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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9)-김웅수장군회고록

5.16 군사 쿠테타 회고: 나의 2 인생을 걷게한 5.16

3. 5.16
군사 쿠테타 소식과 6군단

                                                             

 ) 주한 대리대사의 헌정 질서 복귀 공한

 

  17일아침 8군을 통해 마샬 그린 미국 부대사의 군은 헌정에 의한 정통 정부에

 귀속하라는 요청서한이 도착하였다. 당시 대사의 궐석으로 그린 부대사가 대사 대리를 하였다.  참모장 이준학 준장은 서한의 부대 하달을 망설였다. 나는 공문이 쿠테타 참여 군이나 기타 부대에 대한 주의로 받아드렸으며 나의 의사를 부대에 확실히 필요가 있다고 생각 하여 공문의 예하 부대 하달을 지시하였다. 이것 역시 나의 반혁명 죄목의 하나가 되었다. 참모들의 보고에 의하면 야전군 사령관 이한림 장군이 춘천 방송국을 통해 혁명지지 연설이 있었다고 들었다. 후에 그레고리 헨다슨 대사관 공보관의 5.16 일지에는 방송 장소가 춘천이 아니라 원주라고 젂혀 있음을 읽었다. 군사 쿠테타는 혁명으로 자리를 궅처가고 있었다. 저녁에 포병 단장인 대령으로부터 명령없이 포병을 서울로 다려간 것에 대해 미안하다는 사죄와 함케 양해해 달라는 전화를 왔다. 늣게 장도영 참모 총장으로부터도 포병을 돌려 보낼터이니 장교들게 심하게 대해주지 않키를 요청해 왔다. 그러나 약속과 달리 포병은 도라오지 아니하였다. 최근에 나온 장도영 장군의 자서전에는 6 군단 포병을 돌려 보냈다고 되어 있다. 장장군의 지시가 통하지 아니하였음을 짐작케한다.

 

 ) 야전군 군단장 회의의 무산

 

  518 매부인 육사교장 강영훈 중장이 육사생 혁명지지 행진을 허락치 아니 하였다하여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로는 김웅수 6군단장과 처남 매부간의 내통으로 믿지못하게 되어 구속했다는 말도 있었다. 나는 1군단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1 군이 갖이고 있는 서울 비상게획은 쓰지 않고 있는가. 서로간의 유혈사태 까지는 가지 않터라도 힘으로 쿠테타 군과 협상을 준비는 되어야 하지 아니하겠는가. 만약 혁명을 막기가 늦었다면 그리고 공산 혁명을 피하며 조속한 시일내 민정으로에 회복을 기대하려면 어느 개인의 혁명이 되지 않토록  조직체가 혁명 주도 세력이 되게 협상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야전군의 사명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의견은 야전군내 지휘관들 가운데서 토의 됬어야 하는 아쉼을 면치 못하였다. 그날 저녁 무릅 Ryan 장군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전화 내용은 8군사령관에게 나의 내용을 전달하였으며 장도영 장군을 만나려 노력하였으나 이제는 장장군이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8 사령관이 헬기로 이한림 장군을 방문하여 이야기하였더니 내가 하겠다고( I will do) 하였으니 오날 밤에 장군으로부터 전화가 터이니 이장군을 도와(encourage) 주었으면 좋게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8 사령관이 장악한 각군 참모총장들의 혁명에 대한 태도를 알려주었다. 김신 공군 참모 총장과 이성호 해군 참모총장은 군사 혁명에 반대이며 김성은 해병대 사령관은 김포의 해병 여단이 혁명에 가담했음으로 자기도 혁명에 동조하겠다는 의사 표명이 있었다고 알려 주었다. 그날 밤에 이장군으로부터 직접 전화가 있었다. 동지로서 자기를 도와 주었으면 좋케다는 이야기었다. 이장군의 성격으로 동지로서 도와 달라는 말은 들어보기 힘든 말이었다. 내일 아침 8시에 원주에서 군단장 회의를 갖이겠다 하였다. 나는 어제 군단 참모장으로부터 들은 이한림 장군의 원주 방송에 대해서는 뭇지 아니하였다.

  519일은 쾌청한 날이었다. 나는 오전 여덜시 회의를 위해 늦어도 아침 730분까지는 횡성 비행장에 도착되도록 이른 아침 군단 포천 비행장을 떠났다. 횡성 비행장에 도착하였더니 비행장에는 나의 수석 고문을 하다가 야전군 사령관의 차석 고문으로 전임된 바드너 대령이 마중나와 있었다. 바드너 대령은 나에게 오늘 아침 새벽에 이한림 장군이 장교들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가는 중이니 도라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 하였다. 비행장에서 윤춘근 야전사 부사령관과 임부택 1 예비 군단장을 만났다. 나는 비행기를 다시 포천으로 돌렸으며 최소한 야전군 산하 지휘관들이 나라를 위한 고민을 서로 교환하지 못한 아쉼을 달랠길 없었다. 그리하여 쿠테타는 혁명으로 변해가는 가장 고비를 넘겼다.

