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과 문학의 만남
신경숙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통해 보는 삶의 길
5월 3일 무엇을 위해 살것인가?
5월 10일 사랑은 만족하지 못한다
5월 17일 마음은 누구나 같다
5월 24일 죽음, 이별 그리고 용서
5월 31일 가족이 되어 산다는 것
소설 <다빈치코드>(2006년)와 영화<밀양>(2007년)에 이어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가 시도하는 또 하나의 문화 영성 프로젝트를 통해 말씀과 문학의 신선한 조우를 경험하시고 자신의 삶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이 설교만은 노치지 마십요.***
사귐과 섬김의 공동체 와싱톤 한인교회
1219 Swinks Mill Road, McLean, Virginia 22102 Tel: (703)448-1131 Fax: (703)448-5384 contact@kumcgw.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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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5.24 (김 영봉 목사) <엄마를 부탁해> 연속설교 4 1. 소설 <엄마를 부탁해>에 나오는 등장 인물 중 미운 사람이 둘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박소녀씨에 대해 동정을 하면 할수록 이 두 사람이 더 미워집니다. 아마도 대개는 저와 같은 느낌일 줄 압니다. 그 한 사람은 박소녀씨의 남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박소녀씨의 시누이입니다. 박소녀씨의 남편은 결혼하여 50년을 넘게 사는 동안, 집안 일을 모두 아내에게 맡겨놓고 밖으로 떠돌다가, 제사 때가 되면 잠시 돌아오곤 했습니다. 자식 넷을 낳는 동안 남편은 늘 밖에 있었고, 넷째가 죽어서 태어났을 때도 그는 집에 없었습니다. 한 번은 오랜 가출 끝에 집으로 돌아오면서 ‘분 냄새가 진한 여자’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온 적도 있습니다. 그렇게 바깥으로만 떠돌던 그는 늙고 힘 없어 지자 집으로 찾아듭니다. 하지만 아내에게는 계속 무심한 태도로 일관합니다. 아내가 장탈이 나서 며칠 씩이나 곡기를 끊고 누워 있어도 물 한 컵 가져다 준 일이 없습니다. 시시 때때로 두통으로 인해 몸져 누워 있어도 깊이 살펴 준 일이 없습니다. 어딜 함께 갈 때면, 남편은 늘 몇 걸음 앞 서 갔습니다. 뒤따라 오는 아내가 힘들어 “좀 천천히 가먼 좋겄네, 함께 가먼 좋겄네……무슨 급한 일 있소?”라고 말해도, 그는 늘 그렇게 앞 서서 걸었습니다. 그 습관이 결국 아내를 실종시키는 원인이 되어 버렸습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는 한 술 더 뜹니다. 그는 젊은 나이에 혼자 되어서 동생의 집 근처에 살아갑니다. 출가했으나 여전히 친정의 한 식구처럼 살아갑니다. 매일같이, 아침 나절이면 친정집을 한 바퀴 돌고 가는 것이 그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는 박소녀씨에게 시누이와 시어머니의 역할을 충실해 수행합니다. 칭찬은 없고 핀잔과 박대로 일관합니다. 박소녀씨가 시집을 와서 이태 동안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습니다. 그 때 시누이의 타박이 매우 심했습니다. 그러다가 첫 아이를 낳고 온 가족이 좋아하자 그는 “어디, 남들이 안하는 일이라도 했다냐?”라면서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박소녀씨가 둘째 아이를 낳았을 때는 추운 겨울이었는데, 땔감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형수를 끔찍하게 여기던 시동생이 집 마당에 있던 살구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 불을 지폈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시누이는 박소녀씨가 누워있는 방문을 열어제치며 “집안을 망하게 하려고 나무를 함부로 베었느냐?”고 역정을 냅니다. 어느 핸가, 박소녀씨가 해산을 하고 나서 몸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설사를 계속하여 심하게 탈진되었습니다. 그 때도 남편은 밖에 있다가 해산을 한 후에 집에 돌아왔는데, 아내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그는 누나에게 돈을 내어 주면서 약을 좀 지어다 먹이라고 부탁했습니다. 시누이는 그 돈으로 약 세 첩을 지어다 먹였습니다. 어느 정도 차도가 있자 조금 더 달여 먹이자고 했지만, 시누이가 반대했습니다. 그로 인해 박소녀씨는 평생 간헐적인 장탈로 고생합니다. 박소녀씨가 한 번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 때 한약을 두첩만 더 먹었시믄 좋겠더만……무심헌 당신조차두 산모니께 깨끗이 나아야 쓴게 두어첩 더 지어다 먹이라고 했건만 애덜 고모가 그 쌩한 얼굴로 무신 약을 더 먹는다냐! 이만하먼 됐담서 안 지어주었소……그때 그거 두 첩만 더 먹었시믄 이런 고생은 안 할 것인디.”(173쪽) 2. 가정 안에서 어느 정도의 상처를 주고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가정이 가정일 수 있는 것은 그같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도 남을 만한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넉넉하고 진한 사랑 안에서 사소한 상처와 아픔들을 극복해 가면서 우리는 성장하고 성숙하고 깊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성장할 때 우리는 사회에 나가서 더 큰 상처와 아픔을 감수하면서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얻습니다. 하지만 가정 안에서 주고 받는 사랑은 약하고 얕은데 상처와 아픔은 강하고 깊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가장 가까이에서 서로 사랑하게 되어 있는 가족이 때로는 서로에게 야속할 정도로 무심할 수도 있고, 철두철미 이기적일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서로에게 잔인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종 우리가 받은 상처 중에서 가장 깊은 상처를 가족에게서 받습니다. 