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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7.26 (김 영봉 목사) “그래도 나는 일어난다” |
1.
누가 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면 어떻게 답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에 대해 우리는 보통 이름을 밝히거나 직업을 말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나의 본질과는 별 상관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라는 사람의 본질에 대해 말해 주려면 뭐라고 소개하면 될까요?
이 질문은 실상 우리 각자에게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다른 사람에게 대답해 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할 질문입니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온갖 우여곡절을 통과하여 보람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여쭙겠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릴 적부터 다른 사람과 관계하여 스스로를 규정하고 그것에 따라서 우쭐해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습성에 길들여져 있습니다. 어릴 적, 내 부모가 친구의 부모보다 더 잘 나 보이면 자기가 더 나은 사람인 것처럼 착각하고 우쭐했습니다. 내 키가 친구보다 크거나, 생김새와 몸매가 친구보다 나아 보이면, 혹은 내 성적이 친구의 그것보다 더 나으면, 우리는 우쭐해졌고, 그렇지 않으면 열등감에 빠지곤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내 자존감을 높여 주었던 것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공부를 잘 해.” “나는 키가 커.” “나는 운동을 잘해.” “나는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어.” 이런 생각들은 우리의 자존감을 세워주기에 충분합니다. 반면, 내 자존감에 상처를 냈던 것들도 대부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긴 것들이었습니다. “나는 못났어.” “나는 실수 투성이야.” “나는 키가 작아.” “나는 못생겼어.” “나는 지질이도 가난해.”
이상하게도, 우리의 마음은 이렇게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일에 재빠르고, 우리 사회는 그같은 비교를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겨내려는 악착같은 노력으로 인해 움직여지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여 이기면 물질적으로 얻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만, 가장 큰 소득은 자존감입니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봐,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라고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짓습니다. 진 사람은 ‘그래, 이번에는 졌지만, 두고 보자. 내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보여 주마’라고 생각하며 절치부심, 칼을 갑니다. 그래서 싸움 중에서도 가장 추한 질긴 싸움이 자존심을 건 싸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과 관계 없이 나 자신만을 두고 내가 누구인지 생각해 볼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나 자신을 두고 생각할 때,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나의 내면을 들어다 보고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질문해 본 적이 별로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 보는 일을 두려워하는지 모릅니다. 한 번도 대면해 보지 않은 자신을 대면하기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신 안에 자존감을 세워줄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때문에 바깥에서 자신의 자존감을 세워줄 희생양을 찾는 것인지 모릅니다.
2.
정신분석학자 칼 융에 얽힌 일화입니다. 한 중년 남자가 만성 우울증을 치료하고 싶어서 융을 찾아왔습니다. 첫 상담을 마치면서 융은 그 남자에게 하루 14시간 일하는 것을 8시간으로 줄이고,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나머지 시간을 서재에서 홀로 보내 보라고 주문했습니다. 그 남자는 융의 지침대로 일을 줄이고 저녁이면 서재에서 헤르만 헤세와 토마스 만의 책을 읽거나 쇼팽과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몇 주일을 보낸 다음, 그 남자는 다시 융을 찾아가서, 당신의 말대로 해 보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융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자세히 듣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제 말을 잘못 알아들으셨군요. 제 말은 헤세나 만이나 쇼팽이나 모짜르트와 함께 그 시간을 보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 있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우울증 남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 자신보다 더 같이 있기 힘든 상대는 없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대면하기 싫습니다.” 융은 그 사람의 눈을 응시하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당신이 하루 14시간 동안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당신의 자아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가끔씩이라도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고 사십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생각하던 것에서 벗어나 오직 나 하나만을 두고 생각하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나의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내 존재의 중심을 보면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물으며 사십니까? 장차 내가 무엇이 될지를 가끔 생각해 보십니까?
이렇게 반문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니, 목사님, 그런 것은 사춘기 때나 하는 질문이지, 지금 이 나이에도 그런 질문을 하고 살아야 합니까? 저도 그런 질문을 붙들고 씨름해 본 적이 있습니다만, 그런 질문은 대답이 없습니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입니까? 그것 말고도 골치 아픈 일이 많은데, 왜 짐을 더하십니까?”
