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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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성 프로젝트 <내 영혼의 오두막 2>
“네 영혼의 오두막으로 오라”
(Come to the Shack of Your Soul)
--요한복음 21:15-17
1.
지난 주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깨어진’ 세상이며, 우리가 더불어 사는 사람들은
‘상처난’ 사람들이라는 진실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난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니, 나도 아프고, 너도 아프고, 누구나 아프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상처에 관한 첫 번째 진실입니다.
상처에 관한 두 번째 진실이 있습니다. ‘상처가 나를 만든다’는 것입니다. 태어나면서
부터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겪어가면서 우리의 자아는 형성됩니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상처입니다. 밝고 긍정적인 자아를 가진 사람은
상처를 비교적 덜 받았거나, 받은 상처를 상쇄하고도 남을만한 사랑을 받고 자랐거나,
혹은 상처가 대부분 치유된 사람입니다. 반면, 상처를 심하게 당했는데 그
상쇄할만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부정적이고 어두운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어떤 상처를 받았는지, 그리고 그 상처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아는 것은 그 사람의 매우 중요한 부분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통 “내 마음 나도 몰라!”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 움직이는
방향을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은
원치 않는 행동을 하도록 이끕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지만, 어느 사이에 원치 않는 말이 터져 나오고, 바라지 않았던
행동을 하고 맙니다. 그러한 자신에 대해 절망하고 다시 다짐해 보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거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가장 큰
이유는 해결되지 않은 어떤 상처 때문입니다.
상처가 나를 만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행복과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다면, 상처가 계속 나를 만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상처’가 아니라 ‘사랑’이 나를 만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원래
그렇게 지어 놓으셨습니다.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그 사랑 속에서 자아가 형성
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런 사람은 사랑을 전염시키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죄로
인해 이 세상이 깨어지고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자, 우리의 자아는
사랑 보다는 상처에 의해 더 큰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늦었다 싶더라도 상처로 인해 만들어진 나를 바꿀 수 있어야 하고, 앞으로 받게
될 상처가 나를 결정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상처의 치유에 대해 말씀 드리려 합니다. 이미 받은 상처, 그래서
내 마음을 나도 모르게 지배하고 있는 그 깊은 상처를 어떻게 하면 치유할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대해 소설 <오두막>은 아주 중요한 암시를 던져 줍니다.
저자인 폴 영은 그 스스로 경험한 상처 치유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 소설을
썼습니다. 제가 이해하는 한, 폴 영은 이 소설을 통해 상처 치유를 위해 세 가지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2.
첫째, <오두막>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상처를 대면하도록 격려합니다. 맥은 다섯
살짜리 딸 아이를 연쇄살인범에게 잃어 버렸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맥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런 일을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그 슬픔의 깊이와 무게를 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맥이 살아 있다는 것이 어찌 보면 기적처럼 보입니다. 사실, 이런
일이 소설에서나 일어난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최근에 미국과 한국에서 일어난 어린이 성폭행 사건들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습니다. 맥과 같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얼마든지 있다는 뜻입니다.
미시를 잃은 후 맥은 3년 반 동안 납으로 만든 목욕 가운을 걸치고 사는 것처럼 힘
겹게 살았습니다.
마치 먹구름이 하늘을 덮듯, 그의 마음 안에는 ‘거대한 슬픔’(The Great Sadness)이
두텁게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그는 모든 일에 신명과 재미를 잃어
버렸습니다. ‘죽지 못해 사는 목숨’이라는 말이 맥에게 딱 들어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는 것 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음에 틀림 없습니다. 아니,
그 ‘거대한 슬픔’을 지고 사는 것은 미시에게 대한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스스로 거두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것은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해서는
안 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납덩이를 짊어지고 우울의 늪을 힘겹게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또 다른 길이 있었습니다. 그 상처를 치유하는 길입니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 깊은 상처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소설의 메시지입니다. 맥의
상처가 치유될 수 있다면, 이 땅에 치유받지못할 상처는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딸이 살해된 그 오두막으로 오라는 하나님의 초대는 바로 치유의길로 오라는
초대입니다. 맥이 찾아간 그 오두막은 실은 그의 영혼 안에 지어진 오두막입니다.
지난 3년 반 동안, 그 끔찍한 두려움 때문에 한 번도 찾아보지 않았던 영혼의
그 깊은 상처를 대면하라는 초청입니다. 맥이 오두막을 향해 가는 과정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협곡으로 올라가는 좁은 길목에 이르자 의식을 뚫고 공포가 침입해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오로지 운전에만 열중하려 했으나 눌러왔던 감정과 두려움이
콘크리트를 뚫고 올라오는 잡초처럼 그의 속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시야가
캄캄해졌고, 고속도로 출구가 보일 때마다 방향을 틀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 때문에 운전대를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어야 했다. 그는 자신이 고통의 중심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완전히 망가뜨린 ‘거대한 슬픔’의 소용돌이 속으로 돌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생생한 기억과 통렬한 분노가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입안에서 씁쓸한 피 맛이 났다.”
