑자기 진리에 대해 말하시오? 나는 그런 것에 관심 없소"라는 뜻입니다. 실로, 요세푸스와 필로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빌라도의 유일한 관심사는 권력이었습니다. 어떻게든 로마 황제의 마음에 들어 로마 황실의 귀족으로 올라서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니 진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나라가 충돌하는 것을 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빌라도의 나라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왕이 마주 선 것을 봅니다. 진리의 왕과 빌라도라는, 로마 황제를 대신해 왕 노릇하고 있는 사람이 마주 서 있습니다.

두 나라의 대결에서 인간의 나라가 이긴 것처럼 보였습니다. 총독 빌라도에게 진리의 왕 예수는 무력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을 볼 때, 하나님 나라는 허튼 소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죽임 당하신 예수께서는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그의 나라는 국경을 넘어 누룩처럼 번져갔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예수를 왕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없애기 위해 끊임없이 칼을 휘둘렀지만, 그럴수록 그 나라는 더 널리, 더 깊이 퍼져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스스로 신이라 불리기 원했던 황제 콘스탄틴이 예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누가 진짜 왕인지, 어떤 나라가 참된 나라인지, 환히 드러난 것입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는 믿음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왕으로 섬기는 분은 이런 분입니다. 우리가 속한 하나님 나라는 이런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요 참 인간으로 오신 그분을 주님으로 믿을 때, 그분의 보혈은 우리의 죄를 씻어주고 그분의 성령은 우리를 새로 지어 주십니다. 새로 지음받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됩니다. 죽어서 그 나라에 임할 때까지 우리는 이 땅에서 그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며, 그렇게 하여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킵니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 생각합니다. (빌 3:18-19)

이것이 2천 년 전에 쓰인 글이라니 놀랍지 않습니까?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는다"는 말은 육체적인 만족을 최고의 목표로 두고 산다는 뜻입니다.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다"는 말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를 자랑하고 선전한다는 뜻입니다. "땅의 것만 생각한다"는 말은 물질적인 것을 전부로 여기고 산다는 뜻입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이라 불리는 이 시대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생활 방식에 딱 맞는 말이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이 세상 나라의 삶의 방법입니다. 빌라도의 삶의 방법이고, 가야바의 삶의 방법이며, 티베리우스 황제의 삶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신 주님을 믿는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영원한 나라, 참된 나라, 하나님 나라에 눈을 떳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나라의 기준을 따라 살아갈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가 잇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고 사모하는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이 주님 안에 굳건히 서 계십시오. (3:20-4: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빌라도의 나라와는 다른 사상으로 살고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며, 수치를 수치로 알고 죄를 죄로 알며, 하늘의 것을 생각하고, 오직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사랑 때문에 겪어야 하는 수고와 고생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나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믿는 사람은 죽어서 천당 가기 이전에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시민이 되어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나라가 전부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이 제일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때로, 자신의 권력으로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처럼 만들기 위해 신실하게 섬기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권력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면 더 이상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권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권력을 통해 누리던 것들을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 권력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진실하게 믿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사는 기독교인들을 두려워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참된 믿음을 따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하다 보면, 예수님처럼 본디오 빌라도에게, 즉 세상 권력자들에게 미움을 받고 고난을 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보혈의 공로로 죄 사함 받고 그분의 능력으로 축복받아 살다가 죽고 나서 천당 가는 것이 전부라고 아는 신자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아무런 위험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 관심 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세상의 권력자들에게 골치거리가 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 혼자 축복받고 자기 혼자 천국 가는 것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고 헌신하기 때문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은 어떠합니까? 우리의 믿음은 나에게 어떤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우리는 그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았습니까? 우리가 이미 그 나라의 시민임을 믿고 있습니까? 그 나라의 시민다운 삶의 변화가 내 안에 일어나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마음에 품고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간절한 마음을 느끼십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이 세상을 사랑하고, 이 세상을 사랑하기에 잃어버린 영혼들을 사랑하고, 그 사랑 때문에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열정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영광으로 자랑하며, 오직 땅의 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빌라도, 이 땅의 헤롯, 이 땅의 가야바들이 과연 우리를 보고 어떤 생각을 하겠습니까? "저런 신자들이라면 그들로 인해 이 땅이 가득 채워진다 한들 무슨 문제인가?"라고 생각하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진정으로 "우리의 주님은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땅의 권력자들이 우리로 인해 불편해 하고, 그래서 때로 박해를 당하는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신 주님을 믿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의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통치자들에게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온전하지 않으면 빌라도에게 무시당할 뿐아니라 때로는 우리가 빌라도의 자리에 서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한 대제사장 가야바가 믿음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를 통해 확산되어 가고 있던 하나님 나라를 없애 버리려 했습니다. 까딱하면 우리도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께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다"고 고백할 때, 우리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억압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에게 말했듯이, 그것은 마치 가시 돋힌 채찍을 발길로 차는 것(행 26:14)과 같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받은 부름을 잊지 마십시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삶에 결단하십시다. 우리 주변에는 그런 사람을 거부하고 외면하고 박해하려는 빌라도들이 에워싸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과 욕망을 생각한다면 나도 빌라도의 친구가 되어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수치를 자랑하며 땅의 것만을 위해 살아가게 됩니다. 그것은 가장 잘 사는 길처럼 보이지만 가장 희망 없는 삶입니다. 때로 손해를 당하고 때로 무시를 당하고 때로 박해를 당해도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고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성공하는 길입니다. 바로 이것이 새 해를 시작하는 저와 여러분의 신앙적인 결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왕이신 주님,
저희의 눈을 뜨게 하셔서
주님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저희 마음에 주님 나라를 품고
이 땅을 살게 하소서.
빌라도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주님처럼 살게 하소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 나라에 기억되는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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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2)
"믿음의 원점"(Ground Zero of Faith)
--요한복음 20:24-29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120212kim_c.mp3
1.

예수께서 부활 승천 하신 후 첫 오순절의 일입니다. 예수님을 배반하고 죽음의 길로 간 가룟 유다의 자리에 맛디아라는 제자를 뽑아 세운 다음, 열 두 사도와 다른 제자들이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의 영감이 사도들에게 강력하게 임합니다. 사도들은 한 동안 성령의 감동 안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드로가 일어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그러자 야고보가 일어나 "나는 그의 유일하신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열 두 사도가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차례로 고백하여 '사도신경'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이야기가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아십니까? 네 복음서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사도행전에 있던가요? 꼭 그럴 것 같지만, 실은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후 4백년 이상 지난 6세기 경에 만들어진 전설입니다.

'사도신경'은 어느 한 순간에 기적적인 방법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한 문장의 신앙 고백으로 시작하여 조금씩 불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입에서 나온 첫 번째 신앙 고백은 이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당신 자신이 예언한 그대로 부활하셨다는 것, 그것이 첫 번째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사도신경' 안에 포함된 다른 모든 신조들은 그 이후에 따라 붙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것은 부활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에 대한 연속 설교를 예수님으로부터 그리고 부활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를 잘 알고 있습니다. 도마의 이야기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사도신경'의 출발점이 되는 이유를 잘 보여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이 모여 있을 때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자유로이 물질계를 넘나들 수 있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그 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도마가 제자들이 모여있는 곳에 돌아오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도마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요 20:25)

여기서 도마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는 믿을 수 없다는 유물론자(materi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고,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인정할 수 없다는 이성주의자(ration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으며, 느끼는대로 산다는 감각주의자(sensualist)의 입장도 대변하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여드레가 지난 후, 부활하신 주님께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는 도마에게 다가가셔서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서 내 손을 만져 보고,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래서 의심을 떨쳐버리고 믿음을 가져라. (27절)

그러자 도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28절)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는 엄청난 비약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말했어야 옳았습니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주님'과 '하나님'은 당시 유대인들이 창조주 하나님에게만 사용하던 용어입니다. 이 세상에 주님은 오직 한 분뿐이요,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 뿐이라는 믿음은 유대교 신앙의 핵심과도 같았습니다. 그 칭호를 다른 누구에게 붙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이요 우상 숭배와 같은 일이었습니다. 도마는 그러한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 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마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너무도 흥분한 나머지 판단력을 상실한 것일까요? 제가 공부하는 중에 만난 어느 교수님은 이 구절을 감탄사로 해석하셨습니다. "My Lord, My God!"이라는 말은 "Oh, my God!"이라는 뜻이라는 겁니다. 물론, 그런 감탄사를 터뜨릴만큼 도마의 마음에는 놀라움의 감정이 요동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감탄사로 볼 수는 없습니다.

저는 그 실마리를 "여드레 뒤에"(26절)라는 어구에서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도마는 의문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의문이 많다는 사실은 생각이 많다는 뜻입니다. 그런 도마였으니,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한 주님을 만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여드레 동안 그 문제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믿을 수 없다고 말은 해 놓았지만,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을 것입니다. 부활한 예수님을 보았다는 제자들의 태도에 뭔가 다른 것이 있었습니다. 아직 믿을 수는 없지만, 혹시 그것이 사실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도마는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 의미는 무엇일까?"

여드레면 매우 긴 시간입니다. 특별히 심각한 생각거리가 있는 사람에게 여드레는 장구한 세월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 많은 생각 끝에 그는 잠정적인 결론을 얻었을 것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진실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은 단순한 예언자도 아니고, 위대한 랍비도 아니다. 부활하신 것이 사실이라면,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다. 그렇지 않다면 부활은 그 어떤 말로도 설명될 수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진실이라면,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나는 그분에게 내 인생 전체를 걸어야 할 나의 주님이시다!

이와 같은 결론을 이미 마음 속에 담고 있던 도마였기에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부활의 의미에 대해 고민해 보지 않았던 다른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나서 들뜬 마음으로 시간을 보내는 동안, 도마는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했기에 부활 사건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결국, 부활에 대해 가장 늦게 믿은 것은 도마였지만, 그는 가장 먼저 부활 신앙을 통해 믿음의 도약을 이루었습니다.


3.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 동안 도마의 마음에 엉켜 있던 많은 의문들이 풀려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어 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어릴 적에 엉클어진 실타래를 푸는 일에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머님께 특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엉클어진 실타래를 풀다 보면, 중요한 매듭을 발견합니다. 그 매듭 하나만 풀면 다른 작은 매듭들은 술술 풀립니다. 그처럼, 부활은 예수님에 관한 엉클어진 비밀을 푸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매듭이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면 그분은 분명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생각의 매듭이 풀리자, 도마의 생각 속에서 다른 작은 매듭들이 술술 풀려 나간 것입니다.

그는 아직도 예수께서 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셔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당도한 이후 그분은 갈릴리에서 드러냈던 그 엄청난 이적의 능력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능력이라면 단숨에 로마 군인들을 몰아내고 유대인 자치 정부를 세울 수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마자 마치 방전된 배터리처럼 무력하게 모든 모욕과 고난을 받아 안으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나사렛 예수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니, 의문이 풀립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비극적인 죽음이 아니라, 인간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신 사건임을 알겠습니다.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돌발적인 비극이 아니라 성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던 것임을 알겠습니다. 그 깊은 뜻을 다 헤아릴 수는 없었지만, 십자가에서 예수께서 당하신 죽음은 아주 특별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것 같았습니다.

나사렛 출신의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살아 생전에 그분이 하셨던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들이 이해가 되었고, 납득이 되지 않던 그분의 행동과 생활 방식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분이 그토록 자주 강조하던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중에 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분이 그렇게도 자주 왜 "볼 눈이 있는 사람은 보라"고 말씀하셨는지, 그리고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말씀하셨는지를 알 것 같았습니다.

사실, 탄생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까지만 두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살펴 본다면, 정상적인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심각한 지적 딜렘마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분은 정상적인 인간으로서는 해명할 수 없는 말을 많이 했고 그런 행동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이거나 과대망상증 환자이거나,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문학자이자 기독교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Lewis)가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라는 책에서 지적한 사실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위대한 도덕 교사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복음서를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이 딜렘마를 해결해 줍니다. 만일 그분이 십자가에서의 비극적인 삶으로 인생을 마쳤다면, 그분은 과대망상증 환자였을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도마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예수에게 홀딱 속아 넘어간 자신도 불쌍하고, 자신과 많은 이들을 속여먹은 예수가 밉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 실패와 실수를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를 두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부활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만일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분은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니라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 맞습니다.


4.

'사도신경'의 두 번째 신조, 즉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은 이와 같은 경로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위에서 저는 도마의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만을 추적했습니다만, 이 같은 변화가 처음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불길이 번지듯이 퍼져 나갔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있는 말씀과 놀라운 행동을 보고 그분이 누구인지 궁금해 했으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자 그 모든 궁금증을 내려 놓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부활 사건으로 인해 그들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한 그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게 되었고, 그 믿음은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신앙고백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신앙 고백에는 세 가지의 중요한 용어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용어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서로 다른 각도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독생자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존재하는 '특별한 관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향해 자주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고, 기도할 때는 당시에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애칭('아바')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분은 말과 행동에서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셨습니다. 그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은유로서 '독생자' 혹은 '유일하신 아들'이 선택된 것입니다.
'유일하신 아들'이라는 말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의 몸을 입고 오신 그분이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의 한계에 봉착합니다.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기 이전에 성자 예수께서 어떤 상태에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요한을 통해 그 신비의 일부를 벗겨 보여 주십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요 1:1-3)

이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 중에서 가장 알듯말듯한 말씀입니다. '알듯말듯함'이 이 말씀의 본질입니다. 이 말씀의 뜻을 다 알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영적 사기꾼으로 여기는 것이 옳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이해시키려고 쓴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관한 비밀과 신비를 느끼게 해 주려고 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할 때, 우리는 그 신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둘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향해 '주'라고 고백합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이 성부 하나님에 대해 사용하던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 정부는 로마 황제를 향해 '주님'이라고 고백하도록 강요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이 세상을 실질적으로 다스리고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며, 그래서 그 사람에게 충성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나의 주님'이라고 고백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최종적인 통치권은 부활하신 주님에게 있으며, 따라서 나는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바치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셋째, '사도신경'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하도 익숙하게 사용되다 보니,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가 성인 것처럼 오해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김영봉 목사'와 같은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예수'가 무엇하는 사람인지를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말 '메시야'에 해당하는 헬라어로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기름부어 세운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이십니다"라고 고백하는 것과 같습니다.


