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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김영봉 목사의 문화영성 프로젝트 '오두막'9 “내 하나님은 늘 낯설다”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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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하나님은 늘 낯설다”
                                            (My God Is Always Puzzling)
                                               시편 (Psalms) 139:7-12

1.

소설 <오두막>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뜨거운 찬사를 받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의 하나님을 세 사람의 등장 인물을 통해 그리고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또한 성부, 성자, 성령께서 어떻게 ‘따로 또 같이’ 활동하시는지를 세 등장 인물을 통해 보여 줍니다. 삼위일체와 같은 복잡한 교리를 말로 설명하다 보면 여러 가지의 모순과 왜곡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의문점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아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 어려운 문제를 하나의 이야기로 다루었다는 점에서 이 소설은 아주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바로 이 점 때문에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이 소설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사람들은 독한 비난을 퍼붓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보이는 모습으로 그리려 하면, 어쩔 수 없이 왜곡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물며, 삼위일체 하나님을 우리와 비슷한 사람을 통해 그리려 했으니, 그런 부분이 왜 없겠습니까? 적어도 삼위일체 교리에 관한 한, 그 누구도 ‘모순이나 오류가 하나도 없는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런 글을 읽을 때 작가가 어떤 점을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그렸는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작가의 의도는 오해되고 왜곡됩니다.
주인공 맥은 오두막에서 성부인 파파, 성자 예수 그리고 성령 사라유를 만나, 2박 3일 동안 동거하며, 그들과 ‘함께’ 그리고 ‘각각’ 대화하면서 상처를 치유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파파와 예수와 사라유가 서로 하나가 되어, 하나의 목적을 위해, 기쁘고 행복하게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셋은 분명히 구분되는 개별적인 인격체들인데, 동시에 그 셋은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통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일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가는 동안, 독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신비를 ‘느껴’ 이해하게 됩니다. 그것이 저자의 의도입니다.
저는 앞으로 네 주일 동안 폴 영이 만든 이야기와 이미지를 바탕으로 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드릴 것입니다. 오늘은 먼저 소설 <오두막>에서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 어떻게 묘사되어 있는지를 살펴 보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2.

첫째,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파파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맥이 오두막에서 만난 세 인물 중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충격을 주는 것은 이 흑인 여성입니다. 오래 전에 개봉된 코미디 영화 <브루스 얼마이티>(Bruce Almighty)에서는 흑인 배우 노먼 프리드만(Norman Freedman)이 하나님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 영화를 보면서 저는, 감독이 꽤 용기있는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흑인으로나타나시다?’ 적지 않은 백인들에게, 특히 인종차별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에게는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폴 영은 한 술 더 뜹니다. 성부 하나님은 흑인이면서도 여성으로 나타납니다. 어느 면에서 보더라도 어머니의 역할을 하고 있는 그 여성은 자신을 ‘파파’라고 부르라고 요구합니다. ‘마마’라고 불러야 옳을 사람에게 파파라고 부르라니! 독자들은 여기서 아주 어색한 느낌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저자의 의도적인 선택이요 고안입니다. 저자는 독자들이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을 깨뜨리려 했음에 분명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전통은 신구약성경 안에 뿌리가 깊습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믿는 사람과 성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은유(metaphor)입니다. 하나님이 남성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성을 초월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부르는 전통을 오해하여 부지불식간에 그분을 남성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맥이 오두막을 향해 떠나기 전에 친구 윌리와 대화를 나누는 대목이 나옵니다. 친구 맥이 하나님을 만날 것을 기대하고 있음을 눈치 챈 친구가 묻습니다. “하나님이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나?”(109쪽) 그러자 맥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모르겠네. 환하게 발광하는 빛이거나 불타오르는 나무일 수도 있겠지. 톨킨의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간달프처럼, 허옇고 긴 턱수염을 휘날리는, 몸집이 큰 할아버지와 비슷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 왔네.”(110쪽)

 

맥이 실제로 하나님을 간달프나  KFC 할아버지처럼 생각했다면 그의 하나님 이해가 유아기적인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은 영이십니다(요 4:24). 물질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마음씨 좋은 백인 할아버지처럼 생겼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 이해가 매우 낮은 수준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사정이 좀 달라집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맥의 대답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이 오프라 윈프리(Oprah Winfrey)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혹은 우피 골드버그(Whoopi Goldberg)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혹은, Aunt Jemima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러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맥의 반응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파파를 만나고 나서 맥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미쳐가는 걸까? 썰렁한 유머 감각을 지난 저 뚱뚱한 흑인 여자를 과연 하나님이라고 믿어야 하는 걸까?” 많은 독자들이 이 대목에서 맥과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뉴저지에 사는 제 백인 친구 바바라는 제게 보낸 메일에서, 하나님을 이렇게 그리는 것은 그분에게 결례를 범하는 것 같고, 심지어는 그분을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며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3.

