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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11)-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5.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

                                                             



확실한 시기는 기억에 없으나 여름에 들면서 헌병감실에 구속되었든 장성중 유독 나만 혁검에 의해 기소되어 서대문 형무소 독방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나는 무슨 죄로 기소되었는지는 몰으고 있었다. 다만 이제는 나의 재판이 공개될 터이니 헌병 사령부 감방에서 비밀리에 죽임을 당할 위험은 벗어났구나 안도하였던 기억이 난다. 

 

 ) 수감 생활을 도와준 장익진 형무의

 

   나는 한국 전젱중에 얻은 위산 과다증으로 공복시 가슴이 쓰라린 병으로 약을 상복하고 있었다. 내가 서대문 형무소로 이관된지 수일후에 누군가 약을 넣어 주었다. 아마 사람이나 김희양 부관이 특별히 부탁한 결과이겠지 생각하였다. 형무소에서는 하로 10 정도의 햿빛을 보는 시간이 허용되었다. 나는 기회를 운동으로 사용하였다. 미결수이라 서인지 독방에 책을 넣어 주지않음이 고통이 되었다. 감방에는 변기와 수매의 모포가 비치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이 기상하면 죄수는 문앞 간수가 드려다 보이는 정면에서 정좌함이 요구되었다. 몸이 불편해서 개어놓은 모포를 뒤로 기대면 모포가 마손된다고 기대지 못하게 했다. 나는 도수 알렌을 통하여 건강을 유지하느라 노력을 하였다. 미결수는 가족이 차입하는 돈으로 형무소에서 파는 음식을 구입할 있었다. 나는 형무소의 콩밥을 먹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여  저녁 한끼를 제외하고는 형무소에서 주는 식사를 하여 출소시는 집사람이 차입한 돈을 거이 쓰지않코 갖이고 나왔다. 하루는 혁명에 가담한 대가로 감사원장이 됬다는 채명신 장군의 형무소 시찰로 소내가 북적대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론 그는 죄수에게 대한 외식 판매가 너머 호화스럽다고 2종류에 제한케 했다는데 나하고는 관계 없는 일이었다. 나는 나의 수양과 건강을 위해 정좌하며 명상하는 습관을 하였다. 하로는 누가 간방 문을 열고 약을 넣어주더니 나의 이름을 부르며 미영 아빠세요 하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편히 누어 있을 있도록 간방 문에 환자표를 부처준 것을 간수를 통해 알았으나 자신을 위해 혜택은 쓰지 아니하였다. 그는 나의 동서의 8 형되는 서대문 형무소 의사였든 익진 선생이었고 나에 대한 특별한 배려를 주었음을 출소후 알게되었다. 나의 절제 생활과 옥중의 불편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죄의식 대신 마음에 긍지를 가지고 있던 것이 나의 건강을 직혀 주어서 입소 3개월 후부터는 위장약이 필요없게 되었다.

 

 ) 부정 축재 조사와 강제 예편 지원서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지 얼마 되지않아 나는 사건을 당했다. 하나는 군에서 파견됬다는 조사관을 통해 나의 구입에 관한 조사를 당하였다. 조사관의 이야기 로는 부정축재에 관한 조사를 하라 지시받았는데 공허한 노력을 하고있다는 불평조의 이야기였다. 후에 알게됬으나 나에게 부정축재 혐의를 씨우기위해 전군에 정보재공을 요구하는 공문이 하달되었고 사람과 아버지와 처가집도 조사를 위해 출두하는 모욕과 번민을 받았다 한다. 하나의 사건은 나에게 군대 예편 지원서의 납인을 강요해 왔다. 재판을 받으면 자동적으로 처리될 터이니 그런 형식이 필요 없지 아니한가 반문하였으나 결국에는 예편신청에 서명을 밖에 없었다. 덕택으로 다른 형명 장성들과 달리 나는 형명죄로 후일 실형이 언도되었으나 나의 재직시의 계급은 박탈되지 아니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들었다.

 

 ) 윤길중씨와 남산 구보

 

  하루는 나의 감방에서 벽을 두드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렸다. 혁신계 구속으로 입소되온 윤길중씨 였다. 그는 당시 혁신계 간부이었으며 사위도 검거되었다고 하였다. 나는 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있던자로서 많은 사람이 다치고 있음에 마음이 무거워젔다. 그는 때때로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며 남산에 올라가 봅시다 하고 감방안에서 선자리에서 같이 뛰기를 권해 주었으며 기회에 한시라도 지어보라며 필요하면 자기가 짓기를 도와주겠노라 제안하였다. 나는 문학과 낭만의 길에서 탓인지 좋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였으나 고맙게 생각하였다. 후일 들은 이야기로는 그는 일제하 고등 보통학교(지금의 국민학교 과정에 2 연장 수업) 나와 독학으로 고등 고시까지 합격한 자수성가한 인물이었다. 그는 후일 전두환 대통령이 만든 민정당 대표를 지냈다. 유감스럽게도 잠시의 감방의 대화를 제외하고는 그를 한번도 상봉할 기회를 못가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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