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12 (김 영봉 목사)
“제국의 중심에 법궤를 모시라”(At the Center of Your Empire)
--사무엘하 6:1-5, 16-19
(김 영봉 목사)
1.
몇 년 전, 세간을 떠들썩 하게 만들었던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라는 소설은 예수께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실 때 사용했던 ‘거룩한 잔’ 즉 ‘성배’를 찾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 잔이 지금까지 남아있을 리는 없으나, 그 잔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너무도 의미 깊어 보이기 때문에 ‘혹시나 어디엔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호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이로 인해 어떤 사람은 이같은 소설을 쓰고, 또 어떤 사람은 탐험가로 나섭니다.
예수님의 성배만큼이나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온 것이 법궤입니다. 영어로 보통 the Ark of Covenant라고 부르는데, 우리 말로는 ‘법궤’라고도 하고 ‘증거궤’, ‘언약궤’, 혹은 ‘하나님의 궤’ 등으로 불립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출애굽기 25장 10절부터 22절에 모세가 언약궤에 대한 계시를 받는 장면이 나오고, 이어 37장 1절부터 9절에 법궤를 만드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각목으로 상자를 만들고 그 외면에 금을 입힌 다음, 그 안에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십계명 돌판을 두게 했습니다. 학자들이 재현해 낸 법궤의 모양은 대략 이와 같습니다.
이 법궤는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징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그 행군의 중심에는 언제나 법궤가 있었습니다. 이 법궤는 반드시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운반해야 했습니다. 법궤가 나아가면 백성도 나아갔고, 법궤가 멈추면 백성도 멈추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확보하는 도구처럼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나갈 때면 법궤를 메고 나갔습니다. 보통 때, 이 법궤는 성막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지성소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나중에 성전이 지어졌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법궤가 안치되었던 지성소에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제사장만이 일 년에 한 번 그곳에 들어가 모든 백성을 위해 속죄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법궤가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인해 파괴되었을 때 사라졌을 것으로 봅니다. 파괴되어 없어진 것인지, 어느 누가 감추었는지, 혹은 어딘가에 묻혀 버렸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 행방을 찾아 다니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영화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주제를 가지고 1981년에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의 한 편으로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Raiders of the Lost Ark)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영화 속의 일만은 아닙니다. 잃어버린 법궤를 찾아다니는 실제 인물들도 있습니다. 론 와잇(Ron Wyatt)이라는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그 예입니다. 그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법궤가 감추어져 있는 곳을 발견했으며, 그곳에서 예수님의 피까지 찾아냈다고 주장합니다. 아직 다 공개하지 못하는 것은 이스라엘 정부의 방해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전문가들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데,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에 김성호라는 분이 여행기를 올려 놓았는데, 에티오피아에 있는 ‘시온의 성 매리 교회’(St. Mary of Zion Church)에 대한 방문기가 있습니다. 법궤가 보관되어 있다고 알려진 성당입니다. 김성호씨가 안내원에게 법궤를 꼭 보고 싶으니 안내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안내원은 마지 못하는 몸짓을 짓다가, “보통 사람에게는 보여주지 않는데, 정 그렇게 원하니 특별한 친절을 베풀겠다”면서 깊은 지하 보관소로 인도해 줍니다. 여러 개의 방을 지나 어느 방문 앞에 당도하더니, 안내자는 그 방문 틈을 들여다 보라고 합니다. 방문자는 눈을 수 없이 껌뻑거리며 들여다 보았지만, 어두워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라고 안내원에게 말했더니, 그 안내원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그 법궤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직 성직자들의 눈에만 보입니다.”
2.
오늘 우리가 읽은 사무엘하 6장에는 이 법궤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6장을 다 읽어야 하겠지만, 시간 제약으로 인해 두 부분만 읽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번째 임금 다윗이 사울에 이어 왕위에 오르고 예루살렘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정권을 안정시켜 나갈 즈음의 일입니다. 다윗은 사무엘에 의해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 되었지만, 사울 임금의 추종자들 편에서 보면 구테타를 일으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은 자신의 왕권을 더 공고히 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 방법을 찾던 중에 그에게 법궤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옮겨 놓으면, 예루살렘은 수도로서의 위엄을 갖출 수 있고, 자신의 왕권은 신적인 아우라(aura)를 덧입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북쪽으로 약 10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던 기럇 여아림으로부터 법궤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새로 만든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예루살렘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다윗과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은 축제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않은 사고가 발생합니다. 법궤를 끌고 가던 소들이 어느 지점에 이르러 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법궤가 땅에 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수레를 몰던 사람 중 하나가 황급히 손을 뻗어 법궤를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입니까? 법궤에 손을 댄 웃사라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즉사합니다. 그 광경을 보고 다윗은 당황했고 또한 분노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9절) 다윗은 그 법궤를 예루살렘 성으로 옮기기를 포기하고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의 집에 잠시 보관하게 했습니다.