이 거부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제 친구 바바라는 저자의 문학적 올무에 걸린 것입니다. 바바라만이 아니라 수 많은 독자들이 여기서 걸려 넘어졌습니다. 이 어색하고, 심지어 불쾌하기까지 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통해 저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요?  그 이유를 파파는 맥에게 이렇게 설명합니다.

메켄지, 남자나 여자나 모두 나의 본성에서 나왔지만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니에요. 내가 당신에게 남자나 여자로 ‘보이고자’ 한다면, 그건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죠. 내가 여자로 나타나서 당신에게 파파라고 부르라고 제안한 건 단순히 은유들을 뒤섞이게 하고, 또 당신이 종교적인 고정관념에 쉽게 빠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죠. 내가 간달프처럼 턱수염을 휘날리며 거구의 백인 할아버지로 나타났다면 당신의 종교적인 고정관념이 더욱 강화되었겠죠. 하지만 이번 주말은 당신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랍니다. (142쪽)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들을 심각하게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들 가운데 근거 없는 편견은 없는지, 과연 자신이 믿는 신이 자신의 바램으로 만든 우상은 아닌지, 반성해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편견에도 갇힐 수 없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드러내실 때 그 어떤 모습도 취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이 작은 머리로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진실로 살아계신 하나님,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바’라고 불렀던 성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는 모든 선입견을 내려 놓고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방법에 따라 늘 새롭게 그분을 만날 준비를 해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모습 대로의 하나님, 내가 배워 온 모습 대로의 하나님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굳어버린 생각 속에 자신을 가두고,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과 우상을 믿는 것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계속 변화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알수록 그분은 새로운 면을 드러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편견과 아집과 오해와 불신앙을 치료하십니다. 반면, 우상을 믿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더 강해지기는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그 사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그가 섬기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은 늘 같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시편 129편은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 중 가장 심오한 것에 속합니다. 어떤 경위로 시인이 이같은 고백에 이르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주 작은 흔적을 체험하고 목격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 체험을 통해 시인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그에 비해 하나님은 얼마나 놀라운 존재인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교리로 하나님을 배우다 보면, 머리로 그분을 담을 수 있고 글로 그분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오해합니다. 하지만 그분의 실상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나면, 우리가 할 일은 오직 그분의 위대하심 앞에서 입을 벌리고 감탄하는 것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4.

둘째, 맥에게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어떤 그림이 떠오릅니까? 아마도 우리에게 익숙한 몇 개의 성화를 떠올릴 것입니다.

 

맥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런데 맥 앞에 나타난 예수님은 성화에서 자주 보던, 말끔하고 정갈하며 조각상 같은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전형적인 유대인 남성답게 길죽한 얼굴에 유난히 크고 긴 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잘 생겼다고 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맥은 예수님과 친해진 다음에 이렇게 아쉬움을 표현합니다. “아, 그러고 싶진 않았지만, 당신을 체격도 좋고 외모도 출중한 이상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173쪽). 많은 독자들이 예수님을 이렇게 매력 없는 남자로 그려 놓은 것에 대해서도 마음 편치 않게 느끼는 것 같습니다. 그분을 지상 최대의 미남을 생각해 왔던 고정관념에 어긋나기 때문입니다.
예 수님의 실제 모습이 어떠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얼마 전,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것으로 추정되는 토리노의 수의(the Shroud of Turin)에 남겨진 흔적으로 바탕으로 예수님의 얼굴을 재구성 하는 데 성공했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수의가 정말 예수님의 시신을 쌌던 것인지에 대한 의문은 아직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증거가 없는 셈입니다. 맥의 추측대로, 아주 뛰어난 외모를 타고 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이사야 53장의 예언 때문입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고난의 종에 대해 예언하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는 주님 앞에서,
마치 연한 순과 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싹과 같이 자라서,
그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고,
훌륭한 풍채도 없으니,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모습이 없다. (사 53:2)

