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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18)

신사 숙녀 여러분 건강한 여러분들을 다시 만나니 반값습니다. 오늘 은 참전동지회의 정기 총회입니다. 일전에 나는 무공훈장 모임에서  우리가 가장 장스러운 훈장이 종군기장이라는 말을 하엿습니다. 전쟁 에 참가한 군인치고 생명을 걸지 아니한 군인은 없으리라 생각되며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 참가한 군인은 다 용감한 사람들이기 때문입 니다. 군대도 각종 보직이 필요해 많은 참전자들은 적과의 직접적인 접촉이 허용되지 않게 되 있습니다.

 

  여기 모인분들은 다 젊음을 군을 통해 나라에 이바지한 분들입니다. 나이가 젊다고 다 나라에 몸을 바칠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증명되어야 나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무에 종사함 자체가 영예이며 감사를 들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 가 받는 최대의 대가입니다. 특히 말 없이 간 전우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렀습니다. 여러분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게실 줄 믿습니다.

 

내년에는 건군60주년행사가 있다합니다. 육사8기생까지는 한국 전쟁 전에 국방경비대로 임관된 사람들입니다. 대한 민국이 수립될 때 미국은 당시의 국방경비대를 독립된 대한민국의 국군을 이어줄 것을 공한으로 의뢰하였고 최근 미국 국회에서도 대한민국 독립 이전에 종사한 한미  양국 군인에 대한 사의를 표한바 있으며 한국의 경비대가 창설된 때는 1945 12월로 알고 있으며 대한민국 수립에 3년을 앞서서였습니다. 우리 국군의 모체인 조선경비대의 대 공산 유격전에서의 전투와 희생이 없었더라면 과연 6.25 한국전 시에 UN 군이 무사히 한반도에 상륙할 수 있었겠는가 의심을 한바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뜻 하는바 있어 몸은 미국에 와 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나를 나아준 고국 대한민국에 있으며 한국의 안보를 근심하고 게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비오며 영예 있는 노후 되시기 빕니다.

 

          2009 4 18       김웅수 육군 예비역 소장

               페리스 식당             참전 유공자 모임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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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4 10)  

 

  신사 숙녀 여러분 다시 만나니 반값습니다. 우선 무공훈장의 날 행사를 개최해 주시는 재향군인회장 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전쟁에 참가한 군인치고 생명을 걸지 아니한 군인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전쟁에 참가한 군인은 다 용감한 사람들입니다. 하물며 남에게 인정되어 훈장을 받게됨은 그 용감성이 인정되었다는 의미에서 퍽이다 다행한 자들이며 살아있다는 자신이 대견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말 없이 간 전우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여기 게시는 한국전 참전 용사들은 가장 자랑스러운 훈장이 종군을 증명하는 기장이며 그의 용맹을 증거함이 상의 기장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다 노인이지만 군대에서는 나이 차와 직종의 차로 여기 게시는 동료 중에는 전쟁 말기에 종군하였던지 자기의 용맹을 증명할 기회가 없었던 분들이 많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내 때의 직종 분류로 쓰이던 MOS 구분으로 일선 근무가 허용되지 못했던 분이나 일선에 배치되어도 적과 직접 대치하는 기회를 갖지 못한 분들께는 용맹의 기회가 부여되지 못한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보훈도 운이 따라야 하는 행운성을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다행이 수도 사단 참모장 때 한국 전쟁을 맞이했으며 안양 잔투에서 실종된 후 제1군단 인사참모로 경주까지 후퇴작전에 참가했고 종합학교를 거처8사단 부사단장으로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과 그 후 북진 작전에 참가했다 육본 참모총장 비서실장과 육군대학을 경유 다시 중부전선 제2 군단 참모장 직에서 10개월 지내다 종전시 육군 제 2사단장으로 강원도 철원 지역 백마산 방위 때  화살머리 고지 전투 에서 부하들의 용맹 덕으로 한국 정부로 부터는 태극 훈장을 미국 정부로부터는 Legion Merit 훈장을 받았습니다. 다행이 전쟁의 초기부터 참전한 덕으로 화랑 충무 훈장을 각 2개식 그리고 을지 훈장을 3개와 태극훈장 1개를 받았으며 미국 정부로부터는 전시에 Legion Merit 2개 전후에 하나를 합하면 3개가 됩니다. 그리고 전후 재1야전군 창설 공로로 대통령 개인 표창을 받았습니다. 별 한 일 없이 용감을 보일 자리가 되지 못한고로 과분한 표창으로 때때로 다런 분께 미안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회장님이 다른 분들은 태극훈장이 없다고 오늘 이자리에 달고 나오라 하셨는데 훈장들은 액자에 넣어 집안 장식품이 되어 액자를 부슬 수도 없어 훈장 장식품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흥미 있는 분들은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일전에 본회 이 부회장님이 주신 대한 민국 국가 유공자 기장을 대신 달고 나왔습니다. 여러분들도 가지고 게실줄 믿으며 못 가지신 분이 있으시면 제것을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아까 말씀 드린바와 같이 한국전을 위해서는 종군기장과 상의 용사 기장이 제일 자랑할 수 있는 훈장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나이로 보아 말이 한국전쟁으로 국한되기 쉬운데 한국 전쟁후에도 많은 공훈자가 있습니다. 휴전후의 군무 중에도 그리고 월남전 참전과 최근에는 서해 교전중의 용맹이 있으며 해 공군과 해병대 외국에 파견된 부대들의 용기 있는 후배들이 많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잘 모르나 군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에는 많은 공훈들이 계속되고 있을 줄 믿습니다.