오벳에돔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거룩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웃사가 법궤를 만졌다는 이유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는 모습을 본 사람으로서, 법궤를 자기 집에 보관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일인지, 오벳에돔은 충분히 짐작하고 남았을 것입니다. 스스로 자원한 것인지, 아니면 왕의 명령이니 억지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법궤를 집안에 모셔 들이면서 정성을 다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 법궤는 그의 집에 3개월 동안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 기간 동안 하나님은 그의 집안에 큰 복을 내려 주셨습니다.
자, 여기서 잠깐 멈추어, 웃사라는 사람이 법궤에 손을 댐으로 인해 즉사한 사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참, 이해하기 힘 든 사건입니다. 하지만 웃사라는 사람 하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윗의 의도를 함께 고려하면, 전혀 이해 못할 일도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정권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할 목적으로 법궤를 옮기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만 하나의 상징으로서 법궤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법궤를 다루는 그의 태도에서 그의 잘못된 의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 법궤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정결례를 행한 후에 어깨에 메어 운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것을 수레에 싣고 소가 끌고 가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한 상징물로 취급했다는 뜻입니다. 웃사의 죽음은 자신의 승리와 권력에 기고 만장하여 하나님까지 우습게 생각하려는 찰나에 있었던 다윗에 대한 경고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법궤를 오벳에돔의 집에 맡겨 놓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다윗은 고민에 빠졌을 것입니다. 단순한 상징으로 알았던 법궤가 하나님의 능력의 통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두려워 떨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소홀히 다루어 애꿎은 웃사를 희생시킨 잘못에 대해 뉘우쳤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법궤를 포기해야 하는가? 법궤는 과연 ‘화 덩어리’인가? 과거에 법궤를 통해 조상들에게 베풀어진 축복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과거 조상들처럼 법궤를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렇게 고민하면서 다윗은 오벳에돔의 집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두고 볼 셈이었습니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누군가가 오벳에돔의 집에 일어난 변화를 다윗에게 전해 줍니다. 법궤를 그 집으로 옮긴 후에 그 집이 큰 축복을 받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다윗의 의문이 풀렸습니다. 과연, 법궤는 ‘화 덩어리’가 아니라 ‘복 덩어리’였습니다. 그것이 재앙의 원인이 된 이유는 하나님께 합당한 위엄으로써 그것을 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위엄으로써 그것을 대하면 법궤는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다윗은 이 사실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하나님께 합당한 모든 위엄과 정성과 예의를 갖추어 법궤를 옮겼습니다.
이 때, 다윗은 너무나도 기뻤습니다. 그는 ‘에봇’이라고 불렸던, 오늘로 하면 앞치마 같이 생긴 옷 하나만 걸치고 춤을 추었다고 합니다. 에봇은 거룩한 의식을 위해 만든 예복입니다.
이 때, 다윗은 속에 아무 옷도 입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그것은 왕으로서는 체신이 떨어지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는 법궤를 예루살렘에 모셔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임재와 보호 가운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감사 감격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하여 힘차게 춤을 추었다”(14절)고 합니다.
그렇게 법궤를 옮겨 예루살렘에 있는 성막의 지성소에 안치했습니다. 그것을 감사하여 다윗은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는 그 자리에 모인 백성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빵 한 덩어리와 고기 한 점과 건포도 과자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다윗과 예루살렘 주민들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가족들에게도 똑 같이 주님의 축복을 빌어 주려고 궁궐로 뛰어 들어가는데, 첫째 임금 사울의 딸이며 다윗의 아내인 미갈이 마중 나옵니다. 미갈은 냉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임금님이, 건달패들이 맨살을 드러내고 춤을 추듯이, 신하들의 아내가 보는 앞에서 몸을 드러내며 춤을 추셨으니, 임금님의 체통이 어떻게 되겠습니까?”(20절) 미갈은 하나님의 법궤가 그들 가운데 옮겨졌다는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것보다는 임금의 체통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차갑게 응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미갈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천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주님을 찬양하는 일 때문이라면, 이보다 더 낮아지고 싶소. 그래도 그대가 말한 그 여자들은 나를 더욱더 존경할 것이오.”(21-22절) 절대 권력을 손에 쥔 다윗은 잠시 잠깐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처럼 착각했으나, 하나님의 위엄과 능력 앞에서 제 정신을 찾았습니다. 위대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은 한낱 천한 사람일 뿐임을 확인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임금으로서의 체통을 괘념치 않고 춤을 추고 찬양을 했던 것입니다.
