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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19 (김 영봉 목사) “네가 아니라 나다” |
1.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God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라는 격언이 있습니다. 미국민의 82%가 이 격언을 성경 말씀이라고 여긴다는 통계가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렇게 알고 있었던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 말씀이 아닙니다. 그리스 시대의 속담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미국 사회의 정신적인 유산처럼 만든 사람은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며 영성가인 제랄드 메이(Gerald May) 박사는 이 격언이 성경의 사상과 매우 닮아 있는 것 같지만, 실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겉으로 보면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신뢰를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 이 격언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도구로 쓰이기 때문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전 국민을 전쟁으로 몰아세울 때 이 격언을 자주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 격언이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강조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를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격언이 또 하나 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 있는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너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Pray as though everything depended upon God and act as though everything depended upon you). 이 격언도 역시 성경 말씀처럼 들리기는 하지만, 성경에 있는 말은 아닙니다. 누가 한 말인지 정확히 밝힐 수 없을만큼,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이 격언을 사용했습니다. 어거스틴이나 마르틴 루터같은 분들이 이 격언을 사용할 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강조했을 터인데, 오늘날 이 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제랄드 메이 박사는 이 두 격언이 미국인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내 생각에, 이 격언들은 하나님에 대한 불신앙과 운명을 지배하려는 의지를 정당화시켜 주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는 것 같다. 이 격언들은 제 의지대로 살려는 욕구를 부추긴다” (I think such sayings are popular because they rationalize our mistrust of God and our subsequent desire to master our own destinies. They are propaganda for willfulness.) 그렇기 때문이 영적으로 깨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두 격언을 조심해야 한다는 겁니다. 복음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radical trust in God)를 손상시키고, 우리의 죄성 안에 있는 ‘통제의 욕망’을 부추기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이 세상을 제대로 보고, 우리의 인생길을 제대로 걸어가려면, 매일, 매 순간,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죄성에 숨어 있는 ‘주인에의 의지’ 혹은 ‘통제에의 욕망’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나 하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유혹을 경계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되게 의지하고 살려고 힘쓰는 사람조차도, 너무도 자주, 마치 내가 내 삶의 주인인 양,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린 양, 마치 내가 우주의 중심인 양,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오늘 읽은 사무엘하 7장의 이야기를 보면, 다윗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때는 다윗이 영광스러운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하고 태평 성대의 시기로 진입하던 즈음이었습니다. 성경의 저자는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주님께서 사방에 있는 모든 원수에게서 다윗 왕을 안전하게 지켜 주셨으므로, 왕은 이제 자기의 왕궁에서 살게 되었다.”(1절) 여기서 저자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다윗이 영광스러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이 서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초를 겪었는지, 왕 위에 오른 다음 전임금 사울의 추종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 해야 했는지, 제국을 위협해 오는 나라들을 제압하고 통합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싸움을 싸워야 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서 얼마나 자주 죽음을 각오했었는지를 거론하며, 다윗의 공도 인정해 주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을 것입니다. 물론입니다. 다윗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노력을 경주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했습니다. 죽을 고초를 수 없이 겪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이룬 것은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이 성경 저자의 판단입니다. 하나님께서 애시당초 다윗을 왕으로 택하지 않았다면, 사울 왕의 집요한 살해 음모로부터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지 않으셨다면, 다윗의 마음을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도우시지 않았다면, 그리고 다윗을 통해 영광스러운 나라를 일으키실 마음을 먹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선한 임금으로써 계속하여 선정을 펼치려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습니다. 법궤을 제국의 중심으로 모셔 들일 때의 그 믿음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제 아무리 큰 일을 이루어도 다만 스스로를 들볶는 일일 뿐이요,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있으면 실패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는 믿음, 말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한, 나는 어떤 상황에 처하든 복 받은 사람이다라는 믿음, 말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 안에 항상 머물러 있느냐에 있었습니다. 다윗의 가장 큰 과제는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도 우리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지중해 연안에 있는 나라들이 모두 두려워 떨만한 강대국을 건설하고 나서 이 믿음을 잠시 망각했습니다. 자신의 성공으로 인해 한껏 마음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자신의 권력으로 못할 것이 없었던 그는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이룬 것처럼 착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의 제국이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음을 잠시 잊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성대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 때문이었는데, 그 업적으로 인해 그는 그 믿음으로부터 미끄러질 찰나에 있었습니다.
3.
오늘의 본문을 주의깊게 보면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성기에 접어들면서 다윗은 궁정 예언자였던 나단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백향목 왕국에 사는데, 하나님의 궤는 아직도 휘장 안에 있습니다.”(2절) 그러자 나단도 동의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 임금님과 함께 계시니, 가셔서, 무슨 일이든지 계획하신 대로 하십시오”(3절). 예언자 나단으로서는 성전을 짓겠다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하나님에 대한 다윗의 배려가 갸륵해 보입니다.
