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제 2 인생을 걷게한 5.16
나는 만약 나의 미국 체류가 일년이 넘는다면 집사람에게 미국 경험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한국을 떠났다. 그 이유는 내가 어린 시절을 만주 백계 로서아 사람이 많은 국제도시 하얼빈에서 그 것도 아버지의 직책관계로 로서아 사람들이 살고있는 관사지대에서 비교적 개방된 환경에서 자라난 탓도 있었다. 그보다 나는 1944-5년을 Kansas에 있는 미 참모대학 유학동안의 경험을 통해 소박하며 실용주의적 가정 생활과 개방된 미국식 사고방식을 가정과 자녀 교육에 도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만 자란 집사람에게 같은 생활 철학을 공감케 하기 위해서는 집사람의 미국 경험이 대가를 치룰 가치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한국 학생들게 친절했든 Doghrety 할머니의 도움으로 내가 Seattle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아니하여 초청장을 서울로 보내게 되었다. 집사람은 세가지 문제로 난색을 표했다. 하나는 반혁명 분자의 가족을 외국에 보낼 수 없다는 정부의 비 협조적 태도와 4 남매의 양육 문제이고 맛 며누리로서 시아버지의 환갑을 앞둔 일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집사람은 1963년 1월 30일 미국으로 들어오게되었다.
집사람은 내가 공부하는 동안 영어를 배워야했고 그 후 서을에 있는 아이들의 양육을 돕기 위해 미국 친구가 경영하는 공장에서 재봉일을 시작하다 후에는 Washington 주립대학 병원 병리학 연구실에서 직장 교육을 통해 현미경 기술자가 되었다. 훌브라이트와 아시아 재단으로 부터의 장학금이 끝난 이후 부터의 나의 학교 등록금은 집사람의 학교 병원 취직으로 면제 되었다. 나는 박사 과정을 위해 카토릭 대학에서 조교로 학기금 면제와 약간의 생활 보조비를 받게되 있었다. 나는 Seattle에서 집사람을 서울로 직행시킬려하다 이왕 미국까지 왔을바에는 수도 구경이라도 하고 보내야지 생각하여 워싱턴까지 같이 오게되었다. 다행이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으로 있었으며 나의 동생 환수를 아끼든 McTargat 박사가 홀아비로 카토릭 대학에서 보행거리에 단독 주택을 갖고있었다. 나의 형편이 풀릴 때까지 같이 있기를 강권하는 바람에 내외의 임시 숙소가 마련되었다.
블로그담당자나 김웅수장군님의 허락없이 사진과 글을 무단복재해 사용 할 수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무단 복재해 사용시 법적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문의 john_lee_rfa@hotmail.com
'김웅수장군회고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5.16 군사 쿠테타 회고(20)-김웅수장군회고록 (0) | 2009.02.15 |
---|---|
5.16 군사 쿠테타 회고(19)-김웅수장군회고록 (0) | 2009.02.08 |
5.16 군사 쿠테타 회고(17)-김웅수장군회고록 (0) | 2009.01.24 |
5.16 군사 쿠테타 회고(16)-김웅수장군회고록 (0) | 2009.01.18 |
5.16 군사 쿠테타 회고(15)-김웅수장군회고록 (0) | 2009.01.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