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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13)-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6. 임시적 석방

                                                             



11 하순경으로 생각이난다. 헌병 사령부에 위치했던 형명 검찰부에 불려 

나갔다. 석방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때까지도 무슨 죄목으로 기소되고 무슨 조건으로 석방된다는 것인지 설명도 드렀고 문의도 하지 아니하였다. 지금 되도라보면 제대로 법의 보호나 권한도 허용되지 못한 셈이다. 집이 그리웠고 겨울을 감방에서 지낼 필요 없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였다. 아내와 김희양 부관이 마중 나왔다. 아내는 나를 차에 실고 시내로 들어 갔다. 7세이며 국민학교 일학년에 입학한 둘째 아들 용회가 고열로 입원했는데 급성 맹장염으로 판명 되었으나 열이 높아 수술을 망설이고 있다가 수술을 모험키로 했다고 하였다. 병원은 안국동에 있으며 원장이 나를 안다고 하였다.  병원에 가보니 수술은 끝나 있었고 열도 많이 나려 근심할 필요 없다고 들었다. 병원장의 이름은 기옥 못하나 육군 병원장을 지난 군의관 출신이었다. 어린 아이에게 미안하며 나와 자식의 병으로 혼자서 고생한 아내에게 미안함을 금할 없었다. 지금 아들은 Washington D.C. 소재 National Accademy Science 부사장으로 활약하고 있다. 얼마후 박정희 장군의 미국방문이 발표되었다. 나의 석방이 어쩌면 그와 관련이 있었구나 하는 짐작을 보았다.       

 

  그때 아이가 1962년도 숙명 여자중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당시는 체력시험이 중요한 과목이었다. 나는 아이의 다름박질과 턱거리의 요령을 가르첬다. 조곰한 요령이 체력 검정시험에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집에서 한문의 기초를 가르첬다. 당시부터 학교에서 한문를 소홀히 때라 집에서 배워준 한문의 덕을 보았다며 지금도 당시 학교 졸업치고는 한문해독을 많이 하는편이 되었다. 딸은 영양사가 되었다. 남편이 아주대학 화학과 교수로 나가있어 현재는 한국에 있으며 서울 8군의 영양사로 있다.

 

  나는 석방된후 나의 휘하에 있던 군단 예비로 있던 8 사단장 정강 준장이 구속됨을 알게되었다. 장군은 내가 구속된후 얼마 있다가 혁명에 가담한 만군 출신의 최주종 준장과 교체되었다 한다. 나는 군단장의 망명 조언을 듯고도 후일 나의 군단 참모나 사단장들게 책임이 돌아가지 아니하도록 나의 책임을 해야 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군단에 비상 명령을 하달한바 있었으나 정강 장군에게 공격명령을 하달하거나 그에게 후일 책임 질만한 지시를 내린적도 없고 나의 명령 없이 부대출동도 가능하지 아니하였다. 전에도 언급했지만 나는 미군 지휘하에 있는 부대의 출동이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군의 후임 최장군과 참모들이 강력히 그의 구속을 진언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8 사단장의 재판은 나와 연관이 되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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