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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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은 없다”
(Independence Is Not an Option)
--갈라디아서 2:20
1.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많은 의문을 불러 일으킨 것 중 하나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일 것입니다. 이 나무와 열매에 대해 의문은 많기도 하고, 그 의문의 대부분은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왜 선악과를 만들어 놓았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게 하신 분이 분명하게 말씀하지 않는 한 우리로서는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인간인 우리가 추측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의문을 제기하고 해답을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좋지만, 때로는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하는 질문도 있음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최고의 사상가로 인정받는 어거스틴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어려운 질문으로 교사를 괴롭히기를 즐기는 청년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가 어거스틴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셨을까요?” 어거스틴은 그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 봅니다. 그에게서는 진지한 구도심이 보이지 않고, 다만 어려운 질문으로써 상대방을 괴롭히고 자신의 명석함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너 같은 놈을 위해서 지옥을 만드셨네.”
믿고 살아가는 데 있어서 대답될 수 없는 영역이 있으며, 그것에 대해서는 신비로 놓아 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애당초 선악과를 왜 만들어 놓으셨느냐는 질문이 그렇습니다. 그것은 우리로서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입니다. 따라서 이같은 질문은 신비에 속한 것으로 두고, 우리는 그 대신 그 선악과의 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물어야 할 것입니다.
철이 들고 나서 선악과에 대해 제가 가졌던 질문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믿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선과 악을 분별하는 것인데, 왜 하나님은 선과 악을 분별하는 지식을 금지하셨을까?” 기독교인의 주요 관심사가 악을 거부하고 선을 행하는 것에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의도가 제겐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 질문이 완전히 풀린 것은 아닙니다만, 인간의 본성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씩 풀려가는 기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어기고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습니다. 뱀은 사탄을 상징합니다. 인간의 세계에서 타락이 일어나기 전에 영적 세계에서 먼저 타락이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자유 의지를 오용하여 하나님에게 등을 돌린 사탄은 인간을 악의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 유혹을 합니다. 하와에게도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습니다. 사탄은 그 욕심을 부추긴 것이고, 하와는 사탄의 유혹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명분이나 핑게가 주어지면 숨겨졌던 욕심을 채우는 데 발빠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어찌 되었습니까? 그들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나서 첫 번째 일어난 변화가 무엇입니까?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이 여기고 무화과나무의 잎을 따서 몸의 일부를 가렸습니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니 그 열매를 따먹기 전에는 달리 느꼈습니다.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선악과를 따먹고 나서 벌거벗은 것을 악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심각한 질문이 제기됩니다. 과연,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선과 악을 알게 되었습니까? 사랑하는 남녀가 서로 벌거벗은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는 것을 과연 악으로 보았다면, 그들의 판단이 옳습니까? 사람마다 보는 입장이 다를 수 있겠지만, 그것을 악이라고 단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제가 ‘자연주의’(naturism) 혹은 ‘나체주의’(nudism)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맨 처음 악으로 여긴 것이 진실로 악의 범주에 드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2.
이상의 추론을 통해서 어느 정도 분명해지는 사실이 있습니다. 선악과의 이야기는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암시합니다. 창세기 3장 5절에서 사탄이 하와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너희가 그 나무 열매를 먹으면, 너희의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사탄이 제대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선과 악을 아는 것은 곧 하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선을 선택하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독립적인 인간, 자립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선과 악을 제대로 분별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이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에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들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택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선악을 분별하며 사는 편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고 난 다음, 그들의 눈이 밝아지기는 했는데, 불행하게도 완전한 시력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선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자만했지만, 실은 이로써 선과 악에 대한 혼동의 역사가 시작된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 보시기 바랍니다. 선을 악으로 오인하여 마음 놓고 악을 범한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저 자신과 제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맹목적인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역사 드라마를 보거나 역사의 현장을 여행할 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권력자들의 선전에 속아 악을 선으로 착각하고 그 의미 없는 전쟁에 생명을 바친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교의 역사를 살펴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독교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종교인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그것을 신의 뜻으로 미화하고 있습니까? 지금도 그같은 일은 계속되고 있고, 그래서 무신론 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각자의 삶의 궤적을 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을 만나 “아, 이건 재앙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중에 오히려 축복으로 드러난 경우가 있지 않았습니까? 반면, 좋은 일이 생겼다고 신이 났었는데, 나중에 보니 악이었습니다. 때로는, 잘 하고 싶은데, 선을 행하고 싶은데,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때로는, 의식에서는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믿었는데, 실은 악을 도모하고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 자신에 대해 말하자면, 선에 대한 저의 믿음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점점 자신이 없어집니다.
