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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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엔 배후가 있다”
(There Is Someone Behind Evil)
-- 요한복음 8:39-47
1.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 소설로서 <오두막>은 꽤 성공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복잡하고 심오한 문제를 한 편의 소설로써 말끔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이 소설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말하는 이유는 독자들로 하여금 악의 문제를 붙들고 진지하게 씨름하도록 만들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악의 문제에 관한 여러 가지의 주제들을 새로운 시각에서 이해하도록 도와 주었다는 점에서도 성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주 중대한 결함이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다루면서, 인간의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제가 여기서 ‘영적 세력’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흔히 사탄, 마귀(devil), 악령(evil spirit), 귀신(demon) 등의 이름으로 부르는 존재들을 가리킵니다. 적어도 이 소설만 두고 말하자면, 윌리엄 폴 영의 세계관에는 악한 영의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미시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에 대해 지면을 할애하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 말할 기회가 없었는지 모릅니다. 혹은 일부러 무시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큰 결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맥과 삼위의 하나님(Triune God) 사이의 대화 중에, 악의 현실에 있어서의 사탄의 역할에 대한 언급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 지점에서 용어에 대한 설명을 잠시 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성경에서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에 대해 여러 가지의 용어들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리가 좀 필요합니다. 가장 잘 알려진 말이 ‘사탄’(Satan)입니다. 이것은 아람어에서 나온 말로서, ‘반대자’(adversary)라는 뜻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타락한 영적 존재들의 우두머리를 가리킵니다. 사탄과 동의어로 쓰이는 헬라말이 ‘디아볼로스’로서 우리 말로는 ‘악마’로 혹은 ‘마귀’로, 영어로는 주로 devil로 번역합니다. 사탄 혹은 악마의 지시를 받아 악한 일을 일삼는 영적 존재들을 가리켜 ‘귀신’(demons) 혹은 ‘악령’(evil spirits)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본래 이 세상을 선하게, 의롭게 그리고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분은 영적 세계를 창조하셨고 또한 물리적인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영적 세계에는 천사를 두셨고, 물적 세계에는 인간을 두셨습니다. 악은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그런데 천사들 중 일부가 하나님께 반역을 했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그 천사를 루시퍼(Lucifer)라고 불러 왔습니다. 성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지는 않지만, 여러 곳에서 암시되고 있다고 봅니다. 루시퍼는 천사장 미가엘과 함께 영적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던 존재인데, 자유 의지(free will)를 오용하여 하나님께 반역하였고, 추종자들과 함께 하늘에서 쫓겨났습니다. 우두머리 루시퍼는 사탄이 되고, 그의 추종자들은 악한 영이 되어, 이 땅에서 인간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하나님을 반역하도록 음모를 꾸미고 그 음모를 실행하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천사’(angels)에 대해서도 잠시 설명을 할 필요가 있다 싶습니다. 요즈음 기독교인들 사이에 천사를 하나의 신화적 존재로 취급하여 아예 무시하고 사는 경향이 보입니다. 아마도, 천사라는 말이 ‘흰 옷을 입고, 두 날개를 단, 사람같이 생긴 존재’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고 나면 그런 동화적 그림을 더 이상 믿지 않습니다. 동화의 세계를 떠나면서 천사에 대한 믿음까지도 함께 버리는 겁니다. 하지만 ‘천사’라는 말의 근본적인 의미는 ‘메신저’(messenger)입니다. 그 외모가 어떤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우리는 영적인 세계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도록 창조된 영적 존재가 있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증언이며, 진정성 있는 영적 체험을 통해 경험한 사실입니다.
2.
여기서 잠시 ‘자유 의지’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사와 인간을 창조하시고는 그들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에게 순종할지 거역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천사와 인간이 당신에게 거역할지도 모를 위험을 감수하셨다는 뜻입니다. 악은 대부분 천사와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가 오용됨으로써 생긴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신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을 거역할만한 여지를 주지 않았더라면 악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말은 그럴듯해 보입니다만, 이 질문은 자유 의지의 성격을 제대로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자유 의지는 진정한 관계를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만일 내가 누구와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다면, 그 사람이 스스로 나의 친구가 되기를 선택할 자유가 전제되어야만 합니다.
