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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김영봉 목사의 문화영성 프로젝트 '오두막' 4 (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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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가 세상을 바꾼다”
(Forgiveness Transforms the Universe)
--에베소서 4:25-32



1.

깨어진 세상에서 상처 입은 사람들과 함께 살다 보면, 상처를 주고 받는 일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아픕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실입니다. 이 현실 속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 뿐입니다. 그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정하고,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의 대안입니다. 또 하나의 대안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힘쓰는 것입니다. 몸을 도사리고 살아가는 편이 훨씬 편하고 쉬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 사이에 자신이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어려움과 힘듦을 견디는 것만이 나 자신과 이 세상에 희망을 끌어 올 수 있습니다.

나 자신과 이웃의 상처 치유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용서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품고 있던 ‘거대한 슬픔’은 사랑하는 딸 미시를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지만, 더 깊이 헤쳐 보면 그의 마음에 누적된 분노 때문입니다. 어릴 때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분노, 어린 딸을 해친 살인마에 대한 분노, 딸을 지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분노, 그리고 그 모든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둔 하나님에 대한 분노가 그의 마음 안에 복잡하게 얽혀 있었습니다. 그 분노를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용서 뿐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맥에게는 세 종류의 용서할 대상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하나님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둘째, 그는 자기 자신을 용서해야 했습니다. 셋째, 그는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와 자신의 딸을 해친 살인마를 용서해야 했습니다. 이 셋 중에 그 어느 것도 용서하기에 쉽지 않습니다. 아니, 용서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맥은 분노와 앙심을 그대로 품고 살아가는 것이 잃어버린 딸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며,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징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서할 생각도, 용서를 위한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꿈 속에서 보낸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은 그가 전혀 원치 않았던 용서를 갈망하게 만들었고, 가능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용서를 실천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우리 자신의 분노를 다시 돌아보고 용서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 볼 용기를 내도록 격려합니다. 저와 여러분에게도, 맥이 경험했던 세 종류의 용서를 꿈꾸고 기도하며 선택해야 할 때가 오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하나님에 대한 분노 때문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 때문에, 혹은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에 대한 분노 때문에 힘겨워 할 때가 옵니다. 그 각각의 경우에서 어떻게 용서를 꿈꾸고 실천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주교의 말대로, “용서 없이는 희망도 없습니다”(There is no hope without forgiveness). 그래서 오늘은 세 종류의 용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2.

첫째, 하나님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이 말씀에 놀라실 분들이 계실 지 모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아야지,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한다는 말이 어떻게 성립하느냐?”고 묻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용서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일을 당신의 절대 진리에 따라 절대 사랑으로 행하시기 때문에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용서할 이유는 있습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분노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도 의아해 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에게 분노한다는 것이 말이나 됩니까? 혹시 그런 감정이 든다면 그것을 없애 버리려고 노력해야지요. 어떻게 감히 하나님에게 화를 냅니까?”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대개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는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교리적인 신앙은 비정한 악의 현실 앞에서 무참하게 무너져 버립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섭섭함이나 분노가 스믈스믈 올라오는 것을 느낍니다. 맥과 같은 입장에 처하면, 그같은 감정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자연스러운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성경을 잠시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당하여 하나님께 분노를 퍼붓는 장면이 적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처사에 얼마나 화가 났던지,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렘 20:7)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습니다. 요나서를, 시편을, 그리고 욥기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멱살이라도 잡을 듯이 대들며 화를 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분노를 그냥 참고 지켜 보십니다. 때가 이르면 당신의 뜻을 드러내시지만, 그 전까지는 잠자코 지켜 보십니다.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들이 그러시듯 하나님은 분노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기도 하십니다. 당신을 향한 분노가 얼토당토 않은데도 하나님은 참으십니다. 분노가 잦아들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이르면 그 모습이 더 두드러집니다. 그 유명한 ‘탕자의 비유’(눅 15:11-32)에서 아버지는 분노한 큰 아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처사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하나님께 분노한 사람에게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렇게 하여 너의 분노가 풀린다면, 마음껏 화를 내거라. 나에게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은 안전하다. 그러니 걱정 말고 네 분노를 쏟아 놓아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섭섭하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울 때,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믿음이 없었나?”라면서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감정을 받아들이고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감정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십시오. 기도로써 혹은 눈물로써 쏟아 내시기 바랍니다. 소설 <오두막>의 맥처럼, 그리고 욥기의 주인공처럼, 하나님께 대해 정직한 분노를 쏟아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실은, 그것은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가지면서 자신의 분노를 스스로 내려 놓는 것입니다.