하지만 그 날 밤에 하나님은 예언자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십니다. 5절부터 16절까지 나오는 긴 말씀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집을 지어 주겠다는 것이냐? 집이 필요한 사람이 누구냐? 너냐, 나냐? 네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하겠다는 말이냐? 목동인 너를 택하여 기름 부은 것도 나요, 네가 싸울 때 승리를 안겨 준 것도 나다. 과거에 그랬듯이, 내가 장차 너를 위대한 왕으로 만들 것이다. 내가 너의 이름을 빛나게 할 것이다. 너뿐 아니라, 너의 후손들이 대대로 왕위에 올라 이 나라를 견고히 다스리도록 내가 지켜줄 것이다. 누가 주인이냐? 네가 아니라 나다!”
다윗에게 주신 하나님을 말씀을 읽으면서 주의깊은 독자라면 뚜럿한 특징을 하나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는”, “나의”, “내가”, “나를”이라는 표현이 이상할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지금 다윗은 자아 도취에 빠져서, 타락한 권력자들이 자주 그렇게 하듯, 말끝마다 “내가”, “나는”, “나의”, “나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요 제국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힘이면 못할 것이 없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겨냥하셨습니다.
나단으로부터 이 말씀을 전해 들은 다윗은 정신이 번쩍 났던 것 같습니다. 18절 이하에 보면, 그는 성막으로 들어가서 주님 앞에 꿇어 앉아 기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쉽게 교만해지기도 했지만, 또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일에도 민첩했습니다. 아무나 그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어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한다 해도,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한껏 부풀었던 마음으로부터 바람을 빼어 내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 꿇었습니다. 자기 인생의 참된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다시 확인하며 고백했고, 처음 가졌던 믿음의 눈을 되찾았습니다.
다윗은 기도 중에 하나님께 이렇게 말씀 드립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 주님께서 몸소 이 계시를 이 종에게 주시고 ‘내가 너의 집안을 세우겠다!’ 하고 말씀하여 주셨으므로, 주님의 종이 감히 주님께 이러한 간구를 드릴 용기를 얻었습니다.”(27절) 그는 나단이 전해 준 말을 통해, 하나님이 자신의 미래를 자신이 생각해고 꿈 꾸는 것보다 더 놀랍게 계획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토록 귀하게 여기시는 줄, 예전엔 미처 몰랐습니다. 다윗은 감당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주님의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셔서, 나의 자손이 주님 앞에서 영원토록 대를 잇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주 하나님, 주님께서 직접 그렇게 약속하여 주셨으니, 주님의 종의 집안이 영원토록, 주님께서 내리시는 복을 받게 해주십시오.
다윗은 그 전에는 감히 이러한 기도를 드리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꼈습니다. 어떻게 염치 없이 내 집안 문제를 두고 기도할 수 있느냐고 생각했는지 모릅니다. 혹은, 내가 하나님께 해 드린 것도 없는데, 어찌 나는 하나님께 구하기만 하느냐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깨닫고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어떤지를 확인하고 난 다윗은 전 같으면 게면쩍어서 꺼내놓지 못했던 기도 제목을 꺼내 놓았습니다.
4.
나단을 통해 다윗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음성은 오늘 우리의 마음에도 울림을 만들어 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도 다윗과 별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는 일마다 승승장구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면 다 된다!”고 장담하고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도대체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주인으로서의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무능한 주인에게 인생을 맡기고 회의와 절망과 한숨 속에서 하루 하루를 연명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아갑니다.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자주 고백하고, 또 가끔 그렇게 행동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잠시뿐, 나는 다시금 내 삶의 주인으로 등극하여 내 제국을 건설하기 위해 힘을 씁니다. 모든 것이 마치 자신에게 달려 있는 듯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속합니까? 어느 쪽에 속하든 상관 없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며,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제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매일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과 내 가정 그리고 내 직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간절한 소원보다 더 좋은 계획을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매일 그렇게 살아가는 것,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사실을 기억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시며, 나의 제국의 주인이시며, 인류 역사의 주인이시며, 또한 온 우주의 운행의 주인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진실에 역행하여 살면, 그것은 마치 가시채를 발길로 걷어 차는 것과 같은 꼴이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내가 스스로 주인이 되어 살아가다 보면, 결국 내 스스로 내 숨통을 옭죄는 결과에 빠집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나친 스트레쓰와 불안, 초조, 우울증 등을 앓고 있습니까? 신경 안정제와 수면제가 얼마나 많이 팔리고 있습니까? 카운슬러와 상담 치료사와 정신분석가와 정신과 의사들의 수요가 급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는 더욱 심해지고 많아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를 다 밝힐 수야 없겠지만,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서두에서 인용한 격언처럼, 모든 것이 자신에게 걸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운명을 통제하려 몸부림치기 때문에, 그런 문제들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나의 자아는 나 자신을 책임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그렇게 지어 놓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 스스로 주인으로 자처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필경 지쳐 넘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오래 버티고 어떤 사람은 이내 지친다는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마치 어린 아이에게 집안을 맡긴 것과 같은 일입니다. 가끔 소년 혹은 소녀 가장이 집안을 훌륭히 이끌고 사는 이야기가 미담으로 전해지지만, 그들이 어른이 되면 어릴 때 받은 지나친 부담이 병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감당하려고 버둥대면 탈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5.