(110-11쪽)
상처 치유에 대해 전문가들이 쓴 글을 읽어 보면 예외 없이 첫 번째 치유 단계로서
“상처를 대면하라”고 말합니다. 영성(Spirituality)과 상담(Counseling)에 탁월한
식견을 가진 존 엘드리지(John Eldredge)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상처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마음의 회복> Wild At Heart, 206쪽).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집요하게 상처를 피하려 합니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 보면,
맥이 그 오두막을 향해 가는 동안 고속도로 출구가 보일 때마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본성입니다.
실로,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다시 대면하는 것은 심히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이
실수였든, 실패였든, 학대 당한 것이었든, 차별 당한 것이었든, 다툼이었든,
버림받은 상처였든,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상실의 아픔이든, 자존심에 받은 상처든,
그것을 다시 대면하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수치심, 후회, 모멸감, 절망감, 분노 등의
감정이 일제히 밀려오면,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억압하거나 정당화 하여 덮어 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그대로
사라져 주지 않습니다. 끌어 안고 치유하지 않는 한, 상처는 언제까지고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진정한해결을 원한다면, 대면하고 품어 안고 눈물로써 녹여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눈물은 약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폴 영이 소설 속에서 말하듯,
그것은 ‘치유의 물’(healing waters)입니다.
3.
둘째, 상처를 내어 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상처를 담아 놓을 수 있는
마음의 용량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용량을 넘어서면,
상처는 화산처럼 폭발하거나 생명을 질식시킵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버지니아
텍 총격 사건은 상처가 쌓여 폭발한 예라고 할 수 있고, 최근에 한국 유명인들이
연이어 자살한 것은 상처에 눌려 질식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그렇습니다. 한 없이 쌓아 두면 안 됩니다.
이민자들은 특별히 자신의 상처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꺼립니다. 여기에는
개인적인 이유도 있을 것이고, 이민 사회의 성격에도 그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든지, 스스로를 독방에 감금시키고 암울한 나날을 지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연극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니 그 하루 하루의 싸움이 얼마나
힘겹겠습니까? 그러다가 사소한 상처 하나라도 다른 사람에게 알려졌다 싶으면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신의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털어 놓는다는 것은 실로 위험한 일입니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가십거리가 될 수도 있고, 엉뚱한 오해와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상처를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은 훨씬 더 위험한 일입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가십과 오해와 비난은 나를 해치지 못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쌓아둔 상처는 나의
삶을 폭발시키거나 질식시킵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의 상처와 아픔을
쏟아 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누군가 믿을만한 사람을 찾아 자신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배우자와의 관계가 그럴 수 있는 관계라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배우자가 아니더라도, 친구나 교우 가운데 그런 사람이 한 둘은 있어야 합니다.
내게 깊은 상처 이야기를 나눌 사람 하나 없다면, 혹은 자신의 깊은
상처의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나를 찾을 사람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았는지 자문해 볼 일입니다. 지금이라도 그런 진지한 사귐을 시작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다면, 우선 일기를 쓰거나 글을 써서 마음의 상처를 토해
내도록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은 자신의 상처를 두고 마음 열어
대화할 수 있는 영적 친구를 찾는 일입니다.
아울러, 상처가 특별히 깊고 그 뿌리가 깊을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일에 주저
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대면하기를 꺼리게 되고, 상처의 지배력이
강할수록 그것을 치유하려는 노력은 방해를 받습니다.
심리 치료를 하는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그겁니다. 치료 받고자 하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데, 상처받은 마음 안에는 그것을 그대로 품고 살려는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본인이 끝내 치료받기를 원치
않으면, 제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살펴, 상처 치유를 방해하는 마음의 움직임을 제어하고, 치유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찾아 행해야 합니다.
4.
셋째,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때 상처는 비로소 온전히 치유됩니다. 상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믿음을 뿌리째 흔들어 놓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임재와 은총을 가장
진하게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롬 5:20)라는 바울의 말씀을 패러디 한다면, “상처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티브 그린(Steve Green)의 찬양 중 “In Brokenness
You Shine”이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상처 받아 깨어진 그곳에 주님의 임재가 빛난다는
뜻입니다. 경험해 보지 않고는 동의할 수 없는 ‘역설적 진리’입니다.