 

 ) 대통령 특사의 방문

 

  5 20일로 기억을 한다. 대통령 특사가 방문한다며 그것도 군단 비행장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군용 경비행기로 비서가 비행장에 도착하였다.  대통령 비서는 보선 대통령의 서신을 놓았다. 장에 타자된 간단한 서신으로 기억되며 자세한 내용의 기억은 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신에 대한 기억은 각별하였다. 간단하면서도 직설적이 아니라 우회적 정치가의 표현이었다. 무었을 전달할려는지 요지가 분명치 않아 추측하게 만들었다고 기억한다. 나는 서신이 대립을 피하고 쿠테타에 협력을 시사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나는 서신이 강압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하였다. 서신으로 보아 나는  비서들에게 질문이나 조언을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였다. 후일 비서의 한사람의 회고록에 군단 방문중 최석 장군을 제외하고는 쿠테타에 반대 의사를 갖이고 있던 군단장은 없었다라고 읽은 기억이 난다.  그날 밤에 장도영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인 오치성 중령 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고 회의 의장 장도영 장군이 나를 오후 1시에(지금 시간 기억은 확실치가 않다) 보잔다고 한다. 어차피 서울에 있는 군단 포병 대원들을 만나보아야할 시점이기도 하여 나가겠다고 답변하고 참모장에게 포병단장에게 통지토록 하였다.

 

 ) 최고위 앞에서 무장 해제되어 마포 형무소로 수감

 

  5 21일이 되었다. 부관을 통해 서울 방문의 소식을 들은 사람이 전화를 해왔다. 서울행이 예사롭지 못한 느낌을 준다는 이야기었다. 참모차장에서 국방 장관 보좌관으로 김형일 장군이 어제 저녁에 구속되었다한다. 그러나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한가지 있다면 1군단장에게 서울 가는 이유를 그에게 직접 보고하는 일이었다. 서울 방문을 직접 보고한다면 그가 나의 서울행 내용을 사전에 알아보며 조언을 주던지 대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나는 평소 서울 나갈 때는 Ryan 장군에게 직접 전화를 하곤하였다. 그날따라 집사람의 이야기를 듯고나니 Ryan 장군께 구명 운동을 하는 느낌이 들어 직접 전화 대신 비서실로 하여금 전화 보고로 대신하게 하였다.

 

  국가 재건 최고위원회는 지금의 세종 문화회관 자리에 있었든 당시의 국회 의사당 안에 있었다. 그리로 가기 위해서는 당시의 중앙청(지금의 광화문 자리) 거첬다. 서울행은 공용임으로 헌병 차량의 호송을 받았었다. 중앙청사 정면에 못미친 거리에서 갑자기 호위 헌병 차량은 두손을 벌린 여인에 의해 정지되었다. 나의 차량에 동승했든 김희양 부관(육군 소령) 차에서 뛰어나려 여인 앞으로 다가갔다. 나의 아내가 우리의 길목을 직히고 있다가 호위차를 세운 것이다. 나는 차량에서 나렸다. 집사람은 아침에 전화로 하던 이야기를 되풀이 하였다. 나는 당신이 군인의 아내이니 이정도는 각오해야 하며 아이들이나 보살펴 달라는 이야기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혁명이 성공하려면 같은 사람은 죽일 없다는 이야기를 하여주며 차에 올랐다. 아내의 눈에는 눈물이 글성거리고 있었다. 우연이도 미국 대사관에 근무중이든 나의 막내동생 환수와 대사관 문정관이든 그레고리 헨다슨 씨도 각자 별도로 점심에 나왔다가 그곳을 지나가게 되어 만나는 일이 생겼다. 아마 이것이 미국사람 귀에 먼저 들어간 나에 관한 정보이며 동생은 혁명 정부 기간중 감시하에 놓이게 되어 대사관 근무를 떠나 직장을 옮길 예정을 취소하고 끈내 은퇴할 때까지 대사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나는 국회 의사당 정문 계단에 도착하여 차로부터 나렸다. 대위가 내곁으로 와서 안내하는척 하뎌니 옆구리에 권총을 겨누며 나를 덕수궁 안으로 다려가 무장

해제를 시키지를 않는가. 나는 어느 정도 각오는 되있었으나 하급 장교의 무레함에 불쾌감을 금할 수가 없었다. 대위는 인상으로 보아 차지철 대위인듯하나 나는 면식이 없었다. 나는 해가 때까지 덕수궁에 머물다 마포 형무소로 이송되어 2 칸도 되지못한 마포 형무소 감방에 수감되었다. 숨이 맊힐 같아 눈을 감고 생각  잠기니 답답증도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늣게 군단 포병부장인 재준 대령이 감방을 찾았다. 그는 감방 안으로 들어와 사과를 하였다. 그러면서 이제는 선배님들은 군보다 외교계에서 대사직으로 전환함을 권유하였다. 그는 군단 포병 사령관 직으로부터 떠나있는 듯하였다. 내가 포병단을 방문하려 한것도 서울 사정 모르고 있었음이 나타났다. 후일 대령은 헌병 사령관이 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여하튼 국회 의사당 앞에서의 무례하였던 대위에 비해서는 예절을 갗춘 대령의 배려가 고맙게 생각되었다. 후일 그는 자신이 장도영 장군 형명 사건에 연류되어 형을 살게 됬으며 혁명 재판정에서 나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려 노력하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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