 

  여기 모인분들은 다 젊음을 군을 통해 나라에 이바지한 분들입니다. 나이가 젊다고 다 나라에 몸을 바칠수 있는 것도 아니고 건강이 증명되어야 나라에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군무에 종사함 자체가 영예이며 감사를 들여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받는 최대의 대가입니다. 저의 말씀을 마치기 전에 한국도 한국전 참전자는 국가의 보상이 따르며 수훈자는 참전자에 비해 명색뿐인 차별을 받고 있으나 각국 특히 미국에서의 수훈자에 대한 대우는 우리 나라와 달리 영예를 실감케 하는 특징이 부럽습니다.

 

 여러분들은 뜻 하는바 있어 몸은 미국에 와 있으나 마음은 아직도 나를 나아준 고국 대한민국에 있으며 한국의 안보를 근심하고 게실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건강을 비오며 영예 있는 노후되시기 빕니다.

 

 

 

                                        김웅수                                                                                                                                                                   

                                    육군 예비역 소장

                               미 동부 재향군인회 고문      

                          (2009 4 10일 정대감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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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 3 28)

 

  신사 숙녀 여러분! 건강한 여러분들을 만나니 반갑습니다. 오늘은 우리에게는 특별한 날입니다. 첫째는 재향 군인회 탄생 8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동부 지역 재향군인회는 지난 2001 3월에 결성되었습니다. 우리의 모임이 지역 교포들의 모임으로서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볼때 가장 충실한 모임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초를 것이 8년전이며 초대 김홍기 회장단에 이은 이병희 회장단의 노력에 대해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모임이 정도가 될려면 회장단의 노력이 보통이 아니기에 말씀입니다. 우리의 모임이 지역 이민사회에 모범이 되며 또한 좋은 영향을 주기 바랍니다.

 

  둘째는 2004 4 28 창시된 율곡 forum 2번째 모임을 겸했습니다. 저는 forum 책임을 맡을때 우리가 미국에서 해야할 일을 1) 한국 전쟁에 대한 내역과 그의 참상을 이민 사회에게 정확히 이해시켜며 2) 대한 민국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인식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고 강조 하였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일보에 내가 경험한 한국 전쟁과 전후의 군대 생활 기록을 연재하여 보았습니다. 더우기 북은 중공군 90만과 UN 16 여명의 희생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끼리 운운하며 전쟁 경험 없는 우리 나라 젊은이들이 가지기 쉬운 통일 지상주의와 6.25 한국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 분별 못하며 북의 핵은 우리 것이라 하는 사고의 현실을 이용하고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없는 처지입니다. 한국 전쟁에 관해 교포 사회에게 옳은 인식을 갖도록 함이 우리의 책임인 압니다.

 