저는 지난 주에 소설 <오두막>의 전반부 ¼의 줄거리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나머지
¾의 내용은 미시가 살해된 그 오두막에서 맥이 경험한 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두막에서 만나자는 엽서를 받고 나서, 맥은 두려움과 기대감이 교차되는 가운데
그 오두막으로 갑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미시가 살해될 때 흘렸던 핏자국이 마루 바닦에 흐릿하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그를 초대한 사람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배신감과 절망감과
분노로 치를 떨고 울고 불며 몸부림을 칩니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 속에 품어 두었던 분노를
한꺼번에 쏟아냅니다. 얼마 후, 맥은 제 풀에 지쳐서 피곤한 몸을 벽에 기댄채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져 듭니다.
그렇게 얼마를 잔 후, 맥은 헛걸음 한 것을 후회하며 오두막을 떠나려고 길을
나섭니다. 약 15미터쯤 언덕을 올라갔을 때, 황량했던 겨울 산 풍경이 갑자기
따뜻한 봄날의 풍경으로 바뀝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것처럼 온 세상이
순식간에 변화됩니다. 실은, 꿈을 꾼 것입니다. 꿈 속에서 그는 무엇에 홀린 듯이
오두막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맥은, 흑인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성부
하나님 ‘엘루시아’, 별로 잘 생겨 보이지 않는 유대 청년 ‘예수’, 그리고 신비로운
동양 여인으로 나타난 성령 ‘사라유’를 만납니다. 그는 2박 3일 동안 ‘셋이면서
하나요 하나이면서 셋인 하나님’과 함께 지냅니다. 실제로 맥은 몇 시간 동안
잠을 잔 것이고, 잠시 동안 아주 긴 꿈을 꾼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폴 영의 묘사는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매력적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혐오스럽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는 차차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이 만남과 대화를 통해 맥은 ‘거대한 슬픔’을 치유받습니다. 이 만남과 대화는
그렇게 아름답고 감미로운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통곡하고,
때로는 후회하며, 때로는 의심합니다. 그러는
중에, 맥은 그토록 보고싶던 딸 미시가 하나님의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았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자신에게 준 상처로 인해 괴로와하는 모습을 보고
용서하기도 합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맥은 ‘거대한 슬픔’이 사라지고 없어진 것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과 사귐을 통해 상처를 치유 받은 것입니다.
상처 치유에 대해 앞에서 말한 두 가지 방법은 어쩌면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어 상처를 대면하고 보듬어 안고 씨름하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치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믿을만한 사람을 만나 눈물 콧물 흘리며 자신의 상처를
내보인다 해서 자동적으로 치유되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임해야
합니다. 사라유 즉 성령의 그 부드러운 손길이 우리 마음을 만질 때, 비로소 상처는
아물기 시작합니다. 때로 치유는 순식간에 완성되기도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서서히 치유가 됩니다. 몸에 난 상처는 하루에 1밀리미터씩 아문다고 하는데,
마음의 상처도 그렇게 천천히 아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하기 시작하면,
점진적이지만 분명히 완치될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달고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치유를 경험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회심의 체험을 통해 상처를
치유받는 일도 일어납니다만, 늘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적 체험이 꼭 상처 치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
하고 목사니 장로니 하는 직분을 얻었다 해도, 여전히 상처를 그대로 품고 살 수
있습니다. 상처 치유를 위해 사라유와 함께 우리의 마음 밭을 지속적으로 갈고 닦지
않으면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게 됩니다.
얼마나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의 상처를 방치함으로 인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대물림 하고 있는지요! 그들로부터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믿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어서교회를 멀리합니다. 우리 자녀들 가운데 이런
입장에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일마다 교회 가라고 성화하는
부모가 말과 행실로 끊임없이 상처를 줍니다. 아이들이 볼 때, 부모가 믿는
신앙 혹은 부모가 믿는 하나님은 혐오스럽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신앙 생활의 초점이 숨겨진 상처를 치유하는 데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5.
오늘 읽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의 이야기는 ‘베드로의 치유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가야바의 법정에서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상처로
남았겠습니까? 목숨이 두려워 자신을 수제자로 여기고 아끼던 스승을 모른다고
부인했으니, 그것도 세 번이나 그랬으니, 그것이 그의 마음에 얼마나 큰 짐이
되었겠습니까? 그는 너무나 수치스러워 그 기억을 외면하고 회피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는 그 상처를 마음 속 깊이 눌러 놓고, 다시 갈릴리 호수로 돌아가 “
고기나 잡아 먹으며” 살려 했습니다(요 21:3).
갈릴리로 돌아가 어부의 삶으로 복귀하여 지내던 어느 날,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밤새도록 힘썼으나 물고기를 한마리도 잡지 못합니다. 다음 날 아침,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가 오셔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지라고 하십니다.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그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그분이 예수님인 것을 알아 차립니다. 그들은 잡은 생선을 모두
끌어 올리고, 뭍으로 올라와 예수께서 준비하신 아침 식사를 나눕니다.