4.
오늘의 이 흥미로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신앙에 대한 태도를 돌아보게 만들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는 것이 여러 가지 면에서 다윗이 법궤를 그의 제국의 중심에 옮긴 것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와 법궤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법궤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특별한 방법으로 함께 하시는 통로입니다. 법궤가 없이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역사하셨습니다만, 법궤는 그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특별한 방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에 있어 법궤가 차지하는 의미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차지하는 의미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메시야 즉 그리스도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해 성부 하나님을 특별한 방법으로 만납니다. 그래서 그분의 별명은 ‘임마누엘’이 되었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마 1:23).
어찌 보면, 법궤가 사라진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는지 모릅니다. 신앙적인 열심으로 사라진 법궤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은 그같은 노력과 헌신을 영적인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일에 바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며 그분과 함께 살아갈 길이 열린 마당에 법궤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서 운명하셨을 때, 성전의 지성소를 두르고 있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마 27:51)고 합니다. 지성소는 법궤를 두었던 곳입니다. 이곳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강력하여 보통 사람들은 들어갈 수 없었고, 오직 대제사장만이 일년에 한 번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성전 휘장이 두 갈래로 찢어졌다는 말은 지성소 안에 특별히 임했던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열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특별하게 만나기 위해 성전으로 가고 지성소로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추측입니다만, 만일 예수님 당시까지 법궤가 지성소 안에 있었다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순간, 휘장이 두 폭으로 찢어지는 동시에 법궤가 산산조각 났을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어느 한 장소 혹은 어느 한 물건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찾아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법궤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겨져 있었다 해도, 예수님이 운명하시는 순간에 그 법궤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것입니다. 법궤는 더 이상 찾을 필요도 없고, 찾을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은 다윗이 예루살렘에 법궤를 모시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저 변방에 있는 산에 모시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살고 있는 곳,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곳, 그곳에 모셨습니다. 자신이 통치할 제국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에 모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마음의 중심에, 우리의 존재의 중심에, 우리의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합니다.
처음, 아미나답의 집에서 법궤를 옮기려 할 때 다윗이 범한 실수를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윗은 법궤를 하나의 ‘상징’으로만 알았습니다. 그것을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옮기려 했지만,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습니다. 자신의 왕권에 도움을 주는 하나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궤를 옮기려는 그의 의도는 일종의 ‘구색 갖추기’였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대하는 일에 정성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소홀히 법궤를 취급하다가 큰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제서야 다윗은 법궤가 하나의 ‘상징’이 아니라 살아있는 ‘능력’임을 알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하나의 ‘의식’으로, 하나의 ‘문화’로, 하나의 ‘형식’으로, 하나의 ‘상징’으로 생각합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대하는 태도와 신앙 생활을 하는 태도에 정성이 없고 진실성이 부족합니다.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리 아쉽지 않은 것으로 취급합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생각해 보면, 이 얼마나 위험 천만한 태도인지 모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심각한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상징이 아닙니다. 실체입니다. 살아있는 능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은 형식이나 의식이 아닙니다. 문화 생활이나 취미 생활이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요 과제입니다. 나의 삶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의 능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을 잘 못 대했다가는 큰 재앙을 만날 수 있지만, 제대로 섬기고 살 때는 오벳에돔의 집에 내렸던 것 같은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5.
예루살렘 안으로 법궤를 모셔 들이는 것이 다윗의 공적인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치적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자체로서는 업적이라 할 수 없었지만, 법궤를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모셔 들임으로 인해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동행을 통해 그는 선한 업적들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할 수 있는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을 꼽으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 가운데 모셔 들이는 일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 그분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나의 그 많은 업적들은 덤불로 지은 집같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 사람들에게 내세울 업적이 별로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과의 교제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든든한 토대 위에 세워진, 그 어떤 불로도 타지 않을 집을 마련한 셈입니다.