  셋째는 우리 산하로 들어올 있는 각종 향군 단체들이 발족하고 있읍니다. 그리고 외국에서의 우리 활동은 많은 제약을 받게 있습니다. 최근 육해공군과 해병대 그리고 여군 월남전 카튜샤등 좀더 축소된 동류적이며 친숙도를 공감할 있는 단체로서의 향군 분체들이 형성되 가는 경향을 보게됩니다. 기존 재향군인 단체의 성공을 뒷바침 하는 것으로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건전한 발전과 기존 재향 군인회와의 유기적 관계가 유지 되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재향 군인회의 책임이 더욱 중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모임을 좀더 삶의 질을 향상 시키며 상호간의 침목을 돈독히 하기 위해 상조회를 발족시킨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의 운영이 향군발전 취지에  이바지 되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저의 말을 마감하기 전에 최근 조선일보 사설을 통해 한국전쟁의 생존 영웅인 백선엽 대장에 대한 명예 원수계급이 수여된 다는 기사가 발표되였습니다. 백대장 개인 문제라기 보다는 정부에 항거한 자들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아니한 우리 사회에서 우리 동료의 한국전 참전에 대한 국민적 인정이란 점에서 있는 일이라 생각되어 여러분께 언급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 의한 한국전쟁의 도발과 그를 저지하는 노력과 한미동맹의 결과가 오늘의 남북간의 정치제도와 생활 차를 만들었다고 생각되어 한마디 첨가했습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재향군인회 고문 육군 예비역 소장 김웅수

                              2009 3 28 Annandale 정대감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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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5. 맷는말
                                 


 

나는 충실한 인생과 군인의 본분을 다하기위해 노력했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내가 임관할 선서한바 나라의 헌법과 국내외로부터의 적으로부터 국가를 수호 하겠다고 서약한 군인으로서는 실패한 군인이되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시 5.16 같은 입장이 되었드라도 나의 행동은날의 그것과 차가 없을 거라고 생각된다.

 

  나는 5.16에서 군의 고급 지휘관으로서의 책임을 하지못한데 비해서는 인생의 수획을 얻은 행운자의 하나라고 자위하고 있다. 나는 인생의 가장 성취기의 10년을 2 인생 준비를 위한 수련기로 썻으나 한국에서의 동료들의 은퇴기를 넘는 75세까지 나는 미국과 한국의 교육계에서 봉사할 있는 행운도 갖었다. 보다는 돈을 주고도 경험할 없는 인생 수련을 통해 고통의 인생에 참여할 있는 고귀한 기회를 부여받았다.

 

  나는 2 인생을 미국에서 개척하는 가운데 많은 시련을 극복함으로 생존에는 성공하였으나 대신 어느 전문 분야에서도 성공적 공헌은 못한 아쉬움을 느낀다. 우물을 파라는 우리의 격언은 역시 명언이다. 직장의 종류를 막론하고 직장 에서 평생을 일하는 사람을 보면 부러움을 느낀다. 사람은 직장에서 오랜 시간을 전념할 길에서 무엇인가 남을 위한 공헌도 기대되리라 새각하기 때문이다.

 

  원칙과 정도를 것는다는 것은 힘들고 단기적으로는 외로운 길이겠으나 눈으로 외롭지 아니한 길이다. 그것은 정도를 것고있는 대중에게 소망과 인내를 주며 자기 인생에게는 고귀한 자위가 된다. 권력은 우리의 생활을 좌우시키지만 세상은 외로우나 정도를 것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행해 나아가고 있는 하다.

 

             2002 4        미국  워싱턴에서      김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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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4. 5.16 군사 쿠테타에 대한 평가와 재발 방지

                                                            

 

) 군사 쿠테타의 재발 방지

 

  우리는 사고 관습 기호가 다양화되며 국제화되는 세상에 살고있으며 엏떠

국가 정책도 군민 전체를 만족시키지 못하는 세상을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는 획일적 사고 방식을 강요하는 군사 독재 정권에 대한 국민의 저항과 희생은 막대할 것이다. 나는 나의 경험을 통해 이러한 사태 발생을 미연에 예방키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조건들이 충족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는 군인 중에 군사력을 이용해 정권을 쟁취하겠다는 생각을 갖이 아니하도록 교육되어여야 하며 국가 이변에 대처할 있는 군의 지휘 계통이 살아 국민 신뢰가 유지되어야 하겠다. 둘째로 정치가 최소한의 국민 여망을 수용할 있는 수준이 유지되어야 하겠다. 군인도 국민이요 정치에 관심을 갖임이 당연하다. 정치가 혼미할 군인을 정치에 유도하는 남미의 군사정권을 많이 보아왔다. 셋째는 높은 민도의 유지이다. 나의 청소년기에 과거 일본에서는 2회의 걸치는 젊은 장교들에 의한 군사 쿠테타 시도가 있었다. 총리를 암살까지한 쿠테타도 국민의 지지를 엇지 못하고 실패를 하였다. 악법도 법이요 정의감도 수단 여하에 따라 불의가 된다는 원칙과 합법적 절차 그리고 국민의 높은 가치 인식의 저변이 확대되어야 하며 이것이 민도를 측정하는 기준이다. 마지막으로 군사 쿠태타 거사에 반대한 자들의 명예가 회복되고 보상되여 군인에 의한 헌법 수호의 정신이 장례되어야 하겠다.