만일 그 분노를 외면하거나 억압하거나 부인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죽어 버립니다. 기도가 막히고, 찬송이 껍데기가 됩니다. 예배를 드리지만, 형식일 뿐입니다. 맥이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체험을 하기 전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던 감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는 아내와 함께 주일마다 교회에 나갔습니다. 그는 여전히 식사 때마다 기도하고,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 안에 그의 마음은 없었습니다. 분노가 하나님과 맥 사이를 가로박고 있었던 것입니다. 인정받지 못한 분노,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분노, 그리고 해소되지 않은 분노는 관계를 깨뜨려 버립니다.

3.

둘째, 우리 자신에 대한 용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때때로,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우리 자신을 정죄하고, 심지어는 저주하기까지 합니다. 하나님도 뭐라 하지 않으시고, 이 세상 그 누구도 탓하지 않는데, 혼자서 스스로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벌을 주는 것입니다.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제게 가장 짠한 느낌을 준 사람이 맥의 넷째 딸 케이트입니다. 미시가 실종된 후, 케이트는 스스로 껍질을 만들고 그 안에 숨어 버립니다. 딸의 갑작스러운 변화에 대해 맥과 그 아내 낸은 속을 태웁니다. 하지만 케이트는 그 어떤 노력에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맥이, 아내와 함께 친척 집에 간 케이트가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묻습니다. “케이트는 어때?” 그러자 낸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맥, 나도 좀 알고 싶어. 아무리 말을 걸어도 그 애는 바위처럼 단단해서 내 말을 전혀 듣지 않아. 식구들이랑 같이 있을 때면 껍데기를 벗고 나오는 것 같다가도 어느새 다시 쏙 들어가고 말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 애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찾게 해 달라고 파파에게 계속 기도했지만…… 내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것 같아. (30쪽)

꿈 속에서 경험한 2박 3일 동안의 오두막 대화 중에 하나님은 맥에게 그 이유를 알려 주십니다. 케이트는 자기 때문에 동생 미시가 유괴되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에게 벌을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빠와 카누를 타고 놀다가 케이트가 아빠를 향해 소리를 쳤습니다. 맥은 손을 흔들어 응답했고, 케이트도 아빠에게 응답하려고 노를 치켜 들었습니다. 그 순간 카누가 뒤집혔습니다. 맥은 물에 빠진 두 아이를 건지기 위해 물에 뛰어 들었고, 그 사이에 미시가 납치되었습니다. 케이트로서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중에 현실로 돌아온 맥은 케이트를 따로 불러 미시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눕니다. 케이트에게 맥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을 건넵니다. “케이트, 그건 네 잘못이 아니란다.” 케이트는 깜짝 놀라 긴장을 합니다. 맥이 다시 말합니다. “딸아, 그 일에 대해 아무도 너를 비난하지 않는단다.” 그러자 케이트가 눈물을 흘리며 대답합니다. “언제나 내 잘못이라고 생각했는걸요. 아빠와 엄마가 날 원망한다고 생각했고요. 나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맥은 딸을 위로하며 이렇게 응답합니다. “케이트, 그 일을 의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거고 우리는 그 사건을 버텨내고 살아가는 법을 배울 거야. 우리 모두 함께. 알겠지?” (이상 401-2쪽, p. 246)

케이트처럼, 일어난 어떤 사건을 두고 스스로를 징계하고 그 징벌을 매일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실은 맥도 어느 정도까지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미시를 지키지 못한 것이 자신의 책임이라고 느껴졌고, 그래서 스스로를 징계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그 죄책감에서 벗어났고, 케이트의 마음에서도 그 짐을 벗겨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저자 폴 영은 독자들에게 아주 분명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스스로를 용서하라고 말입니다.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스스로를 징계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몇 년 전, 우리 교회 교우 중 한 분이 아침에 다른 교우와 테니스를 치다가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로 인해, 함께 테니스를 친 교우는 심한 죄책감에 빠지게 됩니다. 그 전 날 밤, 자신이 전화를 하여 테니스를 치자고 불러냈기 때문입니다. 그 교우님은 “내가 만일 불러내지 않았다면 그 사고를 피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를 죽게 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에 시달립니다. 그분은 심한 죄책감에 짓눌려 장례식을 치뤘고, 장례식 후에도 그 무거운 마음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상을 떠난 그 친구의 오랜 친구와 우연한 자리에서 동석하게 됩니다. 대화를 나누는 중에 세상을 떠난 그 친구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 대화는 그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에 있는 죄책감을 고백하는 데까지 갑니다. 그 고백을 듣더니 그분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니, 당신이 그렇게 생각하면, 나 같은 사람은 어쩌란 말입니까? 저는 의사인데, 내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 내 잘못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해야 합니까?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 순간, 그 교우님은 세상 떠난 그 친구가 그 의사 친구를 보내어 자신을 위로해 준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세상 떠난 그 친구는 늘 그렇게 친구들을 위로하고 품어 안아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죄책감이 한 순간에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 때로부터 서서히 스스로를 용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와 같은 마음의 짐을 가지고 사시는 분이 계신지요? 나만 아는 나 자신의 잘못에 대해 스스로 나를 징벌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다 설명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내가 적극적인 의도를 가지고 행한 범죄가 아니라면, 자신을 용서하고 풀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케이트처럼 스스로 감옥을 만들어 세우고 그 안에 자신을 감금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그 누구도 바라는 일이 아닙니다.

