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명깊은설교

하늘로 솟으라 - 와싱톤 한인교회 김영봉목사

audio한국어 영어 고속 저속

2009.7.5 (김 영봉 목사)

인쇄페이지 열기
MP3로 듣기

                                                                  “하늘로 솟으라”
                                                                  (Fly to Heaven)
                                                             --고린도후서 12:1-10                 
                                                                  (김 영봉 목사)

1.

“무엇 때문에 교회 다니십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교회를 다니고 신앙 생활을 함으로써 어떤 변화 혹은 유익을 얻게 되기를 기대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어떤 분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섭니다”라고 대답하십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잡음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대해 이런 기대감을 가지는 분이 아직도 계시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요! 아이들이 싫어하는 데도 불구하고 주일마다 교회에 데리고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상, 우리가 사는 사회에 그 어디에서도 이제는 ‘바른 생활’을 가르치는 곳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학교조차도 이제는 ‘바른 생활’이 아니라 ‘성공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의 본분에 대해 가르치고 덕성을 길러주며 선하고 바르게 살도록 인도하는 데 있어 교회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런가 하면, 종교적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계십니다. 실로, 종교의 문제는 한도 끝도 없는 인간의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가장 탁월한 주제입니다. 종교적인 질문들은 보통 확실한 대답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질문들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 질문들에 매달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난 인류사에서 수 많은 천재들이 종교적인 문제들과 씨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굳이 천재가 아니라 하더라도, 종교적인 질문들은 우리의 지성을 사로잡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요즈음 한국 교회의 강단이 교인들과 소통하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이런 점에서 저도 위기감을 가지고 매 주일 설교에 임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지성을 사로잡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지만, 지성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이라도 번잡한 세상을 뒤로 하고, 세상과는 전혀 다른 곳에서, 세상에서 듣지 못하던 이야기들을 들으면 마음에 휴식이 들어 찬다고, 그래서 좋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요즘처럼 교회가 야시장처럼 번잡해진 상황에 이렇게 느끼는 분들이 계시다는 것도 참 감사하고 다행한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그 위치나 예배당의 분위기 그리고 예배 분위기 때문에 찾아오는 분들이 마음과 영혼에 깊은 평화를 맛 볼 수 있다고, 그 점에서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참 다행한 일입니다.

반면,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로 교회에 나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민 사회에서는 사람 만나러 교회 오는 분들도 계시고, 더 많은 사람들을 알아 두어 사업 상의 유익을 얻으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 음식점이 없는 지역에 있는 교회의 경우, 일 주일에 한 번 한국 음식을 먹고 싶어서 교회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저희 어릴 적에는 자연스럽게 같은 또래의 이성을 만나고 싶어서 교회에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교회에 나오는 것을 굳이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유학 생활 중에 일 주일에 한 번 김치 먹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다가 하나님을 만나 참된 신앙인으로 변한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 중 어떤 분은 미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교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 한시적으로 교회를 나가 ‘주다가’, 그만 하나님에게 발목이 잡힌 분도 계십니다. 연애하고 싶어서 교회에 나왔다가 하나님과의 연애에 빠진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이유로 교회에 나오더라도 그것을 굳이 막을 일은 아니다 싶습니다.

하지만 교회에 다니면서 언제까지고 비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생각해 볼 일입니다. 그것은 본인에게도 좋지 않고, 교회에게도 폐를 끼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배를 드리기 위해 교회 안에 모인 우리 각자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무엇을 구하려고 교회에 나오고 있는가? 과연 내가 추구하는 것은 교회의 본질과 일치하는가? 나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가?

2.

이성 친구를 만나기 위해, 혹은 김치를 먹고 싶어서, 혹은 사업 상의 이유로 교회에 나오는 것보다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혹은 종교적 질문들을 해결받기 위해, 혹은 마음에 평화를 얻기 위해 교회에 나오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훨씬 차원이 높고 고상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커다란 의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것이 믿음의 본질입니까? 과연, 그것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추구해야 할 본질에 속합니까?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로 솟아 오르는 데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초월자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 종교입니다. 인간은 본래 하나님에 의해 지어졌기에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 안에 머물러 살아야만 한다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과의 관계를 추구하며 그 관계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삶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가장 중요한 소망이어야 합니다.