 

 ) 군사 쿠테타에 항거한 군인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나는 1993 6 문민 정부가 수립되어 역사의 기원을 열겠다는 김영삼 정부가 5.16 군사 쿠테타로 선언함을 환영하면서 우선 5.16 반혁명 재판으로 희생된 동지들과 5.16 반란군을 저지하다 한강교에서 전사한 두명의 헌병들에 대한 복권과 적절한 보상을 탄원한 일이 있다. 당시의 총리를 지낸 황인성 장군과의 교우관계를 이용 김영삼 대통령께 나의 탄원서가 대통령의 직접 관심을 끌도록 부탁하기 위해 탄원서의 사본을 총리에게도 보낸 일이 있다.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결국 새로운 법이 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를 위해서는 정치인들의 힘이나 군의 정치개입을 정리하는 국방부의 자의적 역사 바로잡기 정책에 의존할 밖에 없게 되었다. 최근에는 나의 재판 기록으로 국군 묘지에도 들어 없게 있다는 신문보도를 보았다. 내가 국군 묘지에 들어가는 확율은 그리 높지 아니할 것이나 이러한 처사가 정치권이나 당국에 의해 묵인된다는 일이 우리나라의 사회 정의를 부르짓는 세력들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진다. 과거 일이니 내가 외국에 나와 있어 법정 유효기한이 넘었다고 것이나 헌정 질서를 고수하기 위해 중요한 5.16 반혁명 재판 기록이 정치권과 군부에서도 시정이 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행정부와 정치권의 역사 출발 운운함이 얼마나 허실이었나 말해주고 있다. 김대중 국민의 정부 대통령이 5.16 기념사업 명예회장에 취임 했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탄원서를 그에게 것을 시도하지도 못하였다. 민주 인사 대한 희생자가 보상되는 마당에 그의 원인제공을 막는데 희생된 군인들의 인권은 민간 인권에 미치지 못한다는 차별의식을 군인들게 어찌 설명할 것인지 쓸쓸한 마음 금할 없다. 참고로 김영삼 정부에 나의 탄원서와 국방부와 황인성 국무총리를 통한 답변 서신을 기록을 위해 부록으로 남겨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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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4. 5.16 군사 쿠테타에 대한 평가와 재발 방지

                                                            


) 5.16 평가와 우리나라의 민도

 

   5.16 대한 역사적 평가는 아직 시기가 적절치 못하며 5.16 시발부터 반대해온 나로서는 객관성을 위해 그에 대한 평가를 없는 입장에 있다고 말하였다. 5.16 주도한 사람이나 그를 반대한 자들 각기 나름대로의 국가관과 생활 철학을 갖이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항상 변화를 맛게 마련이고 변화는 자기에게 유리할 수도 불리할 수도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감에따라 변할 수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각자의 위치에서 자기 최선을 하는 밖에 없다. 나는 지금 다시 당시의 환경이 재현된다 하드라도 약간의 기술적 차는 있어도 같은 행동을 하게될 것이라 말한바 있다.

 

  지금 국내는 각종 선거활동이 한참이다. 박정희 정권의 후광을 이용하여 대권 도전이 거론되는 환경으로 보면 5.16정권이 아직도 국민 일부에게는 매력을 주고있음을 짐작할 있으니 불행한 과거사이나  다행한 일이라 아니할 없다. 5.16 심어놓은 사회적 부조리와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아니하는 수법과 IMF사태를 초래케한 재벌적 경제제도와 지역주의도 군사정권 유지를 위한 수단의 소산과 무관치 아니할 것이다. 독재 군사 정권 유지를 위한 많은 인명의 희생이 우리가 근대화를 위해 필수적이었나 반문이 된다. 역사에서 가정은 증명이 불가능하다. 5.16으로 자기 예산도 세워볼 없이 단명하였던 민주당 정권도 5.16 거사 당시에는 정권 초기의 혼란에서 경제가 안정기미로 돌고 있었으며 구라파의 복지 사회제도를 목표로 경제 5개년 계획이 수립되며 미국의 경제원조도 추진중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헌정 질서 파괴에 수반되었던 희생과 편법으로 발생된 사회기강과 도덕율의 파괴와 오늘날까지의 정치혼란에 따른 문제점들을 고려에 넣어볼 과연 폭력에 의한 정부의 전복이 아니었다면 오늘정도의 경제와 사회질서 그리고 국민의 가치관을 이룩할 없었을 것인가 의문을 보게된다.