제임스 에머리 화이트(James Emery White)는 그의 책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 이해하기>(Wrestling With God: Loving the God We Don’t Understand)에서 덴마크 철학자 죄렌 키엘케골(Soren Kierkegaard)이 만든 우화 하나를 소개합니다. 어느 제국의 왕이 비천한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그 여인을 사랑하는 것만큼 그 여인도 자신을 사랑하기 바랬습니다. 왕은 군사들을 보내어 그 여인을 강제로 데려올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굴종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왕은 값비싼 물건을 보내어 그 여인의 마음을 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랑을 얻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그 왕은 보통 사내로 변장을 하고 그 여인의 초라한 움막으로 갑니다. 그것만이 그 여인의 진정한 사랑을 얻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왕은 그 여인으로부터 거절당할 위험을 무릎쓰고 진정한 사랑을 추구했습니다.
천사와 인간을 지으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 속에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로봇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노예들에게 둘러싸여 살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천사와 인간을 위압하여 군림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진정한 관계를 선택하셨습니다. 자유 의지에 근거한 관계는 위태롭습니다. 거부하고 거부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같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는 진정한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자유 의지에 근거한 관계는 또한 힙겹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이 움직일 때까지 정성을 들여 가며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관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을 주는 것이기에, 위태롭고 힘겹지만 그것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셨을 때, 그것을 오용할지를 미리 아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전지(omniscienct)하시다면, 그것을 예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소설 <오두막>에 나오는 ‘새의 비유’를 적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천사와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부여하시면서 하나님은 스스로 전지의 능력을 제한하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미래를 아시지만, 알기를 원치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되니까 말입니다.
3.
본래 천사로 지어졌으나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악의 배후가 된 사탄은 그 본성이 ‘속이는 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속아 진리를 거부하는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다. 또 그는 진리 편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 속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는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이기 때문이다. (요 8:44).
사탄은 ‘거짓의 아비’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영적 세계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 진실을 호도하는 것이 사탄의 주된 전략입니다. 이 점에 대해 혼돈하지 말아야 합니다. 가끔 보게 되는 ‘귀신들림’의 현상은 사탄의 주된 전략이 아닙니다. 때때로, 모든 정신 질환을 귀신 들린 것으로 오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정신 질환 혹은 심리적인 질환 가운데 아주 적은 부분만이 귀신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이며 베스트셀러 저자인 스캇 펙(M. Scott Peck)은 단순한 정신 질환이 아니라 귀신에 사로잡힌 것으로 보이는 두 환자를 관찰한 결과,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습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통하여 나는 귀신들림이란 우연한 사고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러니까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길거리를 걸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귀신이 뛰어나와 그의 속으로 쏙 들어갈 리는 만무하다는 것이다. 귀신들림이란 당사자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반복적으로 자신의 영혼을 파는 과정을 통하여 나타나는 하나의 점진적인 과정이라고 하겠다. (<거짓의 사람들>, 366쪽).
그러므로 귀신들림의 현상을 두고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물론, 자신의 영혼을 사탄에게 넘겨 주어 귀신들림의 상태에 빠지는 것은 크나 큰 불행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사탄에게 넘겨 주지 않으면 그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두려워할 일은 사탄에게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스스로 ‘거짓의 아비’에게 찾아들어가 ‘거짓의 자식’이 되기를 선택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 속임수는 너무나도 교묘해서 깊은 영적 차원에 있는 사람조차 한 순간에 넘어뜨릴 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대부분은 사탄이 인간을 속이고 유혹하여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범죄자들이 가끔 그렇게 고백합니다. “제 속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를 유혹하는 그 소리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같은 고백은 자신의 책임을 피하려는 거짓인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 그같은 심리 현상이 일어나곤 합니다. 사탄의 속임수와 교란 전술에 넘어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악을 행한 사람의 책임이 면제되거나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이란 내 속에 그것을 탐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악행에 대해 악령의 책임이 몇 %이고 범죄자의 책임이 몇 %인지를 정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 현실 배후에는 악한 영적인 힘이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 속임수와 유혹에 넘어간 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입니다. 죄와 악을 탐하는 마음이 그 속임수와 유혹을 핑게로 삼은 것입니다.