목사가 교인들로부터 제일 많이 받는 질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목사 자신도 이 질문이 가장 어렵습니다. 기독교 서점에 가 보면, 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 적지 않습니다. 이 모든 사실이 반증하는 진실은 무엇입니까? 인간에게는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를 판단하려면 그림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에게는 그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니, 보여 주어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인간인 우리는 장기판에 올려진 말과 같습니다. 장기판에 올려진 말에게는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는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만, 때로 그 사람도 자신의 승부에 집착하면 전체 그림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때 일을 그르치게 됩니다. 장기판 전체를 제일 잘 볼 수 있는 사람이 훈수꾼입니다. 그 사람은 게임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전체를 보아야만 어떤 행동이 선인지 악인지 알 수 있습니다. 장기판에 선 말로서는 그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과 악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합니다. 첫째, 영적 세계와 물적 세계 전체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현재만이 아니라 먼 미래까지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셋째, 자신의 이해 관계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세 가지 조건을 하나도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영적 세계에는 눈이 어둡고, 물질 세계에 대해서도 지극히 한정된 부분만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미래는 고사하고 현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연루된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집착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선이라고 판단한 것이 때로 악으로 판명되고, 악이라고 생각한 것이 때로 선으로 판명되는 것입니다. 때로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것에 붙들려 고민하기도 합니다.
3.
소설 <오두막>에 보면, 맥이 사라유와 함께 대화하는 중에 선악과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맥이 선악과에 대해 말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라유가 이렇게 말문을 엽니다.
“우선 질문 하나 해 볼게요. 당신에게 어떤 일이 닥쳤을 때 그 일이 선인지 악인지 어떻게 판단하죠?”(211쪽)
그러자 맥이 자신 없는 말투로 대답합니다. “음,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젠데요. 아마도 내게 좋아 보이면, 다시 말하면 그것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지거나 안정감이 들면 선이라고 말할 것 같아요. 그와 반대로 나에게 고통을 주거나 그 대가로 내가 원하는 것을 내줘야 한다면 악이라고 생각하겠죠.”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상당히 주관적이군요……선한 것과 악한 것을 분별하는 당신의 능력에 대해 어느 정도 확신하죠?”
맥이 대답합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선’, 다시 말해서 내 마땅한 권리를 누군가가 위협한다면 당연히 화가 나겠죠. 하지만 실제로 어느 것이 선하고 악한지를 결정하는 논리적인 근거가 나에게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내게 영향을 미칠 때는 말이 달라지죠. 말해 놓고 보니 죄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보이네요. 지금까지 난 그다지 잘해오지 못했어요. 처음에는 선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 알고 보니 지독히도 파괴적인 것으로 판명된 것도 있었고, 또 악하다고 생각했던 것 중에서도 나중에 알고 보니……”(212쪽)
맥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사라유가 말을 받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이 선과 악을 결정하는군요. 당신이 심판자가 되는 셈이에요. 당신이 선하다고 판단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고 환경이 바뀌면서 악으로 판명되니, 더욱 혼란스럽겠군요. 게다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결정할 이들이 수십억 명이나 된다는 건 더더욱 혼란스러운 일일 테고요. 결국 당신의 선과 악은 다른 이의 선과 악과 충돌하고, 그 결과로 싸움과 논쟁이 일어나고, 심지어는 전쟁까지 벌어지겠죠.”
선악과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맥은 사라유와 함께 정원을 가꾸면서 독초를 발견합니다. 그 독초를 보고 맥이 사라유에게 묻습니다. “도대체 독성이 있는 식물을 왜 만든 거죠?”(208쪽) 그러자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당신의 질문은 독이 나쁘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어요. 또 그런 것을 창조하는 것은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죠. 소위 독초들은 대개 치유력이 뛰어나거나 다른 것과 혼합되어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지요. 인간들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선하거나 악하다고 단정 짓는 대단한 재주가 있어요.”
4.