5.

그러므로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해 우리는 실제로 다음과 같은 많은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나는 나사렛 예수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 나는 나사렛 예수가 태초부터 성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었음을 믿습니다.
• 나는 성부 하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성자 예수님을 보내셨다고 믿습니다.
• 나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의 주권자임을 믿습니다.
• 그래서 나는 그분을 나의 구원자요 나의 주님으로 받아들입니다.

기독교인들 사이에 자주 사용되는 로고가 있습니다. 물고기 모양의 로고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극심했을 당시에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서로 은밀하게 주고 받던 암호였습니다. 그것이 전통이 되어 요즈음에는 차에 붙이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왜 물고기 모양이 기독교인의 암호로 사용되었는지 아시는지요? '물고기'를 의미하는 헬라어 '익스투스'(ἰχθύς)의 알파벳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의 핵심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례로 읽으면, "예수스 크리스토스 데우 휘오스 소테르"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원자"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의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에서 '주님'이라는 말만 빠져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이라는 고백은 전제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천 년 전에 이 땅에서 활동하다가 십자가에 처형된 한 유대 청년 예수가 단순한 인간도 아니고, 위대한 스승도 아니며, 인류의 위인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보냄 받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믿음의 원점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금도 우리 중에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 앞에 고개를 숙이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설교한다고 말해 놓고서 성부 하나님에 관한 첫 번째 신앙 고백을 뛰어 넘어 두 번째의 신앙 고백부터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사도신경'의 내용 중 절반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 고백의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나서야 성부 하나님을 제대로 알게 되는 것이고, 성령에 대해서도 눈 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식으로 보자면 성부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맨 처음이지만, 내용적으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맨 처음입니다.


6.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우리 각자의 믿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 보아야 하겠습니다. 믿음의 원점에서 예수를 다시 만날 필요가 있습니다. 믿음의 원점에 서서 예수라는 분을 어떻게 할지에 대해 태도를 결정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저 존경받을만한 위인 정도에 그친다면 문제가 없습니다. 스크라테스를 존경하든 무시하든, 그것은 우리 인생에 그리 큰 문제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말 부활하셨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이시라면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구원자라면,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양단간에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결정이 아닙니다. 하면 좋고 안 하면 손해 볼 것 없는 그런 결정이 아닙니다.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결정이며, 그 결정에 인생의 성패가 걸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어찌하렵니까? 도마처럼,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임을 믿으며, 그래서 나의 주님으로 섬기고 있습니다"라고 고백하십니까?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나에게 그 무엇도 주인이 될 수 없다고 고백하십니까? 내가 이 세상 모든 것을 잃고 내 목숨을 잃어도 나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버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믿음이 더욱 깊어지도록 힘쓰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잡으면 변치 않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방치해 두면 약해집니다. 매일같이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고 그 온기가 아직도 살아 있는지, 뿌리가 아직도 든든히 자리잡고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 믿음이 늘 살아있도록 보살피고 가꾸어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결정을 못하고 지금까지 미뤄왔습니까?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할 때, 마음에 가지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까?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수라는 사람이 설사 2천년 전에 살아 있었다 해도, 어찌 그 사람이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사람이 여전히 살아서 활동한다는 말을 어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알지도 못하는 예수라는 사람을 나의 주님으로 모셔 들인다는 것이 어찌 가능한 일인가?"라고 질문하고 계십니까?

그 의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상하게 여길 것 없습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나님 나라에 눈 뜨기 전까지 그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다만,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도약을 꿈꾸고 기도해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미결 상태에서 저울질만 하고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너무 늦어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 함께 예배 드리고 따뜻한 손을 잡고 악수를 나누었던 이수경 권사님께서 그렇게 홀연히 떠나실 줄 누가 알았습니까? 그렇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직 기회 있을 때, 예수께 대한 입장 정리를 해야 합니다. 그 입장 정리는 나의 영원한 운명을 판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대강절(the Advent) 첫 번째 주일입니다. 대강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것을 기억하고 축하하며, 미래에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주실 것을 기대하고, 지금 성령을 통해서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을 맞아들이는 기간입니다. 이 기간에 주님께서는 더 가까이 우리 모두의 마음에 오십니다.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초청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 이 만남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이 무의미합니다. 이 고백이 든든히 서지 않으면, '사도신경'의 다른 모든 고백도 의미가 없습니다.

부디, 이 귀한 계절에 믿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 분명한 입장 정리를 하고, 그분을 주님으로 모셔 들이고 함께 동거함으로 인해 그분께서 열어주시는 신비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아멘!

묵상: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해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미 그분을 주님으로 영접한 사람들에게도 아직 열어놓지 않은 문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문까지 열어야 합니다. 이 시간, 주님께 아직 열지 못한 문을 열고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저에게 더 깊이 오시어 저를 다스리시옵소서."

예배의 자리에 나와 있기는 하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지 않은 분들이 계십니다. 무엇이 여러분의 결단을 막고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판단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죄에 대한 가책 때문일 수도 있고, 삶의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더 이상 미루지 말기를 바랍니다. 더 미룰 시간이 없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그분 앞에 무장해제하시고 그 앞에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렇다고 느끼신다면, 마음의 문을 열고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제 마음을 엽니다. 저의 인생에 들어오셔서 저의 죄를 씻어 주시고 저의 주인이 되어 주옵소서."

(묵상)

묵상 후: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든, 진실하게 기도하셨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들어 오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에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느껴서 믿는 것도 아니고, 알아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영이신 예수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은 만질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써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고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약을 먹고 그 약이 내 속에서 약효를 내고 있음을 믿듯,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으니, 그분이 내 안에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으니, 그 약속을 믿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시기 바랍니다. 주인이 바뀌었으니, 여러분의 삶도 바뀔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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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1월 25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112512kim_c.mp3


연속 설교: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 (1)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히브리서(Hebrews) 11:1-3



1.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무엇을 기준으로 살아가십니까? 어떤 선택이나 결정을 할 때, 여러분은 무엇을 근거로 결정하십니까?

"나는 보는 것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유물론자들(materialists)이 그들입니다. 과학이 진리의 최종 심판자의 자리에 올라 선 지금, 유물론적 세계관(materialistic world-view)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가 하면, "나는 아는 것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성주의자들 (rationalists)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이렇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절대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자신이 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확신을 가집니다. 그런 자기 확신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며 살아가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완고한 고집과 아집 안에 갇혀 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진리를 자신의 이성의 틀로 걸러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은 '자신만의 종교'를 신봉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한 편, "나는 느낌으로 살아갑니다"라고 대답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감각주의자들 (sensualists)입니다. 포스트모던시대라고 불리는 우리의 시대에는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따지지 않습니다.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냥 느낌이 좋으면 그만입니다. 지금 당장 기분 좋게 해 주면, 그것이 환각이든, 거짓이든, 속임수이든, 악한 것이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진리에 일치하는 것인지, 성경의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인지를 따지지 않고, '값싼 은혜'(cheap grace)만을 추구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인생의 토대를 형성해 주고, 방향을 결정해 주며, 성격을 결정해 주고, 운명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것은 세계관(worldview)에 관한 질문이며, 인생관(view of life)에 관한 질문이며, 가치관(value system)에 관한 질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이 질문에 대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후 5:7)

믿음으로 산다? 얼른 생각하면, 매우 위험해 보이는 태도입니다. 여러분 주위에는 무엇이든 덥썩 덥썩 믿는, 그래서 자주 속임을 당하는 사람이 한 두 사람은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그런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생각한다면, "나는 믿음으로 삽니다"라는 말이 결코 좋게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와 영원한 생명에 관한 믿음입니다. 이같은 믿음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을 가리켜 영어로 the mystic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 '신비주의자'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에 번역하지 않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신비롭고 광활한 세계 즉 하나님 나라가 열립니다. 그 신비로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the mystic이라고 부를만 합니다.


2.

우리가 예배 드릴 때 사도신경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첫 번째 이유는, 바울 사도처럼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백하고 확인하고 선언하려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행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아는 것으로 살지도 않습니다. 느끼는 것을 따라 살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삽니다.

사도신경의 원문은 라틴어로 되어 있습니다. 라틴어 원문에 보면 Credo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옵니다. "나는 믿는다"라는 뜻입니다. 라틴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Credo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옵니다. 영어 번역에도 그렇습니다. "I believe"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불행하게도, 과거의 우리말 번역에서는 이 문구가 숨어 버렸습니다. 다행히, 새 찬송가를 출판하면서 발표한 새번역 사도신경에서는 원문의 강조점을 회복시켜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나는 믿습니다"라고 거듭 고백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확인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사람들과 우리가 얼마나 다른지를 확인합니다. 세상에 나가면 보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 아는 것으로 사는 사람들 그리고 느끼는 대로 사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들과 섞여 살다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더 옳은 것 같고, 더 이로운 것처럼 보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 같고 영 가망 없는 일처럼 보입니다. 그러다 보면 믿음이 점점 약해지기도 하고, 믿음으로 살기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배로 모여 사도신경으로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나는 믿음으로 살겠습니다"라고 확인하고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Rene Descartes)는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이라는,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이라는 유명한 철학적 명제(philosophical statement)를 남겼습니다. 인간의 인간됨은 생각하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크레도 에르고 숨"(Credo ergo sum) 즉, "나는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I Believe. Therefore I Am)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믿는 데 있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두뇌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스스로 인간의 가장 고유한 본성을 부정하는 셈입니다.

현존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천재 물리학자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 박사라고 합니다. 그는 우주에 관한 인간의 이해를 끊임없이 확장시킨 우리 시대의 최고의 과학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믿음을 부정하고 인간의 두뇌로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자인 그가 70세 생일에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여자, 그것은 나에게 완전한 비밀입니다"(Women. They are a complete mystery). 저는 이 기사를 읽고 두 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첫째,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사람이 여자를 모르겠다고 말한 것이 흥미롭습니다. 현존하는 인류 중 생각으로 우주의 가장 먼 곳까지 파악하고 있다는 사람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아내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목사가 다른 교회에 초청을 받아 설교하러 가던 중에 길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이에게 약도를 보여 주면서 길을 물었습니다. 그 아이가 친절하게 가르쳐 주자, 목사가 아이에게 말합니다. "그 교회에서 내가 오늘 천국 가는 길에 대해 설교하려는 참인데, 너도 와서 들어보지 않을래?" 그러자 그 아이가 대답합니다. "아니, 교회 가는 길도 모르면서 어떻게 천국 가는 길에 대해 안내를 하세요? 비슷한 얘기 아닙니까? 그렇다고 해서 호킹 박사의 주장을 부정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머리로 다 알 수 있다는 지적 교만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그의 말은 인간의 신비성을 반증하는 말로 들립니다. 인간이 단순한 세포 덩어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무의식 중에 인정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물질로 된 우주는 추론과 실험과 계측으로 그 끝까지 알아갈 수 있는데,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수 십 년 동안 함께 살았는데도 도무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인간이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물질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다 알 수 없는 영적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가 바로 저와 여러분,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은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지어진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 존재 자체가 신비입니다. 영적인 존재인 인간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을 찾고 그 안에서 영적인 세계에 눈을 뜨고 그 세계 안에서 살기까지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이 비어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교성(religiosity)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면서 '존재의 구멍'을 발견하고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그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기독교 2천 년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상가 중 한 사람인 어거스틴(Augustine)이 그의 <고백록> (Confessions)에 남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오, 주님,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 머물 때까지 만족하지 못합니다.

You have made us for yourself, O Lord,
And our heart is restless until it rests in you.

이 문장은 성경 구절의 하나처럼 대접받아 왔습니다. 그만큼 인간 존재의 핵심을 꿰뚫은 말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님을 위해 저희를 만드셨습니다"라는 말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뗄 수 없는 관계를 의미합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인간됨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입니다. 그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진정한 만족이란 없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은 우리의 인간됨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3.

그렇다면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읽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이 '사랑장'이라 불리고, 고린도후서 15장이 '부활장'으로 불리듯,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장'으로 불립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믿음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서두에서 믿음에 대한 정의를 내립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새번역)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개역개정)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줍니다. (공동번역)

세 개의 번역을 소개한 이유는 '확신'(assurance), '실상'(reality) 혹은 '보증'(guarantee)으로 번역된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라는 헬라어(Greek) 단어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세 가지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습니다. 그 모든 의미를 포괄하여 생각하면, 믿음이 무엇인지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믿음은 '바라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적극적 사고방식'(positive thinking)을 전파했던 노만 필(Norman Peale)이나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는 믿음을 그런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현대판 노만 필'이라고 불리는 조엘 오스틴(Joel Osteen) 목사 역시도 무엇이든지 바라고 구하고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진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매사에 적극적(active)으로, 긍정적(positive)으로, 낙관적(optimistic)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혹은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은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믿음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는 철저히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이며, 그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기에 바라는 것이 있으며, 하나님을 믿기에 바라는 것이 결국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이고, 하나님을 믿기에 그것을 이미 얻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합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면 바라는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확신"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므로 반드시 얻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놓지 않는 한, 바라는 것을 필경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과 상관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시민권이 속해 있는 하나님 나라는 지도에 그릴 수 없는 나라입니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머리로 이해할 수도 없으며, 오감으로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것이 실재한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믿고 나면 보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앎으로써 믿는 대상이 아니라, 믿음으로써 알아가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해를 위해 <새번역>의 어순을 조금 바꾸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것을 믿음으로 깨닫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은 논리적인 추론으로 확인할 문제가 아닙니다. 실험실에서 결론 지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야만 알게 되는 진리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믿음으로 산다"고 했는데, 히브리서 저자는 "우리는 믿음으로써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에 관한 한, 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믿음이 먼저입니다.


4.

이 지점에서 이렇게 반론을 펴고 싶은 분이 계실 것입니다. "당신은 쳇바퀴 논리(circular reasoning)에 갇혀 있는 것이오. 하나님이 있다고 믿으니 다 그런 것처럼 보이는 거지요." 현대 무신론 운동의 대제사장격인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가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에서 이런 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비판합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가설을 세우고 여러 가지의 실험과 관찰을 통해 그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함으로써만 진리에 접근해 갈 수 있습니다. 온 우주보다 큰 존재만이 우주가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우주 안에 살고 있는 미세 먼지같은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보다 더 큰 무엇에 대해 알려면 가장 그럴 것 같은 가설을 세우고 그 가설이 맞는지를 확인하면서 수정해 가야 합니다. 그 방법 밖에 없습니다.