한 여름 낮에 시골 길에서 어떤 사람이 소달구지를 끌고 가고 있습니다. 장에 가서 물건을 팔고 빈 달구지로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한 참을 가는데, 저 앞에서 어느 여인이 짐을 머리에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며 걷고 있습니다. 달구지를 끄는 사람은 그 여인 옆에서 멈추어 서서 말을 건넵니다. “아주머니, 어디까지 가시나요? 그곳까지 실어다 드릴테니, 달구지에 타세요.” 여인은 ‘이제 살았다!’ 싶은 표정을 지으며 감사를 표합니다. 그리고 달구지에 올라탑니다. 주인은 “이랴!” 소를 몰아 떠납니다. 얼마 가다가 주인이 뒤를 돌아 보았더니, 이 여인이 짐 보따리를 이고서 달구지에 앉아 있는 겁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아니, 아주머니, 왜 짐을 이고 계셰요. 옆에 내려 놓으세요.” 그랬더니, 여인이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제 몸만 실어 주시는 것도 감사한데, 어떻게 짐까지 신세를 지나요.”
이처럼 어리석은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하지만 우리 대부분이 이렇게 살고 있음을 아십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인생의 주인으로 자처하며 버둥대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짐보따리를 내려 놓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더 불쌍할지 모릅니다. 달구지에 앉아서 짐을 이고 있으면, 덜컹 거릴 때마다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어쩌면 걸어가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울지 모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그분께 맡기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모르고 사는 사람보다 더 삶의 형편이 나쁠 수 있습니다.
오늘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들려주신 말씀을 나에게 하는 말씀으로 들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령께서는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잘 들어라. 네가 아니다. 나다. 네 삶의 주인은 나다. 네 제국의 주인은 나다.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가 다스린다. 네가 나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너는 이슬처럼, 풀처럼 있다가 사라지는 사람이다. 네가 무엇을 하여 나를 유익하게 하겠느냐? 그런 걱정 하지 말아라. 너를 창조하고, 너를 이 세상에 나게 하고, 너를 구속하여 지금껏 너를 살게 한 것은 나다.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나는 너를 위해 일할 것이다. 너와 네 직장과 네 가정을 위해 내게 특별한 계획이 있다. 네가 몸부림쳐 얻으려는 것보다 더 놀라운 것을 내가 줄 것이다. 그러니 너는 다만 나를 의지하여라. 나를 신뢰하여라. 네가 진 짐을 내게 내려 놓아라. 너는 다만 내 안에서 쉬고 나를 따라 오너라. 잊지 말아라. 네가 아니라 나다. 나다. 나, 바로 나란 말이다.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성령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받아들일 뿐 아니라, 진실로 그렇게 믿고 의지하는 이에게 복이 있을진저! 매일 매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것을 선포하며, 그분이 주시는 은혜를 맛보며 그 은혜 안에서 사는 사람에게 복 있을진저! 그분의 친절한 팔에 안겨 쉴 줄 아는 이에게 복 있을진저! 의지하고 신뢰하는 이에게 열어주시는 미래를 보는 이들에게 복 있을진저! 다윗처럼,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확신하고, 마음 속에 숨겨진 부끄러운 간구까지 내어 놓을 수 있는 담력을 가진 이에게 복 있을진저!
6.
여기까지 들으시고 혹시 이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러면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하나님이 다 해 주실 거라고 믿고 하늘만 쳐다보란 말인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니, 그분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나는 태만하게 놀아도 된다는 말인가?”