이 대화는 선악과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줍니다. 결국, 선악과 이야기는 우리가 경험하는 악의 현실들이 왜 생겼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처럼 되어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선악을 판단할 능력이 없습니다. 사탄은 이 무능력을 이용하여 인간을 혼란시킵니다.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헛된 자만심을 불어 넣어 악을 행하는 데 거침이 없게 만듭니다. 사라유가 맥에게 말했듯이, 60억의 인구가 서로 이기적인 기준에 근거하여 선과 악을 판단하고, 자신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미시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마져도 자신에게 선하다고 생각하고 그 악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악의 원천적인 책임이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참 뻔뻔한 책임 전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자유 의지가 없이, 뇌속에 주입된 프로그램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는 존재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절대 자유, 절대 독립을 위해 종교의 굴레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시킴이나 부림을 당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어떤 도덕률에 예속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아무런 구속도 받지 않고 독립적인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싶어하는 것이 우리 모두의 바램입니다. 리차드 도킨스(Richard Dawkins)같은 무신론자들은 하나님 없이 살면서도 얼마든지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호언 장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 정말 그렇습니까? 나의 자유는 다른 사람의 자유와 충돌하고, 나의 권리는 다른 사람의 권리와 충돌합니다. 나의 선은 다른 사람에게 악이 되고, 다른 사람의 선은 나에게 악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선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악이 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선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악이 됩니다. 탈레반 사람들이 선이라고 추구하는 것이 많은 이들에게는 악이 됩니다. 그렇게, 60억개의 자유가 서로 충돌하여 악을 증폭시키고, 인간 현실은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 놓고서 그 책임을 자유 의지를 부여하신 하나님에게 돌리고 있습니다.
차를 가지고 나가 친구들과 놀던 아들이 밤 늦게 돌아오다가 그만 사고를 당했습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칩시다. “왜, 내가 차를 가지고 나가도록 허락했어요. 제게 차 키를 주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거 아니예요?”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혹은, 그렇게 타이르고 때론 꾸중을 해도 공부에 게으르던 아이가 나중에 때가 늦어 버린 것을 깨닫고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칩시다. “왜, 그 때, 나를 그냥 내버려 두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때려서라도 공부하게 했어야 했잖아.” 그러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자유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찌 이렇게 일관된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대해서는 죽기보다 싫어하면서, 정작 자신이 누린 자유로 인해 악한 결과가 생기면,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깁니다. 정작 우리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우리 자신의 힘으로 악행을 저지르면서, 그 책임을 하나님께 묻습니다. 왜 이런 악이 일어나게 했느냐고, 왜 이런 악이 일어나도록 놓아 두었느냐고, 그리고 심지어는 왜 처음부터 자유 의지를 허락했느냐고 묻습니다.
5.
피조물인 인간에게 독립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속임수에 넘어간 것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은 어떤 힘에든 예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인간이 진실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자유케 하는 힘에 자신을 의탁할 때입니다. 스캇 펙은 사탄의 속임수 중 백미는 ‘사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만, 그와 맞먹는 또 다른 속임수는 ‘나는 독립적인 인간이 되어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는 순간, 그 사람은 사탄의 세력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태초에 아담과 하와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었습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스스로 하나님이 되는 것이 그 하나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의 역할을 하려 하니, 잘 될 리가 없었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 엉키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하나의 선택은 선악을 판단하는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완전한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안에 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분별하기 위해 힘쓸 이유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내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대로 행하면, 그것이 선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소설 <오두막>으로 돌아가 봅시다. 맥이 사라유에게, 인간의 악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사라유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려는 권리를 포기해야 해요. 내 안에서만 살겠다고 선택한다는 것이 당장은 쓰디쓴 약을 삼키는 것 같겠죠. 당신은 나를 신뢰할 만큼 나를 충분히 알아야 하고, 내 속에 있는 선을 의지하는 법도 배워야 해요.”(214쪽) 사라유의 말대로,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버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자신을 내맡겨 그분과 친밀한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데 해결책이 있다는 말입니다.