무신론자든 유신론자든 모두 이 같은 방법이 아니고는 진실에 접근해 갈 수 없습니다. 무신론자들이 객관적인 관찰을 통해 그 입장에 선 줄 아십니까? 아닙니다. 처음부터 하나님 같은 것은 없다고 가설을 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세상을 보니 다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쳇바퀴 논리에 갇혀 있는 점에서는 무신론자나 믿는 사람이나 같습니다. 문제는 어떤 가설이 좀 더 많은 현상들을 좀 더 설득력있게 설명해 주느냐에 있습니다. 그 판단에 따라 어느 하나의 가설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선택한 사람들 중에는 갬블링을 하듯 그렇게 한 사람도 있습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이 계실 가능성과 없을 가능성이 반반으로 보였답니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따져 보았답니다. 만일 있다는 쪽에 인생을 걸었다가 죽고 나서 없는 것으로 밝혀지면 별로 손해 볼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반면, 없다는 쪽에 걸었는데 죽고 나서 하나님이 계신 것이 드러나면 큰 낭패를 볼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에 들어서고 보니, 제대로 선택했다는 마음이 생기더랍니다. 믿고 보니 하나님이 계시다는 증거가 눈에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더 많은 사람들은 부인할 수 없는 전환의 경험을 통해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합니다. 무신론자로 살다가 하나님을 만난 사람도 있고, 모태신앙인으로서 습관적으로 교회를 다니던 중에 하나님에 대해 눈을 뜨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연으로 치부해도 될만한 소소한 영적 자각을 통해 혹은 부정할 수 없는 영적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에 눈 뜨고 그 나라를 믿게 됩니다. 그렇게 믿음의 길에 들어서 믿음 안에서 자라가다 보면, 전에는 도대체 이해되지 않던 것들이 깨달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알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믿어서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음 안에 머물러 살기가 쉽지 않습니다. 믿음 안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자라가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바라는 것을 이미 손에 넣은 것처럼 느끼도록 믿음이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가 아는 것만 믿도록 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가는 세상에 살고 있기에 우리는 어릴 적부터상대가 사람이든 사건이든 확인과 재확인을 통해 틀림 없다 싶을 때만 믿도록 훈련되어 왔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마음은 손에 물증(physical evidence)을 쥐고도 믿기 어려워 할 정도로 의심에 익숙해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5.

믿으려고 노력해도 잘 믿어지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고, 믿는다고 하지만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진짜라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믿지 않는 사람과 질적으로 달라야 마땅합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정말 우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내 안에 살아 계시다고 믿는다면, 그분의 성품과 정신이 내 말과 행동에서 드러나야 옳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사람이라면, 과거와 같은 실수와 죄를 반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으려는 의지는 있을지 몰라도, 마음 다해 믿어지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 같은 모습은 있지만, 참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는 것이 이미 손에 쥐어진 듯이 느낄만큼 믿음이 분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야말로 가장 분명한 실재라는 확실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11장에서 믿음의 위인들을 소개하면서 믿음이 살아있을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는 모세를 소개하면서 광야에서의 40년 동안의 고통을 이긴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마치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냈습니다. (27절)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듯이 믿는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것처럼 믿는다면, 그리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이 실제로 내 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모세처럼 혹은 다니엘처럼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짓눌리지 않을 것이며, 그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목숨보다 더 큰 생명이 있고, 눈에 보이는 우주보다 더 큰 하나님 나라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원리는 그런데, 실제로 그런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지난 주에 읽은 어느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LA에서 열린 영성 세미나에서 강의를 하셨는데, 그곳에는 다양한 종교인들이 모였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법복을 입은 여성 불자를 만났는데,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를 믿었다가 불교로 개종한 사람이라고 소개하더랍니다. 개종 이유는 간호사로서의 경험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암병동에서 일했는데, 기독교인 환자들이 가장 불평불만이 많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으며, 하나님을 저주하며 가장 지저분하게 죽음을 맞이하더라는 것입니다. 반면, 불교 신자들은 매우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불교에 귀의했다는 것이지요.

많은 생각을 해 주는 일화입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은 그분의 경험과 많이 다릅니다. 저는 목회를 하면서 수 많은 임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임종을 지켜 볼 때마다 자주 저는 인간이 과연 영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의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첫째, 그분이 만났다는 기독교인 환자들은 명목상의 교인이지 참된 믿음에 이르지는 못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이 참되었다면, 그들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았을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영원한 생명을 이미 얻은 것처럼 말하고 행동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그런 믿음에 이르지 못한 사람들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서 "기독교는 가짜다"라고 결론을 내는 것은 성급하고 미숙한 태도입니다.

고 양승길 장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지독한 고통으로 인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오갈 때, 의사가 "Where are you, Mr. Yang?"이라고 묻자, 싱끗 웃으며 "I am in heaven!"이라고 답하셨습니다. 호스피스 의사가 놀랄 정도로 양 장로님은 깊은 믿음에서 솟아나는 평안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면 이런 모습을 보고 판단해야 옳습니다.

둘째, 그분이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다고 말했다지만, 그분 역시 기독교 신앙이 무엇인지 제대로 몰랐던 분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것을 알았다면, 고통과 죽음의 공포 앞에서 흔들리는 기독교인 환자들을 참된 믿음 안으로 인도하기 위해 힘썼을 것입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분은 자신이 과거에 기독교인이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이야기는 참된 믿음에 이르고 그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증명해 줍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믿으려는 의지만으로도 부족합니다. 믿음의 형식만으로도 안 됩니다. 사고방식과 가치관과 생활 방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서 "크레도 에르고 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

교회가 예배로 모여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확인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고 선포하고 고백하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임을 확인하고 선포합니다. 크레도 에르고 숨! Credo ergo sum! 우리는 믿을 때 진실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을 수 없이 반복하여 외운다고 해서 믿음이 저절로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신경을 고백하면서 신조 하나 하나를 참되게 믿기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기는' 것입니다. 믿어져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질문하고 생각하고 연구해야 하지만, 무엇보다 더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믿음을 구할 때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십니다.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실 때 '믿어지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 믿음은 나의 마음에 빛을 비추어주고 시야를 활짝 열어줍니다. 그래서 그것을 '계시'라고 부릅니다. 나의 두뇌보다 훨씬 큰 진리가 내 마음을 내리 덮는 것입니다. 한 번 내리덮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으로 다 되지 않습니다. 늘 그 상태에 머물러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새 영적 세계가 새빨간 거짓말처럼 느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말아야 하고, 더 깊은 믿음에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부디, 사도신경을 따라 걷는 이 영적 여정을 통해 참된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물질의 유혹 앞에서 꿈적하지 않고, 인생의 풍랑에 요동하지 않으며, 마침내 죽음의 위협 앞에서 흔들림 없는 믿음에 이르기를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이 땅을 천국처럼 살고 마침내 천국에 이르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참된 믿음을 주소서.
믿음의 능력으로써
현세의 유혹과 고난을 이기게 하시고
죽음과 심판의 두려움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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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굴 믿는지 안다면..."
(If Only We Knew Whom We Believe)
--야고보서 2:1-4, 14-17.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090912kim_c.mp3

지난 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통일교 교주 문선명씨가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세인의 관심은 스스로 메시야를 자처하던 교주가 세상을 떠난 다음 통일교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쏠려 있습니다. 언론의 관측에 의하면, 종교 분야는 막내 아들이 맡을 것이고, 사업 분야는 넷째 아들이 맡을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문선명씨가 살아있는 동안에도 내부 다툼이 많았던 가정이기 때문에 '왕자들의 난'으로 인해 심각한 문제가 일어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합니다.

통일교 세계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막내 아들은 하버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통일교회의 절차에 따라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아들이 스스로 메시야라던 아버지의 주장과 기괴한 통일교 교리들을 진실로 믿어서 목사가 되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큰 의문이 남습니다. 통일교 세계 회장의 자리는 적어도 그 세계 안에서는 황제와 같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영적 권력과 물적 권력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그런 자리에 오를 것이 약속된 상태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그의 믿음을 순수하게 보기 어렵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편지의 저자인 야고보는 자신의 형이 시작한 종교 운동을 이어간 사람이라는 점에서 문선명씨의 막내 아들에 비교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을 낳은 후 성모 마리아가 처녀로 지냈다고 믿기 때문에 야고보가 예수님의 친동생이 아니라 사촌 동생일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을 낳은 후 처녀로 살았다는 아무런 증거가 없기 때문에 개신교회에서는 친동생으로 봅니다. 마리아가 처녀로 죽었다는 믿음은 마리아 숭배를 위해 후대 교회가 만들어낸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형이 십자가 처형을 당한 후,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됩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들 즉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이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형제 야고보가 일찍 순교를 당하고 베드로와 요한은 선교를 위해 다른 도시로 돌아다녔기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영향 아래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야고보를 가리켜 '예루살렘 교회 초대 감독'(the first bishop of Jerusalem)이라고 부릅니다.

문선명씨의 아들이 목사가 되어 통일교를 이끌고 있는 것과 야고보가 형의 뒤를 이어 예루살렘 교회를 이끌었던 것은 서로 닮은 점이 많아 보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대로 문선명씨의 아들의 믿음은 그 진정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에 오름으로써 얻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전세계적으로 퍼져 있는 거대 종교 왕국의 황제가 되는 일인데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모든 부귀영화를 거부하고 진리를 택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기는 합니다만, 흔히 볼 수는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의 믿음은 그 진정성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당시에 예루살렘에서도 그렇고, 다른 로마 도시에서도 그렇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야고보는 62년 경에 유대 자치 의회인 산헤드린 공의회의 결정에 따라 투석형을 당했습니다. 만일 야고보가 자신의 형을 그리스도로 진실로 믿지 않았다면, 이같은 불이익을 감수했을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편지 야고보서는 그의 믿음이 속임수가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해 줍니다.


2.

교회력을 따라 읽은 오늘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1절)

여기서 야고보 사도는 편지의 독자들에게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이하를 읽어 보면, 그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복음이 한 나라에 들어가면, 초기에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쩌다가 부자나 지체 높은 사람이 교회에 나오면, 별 생각 없이 특별 대우를 했을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부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랐던 것입니다. 그것을 당연히 여기는 분위기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런 차별 대우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우리는 도시 교회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 현상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한 동네에 교회가 하나 밖에 없던 상황에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저의 부친은 초등학교 교사이셨는데, 장손이기 때문에 고향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거의 평생을 지내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고향 동네 사람들은 거의 전부가 제자이거나 학부형입니다. 어디를 가나 선생님으로 대접받으셨습니다. 제 부친은 40대 중반에 회심하셔서 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셨습니다. 부친께서 교회에 처음 나오셨을 때, 교인들이 어떻게 대했을지 아주 쉽게 상상이 됩니다. 교회 바깥에서 선생님으로 존경받던 분이므로 교회에서도 그렇게 대접을 받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모두들 그렇게 대접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다음 주일에 남편을 잃고 홀로 근근히 사는 노인이 처음 교회에 나왔다고 가정하십시다. 그렇다면, 한 주 전에 선생님이 교회에 나오셨다고 잔치를 벌이듯 한 교인들이 그 노인의 출현에 대해서도 같은 태도로 환영했을까요? 가난한 사람이라고 해서 냉대하는 교회는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을 맞이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환영하지 않았을 가능성은 매우 큽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이 초대 교회에서 자주 일어났던가 봅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던가 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것이 당연하지 않다고, 아니 그것은 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심코 사람을 차별하고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 믿음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뜻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그냥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지 않고,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라고 적습니다. 차별하는 것은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New Living Bible은 이 구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 놓았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그분은 역차별을 하셨습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가셨습니다. 건강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있으면, 그분은 병든 사람을 찾아가셨습니다. 경건하게 사는 사람과 죄악 가운데 사는 사람 중에서 죄인을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우리가 믿는 주님을 제대로 알고 있다면, 우리는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미국에 사는 우리 이민자들은 회개할 것이 많습니다. 우리 민족은 단일 혈통으로 이어져 왔기 때문에 다른 민족에 대한 차별 의식이 매우 강합니다. 우리보다 나아 보이는 민족에게는 주눅이 들어 이유 없이 웃어가며 무조건 "Yes! Yes!"하면서, 우리보다 못해 보이는 민족에게는 함부로 대합니다. 그래서 한인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 한인들에 대한 증오 범죄가 자주 발생합니다. 그 어느 민족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한인 이민자들이 인종 차별에 있어서 가장 심하다면, 우리는 심히 회개해야 합니다.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서만 지켜야 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았다고 해서 '나는 내 믿음에 충실하게 살고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 사도는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지 않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15-17절)

이 대목에서 찔끔하실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과거에 가난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부유한 집에 태어나 유복하게 산 사람조차도, 나라 전체가 가난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가난의 경험은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적으로도 가난을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였고, 개인적으로도 그랬습니다. 오죽했으면 한 때 전국에 울려 퍼졌던 노래 중에 "잘 살아 보세, 잘 살아 보세, 우리도 한 번 잘 살아 보세"라는 것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우리는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일념으로 살아왔고, 우리의 믿음도 가난을 벗어나게 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당시에 가장 인기 있던 부흥사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교파를 초월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분이 제안한 '삼박자 축복'이란 것이 있습니다. 요한삼서 2절의 말씀, 즉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축복은 1) 영혼의 축복과 2) 물질의 축복과 3) 건강의 축복, 이 세 박자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고 설교하셨습니다. "잘 살아 보세"라는 노래가 마을마다 확성기로 울려 퍼질 시대에 교회에서는 삼박자 축복의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민자들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이민의 동기가 다양해졌지만, 과거에는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큰 동기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국은 소위 '아메리칸 드림'을 선전했습니다.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였습니다. 부지런하기로 따지면 어느 민족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민족은 미국에 와서 신속하게 자리를 잡았고, 거대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도 많아졌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그 모든 것을 '축복의 땅' 미국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감사 드렸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까맣게 잊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억압받는 사람들, 무시 당하는 사람들, 밀려난 사람들, 따돌림 받는 사람들을 먼저 찾아가시고 돌보신 분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입니다. 예수 믿어 축복 받는 것만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축복을 받아들고 그것을 왜 주셨는지,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았습니다. 그 축복이 자신 안에 고이게 만들었습니다.