그럴 듯하게 들리는 반론입니다. 그러나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같은 질문은 자주, 마음을 파고 드는 말씀의 도전을 회피하기 위한 간교한 속임수입니다. ‘우리를 속이는 자’ 사탄이 그같은 속임수로 성령의 음성을 회피하게 만듭니다. 초등학교 국어 실력만 가지고 있어도, 이 질문은 엉뚱한 트집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은 내 노력을 모두 내려 놓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과거와는 다른 태도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기를 힘 쓸 것입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힘쓸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한 편으로는, 자신이 없어도 세상은 아무 변고 없이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픔 없이 받아들이는 동시에, 하나님에게 있어서 자신이 더 없이 귀중한 존재임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무엇인가를 해 드려서 귀한 존재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처음부터 귀한 존재로 여겨 주셨고 지금도 그렇게 여기고 계시며 앞으로도 그렇게 여기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리 큰 업적도 의미가 없음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바심을 내거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들볶지 않습니다. 그 사람은 불안감과 두려움에 눌리지 않습니다. 이루어진다 해도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이며,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기에, 그는 다만 하나님께 맡기고 그분의 인도를 따라 전심을 다할 뿐입니다. 대단히 큰 일을 이루었다고 사람들이 칭찬해도 그 사람은 조용히 물러섭니다.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설사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은 절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 머물러 있는 한, 언제든지 그것을 복구해 주실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나에가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는 격언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이 격언을 뒤짚어서 이렇게 생각하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달린 것처럼 행동하라.” 참 적절한 지적이다 싶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이 나에게 달린 것처럼 기도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다린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더 신실하게 삶을 대합니다. 분망하거나 허둥대는 일이 없이, 한 번에 하나씩 정성을 다해 섬겨 나갑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의 삶 속에는 ‘질서’가 생기고 ‘방향’이 서며 맛있는 ‘열매’가 주렁 주렁 열립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기대하는 것은 당신에게 손해가 생길 것을 염려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거나 말거나, 하나님께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에게 생깁니다. 그분이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바라는 이유는 우리가 참된 행복으로 누리며 살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믿어지십니까? 우리는 그 행복을, 하나님 바깥에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 없는 행복은 며칠 가지 못하여 물리게 됩니다. 우리를 진실로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 안에서 찾는 행복입니다. 매일 그 행복을 맛보고 다른 사람까지도 맛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의 주권을 인정하고 살기를 그렇게도 간절히 바라시는 것입니다.
7.
이쯤 되면 회피할 수 없는 질문 하나를 대면합니다. “아니, 우리가 뭔데 하나님께서 그토록 우리를 위하신다는 말입니까? 도대체 우리에게 사랑할만한 것이 무엇이 있어 하나님이 이토록 우리를 위하신다는 겁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보아서는, 그리고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온갖 욕망과 우리의 과거에 숨겨져 있는 갖가지 죄들을 생각해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고 있는 한, 우리는 이 사실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생각하면, 그것이 진실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우리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낳으시고 구속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십니다. 마치,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에 이유가 없듯이,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27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는 나를 버려도, 주님은 나를 돌보아 주십니다.”(10절)
Too good to believe!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믿기지 않을만큼 놀라운 소식입니다. 그런데 진실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전하는 진실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이 입증한 진실이며, 저의 인생 경험을 통해 확인하는 진실입니다. 우리가 흔히 부르는 찬송 Amazing Grace라는 제목처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는 실로 ‘놀랍습니다.’ 아니, 이 단어로도 표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믿기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믿기지 않는다고 외면하시겠습니까? 믿기에는 너무 좋아 뭔가 미심쩍어 보이니, 조금 더 두고 생각해 보겠습니까? 그같은 조건 없는 은혜를 받아들이기에는 여러분의 자존심이 너무 강합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번, 조용히 물러 앉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부여받은 것 중, 진실로 중요한 것들은 모두 값 없이 받은 것들입니다. 그냥 받기에는 너무나도 값비싸고 좋은 것들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그렇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우주도 그렇습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도 그렇고, 배우자에게 받고 있는 사랑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십자가 앞에 무릎 꿇고 그분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진실을 받아들이고, 염치 없어 보이지만,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마음을 여시기 바랍니다. 매일, 그 사랑과 은혜에 젖어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과 은혜의 충격으로부터 헤어나와 어느 정도 정신이 들면, 그 사랑과 은혜에 보답하며 살아가십시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받을 때 느꼈던 ‘염치없음’을 보상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에 대한 응답이요 보답입니다. 이 시간에 함께 모여 예배 드리는 것도 그렇고, 피땀 흘려 번 수입의 일부를 떼어 바치는 것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그렇게 하여 무엇을 더 얻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하는 것입니다. 내가 전 재산을 바친다 해도 하나님께는 달라질 것이 전혀 없지만, 내가 이미 받았고 받고 있으며 앞으로 받을 은혜를 생각하면 때로 그렇게 하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것이고, 그래서 희생하는 것이고, 그래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저와 여러분을 모두를 깊이 만지셔서, 햇살처럼 혹은 공기처럼 늘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고 살아가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 사랑과 자비와 은혜를 깨닫고, 그분의 주권을 매일 선포하고 고백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주님께서 일하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책임지십니다. 아멘. 할렐루야!
주님,
저희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께서 모든 것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다스리십니다.
오, 주님,
저희를 도우시어
이 진실을 깨닫게 하시고
인정하게 하시며
또한 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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