 

  법과 원칙과 선의의 경쟁이 무시되면 안정된 사회를 이룩할 수는 없다. 정권의 정통성에 관계없이 어느 정권이든 치적은 있을 수있다. 그러나 치적이 불법을 합법화 시킬 수는 없다. 민주 질서가 정착되지 못한 개발도상 국가에서 가장 무서운 힘이 군사력으로 군의 중립을 요구하는 이유일 것이다. 5.16 아직도 한국 정치 현실에서 매력이 된다는 사실은 입으로는 민주정치를 외치면서도 군의 정치개입을 관대히 보는 증후로서 군의 정치 개입을 금기시 아니하는 우리 민도의 수준을 설명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우려가 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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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3. 일시 귀국과 유신반대 지휘로 미국에서 정착

                                                            



나의
박사과정은 한국에서 4 남매를 오게함으로 생계의 부담이 늘어 71 말에야 끝나 72 2월에서야 경제학 박사학위를 얻게되었다. 학교가 끝나자 다행이 졸업한 대학에서 연구 교수로 시작 교수직을 받게되었다. 나는 학교를 졸업할 무렵 과연 상아탑에서 배운 나의 학문이 현실에 적용될 있는가를 의아했으며 귀국전에 미국사회에서 그의 적응을 시험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카토릭 대학에서 연구 생활과 교편을 시작하는 동기가되었다.

 

  학교가나고 연구생활이 시작된 무릅 고국에 장모님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임시 귀국하는 일이 생겼다. 10년만의 고국 방문이었다. 10년이라하였는데 아직도 군사 혁명 정권이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나는 홍종철 대통령 홍보 비서의 종용과 중재를 통해 대통령을 만나보았다. 홍종철 비서는 과거 내가 6군단장으로 있을 나의 작전 참모로 있었든 사람이다. 대통령은 나의 귀국 시기를 물으며 한국 체류기간 산업 시설들을 돌아봐 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나는 막내가 대학을 가게되는 3년후 아니면 귀국키 어렵다고 대답하였다. 이는 그가 3 집권이 끝나는 해였다. 나는 장모님의 중태를 이유로 서울에 위치한 국방 과학연구소와 포항 제철  M1 소총을 생산하든 동래 병기창 시찰을 마감으로 장모님의 서거에 따른 장례를 끝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비서는 나와 박정희 대통령를 인연지워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준 사람이다. 나의 원칙 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비서의 뜻을  결실시켜 주지 못하였음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얼마후 청평땜 밑에서 낚시중 아들이 물결에 휩쓸림을 구하다 불귀의 객이된 아버지이다. 조속한 귀국과 구체적 직장까지 제안 해주며 국내 환경 조성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선배들의 호의도 미국 사회에서 배운 지식 적용을 시험코저한 나의 생각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한국에서 돌아온지 얼마되지 않아 7-4 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3개월후 박정권의 종신 대통령제가 보장되는 10 유신체제가 공포되었다. 나는 하나의 구테타가 일어났으며 5.16 동기보다 더욱 악랄한 방법이 같은 사람들의 손에서 이루어젔음을 개탄하였다. 국민들은 군정하에서 공개적으로 반대 없는 입장이었다.  때맛춤 워싱턴에서는 교포들에 의해 10 유신 규탄 대회를 준비중이었다. 군사 쿠테타를 방지못하였든 나도 이를 반대한다는 의사를 정부측에 전달하여야 책임을꼈다. 규탄 대회 준비회의에 참석하였다. 준비 위원회에서는 내가 대회장을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나는 학생 신분이며 정치행위에 희생된 자로치에 가담함은 일종의 보복행위밖에 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치적 행위를 기피하여야 입장을 취해 왔었다. 나는 시위후 나에게 정치적 행사에 관여해 달라는 요청을 않하기로 약속받고 유신반대 궐기대회의 지휘 책임만을 맡기로하였다.