우리 마음에 담겨 있는 분노 중에서 가장 강하고 뿌리 깊은 분노가 가족에 대한 분노인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증오하는 원수가 다름 아닌 가족 안에 있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박소녀씨가 살던 시기는 모든 것이 열악했기 때문에 이같이 가족들끼리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다 할 수 있습니다. 모두 다 어느 정도는 포기하고 살아야 했고, 어느 정도는 좌절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모두 다 어느 정도는 희생해야 했습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기꺼이 그것을 감당할 경우에는 가난 속에서도 화목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지만, 누구 하나라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어!”라고 외치는 순간 가정은 불화에 휩싸이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박소녀씨의 시대와는 상당히 다른 상황에서 살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많이 나아졌고, 사람들의 의식이 많이 변했습니다.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어느 정도까지는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과거보다 희생의 필요성도 적어졌고, 좌절의 기회도 적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가정의 불화가 훨씬 더 적어져야 마땅하고, 가정에서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이 훨씬 줄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입니다. 박소녀씨가 살던 시대보다 가정 안에서 주고 받는 상처는 더 깊어졌고 분노는 더 강해졌습니다. 반면, 가정 안에서 나누는 사랑은 과거에 비해 훨씬 얕고 얇고 약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 모두의 삶이 너무 바빠졌다는 데 문제가 있기도 하고, 우리의 욕심이 너무 커졌다는 데 문제가 있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전 세대 사람들보다 내면적으로 훨씬 약하다는 데도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그 원인이 어떻든, 우리 시대에 가정의 문제는 더 심해졌습니다. 각자가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축적된 분노를 품고 살아갑니다. 모두들 자신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합니다. 그 분노는 언제 누구에게 터질지 모릅니다. 미국의 경우, 슬럼가에서만 일어나던 총격 사건이 이제는 학교와 교회에서까지 빈번한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노가 이정도로 심각하다는 뜻입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의 경우를 보면서 옛날이나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방법이 달라서 그렇지, 그 시누이처럼 가까운 가족에게 악의적으로 상처를 주는 가족들은 오늘날에 더 많아졌습니다. 박소녀씨의 남편 이야기를 읽으며 옛날 이야기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 남편처럼 자기만 알고 무심하게 행동하여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어렵게 하는 사람들은 과거보다 훨씬 더 많아졌습니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가정 안에서 서로 용서를 구하고 용서하는 일은 과거보다 훨씬 더 중요해졌습니다. 3. 먼저,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시인하고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그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약해 보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지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인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면서 ‘지고 이기고’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그는 이미 사랑을 떠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그 마음에 쌓인 분노를 푸는 길은 그에게 진실하게 용서를 비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 행동은 용서를 구하는 사람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자유와 기쁨을 안겨 줍니다. 내 용서를 받아줄 사람이 언제고 곁에 있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내를 잃어버리고 아들 집에 머물러 있던 박소녀씨의 남편과 시누이가 나누는 대화를 잠시 생각해 보십시다. 시누이가 말합니다. “내가 죽기 전에 한번은 말을 하고자 했었는디……사람이 없으니 얻다 대고 말을 하누.”(178쪽) 이런 말도 합니다. “내가 살먼 인자 얼마나 더 살겄능가. ……내가 죽기 전에 형철 에미한티 세 가지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가렸는디……균이 일이랑……살구나무 베었다고 지랄떤 일이랑……장탈 났을 때 그때그때 약 더 못 지어준 거랑……”(181쪽) 박소녀씨의 남편도 그렇습니다. 그는 아내를 잃고 나서야 자신이 그동안 아내에게 얼마나 무심했는지를 절감합니다. 