둘째,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살펴 보면, 조각상과 같은 미남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예수께서 태어나셨을 때, 하나님은 가장 비천한 사람들 중 하나인 마리아와 요셉을 택하셨습니다. 또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에 자리가 없어서 짐승이 자는 곳에서 태어나셨고, 짐승의 먹이통을 첫 침대로 사용하셨습니다. 그러한 ‘선택’의 연속선상에서 볼 때, 하나님은 조각상 꽃미남을 예수님의 외모로 선택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하나님은 “보기 좋은 떡이 맛도 좋더라”는 속담을 인정하지 않으실 분입니다. 그분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형외과 의사의 기준으로 예수님의 외모는 그렇게 잘 난 것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그분을 만나는 사람들은 그분에게서 비범한 무엇을 느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인간의 얼굴에서 풍기는 인상은 육체적인 모양에 의해 결정되기보다는 그 내면에 있는 것으로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내 육체는 내 존재의 작은 일부일 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예수님께서 맥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외모, 다시 말해서 겉모습에 불과한 외모를 존재는 항상 초월하죠. 자신의 편견에 따라 아주 예쁘다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얼굴 뒤에 있는 존재를 알고 나면, 표면적인 생김새는 점차 빛이 바래다가 결국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죠. (174쪽)

저는 이 말의 마지막 부분을 조금 바꾸고 싶습니다. “자신의 편견에 따라 예쁘다거나 못생겼다고 판단하는 얼굴 뒤에 있는 존재를 알고 나면, 표면적인 생김새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하지요. 잘 생긴 것이 하나도 없는데 왠지 매력 있어 보이거나, 정말 잘 생겼는데 왠지 거북하게 느끼는 겁니다.” 진실이 이렇다면, 예수님에게서 외모로는 설명하지 못할 신비로운 매력이 발산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외모를 넘어서 존재 자체를 보는 눈이 조금이라도 열려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그분에게 압도되고 매료되었을 것입니다.

5.

셋째, 성령의 역할을 담당한 사라유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다. 파파는 흑인 여성으로, 예수님은 중동 남자로, 그리고 사라유는 동양 여인으로 나옵니다. ‘사라유’라는 이름은 ‘바람’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말 ‘루아흐’와 신약성경에서 성령을 가리키는 말 ‘프뉴마’는 모두 ‘바람’, ‘숨’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처럼 잡을 수 없는 존재, 하지만 바람처럼 어느 곳에서나 활동하고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사라유라는 이름은 성령의 특성을 잘 표현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이나 성자 예수님의 경우에는 깨어져야 할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이 우리에게 많이 있지만, 성령에 대해서는 그런 것이 별로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성령에 대해서는 별로 지식도 없고 경험도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 있다면, 성령을 하나의 에너지 혹은 기운으로 보는 태도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은 분명한 인격체입니다. 즉,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근심하고 기뻐하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소설 <오두막>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독자들은 이 점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사라유를 처음 만나는 대목에서 맥은 이렇게 느낍니다.

그녀가 뒤로 물러서자 맥은 그녀를 더 잘 보고 싶은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그녀 쪽으로 곁눈질을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는 빛 가운데 아른거렸고,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데도 머리칼이 사방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정면보다 그나마 곁눈으로 보는 편이 나았다. (127쪽)

사라유가 맥을 환영하면서 껴안을 때, 맥은 아주 신비로운 느낌을 받습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맥은 갑자기 몸이 공기보다 가벼워져서 공중부양이라도 하는 기븐이 들었다. 그녀는 그를 안지 않고서도 그를 안았고, 그를 만지지도 않으면서 만졌다. 잠시 후, 그녀가 뒤로 물러선 후에야 그는 자기가 여전히 두 발을 바닥에 대고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129쪽)  

파파와 예수님 사이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라유 즉 성령은 시종일관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사라유는 어릴 때 읽었던 동화 <피터팬>의 팅커벨을 생각나게 합니다.

 

눈 앞에 있다가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추고, 어디 있는가 하고 두리번 거리면 갑자기 눈 앞에 나타납니다. 똑바로 쳐다 보려 하면 더 아른 거리고, 잡으려 하면 더 멀어집니다. 하지만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필요할 때마다 어느 구석에선가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말 없이 말하고, 손짓 하나로 세상을 변하게 만들며, 마음을 꿰 뚫어 봅니다.
예수님은 성령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 3:8). 성령께서 사라유의 활동 모습처럼 부드럽게, 신비스럽게, 드러나지 않게, 그러나 분명하게 변화를 만들어 내신다는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을 때, 마치 비둘기가 땅에 내려 앉듯 사뿐히 임했다는 기록도 역시, 성령의 온유하고 부드럽고 신비로운 활동을 암시합니다.
동시에, 그것은 성령의 활동의 한 측면일 뿐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라유처럼 활동하는 것만이 성령의 유일한 활동 방식이라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고정 관념이 되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성령께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실 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읽는 것처럼, 성령께서는 때로 불같이 뜨겁게 그리고 누구나 알아챌 수 있는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하십니다. 마치, 바람에는 미풍도 있고 순풍도 있지만, 폭풍도 있고 태풍도 있는 것처럼, 성령께서도 때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또 때로는 거세고 강력하게 활동하십니다. 그 모든 활동 방식에 대해 마음을 열어 놓고 있어야 합니다.