4.

야고보 사도는 여기서 가난의 문제를 하나의 예로 들어 살아 있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독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냉담하게 행동했기 때문에 그것을 예로 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분이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안다면 그리고 우리의 믿음이 진정 살아있는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나듯 우리의 모든 삶의 영역에서 차별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그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율법 전체를 지키다가도 한 조목에서 실수하면, 전체를 범한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분이 또한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간음은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살인을 하면, 결국 그 사람은 율법을 범하는 것입니다. (10-11절)

"간음하지 말라"고 하신 분이 "살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는 말은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관심사라는 뜻입니다. 간음도 하지 말아야 하지만, 살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모든 인간을 존중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라면,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이나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내용에서는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경에 수 많은 계명이 있지만, 그 모든 계명의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그 정신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차별성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믿음이고, 비즈니스는 비즈니스다"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믿음이고, 정치는 현실이다"라고 말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 삶의 모든 분야가 하나님의 주권 아래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려는 진심이 내 가게 장부에도, 내 침실에도, 나의 컴퓨터에도, 나의 거래 현장에도 드러나야 합니다. 삶의 모든 영역에 주님께서 주님이 되도록 내어 드려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신앙의 어떤 면에서는 아주 칭찬받을만할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봉사하는 면에서 칭찬받을만 합니다. 어떤 분은 신실한 기도 생활로 인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에 대한 사랑으로 칭찬받을 만합니다. 어떤 분들은 아낌없이 재정적으로 헌신하는 것으로 칭찬 받을만 합니다. 선교에 아낌없이 헌신하는 것으로 칭찬받을만한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참으로 감동스럽습니다. 하지만 야고보 사도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혹시나 무엇을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망각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자신을 돌아 보라고 하십니다. 기도는 많이 하는데 봉사에는 게을리하는 것 아닙니까? 말씀 공부는 열심히 하는데 선교에는 담을 쌓고 있는 것 아닙니까? 봉사는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고 말씀 공부하는 데는 등한히 하지 않습니까?

한국에서 보는 시험 제도에 '과락'이라는 제도가 있습니다. 시험을 치룬 모든 과목의 총점이 합격점을 넘었어도 어느 한 과목에서 낙제를 하면 떨어지는 제도입니다. 과락 제도를 두는 까닭은 모든 분야를 고루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 신앙에도 과락이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꽤 심각한 경고를 던집니다.

여러분은, 자유를 주는 율법을 따라 앞으로 심판을 받을 각오로, 말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하십시오. (12절)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 생활을 시험 보는 것이라고 한다면, 혹시 과락할만한 과목은 없습니까? 골고루 다 잘 하는데, 어느 한 면에 대해서는 도무지 마음이 안 가는 영역이 있습니까? 오늘 말씀을 그 장벽을 허물고 그것까지 끌어 안으라고 우리를 흔드십니다.
특별히, 오늘의 말씀은 가난의 문제에서 많은 이들이 과락할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말씀합니다. 주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요 12: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때까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가난의 문제는 주님의 주요 관심사인데, 가난의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것이므로 그 관심사를 끝까지 붙들라는 뜻입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혹시, 그 동안 가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을 치느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책임을 잊었던 것은 아닙니까? 지긋지긋한 가난을 뿌리치려다 보니 가난한 사람들까지 외면한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지갑에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몫이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가난은 스스로 자초하는 것이므로 나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생각하며 외면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에게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물으십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축복을 감사하는가? 그러면서도 머리 둘 곳 없이 사셨던 주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는가?"

가을이 되면 우리 교회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위해 하는 일들이 있습니다. 여선교회가 주관하는 바자가 그것이며, 추수 감사절에 가난한 이들의 식탁을 돕기 위해 그로써리 카드를 모으는 것이 또 하나이고, 성탄절에 나다니엘 센터를 통해서 가난한 아이들을 돕기 위해 엔젤 트리 사역을 합니다. 이번 가을에는 또한 굳네이버스를 통해 아동 결연 켐페인도 할 것입니다. 탄자니아에 혹은 멕시코에 단기 선교팀을 보내기도 합니다. 노숙자를 섬기고 라티노를 돕고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섬기는 일은 연중으로 지속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업을 추진하다 보면, 이런 저런 불평을 마주합니다. "우리가 낸 헌금으로 교회에서 알아서 하면 되지 왜 또 손을 벌리느냐?"는 소리도 들리고, 자꾸만 뭘 하라는 통에 귀찮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그런 소리를 바람결에 듣다 보면 때로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하지만 우리의 신앙이 죽은 신앙이 되지 않게 하려면 계속 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교회가 교인들의 마음을 평안하게 해 주어야 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불편하게 흔들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가난이라는 과목에서 과락을 하지 않게 하려면 끊임없이 흔들어야 합니다.

이번 10월 6일에 하는 바자는 '비움의 바자'라는 취지로 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씀에 아주 기뻤습니다. 바자에서 나온 수익금으로 우리 교회 청소년들의 단기 선교 활동을 돕겠다고 하는데,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자신을 비우자는 데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안쓰는 물건'을 기증 받았는데, 이번에는 '쓰는 물건'을 몇 개씩 내놓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게 필요 없어서 내놓은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하지만 내어 놓자는 것입니다. 내어 놓고 더 좋은 것을 사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살아보자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도우려면 내 살림을 줄이는 것부터 해야 합니다.

부담이 되시지요? 하지만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금 억지로 선행을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한 번 2장 1절에서 야고보 사도가 한 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구절을 New Living Bible은 이렇게 번역했다고 앞에서 소개했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이 구절을 뒤집어 다음과 같이 번역해 보았습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만일 여러분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고 싶지 않다면, 우리의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굳게 믿으십시오.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려면 우리가 누구를 믿고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지갑을 열고 손을 뻗으려면 우리의 주님에게 얼마나 든든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 가지고는 안 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고,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깊이 연결되어 있다 보면, 그분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을 덮고, 그분의 눈이 우리의 안경이 됩니다. 그러면 사람 대하는 것이 달라지고, 돈 쓰는 것이 달라지며, 말 버릇이 달라집니다. 삶의 모든 면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6.

지난 수요일 저녁, 10월에 예정되어 있는 멕시코 선교에 참여하는 분들이 모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멕시코 단기 선교에 참여하게 된 동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참여자들 모두의 이야기가 감동이었지만, 오늘 말씀과 특별히 연결되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아들이 5년 전에 백혈병 진단을 받았던 교우의 이야기입니다. 겨우, 대학 3학년이었습니다. 그 가정은 그 일로 인해 심한 풍랑을 겪어야 했습니다. 몇 개월 동안의 치료 끝에 다행히 정상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5년 동안 재발을 하지 않아야 안심할 수 있습니다. 지난 8월 중순, 5년을 지내며 마지막 검사를 했습니다. 아들과 함께 병원을 찾은 그 어머니에게 담당 의사는 완치를 확인해 주었습니다.

그 교우의 말씀입니다. 아들이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5년 동안 많은 교우들께서 기도해 주셨고, 특별히 중보기도팀에서 때로는 가족보다 더 간절히 기도해 주신 것이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자신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데, 멕시코 선교팀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헌데,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딸 아이가 10월 초에 출산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딸 아이의 출산을 돌보아주어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마음에 감동이 있을 때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그 고민을 털어 놓았습니다. 그러자 딸이 한 마디로 대답했다고 합니다. "엄마, Go!" 자신에게는 남편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다녀 오라는 것입니다. 그 딸도 단기 선교를 가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엄마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녀 오라고 등을 떠밀더라는 것입니다.

단기 선교를 다녀 오는 것은 상당한 경제적 부담입니다. 여행 경비를 본인이 부담해야 합니다. 또한 그 교우는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한 주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맡겨 놓아야 합니다. 사업을 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자신이 직접 관리하던 사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면, 상당한 손해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모두 합하면 적지 않은 경제적인 손실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흔쾌히 나선 것입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던 하나님의 은혜가 아들의 사건으로 회복되고 나니, 그냥 감사하는 것으로는 안 되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 놓고 헌신을 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믿음의 시험에서 과락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도록 힘쓰십시다. 특별히, 가난이라는 중요한 과목에서 과락하지 않도록 힘쓰십시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우리가 믿는 영광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하십시다. 기도로써 혹은 말씀 묵상으로써 더욱 그분을 알고 그분과 하나되어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일하시도록 하십시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른 과목에서도 좋은 결과를 내겠지만, 인류의 영원한 문제인 가난의 과목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좋은 성적을 내고 나서 우리가 할 말은 오직 "주님께서 하셨습니다!"라는 것 뿐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에게서 터져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 주님
모든 선과 미와 애와 진의 근원이신 주님,
저희가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을 찾습니다.
주님을 구합니다.
저희를 채우시고
저희를 다스리소서.
저희를 통해
주님께서 일하소서.
주님 사랑하는 증거가,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증거가
말과 행실에서 늘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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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에 샘을 내는 법(To Make a Spring in the Desert)
                           --시편 84:1-7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2/audio082612kim_c.mp3

 

1.
뜨겁던 날씨가 많이 수그러져들고 있습니다. 유난히 뜨거웠던 지난 여름 동안 잘 견디셨습니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고 결실의 계절을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가을은 흔히들 '독서의 계절'이라고 하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여행의 계절'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교우들로만 말한다면, 여름 방학 동안에는 젊은 가정들이 여행을 많이 하는 반면, 은퇴하신 분들은 가을, 특히 10월에 제일 여행을 많이 하십니다.

얼마 전, 책을 읽는데, '여행'(journey)과 '순례'(pilgrimage)를 비교한 대목을 읽고 잠시 머물러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순례는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지역을 오랜 기간 동안 여행하는 것'(a journey, especially a long one, made to some sacred place as an act of religious devotion)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역을 돌아보고 오는 여행을 '성지 순례'(pilgrimage to the Holy Land)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제가 읽은 그 글의 저자는, '여행'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 과거의 모습 그대로 돌아오는 것을 말하고, '순례'는 여행을 거치면서 중대한 변화를 겪고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고 썼습니다.

사실, 어떤 여행이든지 어느 정도는 그 사람에게 변화를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여행을 마치고 나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나 판단하는 것에서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알던 세상과 다른 세상을 보고 왔는데, 어찌 그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 변화가 특별히 심한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도 그렇게 느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 변화를 느낄 정도로 심하게 달라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변화는 방문한 그 장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기보다는 여행 과정 중에 뭔가 초월적인 세계와 만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가끔 성경에 나오는 지역들을 방문하는 순례 여행을 하곤 합니다. 3년 전에 약 30명 정도가 다녀 오셨습니다. 그 때, 떠날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온 교우들이 계십니다. 지난 봄에도 또 한 팀이 순례 여행을 다녀 왔습니다.

저는 그분들 중 한 분에게서 진정한 순례 체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분은 많은 이들이 부러워할만큼 성공했고 또한 더 큰 성공을 위해 분투하는 과정에서 순례에 참여했습니다. 성공과 번영의 정상에 서 있던 그분은 그 순례가 자신에게 마지막 출구라고 생각하고 유서를 써 놓고 떠나셨다고 합니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성공에 둘러쌓인 자신의 영혼이 마치 감옥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비장한 마음으로 떠난 순례 여행 길에서 그분은 꼼짝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환경에 처했고, 그래서 두 손 다 들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순례를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제게 그 이야기를 하시는 그분의 눈가에는 끊임없이 이슬이 맺혔습니다.

모름지기, 순례라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부디, 이번 가을에 여행을 떠나는 분들에게 이러한 순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목적지가 성경에 나오는 장소가 아니라도 그러한 변화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좋은 구경하고, 좋은 음식 먹고, 유쾌한 잡담을 나누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성찰하며 하나님의 손길에 자신을 열고 여행을 하다 보면, 초월적인 세계와 마주치는 순간이 번개처럼 임할 수도 있고, 새벽처럼 열릴 수도 있습니다.

2.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은 어느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이 순례의 경험을 기억하면서 쓴 시편입니다. 이스라엘은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렸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랜 옛날부터 자의로 혹은 타의로 주변의 여러 나라에 흩어져 살았습니다. 그들은 생전에 조국 땅에 돌아가 사는 것을 늘 염원했고, 특별히 명절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 드리기를 꿈 꾸웠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는 적어도 일 년에 세 번은 순례를 가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녹록치 않았습니다. 타국 땅에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가장들에게 일 년에 세 차례나 순례를 한다는 것은 웬만해선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순례 여행은 주로 카라반 여행이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필요했으며 비용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일 년에 한 번 순례길에 오르는 것만도 보통 사람들에게는 벅찬 일이었습니다. 미국에 사는 이민자들 중에도 그런 분들이 많듯,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도 평생에 한 번 순례길에 오르는 것만도 특별한 축복으로 여겼을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오늘의 시편을 쓴 사람은 과거에 한 번 혹은 몇 번 예루살렘 성전에 순례를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순례길에 오를 형편이 아닙니다.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경제적인 상황이 좋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늙고 병들어 더 이상 그렇게 고된 여행을 할 수 없는 상황에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심정이 그렇습니다. 갈 수 있을 때는 별로 갈 마음이 없다가도 막상 갈 사정이 되지 않으면 더 간절히 가보고 싶어집니다. 지금 이 시인이 그런 형편에 있습니다.