텅 빈 집에 홀로 누워 있으려니 무심하고 야속하게 행동했던 일들이 하나 하나 떠오릅니다. 진작에 사과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한 일들입니다. 그는 서울에 사는 큰 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말이란 게 다 할 때가 있는 법인디……나는 평생 니 엄마한테 말을 안하거나 할 때를 놓치거나 알아주겠거니 하며 살었고나. 인자는 무슨 말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디 들을 사람이 없구나”(198쪽).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를 구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살지 마십시다. 자신의 잘못에 눈 먼 사람이 되지 마십시다. 용서받지 못한 심령으로 살아가지 마십시다. 혹,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았는지, 늘 반성하며 사십시다. 하나님 앞에 머물러 앉아 혹시나 부지 중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는지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다. 때가 너무 늦기 전에,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떠나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으십시다. 박소녀씨의 남편처럼,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언제고 있어줄 거라고, 알아 주겠거니, 괜찮겠거니 생각하지 마십시다. 아직 기회 있을 때, 아직 그 사람이 옆에 있을 때, 아직 그 사람의 마음이 굳게 잠겨지기 전에 <미/고/사> 즉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하십시다. 잘못 한 것이 하나도 없는 것 같아도, 보험 드는 셈치고 “여보, 미안해!”라고, “얘들아, 미안하다!”라고 말하며 사십시다. 미국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이 있습니다. 사소한 일에는 “I am sorry!”라고 아주 쉽게 말하는 사람들이 정작 중요한 일 앞에서는 냉정하게 입을 굳게 다뭅니다. 가정에서는 이래서는 안 됩니다.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그 일에 대한 나의 책임이 커 보이든 작아 보이든, “여보, 내가 미안해!”라고, “얘들아, 내가 미안하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이번에는 용서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가 상처를 입은 경우를 생각해 보자는 말씀입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받는 상처가 가장 아픈 법입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하는 것은 상처를 견디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나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앙심도 생깁니다. 때로는 원한이 맺힐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타락한 본성에는 미움과 앙심과 원한을 즐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용서하기’란 ‘용서를 구하기’ 만큼이나 어렵습니다. ‘용서할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들이 마음을 휘젖습니다. “저 사람은 뭔가 배워야 해. 무책임한 행동을 조장하고 싶진 않아. 한동안 속 좀 끓이게 내버려둬. 본인한테도 이로울 거야. 행동엔 결과가 따른다는 걸 배워야 해. 잘못한 건 저쪽이야. 내가 먼저 나설 일은 아니지, 잘못한 줄도 모르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해?”(필립 얀시, What’s So Amazing About Grace, <놀라운 은혜>, 110쪽). 이런 생각 때문에 우리는 다시금 마음을 차갑게 식히고 마음의 문을 걸어 잠급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에게 응분의 벌을 줄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하지만 미움과 앙심과 원한을 품음으로써 우리가 징벌하는 사람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용서를 할 때 가장 큰 덕을 입는 사람은 바로 용서하는 사람 자신입니다. 때로, 나는 용서하려는데 용서 받을 사람이 냉담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도 여전히 용서가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우선적으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우선적으로 나 자신을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필립 얀시는, “용서보다 더 어려운 것이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용서하지 않는 것”(115쪽)이라고 말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용서하는 순간은 어렵지만, 용서하고 난 다음에는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쉽지만, 용서하지 않은 채 미움과 원한을 품고 살아가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려운 용서를 실천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오늘 두 가지의 용서의 비결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유명한 <인생수업>(Life Lessons)의 저자요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인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zabeth Kuebler-Ross)는 “용서의 첫 단계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다시 인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232쪽).