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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김영봉 목사의 문화영성 프로젝트 '오두막'8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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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62010_hvod.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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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욥기 42:1-6]
1.

지난 주일부터 수요일까지 노폭(Norfolk)에서 열린 228차 연합감리교회 버지니아 연회에 다녀 왔습니다. 이번 연회에서 제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짐 걸리 목사님(Rev. Jim Gulley)의 간증이었습니다. 걸리 목사님은 연합감리교회 선교국(General Board of Global Mission)에 소속된 선교사로서 캄보디아, 나이지리아, 아이티 등 저개발 국가에서 농업과 지역 사회 개발 프로그램을 도와 왔습니다.

올 해 64세인 그는 지난 1월 12일 아이티 지진이 일어났을 때 연합감리교회 선교사 두 명과 함께 Port-au-Prince의 몬태나 호텔에 있었습니다. 지진이 발생하자 호텔이 무너졌고, 세 명의 선교사들은 다른 세 명과 함께 무너진 건물 더미에 깔려 무려 55 시간 동안 갇혀 지냅니다.  그들 중 두 사람은 심한 부상을 입습니다. 길고 긴 고통과 어둠의 시간을 지내고 난 후, 여섯 명 모두 구출되었는데, 샘 딕슨 목사(Rev. Sam Dixon)와 클린트 랩 목사(Rev. Clint Rabb)는 부상에서 회복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걸리 목사는 55시간 동안 그 어둠과 절망 가운데 있었던 경험을 겸손하고 진실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공간에서 그들은 이틀 하고도 반 날 동안 서로를 격려해 가며 버팁니다. 돌아가며 기도하기도 하고, “내게 강 같은 평화”(Peace Like a River) 같은 찬송을 부르기도 합니다. 걸리 목사는 그들의 감정이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는 롤러 코스터와 같았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그 건물 폐허 안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며, 따라서 어떤 일이 닥친다 해도 그들의 미래는 안전하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걸리 목사는 이런 상황에서 “Why me?”라고 묻기 보다는 “What to do?”라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살아남은 자로서 아이티의 비극에 대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살아남은 것은 세상을 떠난 다른 두 선교사보다 더 나은 무엇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무조건적인 선물이며, 그렇기 때문에 남겨진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을 아이티의 회복을 위해 헌신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과장이나 흥분 없이 담담하게 진행된 간증이 끝난 후, 2천여 연회원들은 기립 박수로써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2.

여러분은 이 믿음을 어떻게 보십니까? 5층짜리 건물의 폐허 더미 아래에서 55시간 동안 갇혀 꼼짝 없이 구조의 손길을 기다려야 했던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고 믿고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했더니 기적적으로 구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렇게 믿고 기도한 사람들 중 두 사람은 끝내 목숨을 건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짐 걸리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도 의식을 잃을 때까지 하나님께 대한 믿음 안에 머물러 있었다고 합니다. 이 믿음이 여러분에게는 어떻게 보입니까?

따지고 보면, 그들이 갇혀 있던 그 현장이야말로 다음의 세 가지 추론이 가장 그럴 듯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상황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계시지 않거나, 둘째, 계신다 해도 인간의 불행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셋째, 그럴 능력은 있으나 그럴 마음이 없거나, 셋 중 하나가 진실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 가장 그럴 듯하지 않은 믿음을 붙들고 있었습니다. “지진이 나고 호텔이 무너지고 우리가 그 건물 더미에 깔렸어도 하나님은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어찌보면 어처구니 없는, 맹목적인, 완고한, 그리고 구제 불능의 믿음처럼 보이지 않습니까?