제가 이 질문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을 괴롭혔다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실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고 사는 이 문제, 아니 자신이 누구인지를 잘 못 알고 살아가는 이 문제가 평생 나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질병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이 질문에 대해 바른 대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비교하고 그 결과로 인해 일희 일비하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내가 나아 보이는 점이 좀 있습니까? 그래서 우월감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그것이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뛰어난 미모가 여러분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것 때문에 당당하게 살 이유가 있다고 느끼십니까? 그 미모가 얼마나 갈 것 같습니까? 미모라는 것이 매우 주관적이기 때문에 당신이 자랑하는 미모가 추하게 보이는 사람도 있을텐데, 당신의 미모를 전혀 알아주지 않는 그 사람 앞에서는 어쩌시렵니까?
많은 재산이 당신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 재산이 얼마나 가겠습니까? 재산이 많다는 것 하나로 인해 으스대는 태도를 경멸하는 사람도 적지 않은데, 그런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무엇으로 당신의 자존감을 세우시렵니까? 머리 좋은 것이 당신의 자존감의 근거입니까? 그 머리로써 인정받는 것도 한 때 뿐입니다. 그 기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을 근거로 자존감을 지탱하겠습니까? 당신보다 더 뛰어난 두뇌의 소유자 앞에 서면 어쩌겠습니까? 정신 질환을 겪는 학생들이 가장 많은 곳이 일류 대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왜 그렇습니까? 머리 좋은 것 하나에 모든 자존감을 걸고 그곳까지 갔는데, 자기보다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있음을 확인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아무리 찾아 보아도, 다른 사람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그런 사람들의 인생에 헐값을 메깁니다. 어떤 야구 선수는 능력이 좋아 공 하나 던질 때마다 4만 달러를 번다는데, 나는 한 시간에 10 달러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일하고 있다면, 도대체 무엇으로 자존감을 세울 수 있겠습니까? 사는 것이 비참하지만, 먹여 살릴 자식들이 있으니, 하루 하루 연명하는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3.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그동안 살아온 방식 그대로, 관성에 밀려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행히 자존감을 세울만한 것이 있다면, 할 수 있는대로 오래도록 그것을 부여잡기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자존감을 세울만한 요소가 하나도 없다면, 자기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회피하면서, 인생이 다 그런 거려니 생각하고, 사는 것이 때로는 치사하고 고통스럽지만, 가끔 느끼는 작은 행복을 찾으며 견디는 길밖에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고통스럽지만, 나중에는 흔들리지 않는 행복감을 누리게 해 주는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대면하는 방법입니다. 자신을 진실하게 대면하면, 자존감을 세우기에 충분한 조건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자신의 외적인 조건에 속아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세울만한 조건이 별로 없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자신이 그동안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얼마나 학대해 왔는지 깨닫게 됩니다.
누구 하나 예외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홀로 자신을 대면한 사람이라면, 그리고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신을 본 사람이라면, 한 없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을 대면해야 하고 끌어 안아야 합니다. <마음의 귀향> (The Heart’s Journey Home)이라는 책을 쓴 니콜라스 하난(Nicholas Harnan)은 이 점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망가진] 모습이야말로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실상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 모습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거기서 지독한 자기혐오의 씨앗이 뿌려진다. 아프도록 연약한 이 모습이야말로 인간의 특성이며, 인간 조건을 치유 상태로 회복하려면 모두가 반드시 끌어안아야 할 모습이다.
이것이 출발입니다. 자기 자신의 참 모습을 보고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대해 한 없이 절망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자존감을 찾는 첫 걸음입니다. 대면하기 두려운 자신의 참 모습을 대면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임을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 초라한 자아를 끌어 안는 것, 그것은 진정한 용기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정한 자아 회복과 자존감의 회복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납니다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고, 또 나아가야 합니다. 자신의 그 초라한 자아를 부둥켜 안고 하나님을 바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우려야 합니다. 그렇게 귀 기우리면 필경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들려 주셨던 바로 그 음성,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조용히 머물러 우리의 초라한 자아를 대면하고 있노라면, 틀림 없이 이 음성을 들립니다. 마음에 느낌으로 들리든지, 또렷한 음성으로 들리든지, 필경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 안에서 자신을 새롭게 발견했던 사람들이 증언하는 바이며, 또한 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증언할 수 있는 진실입니다. 하나님의 임재에 나 자신을 열고 머물러 있으면, 그리고 그 음성이 들릴 때까지 충분한 시간 동안 머물러 있으면, 이 음성은 더욱 분명하게 들립니다. 누구에게나 들립니다. 천사처럼 거룩하게 사는 사람에게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사람에게도, 똑 같이 들립니다.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음성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음성을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온 우주를 창조하신 전능의 하나님께서 이슬처럼 있다가 사라질 존재인 나를 찾으시고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해 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 딸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해 주신다면, 그것이 보통 일이겠습니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자존감은 바로 이 하나의 사실,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 위에 서 있습니다. 그 하나의 사실이면, 이 세상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짓눌리지 않을만한,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4.