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나와 같은’ 인간임을 생각하면 그 사람의 실수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숨겨진 깊은 상처가 그 사람에게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필경, 이상 행동은 이상 심리에서 나오고, 이상 심리는 그 사람이 과거에 받은 심한 상처 때문에 생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을 알고 나면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박소녀씨의 시누이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그는 참 못된 사람입니다. 특별히 올케인 박소녀씨에게는 평생 못되게 굴었습니다. 하지만 그 시누이의 삶의 이력을 살펴 보면, 그의 이상 심리가 이해가 됩니다. 그는 어릴 적에 전쟁 통에 오빠 둘을 한꺼번에 잃고, 부모마저 이틀 간격으로 잃었습니다. 그는 전쟁 후에 결혼을 하여 남동생 집 근처에서 살림을 차렸으나, 집에 불이 나서 전 재산을 잃고, 남편이 타 죽는 것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소설 속에서 박소녀씨의 남편은 말합니다. “그 상처가 누님에겐 뿌리깊이 박혀 고목이 되어 있었다. 그것은 누구도 베어낼 수 없는 고목이었다”(177쪽). 그 시누이는 어떤 점에서 보면 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나서야 어찌 그 시누이를 미워할 수 있겠습니까? 이제는 고인이 된 영문학자 장영희 교수의 글에 보니 재미있는 수식을 소개했습니다. (5 ? 3 = 2)라는 수식입니다. 오해(5)에서 세 발자국(3)만 떨어지면 이해(2)가 된다는 뜻이랍니다. 또 다른 수식도 있습니다. (2 + 2 = 4)라는 수식입니다. 이해(2)에 이해(2)를 더하면 사랑(4)이 된다는 뜻이랍니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심한 상처를 주었을 때, 세 발자국만 물러나 보면 이해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게 이해에 이해를 거듭하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도 있고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 5. 둘째, 하나님의 용서를 기억하는 것이 또 하나의 용서의 비결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인 비결입니다. 오늘 읽은 마태복음의 본문은 바로 이 비결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21절) 예수님 당시 경건하기로 소문난 바리새인들은 세 번까지 용서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가깝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바리새인들이 제시한 기준 3을 곱하고 거기에 하나를 더하여 완전수 일곱을 만들었습니다. 한 사람을 일곱 번 용서해 준다면 예수님이 칭찬해 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22절). 한 사람이 나에게 동일한 잘못을 490번 저지르더라도 490번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끝없이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질문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490번 정도 지속적으로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일까?” 누군가 나와 함께 오래도록 사는 사람, 즉 거듭 거듭 나의 인내심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자녀들 혹은 배우자 외에는 이렇게 많은 잘못을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비유는 가장 먼저 가족 관계 안에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가족을 용서할 수 있으면, 가끔 상처를 주는 다른 사람들 용서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그렇게 ‘끝없이’ 용서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하나의 비유를 사용하여 답을 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당시 로마 화폐로 일만 달란트를 빚졌습니다. 한 달란트는 당시 한 성인 노동자의 15년 품삯입니다. 2008년 한국의 통계에 의하면, 대기업 남자 사원의 평균 연봉이 5천 6백만원 정도라고 합니다. 5천만원만 잡아도, 한 달란트는 7억 5천만원입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는7조 5천억원이라는 엄청난 돈입니다. 왕은 그 종에게, 모든 식구를 노예로 팔고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고 다그칩니다. 그것을 다 팔아 보아야 한 달란트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입니다. 왕은 자기의 돈을 받지 못할 것을 알고 그 종의 인생을 망가뜨려서라도 응분의 벌을 받게 하려 했습니다. 그러자 그 종은 왕 앞에 무릎을 꿇고 사정을 합니다. 제발 살려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 모습을 본 왕에게 동정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왕은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고, 그 사람을 자유케 해 주었습니다. 