식사를 마친 후, 예수님은 베드로를 따로 불러내십니다. 아마도, 해변을 따라 함께
걸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헬라어로 ‘아가파스 메?’(agapas me)입니다. 즉 “네가 아가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내가 너를 변함 없이 사랑하듯, 너도 나를
그렇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는 뜨끔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답합니다. 이 대답은 헬라어로 ‘필
로 세’(philo se)입니다. “제가 주님을 인간적인 사랑으로 밖에는 사랑할 수 없음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는 뜻입니다.
이 때 베드로의 마음에는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수치스러운 상처가 아프게
살아났을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예수님은 “내 어린 양떼를 먹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상 15절) 베드로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셨을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아무 말 없이 걸으시던 주님은 잠시 후 다시 물으십니다. 똑 같은 질문을 말입니다.
베드로는 처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상당히 불안해졌을 것입니다. 가야바
법정 바깥에서 통곡할 때 맛 보았던 수치심과 절망감의 쓴 맛이 입 안으로 가득 차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담담하게, 처음처럼, “내 양떼를 쳐라”고 당부
하십니다. (이상 16절)
베드로는 마음의 혼란을 추스르지 못하고 주춤 주춤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을
것입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시고 돌아서서, 베드로의 떨리는 눈을
응시하시고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헬라어로 ‘필레이스 메?’(philes me)입니다. “그래, 네가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다면, 인간적인 사랑으로라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완전히 무장해제되고, 과거의 상처에 완전히 압도되어 버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로 하여금 대면하고 싶지 않았던 그 상처를 대면하게 하려는 것이 예수님의
의도였음에 분명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것처럼, 예수님은 그에게
세 번 사랑을 확인하십니다. 베드로는 떨리는 마음으로 대답합니다. 17절에 있는
베드로의 대답은 이런 뜻입니다. “주님, 제가 주님이 저를 사랑하듯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아시지 않습니까? 저는 다만 인간적인 사랑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랬기에
저는 가야바 법정에서 비참하게 실패했습니다. 저는 그것밖에 되지 않는 인간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예수님은 베드로의 상처를 아셨습니다. 그 상처를 그대로 두면 그 상처의 무게에
짓눌려 살아갈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으셨고, 그로 하여금 상처를
대면하게 했고, 그 상처의 아픔을 내어 놓게 했으며, 그리고 그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베드로의 상처가 그 잔뿌리까지 모두 치유된
것은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맥에게 일어났던 것처럼 그의 마음 중심을 차지하고
있던, 납덩이 같은 그 무엇이 사라진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폴 영이 <오두막>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상처 치유의 세 요소는 그 뿌리를 성경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우리
자신을 그냥 내버려 두면, 결국 상처가 나를 만들게 됩니다. 상처가 나를 만들면,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 날카로운 칼날과 화살과 가시가 돋아나고, 그것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원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상처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만들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상처의 치유는 신앙의 핵심적인
과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처받은 성도 여러분, 우리의 상처를 가지고 주님 앞으로 나아갑시다.
그분 앞에서 우리의 실패를, 실수를, 수치를, 분노를, 아픔을, 후회를 다시
대면하십니다. 내 상처 이야기를 진실하고 진지하게 들어줄만한 사람을
찾으십시다. 그같은 거룩한 우정을 만들어 나가십시다. 그 사람과 함께 상처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을 함께 구하십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상처가 치유되면, 우리는 비로소 상처가 아니라 사랑에 의해 만들어질
것이며,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우리 자신과 이웃을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는 에스더 무이(Esther Mui)라는 분이쓴 “In Brokenness I Come to You”
(“상처 가운데 주님께 갑니다”)라는 찬양을 들려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상처 가운데 주님께 갑니다, 예수여.
무릎 꿇고 주님의 성령께 빕니다.
제 상한 마음을 둘 곳,
아무 데도 없습니다.
제 깨어진 인생을 고칠 분,
생명 주신 예수님 뿐.
주님, 원합니다. 제 인생을 주님 손에 놓기!
저의 짐을 주님 발 아래에 두기를!
제 인생을 받으소서.
제 마음을 받으소서.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옵니다, 예수여!
무릎 꿇고 주님의 성령께 빕니다.
저의 죄를 용서하소서.
제 소원은 그것 뿐,
주님께 제 인생을 드리는 것,
제 모든 것을, 예수여!
주님, 원합니다. 제 인생을 주님 손에 놓기를!
제 짐을 주님 발 아래 놓기를!
제 인생을 받으소서.
제 마음을 가지소서.
저는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 원합니다. 제 인생을 주님 손에 놓기를!
제 짐을 주님 발 아래 놓기를!
제 인생을 받으소서.
제 마음을 취하소서.
저는 당신의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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