1993년, 빌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축시를 읽으면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마야 안젤루(Maya Angelou)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는 노스 캘롤라이나에 있는 Wake Forest University에서 미국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며, 인권 운동가이며, 댄서이자 또한 시인입니다. 그가 한 번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시인의 언어와 표현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창조주가 나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나, 마야 앙겔루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훨씬 더 대단한 일입니다. 그 생각은 내 마음을 가득 채워줍니다. 내 마음을 마치 풍선처럼 부풀게 합니다. 진실입니다. 그것은 가장 엄청난 사실입니다. 저는 그 생각을 늘 내 마음에 품고 있을 수 없고, 그 생각이 저를 완전히 지배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제 가슴은 아마 터져 버릴 것이며, 제 혈관과 그 안에 있는 피가 끓어 오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눈알은 튀어 나올 것이고, 배꼽이 터지려고 불쑥 튀어 나올 것입니다. 제 양 다리는 6인치 정도 늘어날 것입니다. 진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생각은 육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저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나는 지난 주에 혹은 지난 해에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할 때, 바로 이 경험을 두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그 지식이 제게는 매 번 새롭게 다가옵니다. 마치 과거에는 전혀 몰랐던 것처럼 말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 체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 마야 안젤루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아십니까? 그는 어릴 적,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여덟 살 때, 그는 어머니의 남자 친구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 남자는 나중에 마야의 삼촌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마야는 이 모든 일이 자신으로 인해 일어났다고 생각하고는 그로부터 6년 동안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홀어머니와 할머니 사이를 오가며 자랐습니다.
십대 후반이 되어 그는 바깥 세계와 소통을 시작하면서 댄서가 되었고, 매우 세속적이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열 여섯에 미혼모가 되었고, 20대 중반까지 수 많은 직업을 전전하고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으며, 심지어는 성매매 여성으로 전락할 위험에까지 다다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당시만 해도 그는 신을 믿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성악 레쓴을 받고 있었는데, 성악 선생이 ‘Lessons in Truth’라는 책을 주면서 그 중의 한 부분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라는 문장으로 끝나는 글이었습니다. 마야가 다 읽고 나서 책을 덮은 다음 선생을 쳐다 보니, 그는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읽어 보라고 했습니다. 마야는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하고 소리 내어 읽었습니다. 선생은 “한 번 더!”라고 말했고, 마야는 또 그 문장을 읽었습니다. 그렇게 일곱 번을 반복하여 읽게 했습니다. 이 당시를 회고하며 마야는 자서전에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일곱번째 그 문장을 읽었을 때, 어쩌면 이게 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어쩌면 하나님이 나를 진실로 사랑하실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를 말입니다. 마야 앙겔루를 말입니다. 저는 갑자기 그 느낌에 압도되어 그 자리에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저는 놀라운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말입니다. 그 지식은 저를 겸손하게 하고, 제 뼈를 녹이고, 제 눈을 감게 하고, 제 치아가 잇몸에서 분리되는 것처럼 느끼게 합니다. 저는 무한한 자유를 느낍니다. 저는 높은 산 위를 나르고 깊은 골짜기를 비행하는 새와 같은 느낌이 됩니다. 저는 은빛 바다의 파도 물결이 됩니다. 저는 마치 봄의 새 순처럼 기대감에 가슴 설렙니다.
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경험하는 것은 이와 같습니다. 비록 마야 안젤루가 상상력 가득한 시인의 언어로 표현하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확인하고 경험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고,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음을 확인하게 되면, 우리는 그 무엇도 흔들 수 없는 자존감을 얻게 됩니다. 나 자신만으로는 보잘 것 없는 허망한 존재이지만, 그같은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 하나님 안에서 내가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마야 안젤루가 죄와 타락의 진창으로부터 헤어나와 오늘과 같은 모습으로 성장하고 성숙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나서,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허비하기에는 너무도 귀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로 경험한 사람은 “당신은 누구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일생동안 당신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건입니다”라고 답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여 믿은 사람들은 더 이상 외적인 조건 때문에 우쭐해지지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것 때문에 교만해지지도, 그런 것 때문에 자존심이 상해 잠을 설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고 계시며 영원히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그것만으로 자신이 충분히 귀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같은 깨달음과 믿음을 얻게 되면, 그 사람은 어떤 어려움에도 굴하지 않고 진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이유와 능력을 얻게 됩니다.