이 종은 그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수 없이 왕에게 절을 하면서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왕의 눈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덩실 덩실 춤을 추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좋아라 하면서 가고 있는데, 얼마 전에 자기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만납니다. 한 데나리온은 성인 남성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므로, 하루 백 달러만 잡아도 일백 데나리온은 만 달러 정도, 즉 한국 돈으로 천만원 정도의 돈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멱살을 잡고 빚을 갚아내라고 다그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사정을 합니다. 조금만 참아주면 다 갚겠다고 말입니다. 그 정도의 돈은 얼마의 시간만 주면 능히 갚을 수 있는 돈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그 작은 빚을 이유로 하여 자신에게 빚진 사람을 고소하여 감옥에 쳐넣습니다. 이 소식을 나중에 왕이 듣습니다. 왕은 그 종의 처사를 듣고 분노했고, 그 종을 다시 불러 들입니다. 그 종에게 왕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애원하기에, 나는 너에게 그 빚을 다 없애 주었다. 내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처럼,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겼어야 할 것이 아니냐?”(32-33절). 그리고는 그 종을 하옥시켰습니다. 6. 여러분은 이 종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사람을 비난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사람’으로, ‘호의를 악의로 갚는 사람’으로, ‘아무런 동정의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그리고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으로 여길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즈음,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말씀하십니다. “그게 바로 당신이오!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당신이 바로 그 배은망덕하고 호의를 악의로 갚는, 아무런 동정의 여지가 없는, 벌을 받아 마땅한 사람이오!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용서하셨는지를 기억하시오! 그 용서를 기억한다면, 당신이 당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시오! 당신이 그토록 완악하게 행동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미 베푸신 용서를 철회하실지도 모르오!” 나의 가족이 혹은 나의 이웃이 나에게 준 상처란 기껏해야 천만원 정도입니다. 하지만 내가 하나님께 드린 상처는 7조 5천억원이나 됩니다. 나에게 490번이나 끊임없이 상처를 줄 사람은 가족 중에도 별로 없지만, 나는 하나님께 사만구천번도 넘게 상처를 드렸습니다. 그 많고 큰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내가 받을 벌을 당신 스스로 십자가 위에서 지셨고, 나의 죄책을 벗겨 주셨습니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 하나님은 엄청난 손해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나의 죄를 기억도 하지 않는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그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고 있습니까? 혹시, 이렇게 말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십니까? 나는 하나님께 진 빚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아직 하나님을 대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거룩하시고 진실하시며 순결하신 하나님 앞에 서기 전까지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온전히 자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살다 보면, 나도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을 대면하게 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죄성에 눈을 뜹니다. 진실하게 하나님을 대면한 사람들이 첫 대면의 순간에 느끼는 감정은 늘 동일합니다. “아, 내가 죽었구나! 죽을 수밖에 없구나!” 그런 다음, 이렇게 묻습니다. “그래도 혹시 살 길은 없을까?” 살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습니다. 철두철미 죄인으로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가 좋아 죄를 탐하며 죄 속에서 살다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나서 그 죄로 인해 죽을 것 같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찾는다는 것이 참으로 뻔뻔한 일같지만, 사는 길은 그 길밖에 없습니다. 모든 자존심 내려 놓고 낮아지고 약해져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느니 차라리 죄 속에서 죽는 편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용기도 아니고, 만용도 아닙니다. 어리석음 중에도 어리석음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성을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공로에 힘입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살 길입니다. 7.