지난 수요일 시편 강해에서 읽은 시편 27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4절)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기를 소원한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임을 알았습니다. 인생의 모든 화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진 데서 시작된 것임을, 따라서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부터 풀리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랬기에 그는 오직 하나의 소원, 즉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 안에 머물러 살아가는 것을 소원하며 살았습니다.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이같은 갈망이 있습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는 채워지지 않는 근원적인 갈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모를 잊어버린 어린 아이의 마음 상태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근거가 상실됨으로 인해 생긴 공허감입니다. 그것을 정직하게 인정하느냐, 부인하거나 외면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인간이면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이같은 영적 갈망에 시달릴 때, 우리는 때로 시편 저자처럼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 (42:1)

인간이면 누구나 이같은 갈증을 느끼는데, 그 갈증이 어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누구를 찾고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다 제각기 생각이 다릅니다. 시편 42편의 저자처럼, 영혼의 갈증이 하나님과 분리된 까닭임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그 갈증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을 찾고 그분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는 이유는 오직 이 하나이어야 합니다. 하나님 없이는 내 존재가 비어 버리기 때문에, 하나님 없이는 내 인생의 집의 토대가 무너져 내릴 것을 알기에, 하나님 없이는 내 모든 몸부림이 의미 없는 것임을 알기에, 그분을 찾는 것입니다. 그분을 찾아 하늘로 솟아 오르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과 통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분과 재결합하여 그분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 그 어디에서도 줄 수 없는 것, 오직 교회만이 줄 수 있는 것, 그것은 바로 이 ‘영적 발돋움’입니다.

교회에 오면 마음에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의 평화가 흔들리지 않는 것이 되려면 하나님과 통하여 생겨난 평화여야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우리가 알고 싶은 종교적인 질문들을 해결받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통하여 그분의 계시로써 깨닫는 것이 아니면, 그 대답은 오히려 우리를 오도할 수 있습니다. 교회를 다님으로 인해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뿌리가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에 있지 않다면, 별로 희망이 없습니다.

3.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을 붙드십시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만날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죄의 담장을 십자가를 통해 허물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면,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힘 입어 담대히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하늘로 솟아 오를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읽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힘 입어 하늘로 솟았던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는 자신의 영적 체험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십 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 올라갔던 (2절)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늘이 일곱 층으로 되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영적인 차원에 대한 경험은 보통 우리가 믿고 있는 세계관의 틀 속에 투영됩니다. 바울이 체험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합니다. 바울 자신도 그것을 자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오해만 불러 일으킬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하늘로 솟아 올라 영적인 세계 즉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표현이 있습니다. 2절에 보면, “그는 십사 년 전에 셋째 하늘에까지 이끌려 올라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4절에 보면, “이 사람이 낙원에 이끌려 올라가서”라고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말하면서 일인칭의 표현 즉 “나는……”이라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말하듯 “그는……”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일어난 일을 ‘수동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솟아 오른 것이 아니라, 성령에 사로잡혀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경험이 바울에게는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크고 작은 영적 경험들을 거치면서 그는 늘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성령과 함께 동행함으로써 그는 이 땅에 살았지만 동시에 하늘 안에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하늘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에서 그리고 기독교에서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 말은 비유적인 언어입니다. 영어에서 heaven이라는 말과 sky라는 말이 서로 다른 뉘앙스를 가지고 있듯이, 우리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창공’ 혹은 ‘대기권’이라는 말과 ‘하늘’이라는 말은 다른 뜻을 가집니다. 영어의 heaven과 우리 말의 ‘하늘’은 대기권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신이 활동하는 영역’(the abode of deity)이라는 뜻도 가집니다. 하나님이 활동하는 영역은 우주선을 타고 멀리 멀리 가야만 닿는 곳이 아닙니다. 물론, 그곳에도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시지만,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선 이곳에서도 그분은 활동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로 솟아 오르기 위해서 우리에게 무슨 장치나 도구가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하늘’이라는 단어가 비유적인 것이듯, ‘솟아 오르다’라는 말도 비유입니다.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막고 있는 막을 뚫고 그분과 통하는 것이 솟아 오르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습니까? 죄의 장벽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이 막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또 다른 벽도 있습니다. 우리는 육신과 물질에 익숙한 존재인데,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중에 늘 활동하고 계신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는 일에 실패할 때가 많습니다. 엷지만 잘 뚫리지 않는 막, 뚫렸다가는 다시 봉합되는 막, 그런 막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형편입니다.