6.

무신론자들은 모든 종교들이 신봉하는 신은 인간의 욕망이 투사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의 말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많은 종교들이 살아있는 신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우상을 신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사람이 만든 신은 사람보다 작습니다. 반면, 기독교는 인간의 철학과 깨달음에 기초한 종교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에 기초한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 아니라, 계시된 신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 일어난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이야기들이 때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믿는 이들에게 그것이 자주 문제가 되는데, 실은 성경의 하나님 이야기가 이해할 수 없는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 하나님이 ‘만들어진 하나님’이 아니라는 반증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리보다 크십니다. 커도 보통 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생 그분을 만나 사귀어도 그분의 1%도 제대로 알지 못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분을 믿고 순종하며 사귀고 살아가려면 고정 관념에 붙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붙들리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름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상 신앙을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가까이 오실 것입니다”(4:8)라는 야고보서의 권면대로, 끊임없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늘 새롭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연구하며 묵상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당신을 계속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기도하고 묵상하고 찬양하는 가운데 그분은 당신을 새롭게 드러내십니다. 일상 속에서 그리고 역사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하여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신 분이셔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우리를 놀라게 하고 가슴 벅차게 만들고 또 때로는 난처하게 합니다. 그런 경험을 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게 되고, 그러면서 우리 또한 변화해 갑니다. 그러한 차원이 없다면, 그 신앙은 죽은 것이며, 우상 숭배일 가능성이 큽니다. 참된 하나님을 만나면 늘 낯선 느낌이 드는 반면, 우상 숭배는 늘 익숙한 신을 붙들고 사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오직 살아계신 삼위의 하나님과 연결된 믿음만이 참 생명을 줍니다.

7.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여러분의 사고 능력 안에 넣을 수 있는 분입니까? 아니면, 여러분으로서는 도저히 짐작도 못 할 신비로운 분, 낯선 분입니까? 여러분의 영적 생활은 어떻습니까? 그동안 영적 여정을 걸어 오면서 여러분은 하나님의 새로운 모습을 목격하면서 놀라고 당황하고 두려워 떨며 또한 신비로움에 젖었던 경험이 있습니까? 과거에 알던 하나님과 지금 아는 하나님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여정에는 늘 이같은 기대감과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이 하나님을 찾게 만들고, 그렇게 경험할 때 우리의 영적 여정이 신명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영적 여정에 이같은 신비와 기쁨이 늘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늘의 기도는 구약학자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의 기도문으로 대신하겠습니다. 평생 구약을 연구하며 묵상한 사람답게 그는 시편 129편만큼이나 하나님의 본성을 잘 파악하고 그것을 기도로써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는 할 수 있는 대로 여러 가지 이름으로 주님을 부르고
저희가 필요한 대로 주님의 역할을 규정하고
저희가 선 각도에서 주님께 다가갑니다.
주님을 알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저희 자신의 깊은 요구,
깊은 상처
그리고 깊은 희망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희가 부르는 이름은 잠시 동안 유효할 뿐,
주님은 그 이름을 넘어 다가오시며
저희 생각을 넘어 새로운 모습으로 당신을 드러내시며
저희가 잡을 수 없는 영광 속으로 사라지십니다.
주님의 자유와 숨으심을 목도하며
저희는 인정합니다.
주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저희보다 위에 계시며
저희를 위해 계시고
또한 저희를 넘어 계시다는 것을.
저희의 요구와 필요에 따라 행동하시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의 방식으로 행동하시는 분임을.

저희는 주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우물거릴뿐입니다.
그것을 통해
이름지을 수 없는 주님 앞에 선
저희 자신의 부족함을 확인할 따름입니다.
주님을 설명하고 찾고 규정하는 노력을 잠시 접어두고
주님께 찬양을 돌립니다.
육신을 입고 고통받으시기까지
저희를 사랑하신 것에 대해
그리고 저희에게 주신 이름에
감사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