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서십시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아 보십시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많은 아픔을 드렸는지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십시다. 그 용서의 은혜 안에 거하십시다. 나를 용서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얼마나 큰 손해를 보셨는지를 묵상해 보십시다. 그렇게, 그분의 용서와 사랑 안에 거하면, 우리는 비로소 우리에게 손해와 상처를 입힌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얻을 것입니다. 그같은 능력에 힘입어 용서를 구하는 일에 민첩해 지십시다. 조금이라도 잘못한 일이 생각나거든 용서를 구하기에 지체하지 마십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마 5:23-24). 나를 용서해 줄 사람이 언제나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기회가 있는 동안, 내가 아는 잘못에 대해 그리고 내가 모르는 사이에 준 상처에 대해 용서를 구하십시다. <미/고/사>를 노래하며 삽시다. 용서하는 일에도 용기를 내십시다. 죽기보다 어려운 용서를 가능하게 해 주는 두 가지의 비결을 기억하십시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서너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고 그 사람의 사정을 이해하면, 죽기보다 어려운 용서가 가능해질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가지고는 490번은 고사하고 일곱 번도 용서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의 첫 번째 비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용서의 두 번째 비결, 즉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는 용서하는 일에 진실로 능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용서할 힘을 구하십시다. 진실로 용서할 날이 이를 것입니다. 혹, 여러분 중에 나를 용서해 줄 사람 혹은 내가 용서해야 할 사람이 이미 세상을 떠나서 낙심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늦기 전에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해야 하지만, 혹시 그 기회를 놓쳤다 해도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주는 상처는 가장 먼저 하나님에게 아픔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나고 없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 대신 용서를 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자신이 상처를 준 그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 축복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도를 진실하게 반복하면, 언젠가 우리는 당사자에게 직접 용서를 받은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님에게 심한 상처를 받은 분들 가운데는 부모님들이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없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도 하나님께 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쓰는 이런 경우 죽은 사람에게 용서의 편지를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추천합니다. 편지를 써서 태우거나 혹은 무덤가에 뭍으면 됩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 우리는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8.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용서 받고 용서하며 사십시다. 나의 마음에 아무 것도 맺힌 것 없도록, 아무 것도 묶인 것 없도록, 아무 것도 비틀린 것 없도록 용서하며 사십시다.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눈물짓지 않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억울해 하지 않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이 밤 잠 자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이 눌리지 않도록, 용서를 구하며 사십시다. 이 연습을 가정에서부터 행하십시다. 상처와 아픔과 미움과 원한으로 말하자면 박소녀씨보다 더 많을 인생도 드물겠지만, 그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떠날 때 그는 아무 것에도 붙들리지 않고 “나, 갈라요!”라고 말하며 떠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그의 남편과 시누이는 용서할 것을 용서하지 못하여, 그리고 용서 받을 것을 용서받지 못하여, 떠날 때가 되어도 떠나지 못하는 불쌍한 영혼이 되어 버렸습니다. 떠날 때가 되어 아무 것에도 묶이지 않고 떠나려면 지금 시간 있을 때 용서하고 용서 받아야 합니다. 임종의 시간에 우리의 발목을 잡는 일은 오직 하나, 용서하지 못한 일 그리고 용서받지 못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항상 임하셔서 회개와 용서의 일에 능하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아 살며, 용서를 구하는 일에 민첩하고 용서하는 일에 재빠른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주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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