이 믿음이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실은 믿음이 이 정도에 이르러야만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게는 걸리 목사님의 믿음이 놀라워 보입니다. 제가 만일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제 믿음도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상황에 따라서 롤러 코스터를 타는 감정에 속지 않고, 견고한 믿음 위에 견고히 버티고 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신 믿음입니다. 그분은 절대 고독의 깊은 수렁에서도 하나님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같은 믿음 위에 설 수 있을까요? 세상이 모두 뒤죽박죽인 것 같고, 모든 것이 우연과 사고의 연속인 것 같으며, 인생에는 아무런 뜻도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다시리신다”(God is in control)라는 믿음 위에 견고히 서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게는 이 질문에 대한 모범 답안이 없습니다. 아마도, 그 누구에게도 그런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믿음이란 어떤 공식이나 비법을 배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비법이란 오직, 하나님과 친밀하고도 깊이있는 관계 안에 머물러 살면서 그분에 대해 더 많이 경험하여 알아가는 것밖에 없습니다. 지식으로 배워 안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을 직접 경험하면서 체득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그 진리가 영적인 눈을 뜨게 하고, 그 영적 시각으로 세상을 보면,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믿음입니다.

3.

믿음은 체험을 통해 체득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믿음을 견고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 일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드는 잘못된 사고 방식이 우리에게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것을 조심하면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그것들 중 세 가지만 다루면서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다스린다’(to control)는 말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오해를 수정해야 합니다. ‘이머징 처치’(Emerging Church)라는 새로운 형식의 갱신 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브라이언 맥클라렌(Brian McLaren) 목사의 저서 <새로운 기독교인이 온다>(A New Kind of Christian)에서 저는 이 문제에 대해 눈이 확 뜨이게 만드는 대목을 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 현대인들이 상상하는 것과 고대인들이 상상하는 것 사이에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의 생각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 목동이 양을 치는 것이나 농부가 농작물을 기르는 것 혹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는 것을 상상했을 것입니다. 좋은 목동은 양을 풀밭으로 인도하고, 자유롭게 풀을 뜯으며 놀게 만듭니다. 가끔 문제를 일으키는 양이 있으면 잘 타이르고 길들입니다. 때로, 채찍을 들기도 하지만, 그것은 예외입니다. 어떤 양이 병들면 완치될 때까지 목동은 함께 아파하며 치료를 돕습니다. 때로, 고집을 피워 목동을 떠나 짐승의 밥이 되는 경우도 생깁니다. 목동이 최선을 다해도 그런 일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목동은 그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목동이 양을 다스리는 방법입니다.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애정 깊은 관계를 가꾸고 그 관계 속에서 다스리는 것입니다.

반면, 현대인들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라는 말을 들을 때는 컴퓨터의 ‘콘트롤 키’(control key) 혹은 기계의 ‘콘트롤 버튼’(control button)을 상상합니다. 기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콘트롤 버튼을 누르면 모든 것이 정지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누르면 정상으로 가동됩니다. 컴퓨터의 콘트롤 키는 많은 기능을 가집니다. 콘트롤 키와 다른 키를 함께 누르면 자신이 원하는 작업을 즉각 즉각 해결할 수 있습니다. 콘트롤 키를 누를 때, 누른 사람의 기대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없습니다. 이렇게 콘트롤 버튼과 키에 익숙한 현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을 들을 때면 저 하늘 어디선가 60억개의 콘트롤 버튼을 쥐고 기계실에 앉아 조종하는 신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이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믿음에 곤란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가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콘트롤 버튼을 눌러 아이티에 지진을 일으켜서 20만명에 가까운 생명을 한 순간에 희생시켰다고 생각하니, 그 하나님을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면, 몬태나 호텔이 무너져 내릴 때 당신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선교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콘트롤 버튼 하나 누르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그 하나님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또한 인간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저와 여러분을 다스리십니다. 기계 다루듯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애정 깊은 부모가 자녀들을 양육하듯, 혹은 성품 좋은 목동이 양들을 다스리듯, 관계를 통해 다스리십니다. 애정 깊은 부모와 성품 좋은 목동은 함부로 간섭하지 않고, 제 마음대로 강요하지 않고, 조급하게 나서지 않습니다. 때로 위험을 보아도 자녀들이 그 위험을 겪어내기를 바라면서 아픈 마음으로 지켜 보고 기다립니다. 가장 좋은 양육은 자유 의지를 선하게 활용하여 거침 없고 구김살 없이 자라는 것임을 압니다. 그러기에 그 자유 의지를 오용할 가능성이 뻔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믿고 맡기고 지켜 보는 것입니다. 그 대신, 관계를 깊고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통치 방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자연의 순환 법칙에 따라 일어나는 지진이나 태풍 혹은 산불 같은 것을 막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악이 아닙니다. 길게 보면, 그것은 모두에게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다만, 그로 인해 피해를 입는 사람들에게 악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또한 인간들이 악의를 가지고 저지르는 범행을 완력으로 막아 서지 않습니다. 칼을 쥔 팔목을 잡아 채거나, 날아가는 총알을 휘게 하지 않으십니다. 지진으로 무너져 내리는 건물 더미를 멈추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이 당장은 유익해 보일지 몰라도,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애로운 부모가 자녀들의 자유를 최대한 허용하면서 관계를 통해 다스리는 것처럼, 자연 법칙과 자유 의지에 모든 것을 맡겨 두고는 관계를 통해 다스리기를 선택하셨습니다.