소설 <오두막>에서 저자 폴 영은, 이같은 철저한 신뢰의 삶을 완전하게 사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파파가 맥에게 한 말에서 그 사실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는 완전히 인간이죠. 그는 완벽한 신이지만 신의 본성으로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어요. 그는 오로지 나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왔고, 내가 모든 인간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바로 그 방식대로 살고 있어요. 그가 최초로 그 일을 완벽하게 이루었죠. 자신 안에 거하는 나의 생명을 절대적으로 신뢰한 첫 번째 사람이고, 겉모습이나 결과는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나의 사랑과 선함만을 믿는 첫 번째 사람이죠.”(154쪽)
이 진실은 나중에 예수 자신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확증됩니다. “나의 삶은 그대로 따라해야 할 본보기로 의도된 것이 아니죠. 나를 따른다는 것은 ‘예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독립성이 소멸된다는 뜻입니다. 생명, 진정한 생명, 바로 나의 생명을 당신에게 주려고 내가 왔어요. 우리는 당신 안에서 우리 삶을 살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우리 눈을 통해서 보고, 우리 귀로 듣고, 우리 손으로 만지고, 우리처럼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에게 그런 연합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아요. 지금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됩니다. 결국은 당신도 그것을 원하게 될테니까요.”(238-39쪽)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 그 하나됨의 관계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이 하나님의 마음에 융화되는 것,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과 의와 진리가 우리에게 흘러 들어오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음으로써 잃어버린 삶의 방법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회복시켜 주신 삶의 방법입니다.
6.
우리는 모두 아담과 하와의 영적 유산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도 아담과 하와가 탐했던 욕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예속되어 살기보다는 독립하여 살고 싶고, 우리 스스로 심판자가 되어 선악을 분별하며 살고 싶고, 우리 자신이 우리 인생의 주인이 되어 보고 싶은 욕망, 말씀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과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 안에 있는 그 불순한 욕망을 보라는 뜻입니다. 그 욕망을 따름으로써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오셔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잃어버렸던 그 삶을 회복하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이 옳았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입니다”(롬 5:19). 아담과 하와가 행한 선택으로 인해 죄악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죄악을 소멸하는 삶을 스스로 사셨고 또한 그 삶의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예수께서 열어놓으신 그 길을 바울 사도가 걸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 증거가 드러납니다. 오늘의 본문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의 번역으로 읽어 드립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말하자면 이렇습니다. 나는 율법을 지키려고 애쓰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고 고심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율법의 사람’이 되기를 포기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이 내게 방법을 일러 주었고, 그렇게 살도록 해주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되었습니다. 정말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내 자아는 더 이상 내 중심이 아닙니다. 나는 더 이상 여러분에게 의롭게 보이거나 여러분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하나님께 좋은 평가를 얻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보는 내 삶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나는 이 삶을 저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율법을 연구하여 무엇이 선인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으로는 무엇이 선인지를 제대로 알 수도 없었고, 선을 안다 해도 그것을 행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서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그 만남을 통해 바울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모든 자신감을 내려 놓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모든 열심도 내려 놓았습니다. 그는 오직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사는 일에 전심했습니다. 그렇게 살아가면서 바울은 확인했습니다. 거기에 다 있음을 말입니다. 그것이면 다 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길은 독립이 아니라 항복(surrender)에 있고 신뢰(trust)에 있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아 실현의 길이며, 선과 악을 분별하는 길이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며 사는 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의 꿈을 버리고 그분께 항복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악의 현실은 점점 줄어갈 것입니다. 이같은 영적인 삶이 다른 누구보다도 먼저 저와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기원합니다. 첫 사람 아담에 의해서 시작된 선악의 혼란의 역사가 저와 여러분 안에서 종식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고 성령의 능력 안에 머물러 하루 하루 그 능력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은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의 ‘언약의 기도’(the Covenant Prayer)를 읽어 드림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이 기도는 존 웨슬리와 초기 감리교도들의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한 기도문입니다.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기도가 된다면, 그리고 이 기도가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진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그 철저한 신뢰의 삶, 바울 사도가 살았던 그 영적 하나됨의 삶이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는 더 이상 제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일에 저를 붙들어 매시고,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저를 붙이소서.
저로 행하게 하소서.
저에게 고난을 주소서.
저를 주님께서 고용하소서.
저를 주님의 처분에 맡깁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높이시고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를 낮추소서.
저를 채우기도 하시고,
비우기도 하소서.
저에게 모든 것을 주기도 하시며,
또한 제게서 모든 것을 가져 가기도 하소서.
제 모든 것을
주님의 기쁨을 위해 쓰시도록
기꺼이 그리고 마음 다해 드립니다.
오, 영광스럽고 복되신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시여,
저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저의 것입니다.
그렇게 되게 하소서.
제가 이 땅에서 맺은 이 언약을
하늘에서도 확증하여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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