진실로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삶 속에는 마르지 않는 기쁨이 항상 넘칠 것입니다. 오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다윗과 미갈의 뚜렷한 차이를 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래서 법궤를 모셔들일 때 그는 세상은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며 춤을 추웠습니다. 너무나도 기쁜 나머지 왕의 체면이나 체통 따위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에봇 하나만을 걸치고 춤 추는 다윗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앞 모습은 그래도 볼만 했지만, 그 뒷 모습은 어떠했겠습니까? 왜 그래도 다윗은 괘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그토록 신나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갈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왕의 위신과 체통이 더 중요했습니다. 법궤가 무엇이며, 법궤가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미갈은 알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가깝습니까? 혹시 미갈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면, 자신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춤 추고 계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춤 추고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사는 세상과 그 사람의 삶은 따분함과 권태로움과 피곤함이 특징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세상 안에서는 ‘예측 가능한 일들’과 ‘예측할 수 없는 사고들’만 일어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더 높아지는 것과 더 부해지는 것과 더 유명해지는 것 외에는 다른 기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데서 오는 기쁨은 몇 일도 지속되지 못합니다. 과연, 여러분은 미갈처럼 이같은 삶을 전부로 여기고 투정과 불평과 한숨으로 세월을 허비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다윗과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세계가 전부가 아님을 알아 차렸으면 좋겠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세계 안에 영혼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움직이고 있음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가득한 신비를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온 천하에 가득한 하나님의 율동을 보고 그분과 함께 춤 추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이같은 믿음, 이같은 눈, 이같은 깨달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달라질까요?
저는 지금 영적 환각 상태에 빠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50년 동안 믿어온 사람으로서 현실이 어떤지 잘 압니다. 다윗처럼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에서 살아간다 해서, 손에 대는 일마다 잘 풀리고 무병장수하며 만사형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안에서 살아간다 해도, 질병에 걸리기도 하고 실패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분명히 다른 무엇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갈되지 않는 기쁨이 있습니다. 삶에 대한 기대감이 있습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에 대한 흥분된 기대감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고 권고했습니다. “기뻐하라”는 말이 어떻게 명령형이 될 수 있습니까? 기쁨이 없는 상태에서 억지로 기뻐하려고 힘쓴다고 될 일입니까? 바울 사도가 이것을 모르고 말했겠습니까? 그렇다면 왜 이렇게 말했을까요?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라.”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춤 추시는 것을 알아 차리고 그분과 함께 춤을 추는 것, 그것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영적 상태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을 통해 성부 하나님과 화해되어 하나님의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의 비밀입니다.
6.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사시는 분들께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이 영적인 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내가 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얼마나 알아 차리고 사십니까?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실지, 기대감을 가지고 하루 일을 시작하십니까? 오늘 내가 하는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또 어떤 ‘사고’를 치실지, 가슴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사십니까? 직장을 향해 갈 때, 여러분의 마음은 하나님이 하실 일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설레임으로 출렁입니까?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께서 내 삶 속에서, 일상 생활 속에서, 어디를 가나, 언제든지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것을 보고 사십니까? 경험하고 사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다윗처럼, 때로 체통과 체면을 잊고 기뻐 뒤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순간을 맞을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 있을 때, 저는 예배에 임할 때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통해 이루실 일을 기대하며 마음이 설레입니다. 제가 잘 해서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고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한 예배를 통해 성도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저는 세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예배자들이 모두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 때, 하나님께서 틀림없이 역사하시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믿습니다. 저는 이같은 영적 기대감이 항상 제 마음에 출렁이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무덤덤하게, 매너리즘에 빠져서, 그냥 하는 것이니 하는 마음으로, 혹은 축 쳐진 모습으로 예배에 임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하루에 네 번 설교를 하지만, 매 번 처음 설교하는 것처럼 깨어 있으려 힘씁니다. 그렇게 할 때, 예배에 임하는 저의 마음은 언제나 설레고 제 얼굴에는 기쁨이 충만합니다.