 

  72 115일로 기억한다. 안병국 목사가 부회장으로 그리고 고인이된 장성남씨와 유기홍박사와 당시 신한민보 채임자이던 정기용씨 김응창씨 부성래 박사 방숙자 여사 황옥성 고세곤씨등과 열거할 없는 다수의 유지들과 대학교 교수 유학생 그리고 학생회장들의 노력으로 350명이 궐기 대회에 참석된 것으로 워싱턴 포스트지는 보도하였다. 당시 2000 정도로 알려진 워싱턴 교포인구로 보아서는 대단한 참석율이었다. 시위는 듀폰서클에서 시작하여 한국대사관 까지 행진 한국 정부에게 주는 궐기문을 전달하였고 미국 정부와 국회에 우리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궐기문 초안에는 당시 국무부 통역을 맡고 있든 안홍균씨의 수고가 컸다. 시위에 참석키 위해 LA에서 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지낸 김상돈씨와 초대 한국 총무처장과 불란서 대사를 역임한 전규홍 박사가 참석했으며 시위는 질서있고 평화롭게 진행되었다. 물론 정부를 위한 감시자도 시위 주변을 배회하며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고 들었다. 나는 규탄 대회 회장을 수락한후 두사람의 충고를 받았다. 하나는 당시 한국대사로부터 시위에 가담하는 것은 좋으나 지휘자의 자리는 피해달라는 요청이었다. 한국 대사로서는 의당 있을 있는 요구이며 어쩌면 본국의 요망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나는 같은 교회를 나가는 원로분의 충고이었다. 내가 시위를 지휘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을 위해 너무나 손실이 되니 재고해보라는 충고였다. 나는 시위로 3년후에 귀국하겠다는 생각을 취소하고 미국에서 영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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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2. 군인에서 학자로2 인생 출발

                                                            



 ) 복수심을 버리고 변신을 노력

 

  내가 형무소에 있든 기간 나의 건강을 지킬 있든 중요한 원인의 하나가 내가 5.16 취한 행동에 대한 떳떳한 마음갖임에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나는 미국에 오면서 나의 생활 태도에 대해 생각한바 있었다. 하나는 반드시 후일 나의 동료나 가족이 내가 취한 태도가 옳았다고 증명될 날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었다. 둘째는 내가 군문을 떠나게 되고 옥고까지 치룬 원한에 대한 보복심을 버리고 대신 자기 변신을 통해 자신을 증명해 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으로 나의 마음도 가벼워지며 겸허함을 유지하며 자기 개선의 노력을 있는 덕을 보았다. 1979 나의 장인이 페암의 말기현상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이민오셨다. 장인이 이민오시게 동기가 나를 만나 박정희 장군게 대한 개인 복수심을 갖었다면 그를 포기 시키기 위함이라 하셨다. 장인은 오래동안 기독교 장로이시며 복수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지 사람이 없는 일이라 하셨다. 나는 미국에 올때에 그런 생각을 이미 청산했다고 하였더니 본인이 미국에 목적은 달성됬다고 기뿌게 생각하셨다. 장인은 미국 도착후 2개월 반만에 세상을 뜨셨다. 장인의 훌륭한 정신에 머리가 숙으려 진다.

 

) 어께의 별을 떼기 위해 상과 대학에서 기초 과목으로 시작

 

  나는 Seattle 소재 워싱턴 주립 대학에 도착해 상과 대학에 배치를 받았으며 정치학 박사과정을 밟고있든 중앙 대학 교수 김영재씨를 소개 받아 그가 유숙하고있든 하숙으로 숙소를 옮겼다. 어깨에 걸려있든 별을 속히 떼기위해서는 장사 길을 배우는 것이 첩경이라 생각한 것이 상과 대학을 택한 동기였다. 처음 택한 과목은 경제원론 통계학 회계학의 기초 과목이었다. 하루는 대학원장이 만나자는 요청이 있었다. 그는 내가 정치적 망명 신분이니 학과를 택할 필요는 없으며 도서실을 이용하든지 후진국 경제 발전에 관한 대학원 과정을 청강할 있다는 조언을 주었다. 나는 군대 상위 지휘관직을 통해 응용의 경험은 많으나 절실히 필요한 것은 기초지식이며 그것을 위해 기초과목을 택하였음을 설명하여 주었다. 그는 내가 특수한 사람이라고 의아하는 하였다. 실은 내가 육군의 군수 참모부장직을 수행하며 한때는 정부예산의 2배가되는 년간 3억불을 취급하는 소임을 다하기 위해 기초적 통계 제원을 요구했으나 그를 접하지못하여 나에게 맡겨진 책무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을 늣긴바 있었다. 그리고 이것이 나의 기초지식 부족에서 오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 반성이 나의 기초지식 과목 선택의 이유였다. 나는 그후 서양사를 포함한 기초과목만 택한 것이 경제학 학사학위를 얻게된 결과가 되었다.