4.

셋째,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생각해 보십시다. 상처는 아픔을 느끼게 하고, 그 아픔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분노가 일어납니다. 그 분노가 쌓이면 마치 몸에 난 종기처럼 응어리가 됩니다. 혹은 매우 깊은 상처를 받으면 풀기 어려운 분노의 응어리가 생깁니다. 그 응어리가 마음 안에 자리잡고 있으면 영적인 체증이 생깁니다. 이것이 마음과 영혼을 짓누릅니다. 뿐만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여러 가지의 질환을 만들어 냅니다. 가슴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무 이유 없이 열이 오르며,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있는 것처럼 느낍니다. 엑스레이를 찍고, CT 촬영을 해도 아무 것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야 하는 이 세상에서 우리는 이 분노의 감정을 지혜롭게 해소하는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지 않도록 마음과 상황을 잘 다스려야 하고, 분노가 일어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방식으로 그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도 “모든 악독과 격정과 분노와 소란과 욕설은 모든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31절)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에 뭉쳐진 응어리가 좀처럼 풀리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 상처를 입힌 사람으로부터 사과를 받고 그 사람을 진실로 용서해야만 풀어집니다.

그런데 때로 용서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그런 줄도 모르고 있을 때, 혹은 나에게 준 상처에 대해 사과할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일 때, 분노는 더욱 커지고 용서는 더욱 어려워집니다.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 사과를 함에도 불구하고 그 사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나는 이렇게 상처 때문에 아픈데, 너는 사과하여 짐을 벗으려고 하느냐?”는 생각에 속이 뒤틀립니다. 때로는,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용서할 수 없다고 느껴집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이 그런 상처를 입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딸을 납치하여 성폭행하고 살해한 범인을 생각할 때마다 분노에 치를 떨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서는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마지막 대목에서 맥은 하나님에게 이렇게 토로합니다.

파파, 나의 미시를 죽인 그 더러운 놈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요? 오늘 그놈이 여기에 있다면 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겠어요. 옳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내가 당한 만큼 그놈에게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어요. 정의를 이루지 못할 바엔 복수라도 하고 싶어요. (368쪽)

때로, 용서는 어렵습니다. 불가능해 보입니다. 용서하기가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기가 억울하게 느껴지고, 부당하게 느껴집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만큼, 아니 그 이상 당하는 꼴을 보고 싶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칠 수 없을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법의 심판에 부친다 해도, 내 마음에 받은 상처는 ‘내가’ 갚아주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 혼자 만큼은 냉엄한 심판대에서 내려 오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이 상처 받았을 때의 심정입니다.

하지만, 나의 앙심과 증오와 원한을 통해 내가 벌하고 있는 사람은 정작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내가 나의 원한과 증오심으로써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은 나 자신밖에 없음을 아십니까? 용서하는 것이 때로 죽기보다 힘들지만, 용서하지 않고 사는 것이 그보더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용서함으로써 자유함을 얻는 것은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소설 <오두막>에서 파파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용서란 너를 산 채로 먹어 없애는 힘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야. 또한 완전히 터놓고 사랑할 수 있는 너의 능력과 기쁨을 파괴하는 것으로부터 너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이지.”(370쪽, p. 227)

5.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용서를 기대하신다는 사실은 분노하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분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지으실 때 부여하신 건강한 감정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자주 분노하셨습니다. 십계명을 주시면서 하나님은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다”(출 20:5)라고 자신을 소개하십니다.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속 좁은 투기쟁이’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은 ‘질투’라는 뜻의 히브리어가 하나님의 감정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냉혹한 관리자가 아니라, 감동하고 기뻐하며 실망하고 후회하며 분노하는, 인격적 존재라는 뜻입니다.