믿음 생활의 초점은 바로 이 막을 뚫고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고 그 성령과 함께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교회 다니는 목적은 바로 여기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고 그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삶을 살고, 그 결과로 인해 인격이 변화하고 마음에 평화를 얻으며 종교적 질문들을 해결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먼저 와야 할 것이 분명히 먼저 와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국 교회가 너무나도 비지성적이고 반지성적이라는 점에 대해 안타까이 느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가 영성적으로는 뜨거운데 그것이 인격과 덕성으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지적대로 “주여, 주여!” 부르짖는 열성은 강한데, 주님의 뜻 대로 살아가는 삶의 질은 한 참 떨어진다는 점에 대해 뼈아프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의 목회와 설교를 보면, 지성을 강조하고 덕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 근본이며 우선이며 뿌리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의 의심도 없습니다.

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하늘로 솟아 오른 적이 여러분에게는 있습니까? 하나님의 세계와 통하는 체험이 있었습니까? 성령께서 마음을 만지시는 경험을 해 보셨습니까? 그런 체험을 통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경험을 하셨습니까? 그러한 체험을 통해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갈 2:20)라는 고백이 진실임을 체험해 보셨습니까?

그것이 어떤 것이어도 좋습니다. 세 번째 하늘에 올라간 것 같은 영적 체험이어도 좋고, 왠지 이상하게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것이어도 좋습니다. 말씀을 읽으며 나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났을 수도 있고, 성령께서 나를 압도적으로 사로잡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밖을 내다 보다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눈물 짓는 경험일 수도 있습니다. 방언이나 신유같은 특별한 경험일 수도 있고, 찬양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것이 있습니까?

만일 그같은 체험이 있다면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더 깊은 영적 체험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더 큰 선물을 주고 싶어하십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우리의 마음을 만지시고 채우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믿고 구하고 찾으시기 바랍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찾으시기 바랍니다. 이미 주신 은혜에 머물러 있지 말고, 더 깊은 차원을 맛볼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십시다.

동시에, 균형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무엇인가 된 것 같이 착각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체험이 자신을 즉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께서 자신을 더 깊이 변화시킬 수 있도록 그 은혜를 깊이 숙성시켜야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풍겨나게 해야 합니다.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설득력이 느껴지도록 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이 많은 사람들을 몰상식하 만들거나 일방통행을 하게 하거나 자기 중심적이 되도록 만드는데, 우리는 그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바울 사도은 우리에게 좋은 모범입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성령의 은사를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대신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받은 엄청난 계시들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과대평가 할는지 모릅니다”(7절). 그 많은 이적과 계시와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지병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는 이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즉 이 질병을 치료해 달라고 세 번이나 간절히 간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예상 밖의 응답을 주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하게 된다”(9절). 바울은 자신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셨다고 믿습니다.

이같은 겸손한 태도 때문에, 바울은 성령과 깊은 교제를 나누고 살았으며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이 그를 통해 드러났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이 뭔가 된 것처럼 착각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깨어지기 쉬운 그릇임을 알았고, 자신을 통해 성령께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겼습니다. 그럴수록 그는 더욱 자중하여 그리스도의 덕이 자신에게서 숙성되도록 힘썼고, 성령의 계시를 추구하며 그것에 따라 가르쳤습니다. 바울같은 분도 그랬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자중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은사와 은혜가 꽃을 피우고 열매 맺도록 힘써야 하겠습니까? 이렇듯, 성령의 역사는 결코 자랑하거나 선전하거나 경거망동할 일이 아닙니다.

반면, 그러한 체험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성령의 은혜를 간절히 추구하는데도 아직 뚜렷한 체험이 없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아예 그같은 세계에 대해서는 마음을 닫아놓고 사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을 단지 인격 수양의 도구로만 여기거나 지적인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분들은 보통 영적 체험을 자랑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당신들처럼 될까 무서워 성령을 구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정한 경계선 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모든 것을 걸러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그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고상한 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더 바른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선택하고 그렇게 믿는 것은 모두 개인의 자유에 속합니다. 그같은 이유로라도 교회에 나오고 신앙 생활을 지속하는 것은 참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분들에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은 미심쩍어 보이지만, 바울 사도가 오늘 자서전적인 고백에서 말한 바, 그 ‘하늘의 경험’에 한 번 마음을 열어 보시라는 것입니다. 굳게 팔짱을 끼고, 내가 가진 체로 모든 것을 걸러, 받을 것만 받는 경계심을 한 번 내려 놓고, 팔짱을 풀고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까지 수용하고 그 세계에 나를 열어 보라는 권면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늘의 세계와 통하는 경험을 추구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내 속에 나 아닌 누군가가 살아 움직여 나를 이끌어 가는 경지를 경험해 보시라는 것입니다.