4.

둘째,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이 때로 의심스러워지는 이유는 주로 어려움을 당할 때 이 질문을 제기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오히려 자신이 잘 나서 그렇게 된 것처럼 생각하면서, 어려움에 봉착하면 하나님 때문에 그렇게 된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짐 걸리 목사님은 간증 중에 테니스 선수 아더 애쉬(Arthur Ashe)에 관한 유명한 일화를 소개했습니다. 아더 애쉬는 1960년대와 70년대를 주름잡던 사람이었습니다. 모든 테니스 선수들의 꿈인 그랜드 슬램(Grand Slam) 즉 US Open, French Open, Australian Open, 그리고 영국에서 열리는 Wimbledon 경기에서 세 번이나 우승을 했고, 그 중 한 번은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윔블던에서의 우승이었습니다. 그렇게 잘 나가던 아더 애쉬는 갑작스러운 심장 마비로 인해 발 목이 잡혔고 두 번이나 수술을 받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수술 동안에 받은 수혈로 인해서 AIDS에 걸립니다. 아더 애쉬는 1993년, 그의 나이 50세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AIDS에 걸린 것이 알려졌을 때, 그는 전세계 팬들로부터 수 많은 편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 중 하나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적혀 있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같이 나쁜 병을 위해 당신을 선택해야 했습니까?” 아더 애쉬가 AIDS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다음에 누군가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애더 애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5천만 명의 어린이들이 테니스를 칩니다. 그 중 5백만명이 테니스를 정식으로 배웁니다. 그 중 50만명이 직업 선수가 됩니다. 그 중 5만명이 리그전에 참여합니다. 그 중 5천명이 그랜드 슬램 대회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50명이 윔블던에 참여할 자격을 얻습니다. 그 중 4명이 준결승에 진출하고, 그 중 두명만이 결승전에 갑니다. 제가 윔블던 우승컵을 들었을 때, 저는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의 회고록 <은총의 나날들>(Days of Grace)에서 아더 애쉬는 AIDS에 걸리고 나서 많은 질문을 가져 보았으나, “왜 접니까?”(Why me?)라는 질문은 한 번도 제기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그에게 그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더 애쉬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만일 제가 심장마비 혹은 AIDS에 걸린 것을 두고 ‘왜 접니까?’라고 묻는다면,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물어야 하고, 그것을 즐기는 제 권리에 대해서도 질문을 해야 합니다. 1975년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한 다음 날, 저는 제가 받은 축복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물었어야 합니다. …… 만일 저의 승리에 대해 ‘왜 접니까?’라고 묻지 않았다면, 저의 실패와 재앙에 대해서도 ‘왜 접니까?’라고 묻지 말아야 합니다.”

아더 애쉬가 진작에 좀 더 성숙한 믿음을 가졌더라면,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컵을 들고 하늘을 향해 말했을 것입니다. “하나님, 왜 저입니까? 왜 저에게 이같은 축복을 주십니까? 자격 없는 제게 이 축복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믿음은 성공과 번영의 순간에 겸손해질만큼 성숙하지 않았으나, 재앙을 마주하여 “하나님, 왜 접니까?”라고 들이대는 미성숙함도 그에게는 없었습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억울하게 AIDS에 걸려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이 여전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고 또한 자신을 사랑하고 계신다고 믿게 해 주었습니다.