 

 ) 신문 해독을 위한 석사 과정과 전문 지식을 위한 박사 과정

 

  나는 당시 동아 일보 사설을 읽곤하였다. 경제학 학사학위를 얻은 나는 내가 읽고있든 경제 사설에 대한 이해가 더욱 어려워짐을 느끼게되었다. 경제학을 공부하게 되니 사설을 통해 나의 경제이론을 시험하려 들게되고 나의 짧은 이론으로는 사설의 해석에 딸림을 느끼게 되었다. 나에게는 학위가 목적이 아니었다. 내가 경제 사설을 평가할 있는 능력을 얻고저한 것이 나의 석사과정을 택하게된 동기가 되었다. 66 2년이 걸려 워싱턴 주립 대학에서 경제학 석사학위를 얻게되었다. 그리고 대학원 과정이 대학과정보다 어렵고 공부한다는 것이 당시의 나에게는 군인으로서 정쟁터에 있을 때보다 어렵다고 늣꼈다. 아마도 2 인생 개척은 누구에게나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내가 석사 과정을 끝날무렵 국내에서는 혁명에 가담하였던 인사들이 야당으로 변신하며 부통령의 지위가 논란되고 있었다. 나는 당시 과거의 군의 지위가 사회 지위를 좌우하는 실정이 심히 불공정하다고 느꼈다. 내가 귀국해서는 과거의 나의 군대 지위와 재직시의 친소관계를 이용하는 대신 자기 능력으로 사회 진출을 해야겠다는 결심이 Washington D.C. 소재 카토릭 대학에서 1966 가을 학기부터 경제학 박사 과정을 게속한 동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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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1. 아내의 미국도착과 내조

                                                            



나는 만약 나의 미국 체류가 일년이 넘는다면 집사람에게 미국 경험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을 떠났다. 이유는 내가 어린 시절을 만주 백계서아 사람이 많은 국제도시 하얼빈에서 것도 아버지의 직책관계로서아 사람들이 살고있는 관사지대에서 비교적 개방된 환경에서 자라난 탓도 있었다. 그보다 나는 1944-5년을 Kansas 있는 참모대학 유학동안의 경험을 통해 소박하며 실용주의적 가정 생활과 개방된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정과 자녀 교육에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만 자란 집사람에게 같은 생활 철학을 공감케 하기 위해서는 집사람의 미국 경험이 대가를 치룰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게 친절했든 Doghrety 할머니의 도움으로 내가 Seattle 도착한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초청장을 서울로 보내게 되었다. 집사람은 세가지 문제로 난색을 표했다. 하나는 반혁명 분자의 가족을 외국에 보낼 없다는 정부의 협조적 태도와 4 남매의 양육 문제이고 며누리로서 시아버지의 환갑을 앞둔 일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집사람은 1963 1 30 미국으로 들어오게되었다.

 

  집사람은 내가 공부하는 동안 영어를 배워야했고 서을에 있는 아이들의 양육을 돕기 위해 미국 친구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재봉일을 시작하다 후에는 Washington 주립대학 병원 병리학 연구실에서 직장 교육을 통해 현미경 기술자가 되었다. 훌브라이트와 아시아 재단으로 부터의 장학금이 끝난 이후 부터의 나의 학교 등록금은 집사람의 학교 병원 취직으로 면제 되었다. 나는 박사 과정을 위해 카토릭 대학에서 조교로 학기금 면제와 약간의 생활 보조비를 받게되 있었다. 나는 Seattle에서 집사람을 서울로 직행시킬려하다 이왕 미국까지 왔을바에는 수도 구경이라도 하고 보내야지 생각하여 워싱턴까지 같이 오게되었다. 다행이 주한 대사관 문정관으로 있었으며 나의 동생 환수를 아끼든 McTargat 박사가 홀아비로 카토릭 대학에서 보행거리에 단독 주택을 갖고있었다. 나의 형편이 풀릴 때까지 같이 있기를 강권하는 바람에 내외의 임시 숙소가 마련되었다.