앞에서 자유 의지에 대한 말씀을 잠깐 했습니다. 자유 의지에 대해 사람들이 자주 제기하는 질문 중에 이런 것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용의 위험을 감수하고 자유 의지를 주셨다면, 그것을 오용하는 것에 대해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선택권을 주셨다면, 어느 편을 선택하든지 내버려 두어야지, 잘 못 선택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어 심판한다니, 말이 됩니까?’ 얼른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립니다. 하지만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각각의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를 충분히 알게 해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욕심에 따라 악의 길을 선택했다면, 그 사람에게 어떤 변명이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4.
하지만 사탄의 공격에 대해 지나치게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사탄의 세력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타격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실을 하나의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자 사람들이 그분을 헐뜯습니다. 그분이 귀신의 우두머리인 바엘세불 즉 사탄의 힘을 이용하여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비난에 대해 예수님은, 당신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이라고 대답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힘센 사람이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집을 지키고 있는 동안에는, 그의 소유는 안전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이 달려들어서 그를 이기면, 그가 의지하는 무장을 모두 해제시키고, 자기가 노략한 것을 나누어 준다. (눅 11:21-22)
여기서 말하는 ‘힘센 사람’은 사탄을 가리킵니다. ‘그보다 더 힘센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은 당신께서 이미 사탄의 진영을 공격하여 그 우두머리를 결박해 두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귀신은 결코 두려워할 존재가 아닙니다. 자신의 영혼을 귀신에게 스스로 양도하지 않는 한 귀신들림은 일어나지 않으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진리를 사모하는 사람들은 결코 사탄에게 속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면서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이 귀신을 생각하면서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마치 사람이 지나가는 뱀을 기겁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저의 이야기입니다. 어릴 적에 시골에서 살아서인지 뱀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이 제게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산책하는 길에 작은 실뱀이 제 앞으로 휙 지나갔습니다. 뱀이 저를 보고 놀라서 도망가는데, 저는 순간 뒷덜미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그럴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제 무의식에 숨겨진 어떤 문제 때문에 그렇게 반응하는 것입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사탄과 악령에 대해 병균을 대하듯 대하면 됩니다. 과학을 하시는 분에게 문의해 보니, 병균이나 세균은 건강한 균이 변질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건강하게 살려면, 병균이나 세균의 존재를 늘 의식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강박관념(neurosis)에 걸린 사람처럼 병균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히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병균과 싸우는 것도 아니요, 병균을 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병균에 감염되거나 병균의 세력에 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건강을 키우고 면역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때로, 병균의 세력에 압도되면 병균과 싸우며 건강을 회복시키도록 힘쓰면 됩니다.
사탄과 악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존재와 활동 양상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크게 속아 넘어가는 일입니다. 하지만 사탄과 악령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간다면, ‘영적인 강박관념’(spiritual neurosis)에 걸린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표는 사탄과 악령에 대항해 싸우는 것도 아니요, 사탄과 악령을 피해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표는 사탄에 속임수를 조심해 가면서 영적 건강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늘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을 사탄에게 팔아 넘기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오히려 우리의 영혼을 성령의 손에 맡기도록 매일 힘쓰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넘겨지면 우리의 영혼은 노예가 되고 파멸의 길을 가지만, 성령의 손에 맡겨지면 우리의 영혼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게 되기 때문입니다.