마야 안젤루의 시를 한 편 소개하렵니다. ‘그래도 나는 일어난다’(Still I Rise)라는 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 속에 품은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세계를 그린 시입니다. Youtube에 마야 앙겔루가 직접 이 시를 낭송한 영상이 있어서 보여 드리려 합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신은 매정하고도 왜곡된 거짓말로
나에 대한 역사를 기록할지 모릅니다.
당신은 나를 먼지 구덩이에 짓밟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먼지처럼 일어날 겁니다.
내가 건방진 것 같아 기분이 나쁩니까?
왜, 당신은 우울한 기분에 눌려 삽니까?
내가 걸어다니는 모습은
안방에 있는 유전에서 석유를 퍼내는 사람의 걸음걸이 같습니다.
달처럼, 그리고 해처럼,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처럼 분명하게,
희망이 높이 솟아 오르는 것처럼,
그래도 나는
일어날 겁니다.
내가 깨어진 모습을 보고 싶습니까?
고개를 떨구고 눈을 내리 깐 모습을?
어깨가 눈물처럼 흘러 내리고
통곡으로 인해 혼절한 모습을?
그런데 내가 당당해 보여서 기분이 나쁩니까?
내가 뒷마당에 금광을 가진 사람처럼
웃고 다니는 것이
받아들이기 힘든가요?
당신은 말로 나를 사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눈빛으로 나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증오심으로 나를 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공기처럼 나는
일어날 것입니다.
나의 매력 때문에 기분이 나쁜가요?
허벅지 사이에 다이아몬드를 찬 사람처럼
춤을 추는 내 모습이
당신에게 놀랍게 보이나요?
수치스러운 역사의 초가집으로부터 나와, 나는
일어납니다.
고통 속에 뿌리를 둔 과거로부터,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출렁이는 드넓은 바다,
검은 바다입니다.
들어오고 나가는 바닷물의 출렁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흔들림이 없습니다.
공포와 두려움의 밤을 뒤로 하고, 나는
일어납니다.
상상할 수 없이 쾌청한 새벽을 향하여, 나는
일어납니다.
나의 선조들이 준 선물을 가지고 있는 나는
노예의 꿈이요 희망입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나는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확신하며 그 사랑을 맛보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 낙관주의’(absolute optimism)가 이 시에 그리고 마야 안젤루의 표정에 담겨 있지 않습니까? 저는 이 시를 읽으면서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에 적어 놓은 고백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35절, 37-39절).
6.
더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아니,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믿습니까? 믿어지십니까? 그 믿음이 내 우울한 기분을 바꾸어 줄만큼, 마야 안젤루 말대로 내 육신에 영향을 미칠만큼, 내 얼굴 표정과 발걸음을 바꿀만큼 깊고 강합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내 발걸음이, 마치 안방에 있는 유전에서 석유를 파내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힘이 있습니까? 그 믿음으로 인해 내 목소리가, 마치 뒷마당에 금광이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밝습니까?
저는 지난 한 주일,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제 믿음을 측량해 보았습니다. 제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 아무런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조차도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그 믿음으로 그 어두운 터널을 걸어나올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믿음이 든든한가? 내가 한 순간의 실수로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고 위선자라고 손가락질 한다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그분 앞에 엎드려 회개하고 그분의 자비를 힘입어 다시 일어설 수 있을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내 믿음은 뿌리가 깊은가?” 이런 질문을 제 자신에게 던져 보니,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새벽기도 시간에 저는 마야 앙겔루처럼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을 수 없이 반복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제가 당신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하옵소서.”
오늘 읽은 에베소서의 말씀에서 바울이 기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교우들을 생각하면서 오직 하나만을 간구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 그것 외에 달리 구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기도를 하면서 바울은 그들이 그 사랑을 구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3장 20절에서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엡 3:20)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넘치게 주시는 분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이 사랑을 갈망하는 마음을 허락하시고, 그 사랑을 체험하게 하시며,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살게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누군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을 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이 제게 제일 중요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으로써 인생 길의 어느 길목에 있든지, “그래도 또 다시 일어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
저희로 이 사랑을 믿게 하소서.
이 사랑을 맛보게 하소서.
이 사랑에 취하게 하소서.
주님께 사랑받는 한 가지 사실,
그것으로 인해
평탄하고 높은 인생길을 겸손히 걷게 하시고,
험한 인생길을 가뿐히 걷게 하소서.
“너는 내 딸이다. 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음성을
항상 들으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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