이 시를 쓸 때, 그 시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개 그렇게 했듯이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머리를 두고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눈을 감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 땅을 밟고 그 영광스러운 성전에서 제사드리던 일을 기억합니다. 사정이 된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보고 싶습니다. 아니, 사정만 된다면 그곳에 영원히 머물고 싶습니다. 그러한 열망으로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1-4절)

아마도, 순례의 경험을 했던 분들이라면 이 구절을 읽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그 기억을 되살릴 것입니다. 굳이 성경에 나오는 지역이 아니더라도,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어떤 거룩하고 초월적인 세계와 접속하는 경험을 하게 해 준 여행의 기억을 회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회상하다 보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 그 거룩하고도 신비로운 경험을 다시 하고픈 마음, 항상 그러한 설레임 안에 머물러 살고 싶은 마음이 샘솟아 오릅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열망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곳에 다시 가는 것도 쉽지 않고, 그곳에 다시 간다 해도, 과거에 가졌던 그 설레임을 다시 경험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다 내려 놓고 그곳에 이주하여 살아갈 수도 없고, 그런다 한들 그 삶이 상상하는 것만큼 황홀하지도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은 그곳에 다시 가서 과거의 그 경험에 젖어 보고 싶지만, 그것이 해답이 아니라는 사실은 시편 84편의 시인도 알고 저와 여러분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3.
바로 여기에 영적 생활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이 순례 체험이었든 성령 체험이었든, 과거의 영적 경험을 회상하며 그것을 다시 경험해 보기를 갈망하는 것은 겉으로는 좋아 보이지만 실은 영적인 함정입니다. 만일 이 시인이 과거의 순례 경험을 회상하며 다시금 순례길에 오를 날만 손 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 날이 다가오기 전에 그의 영적 삶은 메마른 불모지가 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영적 체험이라는 것이 본질상 그렇습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한계에 갇혀 있습니다. 우리의 오감으로 늘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을 곧 잊습니다. 영어 표현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인간의 한계와 속성을 아주 잘 요약한 말입니다. 우리는 눈으로 보든, 맛을 보든, 손으로 만지든, 코로 냄새를 맡든 혹은 귀로 들어야 합니다. 항상 그렇게 확인해야만 그것을 기억하고 인정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영적 체험을 쉽게 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눈 뜨는 사건이 자신에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는데, 그 때의 감흥은 쉽게 사라져 버립니다. 당시에는 마치 하나님 나라를 손에 잡은 것 같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긴기민가 해 집니다. 심하면 "그 때 내가 뭔가에 홀렸었나?"라고 의심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잊어 버리는 사람도 있고, 과거의 감동을 다시 회복하고 싶어서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르기를 학수고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영적 체험은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도록 부르는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영적 체험했다면, 매일같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머물러 사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체험의 감동은 가라앉고 또 다시 같은 감흥을 추구하게 됩니다. 순례 체험을 한 사람은 또 다시 순례의 길을 떠나려 하고, 부흥회에서 체험한 사람은 또 다른 부흥회를 찾아 두리번 거리게 되며, 영성 수양회에서 그런 체험을 한 사람은 또 한 번의 수양회를 기다립니다. 그렇게 기다리는 동안 그의 영혼은 파리하게 야위어 버리고 그의 삶은 메마른 황야처럼 되어 버립니다.

시편 84편을 쓴 시인은 그 위험을 알았습니다. 그는 과거의 순례의 경험을 회상하며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를 것을 꿈꾸지 않았습니다. 다시 그곳에 간다 해도 과거와 같은 그런 영적 감동을 경험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일상을 떠나 순례길에 나서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순례길로 만들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5-7절)

여기서 시인은 마치 순례길에 오른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이 선 곳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참된 힘은 오직 하나님에게 있음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일상 생활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수백만리 떨어져 있다 해도 마음은 늘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 그 사람이 진정한 순례자입니다.

4.
그렇게 살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6절은 조금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라는 말은 직역하면 '바카 골짜기'(the valley of Baca)입니다. 히브리어 '바카'가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습니다만, 그 모든 의견에 공동적인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메마른 광야를 뜻한다는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를 지나는 것은 눈물 나는 일입니다. 그래서 '눈물 골짜기'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그분을 예배하는 사람도 메마른 광야를 지날 때가 있습니다.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고 하여, 혹은 늘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여, 걷는 곳마다 낙원으로 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매일을 순례자처럼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6절은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날 때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이라고 합니다. <새번역> 성경은 마치 샘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것처럼 번역을 해 두고 있습니다만, 이 구절에 관한 한 <개역성경>이 번역을 더 잘 해 놓았습니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일상의 순례자들은 메마른 광야에 샘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만이 아니라 이곳 저곳에 샘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저절로 솟아나는 샘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물을 마시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메마른 광야에 샘을 파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때로는 며칠동안 땀 흘려 파다가 거대한 암반을 만나는 바람에 덮어 버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힘겨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상의 순례자들은 결국 샘을 만들어내고야 맙니다.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삶은 결국 그같은 기적을 만들어 냅니다.

6절 마지막에 덧붙여진 말씀이 참으로 귀합니다. 일상의 예배자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면서 그곳에 샘을 내고 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 구절은 <새번역>이 더 좋습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메마른 광야에 샘을 냈을 때, 하나님께서 그 샘에 물이 가득 차도록 비를 부어 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샘물에 생수가 가득 넘쳐 흐르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이 말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 함께 하며 그분을 예배하며 살아가면 마침내 그분을 환히 보게 되는 축복을 얻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치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만나듯 하나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5.
그러므로 과제는 과거의 영적 체험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영적 체험을 출발점으로 하여 우리의 일상을 순례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과제입니다. 그럴 때, 우리의 광야에 샘이 만들어지고, 그 샘을 통해 영적 생명수를 얻을 수 있습니다.

매일의 삶을 영적인 순례로 만들어 때로 광야와 같은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기 위해서는 연장이 있어야 합니다. 저절로 열린 샘을 찾는 데는 아무 도구가 필요 없지만, 마른 땅에 샘을 파려면 좋은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영적 샘을 파는 데 꼭 필요한 도구 네 가지를 소개합니다.

첫째, 공적 예배(communal worship)입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들이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는 영적 순례 과정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예배를 결코 소홀히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를 대신할 것이 없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보기 어렵습니다.

'설교 듣는 것'을 '예배 드리는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절대로, 절대로 설교 듣는 것으로 예배 드렸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교는 예배의 일부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 안에 담긴 순서들이 모두 중요합니다. 건강의 이유로 불가능하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성도들이 몸으로 함께 모여 정성들 다해 예배 드리는 것은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하나님을 만나는 데 절대적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연장입니다.

둘째, 개인 경건 생활(personal daily devotion)입니다. 매일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여 하나님 앞에 홀로 서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하루 일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을 떼내어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일상의 순례자는 가장 먼저 가장 중요한 시간을 하나님께 떼어 바치는 사람입니다. 그 시간에 홀로 말씀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중보해야 합니다. 매일 경건 생활로 인해 우리가 파는 샘은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셋째, 영적 사귐(spiritual fellowship)입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어야 하고, 또한 진실한 사랑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같은 영적 사귐이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열 대상이 없으니 대낮에 닥치는 대로 칼부림하는 사람이 나오고, 눈 감고 총을 쏘아대는 사람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즈음 뉴스를 읽고 있으면 참으로 두렵습니다. 과거에는 사람이 폭탄을 제조했는데, 이제는 이 시대가 사람들을 폭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어디 한 두 가지이겠습니까만, 가장 큰 이유는 참된 친구, 참된 소통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에게는 이 같은 참된 영적 사귐을 나눌 대상이 있습니까? SNS(Social Network Service)로 인해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고 있습니다만, 과연 내 옆에 진실된 사귐을 나눌만한 대상이 있습니까? 트위터의 팔로워가 수천명이 된다고 자랑하면 무엇합니까? 페이스북에 친구가 수백명이라고 좋아할 이유가 없습니다. 카카오톡으로 수백명과 연결되어 있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어줄 귀가 나에게 있느냐는 데 있고, 내가 내 속 이야기를 할 친구가 있느냐는 데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아이들과 함께 바깥에서 식사를 하는데, 주문한 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모두가 자기 스파트폰으로 누군가와 소통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순간 "아, SNS가 수 많은 사람들과 연결시켜준다는 허울로써 우리를 속여 정작 옆에 있는 사람과의 사귐을 방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SNS가 우리 시대에 피할 수 없는 생활의 도구가 되었지만, 영적 생활에 가장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판 영적 샘을 말라버리게 만드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넷째, 사랑으로 행하는 봉사(service)와 선교(mission)입니다.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신앙적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몸을 낮출수록 더 잘 보이고, 자신을 비울수록 더 가까이 오신다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가서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과 함께 거친 음식을 먹고 와서는 그곳에서 주님을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것이 신앙의 진리입니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섬기고 희생할 때 그리고 사랑의 마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할 때, 주님은 더 잘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굳이 선교지에 나가지 않아도 됩니다. 내 삶의 현장에서 허리를 숙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이제 9월부터 시작되는 성인 신앙 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우려 주시기 바랍니다. 제목은 다 각기 다르고 가르치는 사람도 다르지만, 초점은 한 가지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일상을 순례로 만들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눈물 골짜기를 지나가고 있다 해도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을 파도록 서로 배우고 기도하고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6.
오늘 우리가 만난 시인은 또 다시 순례길에 오를 기회를 얻었는지, 아니면 그대로 생을 마쳤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육신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성전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시온에 살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고, 이미 천국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혼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삶은 어떻습니까?

혹시, 최근에 신비한 영적 체험을 하고 그 황홀한 감동에 젖어 살고 계십니까? 축하드립니다. 하지만 그 체험에 붙들려 있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보다 더 깊고 희한한 체험을 하려고 두리번 거리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셨으니, 그 눈으로 매일의 일상을 영적 순례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밤의 이슬과 낮의 비를 받아 담을 수 있는 샘물을 파셔야 합니다.

혹시, 멀지 않은 과거에 하늘이 활짝 열리는 체험을 했는데, 이제는 그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되어 버린 상태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눈물 콧물 쏟으며 감격했었는데, 이제는 그 감격이 거짓말 같이 느껴집니까? "그 때 내가 뭐에 홀렸던 것은 아닌가?"라고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영적 세계에 대한 우리의 경험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가라앉고 빨리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과거와 같은 경험을 다시 맛보고 싶어서 이곳 저곳으로 전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해결책은 단 하나뿐입니다. 우리의 메마른 영적 광야에 샘을 파는 일입니다.

혹시, 예배에 자리에 나와 있지만, '하나님 나라', '성령 체험' 혹은 '영적 체험'이라는 말들이 모두 남의 이야기와 같습니까? 아직 그 나라를 탐색만 하고 계십니까? 초월적인 세계와 접속되는 경험을 아직도 해 보지 못했습니까?

그렇다면 영적 샘물을 파는 네 가지의 연장을 단단히 잡고 샘을 파보시기 바랍니다. 이럭저럭하다 보면 저절로 샘이 터질 거라고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샘을 마련하지 못하면,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은혜의 빗물이 모두 땅에 스며들고 맙니다. 저절로 샘이 터질 것을 기대해서도 안되고, 가끔씩 내리는 빗물에 기대서도 안 됩니다. 진실로 영적인 생명수를 원한다면, 우리의 일상에 샘을 파야 합니다. 예배로써, 매일의 경건 생활로써, 진실한 영적 사귐으로써 그리고 사랑의 섬김으로써 샘을 파야 합니다. 그렇게 파들어갈 때, 필경 샘물이 터지고 하나님께서 은혜의 빗물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참 귀한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이 계절에 우리가 마음을 다잡고 할 일이 많지만, 일상을 순례로 삼아 마르지 않는 샘을 파는 일이 가장 우선 순위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이 계절은 우리 모두에게 특별한 계절이 될 것입니다. 매일, 매 주일, 그리고 기회 있을 때마다 영적 샘을 파는 일에 땀 흘리기를 마다하지 않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충만한 가을비를 내려 주실 줄 믿습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 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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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8월 19일 주일 설교
"시간의 장터에서"(In the Market Place of Time)
--에베소서 5:15-20

1.
한국에서 새로 사용되는 말 중에 '시(時 )테크'라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의 첫 자를 따고 '테크놀로지'의 첫 자를 따서 붙여 만든 말입니다. 영어로는 time management와 같은 말입니다. 시간을 유익하게 관리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가리킵니다. 시간을 관리하는 것도 테크놀로지 즉 전문 기술이므로, 연구하고 배우고 훈련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읽은 오늘의 말씀을 보면 '시테크'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듯한 말씀이 나옵니다. 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우리 말 번역으로만 보면, '시테크'를 배워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뜻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에 사용된 단어들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여기서 '세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카이로스'입니다. 이 단어는 '시간' 혹은 '세월'로 번역해서는 안 됩니다. 헬라어에는 그것을 가리키는 말이 따로 있습니다. '크로노스'라는 말입니다. 반면, '카이로스'는 중요한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영어 번역에서는 자주 '기회'(opportunity)라는 말로 번역합니다.

'아끼십시오'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자신을 위해 장터에서 값을 주고 건져내다'라는 뜻입니다. '건져낸다'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영어 성경은 redeem이라는 단어로 번역합니다. 그냥 두면 버려 없어질 것을 값을 주고 건져내어 자신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담아 다시 번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흘러가는 시간의 장터에서 값을 치루어 시간을 건져내어 기회로 만드십시오.

흘러가는 시간을 장터에 비유한 것은 참으로 기발한 착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는 좋은 물건이 나왔는지 유심히 살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혹시나 헐값에 나온 진귀한 물품이 없는지 찾습니다. 그냥 두면 먼지 속에서 뒹굴게 될 보물을 값을 주고 건져내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redeem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은 그 시간의 진가를 알아보는 사람이 사가도록 진열된 상품과 같습니다. 시간의 장터는 매일 열립니다. 시간의 장터를 돌아다니면서도 그 시간의 진가를 모르고 장이 파할 때까지 사지 않으면, 그 시간은 다시 손에 넣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장터에서 유심히 살펴서 좋은 물건들을 건져내는 사람처럼, 시간의 장터에서 흘러가는 시간을 건져내어 기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그 하루의 시간이 자동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가 값을 주고 사는 것만이 우리의 시간이 됩니다. 우리가 사들이지 않는 시간들은 마치 장터에 널려 있는 물건들과 같습니다. 그 모든 물건이 우리를 위해 펼쳐져 있지만 우리가 값을 주고 사야만 우리의 것이 됩니다. 하루 24시간의 '크로노스' 중에서 우리가 사는 것만이 우리의 소유 즉 '카이로스'가 되는 것입니다.