선교신학자 폴 히버트(Paul Hiebert)는 영적인 실재(spiritual realities)에 대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바른 태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시선의 초점을 오직 그리스도께 맞추어야 한다. 그 초점에서 가까운 주변에 두어야 할 것은 천사들이다. 그 바깥 주변에 두어야 할 것이 악의 세력이다. 우리에게는 악을 이길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이 있으므로, 우리의 메시지는 승리, 희망, 기쁨, 자유의 소식이어야 한다”(<21세기 선교와 세계관의 변화>, 581쪽. Transforming Worldviews).
5.
혹시, 여러분 중에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전설이나 동화처럼 들리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가까운 과거에 과학자들은 이 세계를 기계와 같은 것으로 인식했습니다. 오직 실험실에서 측정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세계를 부정했고, 하나님을 거부했고, 천사와 사탄의 존재를 부정했습니다. 그렇게 해도 이 세상은 얼마든지 설명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직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이지만, 이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회의를 품고, 다시금 영적인 세계와 영적인 존재들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두뇌의 명석함이 떨어지거나 학문이 짧아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정신과 온전한 지성을 가지고도 영적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사탄과 악령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사탄의 가장 큰 속임수에 넘어간 것일지도 모릅니다. 스캇 펙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겠습니다. “어쩌면 사탄의 거짓말 중 백미는 인간의 마음에 자신의 현존성을 감쪽같이 숨겨 버리는 일이다. 사탄은 그 점에서 전폭적인 성공을 거두었다”(401쪽). 이 성공으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속아 넘어가는 줄도 알지 못한 채 속아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과제는 악한 영적 세력이 활동하고 있음을 알고 삼위의 하나님과 함께 사귀며 매일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거룩한 관계 안에서 살아갈 때, 우리는 악에로의 유혹과 속임수를 벗어나 살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악에 대해서도 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악의 현실 앞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악의 본영이 이미 파괴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 있는 사람을 사탄이 어찌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이며, 또한 온 우주를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선하게 바로잡으실 날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악의 배후에 있는 영적 세력을 안다면, 그리고 그로 인해 수 많은 사람들이 그런 줄도 모르면서 ‘거짓의 자식들’로 살아가고 있음을 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데 더 열심을 낼 것입니다. ‘거짓의 자식들’을 ‘진리의 자녀들’로 변화시키는 것만이 이 세상의 악의 문제를 진정으로 해결하는 길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크랩(Crabb) 가족이 만든 ‘거룩한 땅’(Holy Ground)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면서 말씀을 마칩니다.
거룩한 땅(Holy Ground)
We are standing on holy ground/And I know that there are angels/All around/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어요/천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나는 알지요/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찬양합시다/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까요/그 거룩한 땅에
See in His presence there is joy/It's beyond all measure/And that His feet, a peace of mind/It can still be found/He said if you have a need/My child I'll always have for you/An answer/All you have to do is reach out/And claim it /For child, you're standing right here/On holy ground
그분의 임재 안에 기쁨이 있음을 보세요/측량할 수 없는/그분의 발치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마음의 평화를/그분이 말씀하셨지요/너희에게 필요한 것/내 자녀야, 나는 너희를 위해 늘 가지고 있다/대답을/네가 할 일은 단지 손을 뻗어/그것을 가지는 것일 뿐/왜냐하면 자녀야, 너는 바로 지금 이곳/거룩한 땅에 서 있기 때문이지
We are standing on holy ground/And I know that there are angels/All around/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우리는 거룩한 땅에 서 있어요/천사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음을/나는 알지요/그러니 지금 예수님을 찬양합시다/우리가 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까요/그 거룩한 땅에
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Standing in His presence/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그러니 지금 함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 거룩한 땅에
So let us praise Jesus now/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For we are standing in His presence/On holy ground
그러니 이제 함께 예수님을 찬양합시다/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 안에 서 있으니/그분의 임재안에 서 있으니/그 거룩한 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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