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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16)-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8. 5.16 일주년을 기한 형의 집행 유예로 출소

                                                             



내가 언도를 받았을 때는 이미 봄이 가차왔을 때이었다. 감방생활 가운데도 종종 외부 소식이 들려왔다. 하루 아침은 세면장에서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된 공병감 엄홍섭 소장과 부다치게 되었다. 그는 오래동안 공병감으로 재직함으로 기회를 독점한다는 비난은 받았으나 열심하고 우직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는 외부에서 나에 관한 이야기가 많으며 출소하게 것이라고 전해 주었다. 이야기를 듯고 얼마되지 아니해 나는 출소를 위해 호출되었다. 감방에서 출소를 위해 나오는데 이상국 장군이 세면을 위해 나와 있음을 보았다. 그는 내가 출소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축하한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장도영 장군도 같이 출소한다고 들었다. 상국 장군은 30 사단 반혁명 사건으로 기소됬지만 그의 상관인 서종철 6관구 사령관은 난을 면했으며 정강 장군과 같이 억울한 처지에 있었다. 나의 부하였던 정강 장군이나 장도영 장군의 부하들의 석방은 듯지 못하였다. 나는 이장군을 면대하기 미안한 감을 금하지 못해 혼자 출소하게 되어 미안하다는 말만 남기고 그를 뒤로했다. 나는 장도영 장군과 같이 혁검에 보내젔다. 장도영 장군은 나와는 달리 혁명 주체의 최고의장을 수락했었으나 주체세력에서 쫏겨나 부하들과 혁명죄로 무기를 언도 받고 있는 처지었다. 우리는 5.16 한돌을 기념키 위해 형명죄는 인정되나 복무중의 공을 인정해서 형의 집행 유예로 석방된다고 들었다. 5.16 1주년 2-3 전으로 기억되다. 김희양 부관이 사람과 같이 마중나와 주었다. 부하를 옥중에 남겨 둔채 석방됨이 석연치 않아 기뿜을 느낄 수는 없었다. 책임있는 상관이 부하에 앞서 풀린다는 것은 군의 특성상 나로서는 예사로 넘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9. 자이반 타이반 미국 유학

 

  내가 형무소에서 풀려나서도 완전한 자유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2명의 감시원 으로 추측되는 경비원이 아래위를 배회하였다. 때때로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과거 부하라고 하였다. 나의 목소리를 확인하면 인사말도 없이 수화기를 나려 놓았다. 결혼식이나 나들이를 때는 의심스러운 사람이 내가 눈치 차릴 정도의 거리에서 따라다녔다. 어느 면에서는 나의 보호가 되겠지만 보호가 필요 없는 나에게는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내가 마당에 있는 장미가 아름답구나 느낀 것도 때가 처음이었던 같다. 나는 일벌레가 되어 인생을 즐거움에서 멀리 떠러저서 살고 있었음을 발견하였다. 나는 바뿐 군대 일정에서도 일요일이면 가급적 아이들과 같이하는 시간을 내려했으나 여의치 아니하였다.

 

  1962 봄이 되었다. 당시 참모 총장이었든 김종오 대장으로부터 미국가는 기회가 있다며 의사를 문의해 왔다. 혁명 정부와 8군에서 합의된 것이라 하였다. 원래 나도 1961년도에 쿠테타로 강제 퇴역된 장성들과 같이 미국유학을 가게 되어 있었으나 재판 관게로 가지못했다. 유학이라는 것은 명칭뿐이고 미국 입장에서는 군사 정권이 실패했을 때의 대체세력을 그리고 군사 정권으로서는 위험 분자들의 해외 축출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나는 감시 체제에 있던 불편한 생활에서 버서나고 못한 공부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 김총장에게 몃년 있을 있는가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망명이라는 명분이면 가지 않켔고 내가 원하는 기간 공부할 있으면 가보겠다고 대답하였다. 그는 자세히는 몰라도 우선 일년이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어질지는 가보아야 알게 것이 아니냐고 하였다. 나는 얼마 있다가 전년에 미국에 가있던 이한림 장군으로부터 고통스럽고 건강에 해되는 미국 유학은 생각하지 않음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의 편지를 받았다. 결국 나는 Fullbright Scholarship 얻어 Seattle 소재 University of Washington 유학 망명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후에 일이지만 내가 그곳으로 가게된 것은 몸이 약하니 기후좋은 으로 생각한 8군의 배려와 미국 정치와 연결되지 아니할 곳을 요망한  한국 정부와의 절충안이었다.

  나는 미국으로 떠나기전 감사와 작별 인사를 위해 당시의 국가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과 8 사령관을 방문 하였다. 박정희 장군과의 만남에서는 장도영 장군과 내가 부하들 보다 앞서 나오게 됨은 통수법을 존중하는 지휘관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현재 민주당 출신들이 움지기고 있으니 시기를 보아 풀어 주겠노라 하였다. 나는 문제로 1962 겨울 박장군이 맥아더 원수 장례차 미국방문을 마치고 귀로 Seattle 들렸을 때와 66 워싱턴을 방문중이던 정일권 당시 국무 총리와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을 만났으나 영향을 주지는 못하였다. 나는 군의 고위 장성으로 나의 부하였던 정강 장군 아니라 30 사단장 이상국 장군과 장도영 장군 사건으로 형을 살고있던 하급장교들의 자유를 위해 책임이 있다는 강박 관념에서 자유스러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혁검에서 주장하는 미국측의 나에 대한 관심이 대사관에 근무하는 나의 동생 때문이라는 비난과 나의 재판이 필요했으며 나를 일단 석방한후 다시 재판에 회부한 이유를 박정희 장군에게 물어 보았으나 대답을 얻지는 못하였다.

 

  나는 Meloy 8 사령관을 만나보았다. 그는 군사 형명 때는 8 부사령관 이었으나 Magruder 대장 후임으로 8 사령관이 되어 있었다. 그는 나에게 군사 형명 정부의 장래를 예칙하는 질문을 하였다. 나로서는 대답할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혁명에 가세한 장교들 중에는 군에서 사고등으로 어차피 제적되어야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며 혁명의 성공을 위해 장군 많은 부하를 정리해야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한편 그들이 막중한 국가 책임을 통감하고 분발한다면 기적이 이러나지 않는다는 법도 없을 것이며 나의 개인 불행이 국가의 발전 차원에서 보상되길 바라노라 말해주었다. Meloy 장군은 나에게 그런 기적을 믿느냐고 질문을 계속하였다. 나는 평소에 옳은 사람도 권좌에 오르면 변하는데 기적과 요행을 바라지 않음이 나의 인생 태도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나의 인생을 바꿔보는 기회를 반신 반의하면서 1962 8 11 가족들의 전송을 받으며 김포 공항에서 푸로페라 젯트기로 24시간이 걸리는 미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다. 무더운 날씨와 지루한 여행이었다. Guam Hawaii 경유하여 싼후란시스코의 Travis 비행장에 도착한 것은 한국을 떠난 같은 8 11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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