2.
장터에서 좋은 물건을 건져내기 위해서는 특별한 안목이 필요합니다. 시간을 건져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귀중한 순간을 포착하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고 그것을 건져낼 수 있는 안목을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신 비유 중 하나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마 13:45-46)

예수님은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좋은 진주를 찾아 다니는 상인이 마침내 값진 진주를 발견하듯,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꾸준히 찾아야 합니다. 여기서 '구하는'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지속적으로 구하는'이라고 의역해야 옳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냥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나라는 때로 우리의 오감을 통해 계시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그것을 넘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열 다섯 시간을 가면 저절로 눈 앞에 펼쳐지는 한국이라는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 나라는 저절로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찾아야 합니다. 그렇게 찾는 사람에게 하나님 나라는 드러나게 되어 있고, 찾고 나면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면 눈이 확 뜨입니다.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고, 전에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시간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일상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사람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직업을 대하는 눈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 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 것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에게 모든 것이 새 것처럼 보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았고, 하나님 나라를 보았기에 새로운 눈이 열린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건져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하기 전에 바울 사도가 쓴 고백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 (고후 5:7)

하나님 나라에 눈 뜬 사람은 더 이상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보다 더 크고 더 참된 하나님 나라를 알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오직 믿음으로만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여 그 나라를 위해 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은 바울이 사는 방법을 보면서 미쳤다고 생각했습니다.

3.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가장 먼저 관계를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성령 체험을 하고 난 사람에게 일어나는 공통적인 변화는 배우자가 지극히 사랑스러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만일 대단한 영적 황홀경을 경험한 것 같은데, 배우자에 대한 태도에 변화가 생기지 않으면, 그 체험은 성령 체험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배우자에 대한 태도의 변화는 의무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 배우자를 보던 눈이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서 달라졌기 때문에 저절로 달리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배우자는 나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는데,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니, 사랑하고 섬기라고 나에게 붙여주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진실한 마음으로 배우자를 사랑하고 섬기게 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아, 내 아내는, 내 남편은 왜 그러지 못할까?"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 아내도, 내 남편도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를 그렇게 사랑해 주었으면......"하고 생각합니다. 수십년 예수를 믿어도 변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내가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 남편이었고 얼마나 부족한 아내였는지를 자인하고, 하나님 나라를 더 환히 보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보면, 우리는 비로소 깨달을 것입니다. 문제는 내 아내, 내 남편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비단 부부 관계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기 전에는 누구를 대하든 자기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대했습니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나의 유익을 증가시키는 것이 모든 관계의 법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용 가치가 없다 싶으면 찬바람이 날 정도로 매정하게 등을 돌려 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그들을 섬기도록 나에게 붙여 주셨음을 깨닫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심판에 대한 비유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힌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마 25:40)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우리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변장하고 나타난 주님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아주 멋진 인도주의적인 수사법이 아닙니다. 진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볼 때 드러나는 진실입니다. 그 나라를 보고 나면, 겉으로 판단하던 습관을 청산하고, 그 사람의 조건을 보고 사람을 평가하던 버릇을 내려 놓습니다.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처럼 우리도 중심을 보고 모든 사람을 같은 값으로 대하게 됩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는 <그리스도를 본받아>(Imitation of Christ)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을 남들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사람 속에 있는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눈에 당신이 남들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일까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은 누구를 경멸하거나 무시하지 않습니다. 반면, 누구 앞에서도 굽신거리거나 비굴해지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높은 값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빛으로 모든 사람을 똑 같은 값 즉 절대값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관계의 법칙입니다.

4.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또한 일상 생활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직업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여가 생활을 보는 눈이 달라지며, 작고 사소한 일들을 보는 눈이 달라집니다.

직업을 돈 버는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 자체가 재미 있거나 보람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억지로 일을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지 못해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터에 나가는 모습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과 같아 보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직업을 '자기 실현의 수단'(means of self-realization)으로 여깁니다. 자신이 살아가는 의미를 확인하고 자신의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만 해도 꽤 좋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직업을 통해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고, 그 직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것도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보면,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일이 하나님 나라에 의미가 있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를 알지 못할 때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 우연히 택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나라에 눈 뜨고 나니 하나님께서 나를 그 일로 인도하셨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동안 하나님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지 못하고 그저 밥벌이로만 생각하고 산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휴가를 하는 동안의 어느 날입니다. 무심히 TV 채널을 돌려가다가 벤니 힌(Benny Hinn) 목사가 어느 유대교 랍비와 대담하는 프로를 보게 되었습니다. 벤니 힌은 '번영의 복음'(the Prosperity Gospel)을 파는 전도자로서 끊임없이 여러 가지 스캔들을 만들어내는 사람입니다. '저 사람이 요즘은 무슨 말을 하고 다니나?' 싶은 호기심에 저는 그 대담을 한 참 지켜 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와 대담하는 랍비도 역시 '번영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본질을 잃고 물질적인 축복으로 미끌어져 들어간 전도자들은 어느 종교에나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대담에서 랍비가 한 말 중에 귀담아 들을 말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직업을 물을 때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이라고 묻습니다. 우리 말로 하자면, "뭐 해서 밥 벌어먹고 삽니까?"라는 뜻입니다. 그 랍비는 이 질문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묻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직업을 밥벌이 수단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는 직업을 물을 때 "What do you do to help others?"라고 바꾸자고 제안합니다. "어떤 직업으로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돕고 있습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바꾸면, 직업이 밥벌이 수단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 수단이라는 의식이 자리잡을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대담을 보는 내내 고개를 저어가며 'No! No! 그건 아니지!'라고 생각했던 저는 이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심코 하는 말이 우리의 의식을 지배합니다. "저는 식당을 운영하여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세탁소에서 깨끗하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병원에서 아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심령이 배고픈 사람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학교에서 배우려는 학생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다 보면, 자신의 직업이 밥벌이 수단이 아니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일을 통해 버는 돈은 덤이고,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직업을 통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대목이 지난 다음 TV를 끄고 잠시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본 사람들은 직업을 물을 때 어떻게 질문해야 할까? "What do you do to glorify your God?" "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해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혹은 "What do you do to make a difference to God's Kingdom?"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당신은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렇게 묻는다면, 다음과 같이 대답하게 될 것입니다. "나는 의사로서 이웃의 아픔을 덜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돕습니다." "나는 정성껏 사람들의 옷을 세탁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룹니다." "나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배고픈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 줌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돕습니다." "나는 하루의 일을 끝내고 간 사람들의 뒷자리를 청소하여 사람들이 산뜻하게 새로운 하루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움으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의 나라를 돕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직업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말할 수 없다면, 그 직업은 없어져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사기를 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나는 이웃을 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사기를 칩니다"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또한, 이렇게 표현하고 진실로 이렇게 믿는 사람은 직업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집니다. "먹고 살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더 잘 먹고 싶어서 부정한 이득을 탐합니다. 하지만 "이웃을 도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정직하게 일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성직'이 따로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를 보고 나면, 모든 직업이 성직임을 알게 됩니다. 그 직업을 통해 이웃을 도와 하나님께 영광 돌리면 무슨 직업이든 성직이 되는 것입니다. 반면, 모두 다 성직이라고 생각하는 목회를 하나님 나라를 보지 못하고 한다면, 혹은 목회하면서 그 나라에 대한 시각을 잃어 버린다면, 목회는 성직이 아니라 목에 풀칠을 하는 밥벌이 수단이 되고 맙니다. 밥벌이로서 목회를 하는 것은 가장 불행한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경험은 직업만을 새롭게 보게 만들지 않습니다. 삶의 모든 활동들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영어의 killing time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험악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우리 말에도 그와 비슷한 말이 있습니다. '소일'(消日)이라는 말입니다. "무슨 일로 소일하십니까?"라는 말은 "무슨 일을 하면서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고 있습니까?"라는 뜻입니다.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는 것이 하루 하루의 삶이라니,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허망한 삶입니까?

'은퇴' 이후의 나날들은 '소일' 혹은 killing time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은퇴 이후에 편안히 놀고 먹는 것이 가장 좋은 은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What do you do for a living?"이라고 질문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보고 직업을 통해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마음을 쏟는 사람에게는 은퇴가 없습니다. 직업에서는 은퇴가 있다 해도,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는 은퇴가 없습니다. 편안히 먹고 논다고 '노년'이 아닙니다. 노년은 이웃을 돕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더욱 헌신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5.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그 나라의 빛으로 우리의 관계와 일상을 새롭게 보게 되면, 하루 24시간 전체를 redeem할 수 있습니다. 장터에서 건져내어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크로노스'를 '카이로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소일의 대상이었던 나날들을 건져내어 값진 나날로 만들 수 있습니다. 덧없어 보이던 일상이 영원의 빛깔을 입게 됩니다. 삶의 질이 달라지고, 삶의 빛깔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고 새로운 눈을 뜨라는 뜻입니다. 매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변장하고 나타난 주님'으로 대하고, 이웃을 돕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려는 목적으로 모든 일들을 섬기게 되면, 허비되는 시간이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하루 하루를 쓸어 없애는 '소일(消日)의 삶'이 아니라, 하루 하루를 건져내어 쌓아올리는 '적일(積日)의 삶'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매일 우리에게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서 보물을 건져내는 일입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을 한 뒤에 바울 사도는 곧바로 "때가 악합니다"라고 적습니다. "때가 악하다"는 말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과 관계하여 그 뜻을 찾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여기서 '세월을 허비하게 하는 악'을 생각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매일 우리에게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 어슬렁 거리며 돌아다니게 만드는 악을 말합니다.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이해관계에 따라 굽신대게도 하고 외면하게도 하는 악을 말합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을 돈벌이로만 생각하게 만드는 악을 말합니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소일하여 결국 인생 전체를 텅 비게 만드는 악을 생각하고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2천 년 전, 바울 사도가 활동할 당시에도 이 악은 심각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그 어느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심각합니다. 물질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물질주의'(meterialism), 나 혼자만 행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개인주의'(individualism), 돈이 제일이라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mammonism), 지금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쾌락주의'(epicureanism), 먹는 게 남는 거라고 믿는 '소비주의'(consummerism) 같은 시대 정신들이 우리를 세뇌시키고 있습니다. 여기에 사이비 과학정신이 합세하여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무시하고 외면하며 경멸합니다. 이러한 시대 정신에 속으면 영락없이 시간의 장터에서 날이 저무는지 모른채 놀이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살게 됩니다. 일생동안 잘 산다고 노력했는데, 돌아보니 인생이 빈 껍데기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악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값진 진주를 찾아 세상 구석 구석을 찾아 다니는 상인처럼, 우리도 하나님 나라를 찾아야 합니다. 꾸준히, 끊임없이, 매일, 지속적으로 찾아야 합니다. 매일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매일 깊은 기도를 위해 충분한 시간을 할애해야 합니다. 마음과 영혼을 다해 예배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에게 자신을 열고 영적 사귐을 나눠야 합니다. 이웃에게 자신을 낮추어 섬겨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를 찾는 길입니다.
그렇게 찾는 사람에게는 필경 그 나라가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한 순간에 환히 드러내기도 하고, 조금씩 드러내기도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마 7:7-8)

그동안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워줄 약속의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예수께서 여기서 구하라고, 찾으라고, 문을 두드리라고 권하시는 대상은 우리의 욕심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 보기를 구하고, 그 나라 경험하기를 찾으며,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문을 두드리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 그 나라를 사모하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됩니다. 한 번 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그렇게 하면 됩니다.

6.
하나님 나라에 눈 뜨면, 우리에게 보이는 이 세상은 전혀 달라 보입니다. 세상이 달라 보이니 전과는 달리 생각하게 되는 것이고, 전과는 달리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기 위해 우리에게 '시테크'의 기술도 필요하지만,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고 살아가는 변화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악한 세대로부터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땅에서부터 하나님 나라를 살고, 육신 안에 살고 있으면서 영생을 누리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앞으로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의 장날이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지난 주간에도 92세의 노령에도 한 참을 더 사실 것 같던 집사님께서 아침 잠을 주무시는 동안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또한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청년처럼 활발히 활동하시던 분이 심장마비로 인해 속절없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시간의 장날은 한 없이 지속되지 않습니다. 불원간,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는 순간에 시간의 장날은 영원히 마감됩니다.
그러니 "세월을 아끼십시오"라는 말씀을 흘려 듣지 말아야 합니다. 아직 시간 있을 때, 하나님 나라에 눈 뜨고 그 나라의 눈으로 이 세상을 살아 하루 하루를 건져내어 영원의 창고에 쌓아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찾아다니는 '하늘의 상인'이 되십시다. 우리 모두 하나님 나라를 품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천국의 나그네'가 되십시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주님의 부르심이요, 인생에서 진정한 성공을 이루는 길입니다.

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주님 나라 보기를 갈망하게 하시고
그 갈망으로써 그 나라를 보게 하소서.
그 나라를 봄으로
매일 열리는 시간의 장터에서
소일하지 않게 하소서.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주님처럼 대하게 하시고,
저희가 하는 모든 일을
예배처럼 섬기게 하소서.
이 악한 세대에서 저희를 건져 주시고
주님의 나라에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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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29일 주일 설교
김 영봉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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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kumcgw.org/2010new/sermons/2012/sermons_042912_hvod.asp


"세상은 악하고 인간은 약하다"
(Evil Is Strong And We Are Weak)
--에베소서 6:10-13


1.

오늘로서 주기도문 연속설교를 마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기도문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이 송영(doxology)에 대해서도 한 주일 묵상해 볼 수 있겠으나, 기도 자체는 여섯 번째 기도 즉 우리를 위한 세 번째 기도로 끝이 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이 기도의 의미에 대해 묵상하기 전에 먼저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습니다. 얼른 보면 자명해 보이지만, 오해와 오역의 소지가 몇 가지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시험'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페이라스모스'(peirasmos)의 의미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것은 '유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고, '시험'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서는 주로 '유혹'으로 번역합니다(Lead us not into temptation). '유혹'은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 '시험'은 믿음을 흔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유혹은 물론 우리의 믿음을 시험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믿음을 흔드는 것은 유혹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시련이 시험이 되기도 하고, 의심이 시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한글 번역이 영어 번역보다 잘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구절에서도 따져 볼 것이 있습니다. '악에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악한 자에게서'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의 다수가 '악에서'라고 번역하기보다는 '악한 자에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악한 행동에서 구해 주십시오"라는 뜻도 아니고, "악한 상황에서 구해 주십시오"라는 뜻도 아닙니다. '악한 자'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게 해 달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악한 자'는 누구를 말합니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비추어 볼 때, 그것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우리 말로 '악마'(devil) 혹은 '마귀'(demon)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대적하여 인간을 노예로 삼고 하나님의 뜻을 방해하려는 영적 세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탄', '마귀', 그리고 '악마'는 악한 영적 세력의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동의어입니다. '귀신' 혹은 '악령'이라고 부르는 영적 존재들은 사탄의 지시에 따라 활동합니다. 예수님은 신화로 혹은 상징으로 혹은 비유로 이 영적 세력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 있어서 사탄과 악령은 엄연한 실재였습니다.