5.

이 지점에서,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질문하실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막고 있는 장막을 뚫고 하늘로 솟아 오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육신과 물질의 장막을 뚫고 하나님의 성령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때때로 성령의 강력한 덮어씌움을 입어 이 땅에 발을 딛고 살면서도 하늘을 살 수 있겠습니까?

최근에 깊은 영적 체험을 하고 있는 후배 목사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이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드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 성령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는 중에, 그 목사님의 마음 속에 성령께서 주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항상 성령님과 함께 살면서 그 능력 안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음성이었습니다. 저는 그 목사님의 고백을 들으며, 그것이 분명 성령께서 주신 메시지라고 느꼈습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순종하고, 들려지는 말씀에 순종하고, 기도를 통해 깨달아지는 말씀에 순종하고, 양심을 통해 들려오는 말씀에 순종하라는 겁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내 고집, 내 판단, 내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그것을 거스르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는 것만큼 성령이 활동하시는 공간이 커집니다.

둘째, “성결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고 정결하지 못한 것들을 멀리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본성에 있어서 거룩한 분입니다. ‘거룩’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은 ‘구별하다’는 것입니다.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부정한 것으로부터, 음란한 것으로부터, 거짓으로부터 구별되는 것이 거룩입니다. 영이라고 해서 다 거룩한 것은 아닙니다. 악한 영, 부정한 영, 어두운 영도 있습니다. 우리가 죄와 악과 어둠과 거짓 가운데 있으면 악한 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 내 안에 머무시려면, 내 삶이 거룩하고 성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령께서 더 깊이, 더 충만히 내 안에 거할 것입니다. 성령께서 싫어하실 일들을 치워 버려야 합니다.

셋째, “나에게 우선 순위를 두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과 사귀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일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라는 뜻입니다. 목마른 사슴에게 있어서 시냇물을 찾는 것이 유일의 관심사이듯, 성령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것,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 그리하여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러 사는 것, 그것이 우리의 최대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와 기도와 말씀 묵상과 찬양과 영적 교제와 사랑의 봉사를 귀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런 것을 통해서 우리는 성령과 더욱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를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우리 안에 성령께서 자리를 잡고 그 통치권을 점점 넓혀가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통제하고 우리 마음대로 부릴 방법은 없습니다. 그분이 우리 가운데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고 그분을 사모하며 기다릴 따름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와 계시며, 우리 곁에 계십니다. 그것을 결코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미 하늘을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영역 안에 살고 있습니다. 마치 공기에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그 공기를 호흡하며 살고 있듯, 성령은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며 우리는 그 성령을 영적으로 호흡하며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의식하든 안 하든,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듯, 이미 그렇게 살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방법이 우리 인간에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분의 임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무감각하게 살아갈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만일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고 느끼신다면, 하나님의 임재를 무시하거나 외면하거나 무감각해진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그분에게 우리 자신을 더욱 열고 맡기고 의지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임재가 때로는 손에 만져지는 것처럼 분명할 정도로 그분과 깊이 교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직하게 순종하고,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도록 힘쓰고, 신앙 생활에 우선 순위를 두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찾을 때, 그분께서 응답해 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께서 주시는 은사와 은혜가 우리 안에서 지성으로, 덕성으로, 인격으로, 그리고 우직한 실천으로 숙성되도록 겸손히 우리 자신을 그분께 내어 맡기면 됩니다.

모든 것은 성령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께 우리를 온전히 맡기면 됩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우리보다 우리 주님 예수님이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더욱 간절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지 않습니까?

구하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나늘에 계신 하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눅 11:9, 13)

기도

아멘, 주여!
주실 줄 믿습니다.
저희를 성령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성령의 아름다운 은사와 열매가
우리 삶에
그리고 우리 교회에 충만하게 하소서!
아멘, 주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