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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15)-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7. 재개된 혁명 재판

                                                             




 ) 10 형을 선고 받다

 

  나의 재판은 정강 장군과 같이 심리되었다. 나의 죄과중 대사 공한 예하부대 하달 죄목은 국제성을 피하기 위해 삭제된다고 하였다. 나는 정강 장군과 같이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되지 아니하였다. 재판이 진행되면서 정장군 부대 동원을 것이 나의 비상령 때문이라는 사실을 정장군으로부터 듯고서야 이해가 되었다. 나는 그것으로 문제가 된다면 군단장의 책임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결과는 내가 징역 10년을 그리고 나의 명으로 사단의 비상이 걸린 정강 8사단장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내가 명령권자로 인정된다면 정강 사단장은 당연 무죄가 돠어야 했다. 그러나 명령권자보다 무거운 죄를 받았다는 자체가 이성적 재판이 없었다. 고등 고시를 통과한 검사의 독립된 양심이 의심 되었다. 사단장은 기소된 사실 외의 건으로 희생되고 있음을 느끼게 주었다. 나의 구속이 부하에 대한 책임 전가를 막을 있다는 나의 희망은 무산되었다. 장군은 후일 병사되어 동기생인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 호의로 육군 준장 정강이란 비문과 함게 육군 묘지에서 아직도 충실하였던 군인으로서의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재판의 증인으로 참모들이 불려 나왔다. 참모장 이준학 준장 작전 참모이며 군단 헌병부장실에 보내젔든 홍종철 대령(당시 혁명군의 최고 의원) 작전 참모 대리 작전처 차장 채항석 중령 그리고 정보참모 강창성 대령의 증언이 있었다. 참모장 이장군은 성의를 다해 증언을 해주었다. 후일 들은 이야기로는 증인들이 사전에 혁명 검찰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았다 한다. 홍종철 대령은 증언을 통해 군단장이 평소 민주당에 대한 불평을 많이 하였다는 증언으로 나에게 도움주려 노력을 하였다. 군의 지휘관이라면 군단의 비상 선포는 당시의 동향으로 보아 최소한의 조치이었을 것이다. 비상하에서는 예비 사단의 1 연대 전투단이 사전 계획된 U지역에 자동 집결케 있음을 군단 작전 참모라면 알고도 남는 일이었다. 나나 8사단장을 위해 군단 실정에 감안 비상령이 필요함이 증언되어야 했다. 그러나 홍대령의 증언은 평온한 환경에서 비상이 필요 없었다는 증언이 되었다. 재판관 들도 검찰도 이를 추궁하지는 아니하였다. 나는 혁명에 목숨을 바친 젊은 장교로서 그리고 군단의 작전 참모로서 공사를 분간함에 용기가 없었던 것인지 포병 출신이라 작전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던 것인지 의심을 품을 밖에 없었다. 아마도 비상과 8사단의 동원이 재판의 핵심문제 이었음으로 재판 진행상 필요 했을 런지 모를 일이었다. 혁명 대열에서 국가를 논의 하는 책임자 사람은 공사 가리며 소신 있기를 나는 기대했었다.

 

 ) 신약성경 통독의 기회

 

  나는 구속되어 있던 기간 몃가지의 경험을 하였다. 하나는 나에게 다시 성경 책이 투입되어 성경 공부의 기회가 주어 젔다. 나는 헌병 사령부에서 읽었던 구약이 유대 민족사이며 사람들을 무참히 죽이며 추잡한 인생을 그린 인상을 받아 이번 에는 신약을 읽기 시작하였다. 얼마되지 아니한 분량이었으나 한마디 한마디를 새겨가며 읽다보니 5개월간에 신약을 7 밖에 통독 못했으며 그것도 제대로 이해와 감명을 받지는 못하였다. 역시 성경도 잡이가 필요하다고 늣꼈다. 그러나 후일 내가 미국에 와서 미국교회를 다니는데 부족한 영어로 설교를 이해하는데 형무소에서 읽었던 성경 기억이 크게 도움되었다. 나는 1966 박사학위를 위해 씨아틀에서 워싱턴으로 이주한 이래 열심히 워싱턴 하인교회에 출석하여 장로가 되었다. 성경 공부를 지도하는 경험도 보았으나 성경은 영으로 씨워진 책이며 역시 지도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기독교인이 것도 5.16 덕이며 고통중에 낮아진 나에게 하나님이 찾아주신 덕분이다.

 

 ) 동상과 면회

 

  나는 추운 감방 생활에서 귀의 동상을 얻어 때는 귀가 쓰라려 항상 귀에 손을 언저 체온으로 따뜻케 하다보니 어느듯 상처가 없어젔다. 심한 동상은 아닌 모양 이었다. 그리고 하루는 어금니가 자연히 바스러저 나갔다. 아마 옥중의 영양이 골고루지 못한 탓이라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적은 감방에서 4명이 발과 머리를 교대로한 잠자리로부터 발생하는 냄새와 불편함도 시간이 감에 따라 습관이되어 사람의 적응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건강을 위해 계속 도수 아련을 실시하였다. 주위 사람들은 나의 신호흡에 웃었지만 알렌은 도수로도 수있음이 나의 경험이다. 죄수들은 기결 감방에 이감되기 까지는 10 이내이지만 거이 매일같이 면회가 허용되었다. 나는 이를 위해 사람이 고통을 격게될 것을 생각 집사람이 오지 않키를 바랐지만 사람의 생각은 달랏던 모양이었다. 면회의 기회를 얻기 위해 사람은 통금해제의 싸이렌과 같이 형무소출근이 계속되었다 한다. 가족들은 죄수들의 재판 출석일을 용히 알아냈다. 내가 법정에 출두하기 위해 수갑을 차고 형무소 버스에 승차하면 집사람이 버스 근처에 있어 수갑채운 모습을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 힘들었었다.

 

  ) 최인규 이정재의 처형

 

  나는 법정을 오고가는 가운데 이승만 정권하에 3.15 부정 선거와 관련된 피이자를 접할 있는 기회를 갖었다. 당시의 군부는 민주당이 기소치 아니하였던 인사도 추가 기소하였고 재판이 끝나지 아니하였던 사람들의 재판출석시 버스내 혹은 대기소에서 종종 상봉하는 기회를 갖었다. 내가 목격한 사람은 조페 공사 사장 이었든 선우종원씨 그리고 경제인 전땍보씨등이었다. 하로는 설경동씨가 마준편 감방에 수감되었다가 얼마되지 아니하여 출감했다. 경제인들은 군부가 도움을 얻기위해 구속했다는 말이 돌았다. 자유당 부정선거에 관여한 최인규 내무장관과 이정재 속칭 깡패 두목이 형무소내 사형실에서 처형됐다는 소문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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