뿐만 아니라, 저는 이와 동일한 마음 자세로 다른 일에도 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올 때, 많은 경우에 저는 마음 설레는 기대감을 가지고 나옵니다. 비록 피곤에 짓눌려 있을 때도 있지만, 목사님들의 말씀 묵상을 통해 혹은 기도를 통해 받을 은혜를 생각하면, 새벽기도회에 나오는 저의 마음은 잔잔한 기쁨에 설레입니다. 심방이나 상담을 할 때도, 회의를 할 때도, 수술을 앞에 둔 교우를 향해 갈 때에도, 산책할 때에도, 책을 읽거나 신문을 읽을 때에도, 가족들과 함께 식탁을 대했을 때도, 언제나 제 마음이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며 설레이기를 소원합니다. 밝고 희망찬 때만이 아니라, 어둡고 희망 없어 보이는 시기에도 이 믿음으로 찬양하며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저 자신도 언제나 다윗처럼 춤추듯 살고, 저의 기쁨이 저를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염되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믿는 사람의 특징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미국 법학계에서 가장 존경 받는 사람 중 하나가 올리버 웬델 홈즈(Olive Wendell Holms, Jr.)라고 합니다. 그는 1902년부터 32년까지 미국 대법원 판사로 일하면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한 번은 그가 자신의 직업 선택에 대해 말하면서, 판사가 되기보다는 목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목사가 되기를 포기했느냐?”고 물었을 때, 홈즈 판사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제가 알았던 몇몇 목사님들이 장의업자들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 아마 저는 목회를 했을지 모릅니다.”(I might have entered the ministry if certain clergymen I knew had not looked and acted so much like undertakers.) 목사로서 저에게는 홈즈의 이 말이 커다란 경고가 됩니다. 영적 법궤를 마음의 중심에 모신 사람다운 기쁨이 제게 늘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여기서, 홈즈 판사가 한 말 중에 “장의업자들같은 모습으로 행동하지 않았더라면”이라는 대목을 더 생각해 보십시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는 ‘장의업자들은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모셔 들인 사람이라면 장의업자라 해도 이 기쁨의 비밀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달리 할 일이 없어서 그 일로 ‘밥 벌어 먹고 산다’면 삶이 비참해질 수 있겠지만, 시신을 다루는 일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활동하고 계시며,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놀래키실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믿는다면, 그 장의업자는 예배실로 들어가는 저의 마음처럼 기쁨으로 설레일 것입니다. 장의업자도 이럴 수 있다면, 이 세상 직업 중에 이럴 수 없는 직업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미 영적 법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신 성도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이토록 철저히 변화시키도록 더욱 영적 생활에 정진하십시다. 미갈처럼 눈이 어두워지고 마음이 무뎌지지 않도록, 늘 예배에 전심을 다하고, 하나님 앞에 자주 머물러 기도하고 말씀에 귀 기우립시다. 이같은 믿음과 눈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한 번 눈 뜨면 방치해 두어도 그 시력이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매일 닦아야 합니다. 매일 무릎 꿇어야 합니다. 예배 드리기에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봉사하고 헌신하기에 민첩해야 합니다. 하지만 분명히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린 헌신과 희생에는 비교할 수 없는 은총의 신비로써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입니다.
7.
하여,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직 마음의 중심에 모셔 들이지 않은 분들에게 말씀 드립니다. 다윗이 자신의 제국의 중심에 다른 것이 아니라 법궤를 모셔 들였던 것처럼, 여러분의 제국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들이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영접하기는 했으나, 아직도 마음의 가장자리에 모셔 두고 계시는 분들에게 청합니다. 여러분의 영토 가운데, 그 제국의 중심에 그분이 오실 수 있도록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미갈의 경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왕후의 지위에 올랐으나, 하나님을 보지 못하여 그의 삶은 초라하고 불행했습니다.
더 미루지 마시고, 마음을 여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중심에 초청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의 제국의 수도에 임하셔서 저의 왕이 되어 주옵소서. 저를 다스려 주옵소서. 제가 사는 곳 어디서나, 언제나, 주님의 손길을 알아보고 함께 살게 하옵소서.” 이렇게 진실하게 기도하시고 진실하게 여러분의 삶의 통치권을 예수 그리스도께 내어 드린다면, 마치 상징처럼 보였던 그분이 여러분에게 능력이 되어 여러분의 삶을 속에서부터 철저하게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나중에, 그룹 U2의 가수 보노(Bono)가 말했듯, “내가 한 일 중 가장 급진적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이었다”(The most redical thing I have done was to accept Jesus Christ as my Lord)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오, 주님 예수시여,
제 마음의 중심에 임하소서.
제 나라의 수도에 임하소서.
주님이 왕이 되시고
주님이 주인이 되소서.
제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의 율동을 보게 하시고
저도 주님과 함께
춤추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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