5.

셋째, 우리는 하나님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마땅히 사랑받을 권리가 있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아 주어야만 할 책임이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가지게 만드는 또 다른 이유입니다.

소설 <오두막>에 보면, 맥도 이와 같은 생각을 드러냅니다. 선악과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맥이 사라유에게 묻습니다. “미시는 보호받을 권리가 없었나요?”(215쪽) 어떤 면에서 생각하든, 그 귀여운 아이에게는 하나님에게 보호받을만한 충분한 권리가 있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사라유의 대답은 단호했고, 심지어는 냉담하게 들릴 정도입니다. “없었어요. 아이는 사랑받기 때문에 보호받는 것이지 처음부터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건 아니예요.” 이 대답에 맥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라유의 대답에 그는 일손을 멈추었다.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방금 한 말은 온 세상을 뒤짚어 엎는 것 같았고, 그는 흔들리지 않고 버티어 서기 위해 힘써야 했다.”

사라유의 말은 진실로 우리들의 세계관을 송두리째 뒤짚어 엎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마치 자신에게 사랑받고 보호받을 권리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데 별로 예외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라유의 말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보호해 주시는 것이지, 우리에게 보호받을 권리가 있어서 혹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어서 그러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 근거도 없이 우리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 권리를 주장하곤 합니다. 그런 생각으로 당당하게 하나님의 개입을 요구합니다. 그러다가 그 요청이 거절되는 것 같으면, 하나님이 없다는 둥, 하나님이 무능하다는 둥, 혹은 하나님에게 사랑이 없다는 둥, 불평을 합니다.

오늘 읽은 욥기의 마지막 고백이 바로 그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자주 오용되고 있는 책이 욥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욥기의 첫 부분과 끝 부분만 읽고, 그 중간에 나오는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건너 뜁니다. 그렇게 읽고는, “욥은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재앙을 당하고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여 결국에는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입니다. 욥과 세 친구의 대화를 읽어 보면, 욥은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없다고 항변합니다.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처분이 부당하다고 항변합니다.

그 긴 대화 끝에 하나님께서 직접 욥에게 나타나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길게 나옵니다. 마치 참고 참았던 말을 한꺼번에 쏟아 놓는 사람처럼, 하나님은 욥이 대답할 틈을 찾지 못할만큼 끊임없이 말씀을 쏟아 놓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이런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아느냐? 내가 온 우주를 창조할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모든 지혜의 근원인 나에게 네가 논쟁을 하자는 것이냐? 네가 나에게 무슨 권리라도 있다고 생각하느냐? 너는 누구냐? 네가 지금 말하고 있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고나 있느냐?”

한 껏 교만하고 완악해져 있던 욥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는 심하게 떨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 42:3, 5-6)  

이렇듯, 하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나면, 아니, 그분의 존귀와 영광과 위엄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그분이 어떤 처분을 하신다 해도 아무 것도 다툴 것이 없고, 항변할 것도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욥이 고백한 것처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한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아무런 권리도 없으면서 마치 하나님께 큰 권리가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 것을 회개하게 됩니다. 마치 하나님의 약점이라도 잡은 것처럼 혹은 하나님에게 받을 빚이라도 있는 것처럼 행동한 것에 대해 회개하게 됩니다.

6.