하나님도, 인간도 분노한다는 점에서 동일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분노는 언제나 정당하고, 바르게 표출되지만, 인간의 분노는 자주 근거 없이 폭발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표출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분노를 느끼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분노를 잘 못 표출하면 ‘죄’가 됩니다. 분노를 마음 안에 쌓아놓고 있으면 ‘병’이 됩니다. 그래서 분노를 잘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쌓인 분노가 있다면, 결국 용서에 이르기를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서는 “화를 내더라도 죄를 짓는 데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도록 노여움을 품고 있지 마십시오. 악마에게 틈을 주지 마십시오”(엡 4:26-27)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두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익은 용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용서는 서두를 것이 아닙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들볶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도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정 없는 목석 인간이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용서가 우리에게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님을 아십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 하여, 자신을 책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만, 내 마음의 분노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내지 않도록 잘 관리하면서 그 분노를 품어 익히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품에 안고 그 해소를 열망하면 머지 않아 때가 이를 것입니다. 그 때, 용서를 선택하고 결행하면 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했듯이, 용서는 사건(event)이기보다는 과정(process)입니다. 용서는 한 순간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완성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용서를 열망하고 있으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분노가 익습니다. 분노가 잘 익었을 때 용서를 선택하면, 그 응어리는 녹기 시작합니다. 때로는 금새 녹아 버리고, 때로는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용서는 이루어집니다.

6.

성경은 용서를 자주 명령형으로 표현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서로 친절히 대하며, 불쌍히 여기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서로 용서하십시오”(32절). 용서하는 것이 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 명령이 잔인하다고 느낄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로 우리 인간의 본성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명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예수는 인간을 과대평가했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예수께서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 인간의 죄성과 나약성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기 어려워 하는 우리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십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분은 우리가 그 수준에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하고, 그 힘으로써 인간의 한계를 넘어, 불가능해 보이는 용서를 행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용서를 명령하셨습니다. 억지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진실한 용서를 꿈꾸며,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쓰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후반부에서 성령의 역할을 맡은 사라유가 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용서할 때마다 이 지구는 변해요. 당신이 팔을 뻗어서 누군가의 마음이나 삶을 어루만질 때마다 이 세계는 변해요. 눈에 드러나건 아니건 모든 친절과 봉사를 통해 내 목적은 이루어지고 어느 것도 예전 같지 않게 되죠.”(386쪽, p. 237) 진실로 그렇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나를 변화시키고, 내 이웃을 변화시키며, 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오늘 본문에 아주 인상 깊은 구절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30절)라는 구절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못하고 쓴 물을 뿜어내고 있는 동안,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 하십니다. 우리가 나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고 징벌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슬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분노를 쏟아 놓을 때,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와 함께 아파하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그렇게 우리와 함께 씨름하며 아파하면서 치유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마침내, 우리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용서를 선택할 때, 하나님의 성령은 환히 웃으십니다. 그리고 우리도 비로소 티 없이 맑은 웃음을 웃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아니 온 우주가 변하는 기적을 보게 됩니다. 이 기적을 맛보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은 용서의 길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초청에 여러분은 어떻게 응답하시겠습니까? 이 시간, 눈을 감고 묵상하는 가운데 대답해 보십시다.

“예, 제가 오늘 용서를 선택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하시겠습니까? 감사합니다. 먼저, 용서할 그 사람을 향해 마음으로 선언하십시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내가 당신을 용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 자녀의 선언에는 힘이 있다”고 말입니다(374쪽, p. 229) 그러니 용서를 선택하고 선언하십시오. 그렇게 하여 마음 안에 용서가 영글게 하십시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이 용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으면, 용기를 내어 만나십시오. 그 사람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우선 여러분의 마음에서 매듭을 푸시기 바랍니다.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자신이 상처를 준 사실 조차 알지 못하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저는 아직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 지금 당장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하시겠습니까?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마음 이해하실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안에 있는 분노를 품어 익히시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용서를 열망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하십시오. 어느 날, 소나기같은 은혜가, 혹은 이슬비같은 은혜가 내릴 것입니다.

혹시, 오래도록 자기 자신을 정죄하고 징벌해 온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시간, “네가 아니다. 네 책임이 아니다”라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동안 여러분의 목을 조르고 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여러분 자신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하나님께 섭섭함이나 분노를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그렇다면, 오늘 여러분에게 들려주시는 성령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괜찮다. 내게 화를 내도 괜찮다. 그러니 그 마음을 내게 쏟아 놓아라”라는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정직하게 분노하고 하나님을 대면하여 마침내 그분을 새롭게 만나는 은총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이제 잠시 각자의 상황에 맞게 용서를 위한 기도의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저희를 용서하신 주님,
저희가 받은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상처를 당하여
정직하게 분노하게 하시며,
지혜롭게 분노를 다스리게 하시고,
때를 따라 용서를 선택하게 하소서.
용서로써 나를 바꾸고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바꾸며
세상을 바꾸고
주님을 웃게하도록,
주님,
저희를 도우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