 

  부부가 헤어진다는 것은 나에게는 자식과 헤어지는 것보다 어려웠던 같다. 만약 집사람에게 적당한 직장이 주어진다면 후에 아이들을 다려올 수도 있지 아니한가 생각이 바뀌면서 집사람은 일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우선 AFIP(월터리드 육군병원 내에 위치한 국방군 병리학 연구소) 취직 지원서를 내보았다. 그러나 시민권도 영주권도 없었던 집사람인지라 미국 국방성 산하 기관인 AFIP 취직에 그리 희망을 갖지 못해서 임시로 백화점 점원 자리에 나가기 시작했다. 기대치 아니했든 AFIP에서 일본말을 수있는가를 문의해 왔다. AFIP에서 일본 병리학자들의 교환 program으로 통역이 가능한 현미경 기술자를 구하고 있었고 일본어를 아는 집사람은 영주권과 시민권 없이 취직되어 10년간 매년 계약 갱신을 하며 근무하였다. 그리하여 아파트 값은 나의 조교 보수로 생활비는 집사람의 몫이되었다. 1967 헤어진지 5년만에 아이들을 서울에서 다려오게 되었고 AFIP에서 시민권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면서 10년후 나를 제외한 집사람과 아이들은 시민권을 얻게되어 때때로 우리는 국제결혼을 하였다는 농을 하게 되었다. 집사람은 일본 의사들의 덕으로 교육학 전공에서 병리학 전자 현미경 기술자로 24년의 AFIP 근무를 내가 연세 대학 초빙 교수로 나가는 1990년에 마무리했다. 중년 나이로 전업 주부에서 병리학 전문 기술자로의 2 인생을 살게된 집사람의 노력과 고충과 인내는 말과 글로는 표현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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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10. 6 사령관의 호의와 한국 육군 참모 총장의 방문

                                                             



미국에 도착한 여름으로 기억이 된다. 당시 내가 한국에서 속했든 1집단 군단장 Ryan 중장이 국내군 6 사령관으로 부임되어 있었고 그의 사령부가 San Francisco 금문교 근처 Presideo 있었다. 그가 사령부에서 만나자는 전화가 있어 나의 매부인 강영훈 장군(아리조나 대학) 1 사령관이었던 이한림 장군 (산호세에서 유학중) 같이 초대했다고 들었다. 양인 공히 보다 일년전에 서부지역에 유학 신분으로 와있었다. 우리는 그가 베푸러준 만찬에 참석하며 사령부내 귀빈 숙소에 유하게 되었으며 다음날 그의 전용 선박으로 맑고 푸른 상항만을  함게 유람하며 서로의 회포를 풀며 모처럼의 객지 생활의 고독을 달랬다. Ryan 장군의 호의로 수차레의 걸친 Seattle 지역 Ft Lawton 지역 사령관 McGoldrick 소장의 초대를 받아 Seattle 유지들을 만나며 그들과 교유할 있는 기회도 갖이게 되었다. 내가 Seattle 있는 동안 Seattle University 통해 제주도에 Peace Corp 요원들을 보내는 사업의 고문 역을 맡게 됨도 교우에서 이루어젔다.

 

  62 8 말로 기억한다. 당시 한국 육군 참모총장 김종오 대장이 미국 군사 시설 방문길에 Seattle 들리겠다는 소식을 McGoldrick 장군을 통해 받았다. 당시 Seattle에서는 세계 박남회가 열리고 있어 그를 견학차 들리겠다는 요지였다. 그는 9 1 Seattle 도착하였고 다음날 워싱턴으로 행했다. 그의 Seattle 방문 이유는 세계 박람회 견학이지만 실은 나를 만나보는 것이 목적이라 하였다. 나는 총장의 우정에 감사하였고 그가 간접적으로 나를 위해 걱정해 여러 가지 사실에 대하여 사의를 표했다. 당시 혁명 정부에서 거세 당한 나를 만난다는 것은 용기가 드는 일이었다. 하물며 참모총장의 지위는 조심성이 필요한 자리였다. 나는 그와 같이 박람회 장소를 돌보고 지역사령관의 저녁 초대에도 임석했다. 김희덕 소장이 그를 수행하였다. 김장군도 내가 만나보고싶은 사람의 하나였다. 김희덕 장군은 육군 군수학교를 창설 육군의 군수제도 개혁을 위한 제도뿐 아니라 교육을 통해 실질적으로 육군의 군수 제도 운영 향상에 공헌을 하였으며 나의 군수 제도개혁을 위한 이론을 제공해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육군 군수 참모부 차장 이었다. 또한 육군 차석 무관 박보희 중령이 워싱턴에서 Seattle까지 김총장을 마중나와 수행하였다. 내가 워싱턴으로 유학감에 따라 많은 부하들이 지나가며 나를 만나기를 피하였다. 내가 너그럽게 이해하여야 일이었다. 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따뜻이 영접해주고 돌봐준 윤승국 김필상 국방무관들게 지금도 감사를 금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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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KORUS House English class is an article about Chuseok, one of Korea's biggest tradition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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