과학적 세계관에 완전히 설득된 현대인들은 예수님의 이 세계관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합니다. 또한 '마귀'니 '악마'니 '귀신'이니 하는 말들이 전설이나 동화에 많이 나오기 때문에 미개한 시절에나 가질 수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진리의 계시자라고 믿는 사람들 중에도 사탄이니 악령이니 하는 말이 나오면 외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예수님은 다 옳았지만, 사탄에 관해서는 착각하셨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헛것을 보셨을까요? 아니면, 세계관에 관한 한 그분은 미개한 수준에서 살고 계셨을까요? 아니면,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계를 그분이 보시고 그 세계를 계시해 주신 것일까요? 예수님의 세계관을 우리의 과학적인 세계관에 맞게 고쳐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의 세계관을 그분의 세계관에 맞게 고쳐야 할까요? "다만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라는 번역을 그대로 지킨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만,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옳다면, 우리는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세계관의 충돌을 경험합니다.

2.

셋째, '들게 하지 마옵시고'라는 표현에 대해서도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번역은 원문의 의미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에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시고"라고 번역했는데, 이렇게 하면 원래의 의미가 손상됩니다. 이 기도에서 예수님은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이끌어 들이는 분인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는 시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백살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시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고 기도하시다가 시험을 당하셨는데, 그것도 역시 성령께서 하신 일이라고 복음서는 보도하고 있습니다(4:1-2). 하지만 시험이 모두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은 아닙니다. 야고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시험을 당할 때에, 아무도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당하고 있다"하고 말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또 시험하지도 않으십니다. (1:13)

얼른 생각하면, 이 말씀은 시험에 대한 다른 성경 말씀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본문에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죄악으로 꼬여 들이실 리가 없습니다. 이런 유혹은 다른 데서 옵니다. 우리의 욕심 때문이기도 하고, 악한 영에게서 오기도 합니다. 아니, 태초에 에덴 동산에서 일어났던 그 일과 같이, 인간의 욕심과 사탄의 유혹이 결합하여 죄에 빠지게 만듭니다. 믿음의 뿌리를 흔드는 시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잘 되던 사업에 문제가 생기거나 건강하던 몸에 이상이 생기면, 사람들은 하늘을 향하여 "어쩌자구 저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라고 하소연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리모컨을 작동하듯 우리에게 시련이 일어나도록 하시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사정이 그런데도, 예수님은 마치 모든 유혹과 시험이 하나님에게서 오는 것처럼,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시험을 일어나게 하신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알고 계시지만 그대로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 중에 하나님의 눈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일은 하나님께서 직접 일어나게 하시지만, 어떤 일은 우리의 선택에 의해서 혹은 자연 질서의 순환에 따라서 일어납니다. 때로 그 일이 우리에게 시련이 되고 유혹이 되어도 하나님은 그냥 두십니다. 처음 인간을 지으실 때 그렇게 하기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로봇이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의 연인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을 사랑하되 스스로의 자유로운 선택으로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물론, 인간이 그 자유를 오용하여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진정한 자유는 불가능하고, 또한 진정한 연인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자유 의지로 인해 여러 종류의 시험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섭리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시험을 당할 때 본체 만체 하고 멀리서 팔장을 끼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강한 손을 펼치셔서 우리가 당하는 모든 유혹과 시험을 제거하실 수 있지만, 그것은 스스로 택하신 창조 원리에 위배됩니다. 그 대신, 하나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우리의 영혼을 일깨우시고 부드러운 손길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 음성과 그 손길이 너무 부드러워 영적으로 예민하지 않으면 그 음성은 들리지 않고 그 손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깨어있으면 그 손길의 도움을 받아 유혹과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이 맞습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에 이끌어 들이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도움을 받으면 시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풀어 쓰자면 이 기도는 이런 뜻입니다.

저희가 시험에 들만큼 영적으로 약해지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우리를 연단시킨다는 것은 알지만, 저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는 마십시오. 저희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게 해 주십시오. 시험을 당하여 도움을 구할 때, 저희의 기도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3.

이제야 우리는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기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해야 할 목록의 세 번째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 다해 이 기도를 올리다 보면,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까요? 이 기도는 적어도 세 가지의 진실에 대해 우리의 영혼을 일깨워줍니다. 이 세 가지의 진실은 믿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임에도 우리가 너무도 자주, 너무도 쉽게 잊는 진실입니다.

첫째, 세상은 악하다는 진실입니다. 물론,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요즈음 운전을 하다 보면 혹은 숲속을 걷다 보면 혹은 아침 기도를 끝내고 교회 정원을 나가 보면 , 탄성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이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인생은 때로 즐겁습니다. 천상병 시인이 말했듯이, 우리의 삶은 때로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의 그것처럼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세상 안에 악이 깊이 스며 있습니다. 때로 악의 현실을 대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신문에 보도되는 사건 사고에 대한 기사를 읽다 보면, 역겨움에 인상을 지뿌리는 일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악의 현실 배후에 '악한 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자' 즉 사탄의 본질은 '속이는 자'입니다. 사탄의 속임수는 은밀하고도 사악합니다. 만일 우리 눈에 보이는 악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속은 것입니다. 그 배후를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악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죄악을 자랑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유혹은 도처에 널려있고, 악은 강합니다. 그 악한 자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기"(벧전 5:8) 때문입니다. 사탄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을 자신의 협력자로 혹은 노예로 만드는 데 뛰어난 재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둘째, 인간은 약하다는 진실입니다. 젊은 시절, 저는 한 동안 이 기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방어적이라고 느꼈습니다. "인생아, 오너라. 내가 싸워 이기겠다"고 큰 소리치던 저였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시험과 유혹을 대면하여 보기 좋게 승리하고, 악과 싸워 이기기를 바랬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능력 있는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같은 분이 이렇게 나약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사실이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거듭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저 자신에게서 그 진실을 거듭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겸손해졌습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두고 비난하기에 민첩했던 제가 이제는 저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더 관심을 두고 삽니다. 저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모든 죄와 악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한 순간이면 저의 모든 것이 와르르 무너질 정도로 약한 존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소심하고 겁이 많아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악은 강하고 나는 약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어느 기독교 월간지에서 당시 한국 교회에서 가장 잘 나가던 어느 목사님의 대담을 읽게 되었습니다. 기자가 그 목사님에게 제기한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교회도 크게 성장시키셨고 부흥집회에도 자주 다니시니, 이성적인 유혹을 많이 받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아직 한 번도 넘어지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이 이렇게 대답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많지요. 늘 유혹이 따라 다닙니다. 그런데도 제가 지금까지 넘어지지 않은 비결은 단 한가지입니다. 36계 줄행랑, 도망치는 겁니다. 이성과 단 둘이 있는 자리를 무조건 피하는 겁니다." 그 목사님은 그토록 많은 영적 은사를 받으셨지만, 자신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아셨던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강하다는 진실입니다. 세상은 악하고 나는 약하다는 것이 진실의 전부라면 해결책은 둘 중 하나입니다. 토굴을 파고 숨어 살거나, 세상에 자신을 맡기고 세상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악한 세상을 장악하고 있는 '악한 자'보다 더 강한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가 기도하는 하늘의 아버지요, 부활하신 주님이시며, 성령이십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자시요 전능자이십니다. 악한 영의 우두머리인 사탄마져도 하나님의 통치권 하에 있으며 결국 하나님 앞에 항복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을 때, 악한 자의 본부가 회복할 수 없이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자'가 제 아무리 강할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는 것이며, 이 세상의 악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결국 모든 것을 바로잡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온 세상을 바로 잡으실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는 약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할 때 그 약함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희망은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에 의지할 때,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되고, 시험에 든다면 그 시험을 이길 수 있으며, 그 시험에 넘어졌다 해도 '악한 자'의 노예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전능자의 능력으로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갈 수 있습니다.


4.

이렇게 본다면, 이 기도는 절대로 소극적인 기도도 아니고, 방어적인 기도도 아닙니다. 오히려 적극적인 기도이며 전투적인 기도입니다. 이 기도는 기도자로 하여금 뒤로 물러서서 안전한 곳에 숨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떨치고 일어나 깃발을 들고 진군하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때로 유혹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때로 시험에 흔들려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겨내고 다시금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때로 악한 자의 손에 떨어져 시련과 환난을 당해도 그 악한 자에게 항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다시 회복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면 시험도 많고 유혹도 많으며 시련도 적지 않습니다. 악한 자 즉 사탄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려는 열망이 강할수록 더욱 더 강하게 공격합니다. "죽은 개를 차는 법은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 없이 살며 자신의 욕심대로 사는 사람에게 사탄은 관심이 없습니다. 이미 그의 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을 사탄은 주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자는 더욱 더 간절히 이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서 그분의 힘찬 능력으로 굳세게 되십시오.
악마의 간계에 맞설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시는 온몸을 덮는 갑옷을 입으십시오.
우리의 싸움은 인간을 적대자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과 권세자들과 이 어두운 세계의 지배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무기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그래야만 여러분이 악한 날에 이 적대자들을 대항할 수 있으며
모든 일을 끝낸 뒤에 설 수 있을 것입니다. (엡 6:10-13)

진실로 크시고 강하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기도하되, 홀로 악전고투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의 형제 자매들과 연대하여 진영을 짜고 악한 자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내가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자의 손길에서 보전되려면 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믿음 안에서 진실하게 삶을 나누는 신앙의 공동체가 필요합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서로 기도하며 섬기며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도모해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위해 기도하며 돌보고, 시험에 빠진 사람을 보살피며, 악한 자의 손에 빠진 사람을 구해내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 공동체가 없다면, 우리는 전쟁터에 홀로 적군을 상대하고 있는 외로운 병사와 같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비로소 이 세상에 널려 있는 악의 현실과 싸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악을 모두 치유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시기 전까지 우리를 통해 이 세상의 악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시험에 들지 않고 악한 자의 손에서 보호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우리 자신의 영적 안전과 성장을 위해 힘쓰면서 이 세상에 편만한 악을 줄이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교회로 함께 모일 때, 세상의 악은 교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가정과 직장에서 악의 현실을 감소시키기 위해서 할 일을 찾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있습니까? 혹시, 유혹을 직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당신에게 유혹의 미끼를 던진 것은 당신 홀로 싸워 이길 수 없는 '악한 자'입니다. 당신이 얼마나 유혹에 약한 존재인지를 잊지 마십시오. 유혹을 느낄 때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이미 유혹에 넘어가 죄악 속에 푹 빠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러지 말았어야 했으나, 이미 틀렸다고 포기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포기하면 영영 '악한 자'의 노예가 되어 버리고, 당신은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을 만나게 됩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하늘 아버지를 향해 "나를 사로잡으려는 악한 자의 손에서 구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악한 자'보다 더 크고 강력한 하늘 아버지께서 손을 뻗어 구해 주실 것입니다.

혹시 믿음의 뿌리까지 흔들리게 할 정도로 심각한 시련에 직면하셨습니까? 환난과 시련의 한복판에서 "하나님, 왜 저에게 이러십니까?"라고 외치다가 지쳐 이제는 "과연 하나님이 계실까?"라고 질문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심한 시련을 당하다 보면 모두 다 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기도하려 해도 기도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몸소 시험을 받아서 고난을 당하셨으므로, 시험을 받는 사람들을 도우실 수 있습니다"(히 2:18). 그러니 그분을 향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환난으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게 해 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최근에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당하고 계신 교우가 계십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목사도 감당하기 힘들 정도이니, 본인은 얼마나 더 그렇겠습니까? 그분이 당하고 있는 시련은 보통 시험이 아닙니다. 이럴 때 기도가 제일 큰 힘이기는 하지만, 기도밖에는 할 것이 없어서 안타까운 저에게 그분은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시련을 버텨내기 위해 지난 사순절 새벽기도 설교를 처음부터 하나씩 들으며 마음을 다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이 가장 필요할 때 하나님을 떠나는지 알기에 그 교우님의 메일을 받고 저는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모든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같은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심각한 유혹에 직면하는 일도 없고, 믿음을 흔들 정도의 시련도 없습니다. '악한 자'는 이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믿음을 흔들 기회를 찾습니다.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는 동안, 영적으로 무감각해지고 무덤덤해지게 만들어 버립니다. 믿음은 평안하고 안전할 때 가장 위험한 법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고전 10:12)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안전하고 평안한 사람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다만 악한 자에게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를 매일 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의지하고 힘써 노력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구해 주시며 강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게 하여 자신에게 갇히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희생하며 헌신하게 해 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힘써야 하지만, 시험에 빠진다 해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은 오직 하나님을 등지는 것뿐입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하며 우리가 얼마나 약한지를 알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살아간다면, 설사 시험에 빠진다 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1:2-4)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어떤 처지,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흔들리지 말고 하늘 아버지를 의지하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며, 성령의 충만함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한, 그 어떤 시험도 우리를 흔들지 못할 것이며, 오히려 우리를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일하여 이 세상의 악을 퇴치하는 데 우리의 인생이 사용될 것입니다. 그 은혜와 축복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늘의 아버지,
저희 눈을 뜨게 하셔서
세상의 악을 통해
악한 자를 보게 하소서.
악의 현실 앞에서
저희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알게 하시되,
하늘 아버지께서 얼마나 강한 분이신지도
알게 하소서.
매일같이 아버지 앞에 낮아지게 하시고
매일같이 새롭게 일어나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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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8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주기도문 연속설교 "너희가 기도할 때에..."> 8
                                                "내 기도는 너무 사치스럽다"
                                              (My Prayers Are Too Luxurious)
                                                     요한복음(John) 6:47-51

1.