이 대목에서 저의 뇌리에 깊이 남아있는, 오래 전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살면서 공부와 목회를 겸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저는 온타리오 호수 옆에 있는 아파트에 잠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깊은 시간에 홀로 바람을 쏘이면서 온타리오 호숫가에 앉아 있었습니다. 칠흙같은 어둠 속에 저 홀로였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 그 거대하고 깊은 호숫물, 그리고 그 위에 펼쳐진 거대한 하늘과 별들이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순간, 저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가슴 벅차게 경험합니다. 동시에 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지를 절감합니다. 그 밤에 제가 그 호수에 빠져 죽는다 해도 이 세상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제가 방금 전에 호수로 던져 넣은 돌맹이나 저 자신이 별로 다르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에게 저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는 꽃과 다를 것이 없다 싶었습니다. 그 순간에 벼락이 떨어져 그 자리에서 죽는다 해도 저는 아무런 항변할 말이 없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또 다른 생각이 제 뇌리를 뚫고 들어왔습니다. 제가 어릴 때부터 들었던 복음의 말씀이 기억난 것입니다. 그 위대하신 하나님께서 돌맹이와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나를 지으시고 구속하시고 사랑하시고 돌보신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진실로 감당할 수 없는 은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시울이 찡해 왔습니다. 그분이 제 이름을 아시고, 제 머리카락 수까지 헤아리고 계시며, 이사야의 말씀(49:16)처럼, 내 이름을 그분의 손에 새기셨다고 생각하니, 저 자신의 자격 없음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고, 또한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놀랍게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경험하고 보니, 사랑에 빚진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라 저였습니다. 권리가 있다면, 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뭔가를 할 책임이나 의무가 있다면 저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를 어떻게 하시든, 저는 아무런 할 말이 없다 싶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그 어떤 축복이나 사랑을 받을 자격도 제게는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재앙이 닥친다 해도 제가 할 말은 오직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일 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저를 기억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를 사랑하지 않으신다 해도, 저를 영원한 불구덩이에 던져 넣는다 해도, 저에게는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들은 그 복음을 믿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결정하셨다는 복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자격도 권리도 없으나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보호하시고 돌보신다는 복음입니다. 그 복음 앞에 설 때마다 우리는 묻습니다. “왜 접니까? 제게 무슨 자격이 있다고 이 은혜를 주십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서 이렇게 감격하고, 이렇게 항복하고, 그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드리기를 결단합니다.

제가 “왜 저입니까?”라고 물을 때는 재앙이 닥칠 때가 아니라 일이 잘 되고 있을 때입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저는 때로 축복이 두렵습니다. 평안이 두렵습니다. 문제 없이 일이 잘 될 때, 저는 두렵습니다. 제 믿음을 과시하거나 자랑하는 말로 들릴까 염려됩니다만, 진실로 그렇습니다. 제게 그런 자격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그렇게 하실 아무런 이유가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 없는 은혜, 그 놀라운 은혜, 그 두려운 은혜를 찬송하고 감사하며, 그 은혜를 갚기를 소망합니다. 늘 이 마음으로 산다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있더라도 주님의 다스림을 인정하고 그분을 의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고, 하나님이 계신다 해도 무능한 것 같고, 능력이 있다 해도 무관심한 것 같은 상황이 우리 중에 자주 일어납니다. 때로는 그것이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에게 일어나기도 합니다. 짐 걸리 목사님에게 일어났던 일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럴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여전히 이 우주와 세상과 우리를 다스리고 계시다”는 믿음을 잃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기 위해 오늘 말씀 드린 세 가지의 그릇된 사고 방식들을 고쳐 나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의심하게 만드는 그릇된 사고 방식들이 더 많이 있겠지만, 이 세 가지만 고쳐도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모습을 훨씬 선명하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스리시되 기계를 조종하는 것처럼 하시는 것이 아니라, 목동이 양을 기르듯, 혹은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듯 관계 속에서 다스리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어려울 때만이 아니라 잘 될 때에도 하나님을 기억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체험을 통해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된다면,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하나님의 다스림을 믿을 가능성이 훨씬 높아질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견디시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던 그 믿음, 그리고 걸리 목사님이 죽음의 문턱에서 55시간 동안 붙들고 있었던 그 믿음, “상황이 어떻든지 상관 없이 하나님은 여전히 다스리신다”는 그 믿음이 저와 여러분의 존재의 터전이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그 믿음으로써 악의 현실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견고히 서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님,

주님 께서 다스리십니다.

주님 만이 왕이십니다.

저희 눈을 뜨게 하소서.

주님 이 다스리시는 것을 보게 하시고

믿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써

이리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은 저희가

선으 로 악을 이기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