Happy Easter! 부활의 은총과 축복이 교우님의 영혼에 그리고 가정과 직장에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오늘은 부활 주일이긴 하지만 그 동안 진행해 온 주기도문 연속설교를 계속하려 합니다. 오늘이 특별한 주일이기는 하지만, 일년 내내, 주일은 모두 부활을 축하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의 40일을 계산할 때도 주일을 포함시키지 않습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기억하는 기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먼저 하나님을 위해 세 가지의 기도를 올리라고 가르치십니다. 그 세 가지 기도를 영어로 Thou Petitions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기도의 관심을 기도자 자신에게 돌려 세 가지의 기도를 드리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것을 We Petitions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소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진실을 말하자면, 기도 중에 하나님을 뵙고 그분을 찬양하고 그분의 다스림에 자신을 맡기며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입니다. 이 기도가 이루어지면,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제목들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니, 우리 자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라고 적극적으로 격려하셨습니다. 우리의 한계를 알고 또한 우리의 연약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로써 무엇이든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기도할 수 있습니다. 때로 욕심에 눈 멀어 부정한 것을 구할 수도 있고, 분별력이 없어서 잘못된 것을 구할 수도 있습니다. 늘 그러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잘못이지만, 신앙 성장 단계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때로 자신에게 해로운 것을 달라고 구하는 것처럼, 우리도 초보적인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과정을 통해 성장하기를 기대하시며 또한 도우십니다.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사귐을 통해 영적으로 성장해 가면, 기도로써 무엇을 구할 것인지를 점점 더 명료하게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기도 제목을 세 가지로 정리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답게 아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자신을 내어드리려는 사람이라면, 그리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진정으로 소망하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마음에 품어야 할 기도 제목이 있다는 것입니다.

2.

첫 번째의 기도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입니다. '일용할'이라는 말로 번역된 헬라어는 '오늘 먹을'이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고 '내일의'라는 뜻으로 풀 수도 있습니다. 어떤 뜻으로 보든, 여기서 구하는 것은 두고 두고 먹을 풍족한 양식이 아니라 삶을 위한 기본적인 양식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면서 "오늘 하루 먹을 것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라는 뜻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무심코 이 기도를 드리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무심코 기도할 내용이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 대부분은 하루 먹을 양식 정도는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제 말씀을 듣는 분 중에 하루 끼니가 없는 분이 계시다면 양해를 구합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교회가 도울 수 있습니다. 목회자들에게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이상, 미국이나 한국 같은 나라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끼니 정도는 걱정하지 않고 삽니다. 그렇다면, 이 기도를 드릴 때마다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루 정도는 먹을 양식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도 이 기도를 계속 드려야 합니까?

이 질문은 기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께 구합니까? 나에게 그것이 필요한지 하나님이 모르시기 때문에 알려 드리려는 것입니까? 그것이 나에게 필요한 줄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주시지 않으니, 마음을 바꾸시도록 떼를 쓰자는 것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하시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시며, 전능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실 수 있으며, 또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신다. (마 6:8)

이것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신다"거나, "하나님은 내 간구에 관심도 없다"거나,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빠'라고 부르신 그 하나님은 나의 필요를 나 자신보다 더 잘 알고 계시며, 나의 행복을 나 자신보다 더 간절히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왜 나의 기도를 외면하시겠습니까? 기도하지 않아도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기도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분의 다스림에 우리를 맡기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숨쉬고 잠 자는 것부터 큰 질병에서 완치되는 과정까지, 나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냉장고에 며칠 동안 먹을 음식이 쌓여 있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 양식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저는 지난 해 수술을 받고 회복하는 과정에서 매일같이 치유를 구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아서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기에 구한 것입니다. " 주님, 저를 치유해 주소서"라는 기도는 실제로는 이런 뜻입니다. "모든 치유는 주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제가 인정합니다. 오늘도 주님 손에 저를 맡깁니다. 저를 받아 주옵소서."
기도하지 않는 이유도 가지 각색입니다만, 아주 차원 높고 심오해 보이는 이유도 있습니다. 가령, "내가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알아서 공급해 주시지. 그러니 굳이 기도할 이유가 없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기도를 실험하는 과정에서 한 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얼마나 하실 일이 많을텐데 어찌 이 작은 일까지 하나님께 구한단 말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참 갸륵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두 생각 모두 속은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을 잊어립니다. 식탁에 오른 음식을 두고 기도하지 않으면, 그 음식이 당연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오해합니다. 오늘 하루의 일을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그 날 손에 들어온 수입을 자신이 번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오늘 하루의 치유를 위해 기도하지 않으면, 의사와 약이 자신을 치료했다고 오해합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지 않으면, 저절로 잠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실은 그 모두가 하나님이 허락하시어 일어나는 일입니다. 결국,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다스림을 망각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오해와 착각에 빠집니다. 아주 사소한 일부터 큰 일까지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내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언하고 고백하고 또한 그분의 주권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하나님을 그처럼 철저히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공중의 새를 보아라.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으나,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새보다 귀하지 아니하냐?......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이 모든 것은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요, 너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마 6:25, 26, 31, 32)


3.

우리 자신을 위한 첫 번째 기도에서 주목해 보아야 할 또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즉, "오늘날 나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했다는 사실입니다.  "나에게"라고 기도했다면, 나와 내 가족이 먹을 양식만 있으면 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라고 기도했으니, 우리 중에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말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말할 때의 그 '우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류가 우리입니다. 아니, '모든 생명'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기도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우리 중에는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엔의 <세계 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가 제시한 가난과 기아에 관한 통계는 우리를 심히 불편하게 합니다. 현재 인류의 생명을 가장 많이 앗아가는 질병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기아라는 질병'(disease of hunger)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굶주려 죽는 사람의 수가 에이즈와 말라리아와 폐결핵으로 죽는 사람을 모두 합친 수보다 더 많다고 합니다. 굶어 죽는 고통은 그 어떤 질병의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다고 합니다. 매일 저녁 세계 인구 중 일곱 명 중 한 명은 굶은 채 잠자리에 듭니다. 이 사람들은 '타인'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타인은 없습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자녀이며, 우리의 형제 자매입니다.

가난과 굶주림이 문제가 되는 사람들은 저 멀리 탄자니아나 니카라구아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 중 하나인 맥클린 지역에도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루 종일 추위에 떨며 누군가 자신을 데려가 일감을 주기를 기다리는 라티노 노동자들을 매일 보시지 않습니까? 그들이 며칠만 일을 하지 못하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은 일용할 양식을 걱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불과 몇 마일만 가면 일용할 양식을 구걸하는 노숙자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가 이런 사람들에게는 절박한 기도입니다. 오늘 아침에도 일감을 찾아 나간 남편을 생각하고 또한 자식들을 생각하며 불안한 마음으로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마음 졸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들이 바로 우리의 형제요 자매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참으로 불편한 일입니다. 귀찮은 일이고, 때로 짜증나는 일입니다. 그것을 기억하면 내 손에 쥔 재물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돈, 내 마음대로 쓰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냐?"라는 말은 기독교인의 입에서는 절대로 나와서는
안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이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 불편한 진실을 외면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과 같은 일이며, 내가 져야 할 십자가를 내버리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실되게 믿으려 한다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될 마음이 있다면, 이 불편한 진실을 대면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일용할 양식 걱정을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사람에게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첫째,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우리'를 기억하고 이 기도를 드리다 보면, 자신의 삶의 규모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를 다짐하게 됩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고 얼마나 많이 허비하고 있는지를 자각하게 만들어 줍니다.

기도하는 중에 때로 "아, 내 기도는 너무 사치스럽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저 자신을 위해 기도할 때 그런 자각을 하곤 합니다. 저 자신의 건강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치료의 길을 찾지 못하여 어쩌지 못하고 있는 교우가 떠오릅니다. 그러면 "아, 내 기도가 너무 사치스럽다"는 느낌이 압도합니다. 제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중에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자녀로 인해 고통받는 교우가 떠오릅니다. 그럴 때면 "오, 주님, 제 기도가 너무 사치스럽군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그럴 때면, 현재 상태에 자족할 마음이 생기고,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솟아 오르며, 그 사람들을 돌아볼 마음이 생깁니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마도, 주기도문에 이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신, 죽을 때까지 부족함 없이 살게 해 달라고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마음을 아셨는지, 예수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목록의 제일 앞에 이 기도를 배치하셨습니다. 이 기도를 통해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사치스러운지를 자주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그것을 깨달을 때면, 현재 상태에 자족할 마음이 생기고, 지금의 상태에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게 되며,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이들을 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둘째, 일용할 양식조차 없는 '우리'를 생각하며 이 기도를 드리다 보면, 이웃의 가난을 덜기 위해 나의 물질을 나누어야 하겠다는 마음이 생깁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데 반대하는 분들은 나름대로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값싼 동정이 그들의 가난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고착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가난은 게을러서 생기는 것이니 고생하게 내버려 두어야 정신을 차린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그런 가난도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이 모두 그런 원인 때문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그같은 논리가 자신의 이기심을 정당화시키는 위선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돌보라는 것은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부탁이요 호소이며 또한 명령입니다.

이런 뜻에서 오늘 우리는 고난주간 금식 헌금을 봉헌합니다. 두 주 후에는 거북이 마라톤을 통해 기금을 모아 나다니엘 선교 센터를 증축하고, 굿스푼 선교 센터를 돕고, 나진 선봉 지역에 있는 무의탁 청소년 센터를 지원하려고 합니다. 이번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위해 세 분의 장로님께서 매칭을 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멕시코 형제들과 북한 청소년들과 라티노 형제자매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결단을 해 주셨습니다. 누군가 10달러를 헌금하시면, 실제로 그분들에게 전달되는 돈은 20달러가 되는 것입니다. 이번 거북이 마라톤 행사를 통해 우리 모두가 감격할만한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마다 부담이 된다고 호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분들에게 죄송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의 의미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기도의 의미가 우리의 마음에 와 닿는다면, 지금 가진 것에 자족할 마음을 얻을 것이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생길 것이며, 나의 것을 나눌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4.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면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육신에 필요한 끼니와는 다른, 또 다른 양식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먹을 것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먹을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매일같이 허리 둘레를 만져 보면서 어떻게 하면 덜 먹을까 걱정하는 세상입니다. 이렇게,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었는데, 왜 세상은 아직도 이 지경입니까? 유물론자들은 물질적인 것만 채워지면 유토피아가 온다고 주장했는데, 왜 그 낙원을 우리는 이 땅 어디에서도 보지 못합니까?

인간은 먹는 것으로 다 해결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의 친적 중에 욕쟁이 할머니가 계신데, 그분이 자주 그러셨습니다. "인간이 별거라니? 똥 만드는 기계지." 참, 맞는 말씀이다 싶습니다만, 인간은 그 이상입니다. 육신만 편하면 다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인간성을 다 잃어 버린 것입니다. 원래 인간은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창세기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졌고, 그래서 '생령'(living soul)이 되었다고 합니다 (창 2:7). 인간이 '생령'이라는 말은 '육신을 가진 영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음식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히틀러 치하에서 '죽음의 수용소'에 감금되어 인간의 바닥을 철저히 경험했던 빅터 프랭클(Victor Frankl)은 나중에 그 경험을 바탕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서>(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 책에서 프랭클은 인간이 최소한의 육체적 욕구가 채워지지 않아도 얼마든지 고매한 존재로 살 수 있음을 증언합니다. 누구나 다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육체적인 욕구만을 위해 살지 않더라는 사실입니다. 인간은 그러한 존재로 지어졌습니다. 그러한 존재이기에 육신의 양식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광야에서 사탄에게 받은 첫 번째 시험은 돌을 빵으로 만들라는 것이었습니다. 40일동안 금식하신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것은 아주 달콤한 유혹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유혹을 물리치면서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하였다. (마 4:4)

그 옛날,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아모스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겠다.
사람들이 배고파 하겠지만,
그것은 밥이 없어서 겪는 배고픔이 아니다.
사람들이 목말라 하겠지만,
그것은 물이 없어서 겪는 목마름이 아니다.
주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서,
사람들이 굶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이다. (8:11)

생령인 인간에게 음식 외에 필요한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먹어야 우리의 영혼이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육신의 배를 불릴 줄만 알지, 영혼의 허기를 채울 줄 모르는 데서 옵니다. 아무리 좋은 음식으로 배불리 먹고 즐겨도 마음 깊은 곳에서 진한 권태감과 회의감이 밀려 올 때가 있습니다. 음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영적 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만 그 영적 허기가 채워질 수 있습니다. 그 영적 허기가 채워져야만 인간은 생령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처럼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신 분(요 1:18)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다. 그러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은 이러하니, 누구든지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이 빵은 먹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나의 살이다. 그것은 세상에 생명을 준다. (요 6:48-51)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배우며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것이 바로 생명의 빵을 먹는 것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의 내면의 허기는 채워지고 내면의 갈증은 해갈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즉 모든 인류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오늘은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 중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허블 망원경으로 볼 수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며, 현미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육신이 전부가 아니고, 물질이 전부가 아닙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이상의 존재이고,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 이상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활이 과학을 위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을 인정한다면 부활을 부정해야 하고, 부활을 믿는다면 과학을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부활은 과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과학으로 설명하는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세상 뿐입니다. 그런데 부활은 눈에 보이는 세상을 초월하는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과학을 존중합니다. 그것 나름의 가치가 있고 역할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과학을 믿는 사람들은 부활에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험실에서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에 눈 뜬 사람이라야,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를 제대로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만이 자신의 모든 일을 하나님의 다스림에 맡기는 신뢰의 기도를 드릴 수 있고, 육신의 끼니만 해결되면 다 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영적 양식을 먹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육적 양식과 영적 양식을 섭취하여 온전한 생령이 되면,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에 자족하며, 자신의 삶을 줄여 이웃을 돕는 일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손을 뻗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 물질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사람,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라는 기도는 참으로 위험한 기도입니다. 불편한 기도입니다. 끊임없이 양심을 흔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는 한, 이 땅에서는 어느 정도 희망이 있을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는 아무 희망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아무 희망 없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인지를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적으로 위험해 보이는 것이 영적으로는 가장 안전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은 아주 위험한 기도이지만, 우리를 가장 안전하게 변화시켜 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주기도문이 우리를 쥐고 흔들 때, 마음껏 흔들리도록 우리를 맡기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부디, 주님께서 이 용기를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의 주님,
저희로 부활의 세계를 믿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모든 것을 주님의 다스림에 맡기게 하시고
육신의 양식만이 아니라
영적 양식을 먹게 하소서.
저희 모두가 생령으로 자라
물질에 자족하게 하시고
저희 것을 나누어
이웃의 고난을 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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