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감명깊은설교

김영봉 목사의 문화영성 프로젝트 '오두막'11 "지옥은 비어있는가?"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방송보기
http://70.182.190.24/2010new/sermons/2010/sermons_071810_lvod.asp

2010년 7월 25일 설교
<내 영혼의 오두막> 열 한 번째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지옥은 비어있는가?”
(Is Hell Empty?)
요한계시록(Revelation) 14:9-11

1.

오늘 읽어 드린 말씀은 지옥에 대한 성경 말씀 중에서 가장 공포감을 자아내는 말씀입니다. 요한이 본 환상 대로라면, 지옥에는 불과 유황이 끓고 있습니다. 지옥의 고통은 지상에서 경험한 그 어떤 고통과도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 것인데, 그 고통으로 인해 졸도하거나 코마 상태에 빠지거나 죽는 일이 없습니다. “밤에도 낮에도 휴식을 얻지 못할 것”(11절)이라고 합니다. 또렷한 정신으로, 영원히, 최대치의 고통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어느 정도 지나면 고통에 익숙해지기도 하는데, 지옥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지옥에 대한 이같은 이미지를 생각하다 보면, 적지 않은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한 마디로 요약하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하나님’이 몇 십년 동안의 죄에 대한 대가로 인간에게 영원한 고문을 가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최근에 연일 보도되는 어린이 성폭행범들을 생각하면 “그런 벌을 받아도 싸다!”라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지는 않아도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지옥과 심판에 대한 전통적인 가르침에 의문이 일어납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Brian McLaren)은 ‘영원한, 의식적, 고문’(eternal conscious torment)이라는 단어를 하나씩 따로 발음을 해 보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해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에도, 하나님의 정의에도,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성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보편 구원론’(universal salvation)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전통적인 믿음은 ‘제한 구원론’(limited salvation)입니다. 구원이란 내세에서의 지옥불에서 구원 받는 것이며, 천국행과 지옥행의 구분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느냐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입니다. 이에 반하여, ‘보편 구원론’은 “지옥은 존재하지 않거나, 있더라도 텅 비어 있다”는 입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를 믿든지 안 믿든지, 그의 종교가 무엇이든, 그가 선하게 살았든지, 악하게 살았든지, 하나님은 결국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위르겐 몰트만(Juergen Moltmann) 같은 신학자는, 하나님은 마침내 사탄과 악한 영들까지 변화시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만큼 강하고 질기다는 믿음입니다.


2.

폴 영은 소설 <오두막>에서 ‘보편 구원론’을 전제합니다. 이 소설이 가장 심하게 비난을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보편 구원론’은 이단적인 사상으로 정죄를 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오 두막에서 맥이 만난 사람은 셋이 아니고 전부 넷입니다. 성부 하나님을 상징하는 파파, 예수 그리고 성령을 상징하는 사라유 외에도 한 사람이 더 등장합니다. 소피아라는 여성입니다. 소피아는 성경에서 독립적인 인격체로서 활동하는 ‘지혜자’를 상징합니다. 소피아를 만나기 전까지 맥은 ‘제한 구원론’을 믿었고 불과 유황불의 지옥을 생각했습니다. 소피아는 맥을 심판의 자리에 앉게 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역할을 하게 합니다. 이 과정에서 맥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갑니다.
맥이 자신의 딸 미시를 보호하지 않은 것에 대해 하나님을 비난하자, 소피아가 맥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을 그렇게 쉽게 심판할 수 있다면 분명 이 세상도 심판할 수 있겠군요. 자, 그럼, 당신의 자녀 중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하늘과 땅에서 영원히 살아갈 아이를 선택해 보십시오. 딱 두 명만.”
맥이 깜짝 놀라 되묻습니다. “뭐라고요?”
소피아는 무심하게 말을 잇습니다.
“또 당신의 자녀 중에서 영원히 지옥에서 살아갈 아이 셋을 선택하십시오.”
이 말을 듣고 맥은 어찌 할 바를 몰라 합니다. 그의 표정을 읽으며 소피아가 말을 잇습니다.
“매 켄지,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믿고 있는 그 일을 당신에게 하라고 요구하는 것 뿐이에요. 하나님은 지금까지 잉태된 모든 인간들을 알고 있어요. 당신이 당신의 아이들을 아는 것보다 더 깊고 분명하게 알고 계시죠. 하나님은 그 아들이나 그 딸에 대해 아시기 때문에 그들을 각각 다르게, 하지만 동일하게 사랑하시죠. 그런데 당신은 하나님이 대부분의 인간을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으로부터 분리시켜 영원한 고문을 당하게 한다고 믿고 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맥이 마음을 털어 놓습니다.
“그 런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은 없었어요. 어떤 이유로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리라고 믿었던 것 같아요. 지옥에 대한 대화도 늘 추상적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내가 진정으로 ……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라고 여겼던 것 같아요.”
소피아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그쳐 묻습니다.
“하나님이라면 쉽게 하겠지만 당신은 그렇게 못한다는 뜻인가요? 매켄지, 당신의 다섯 아이 중 어느 셋을 지옥으로 보낼 겁니까? 요즘 당신은 케이트와 가장 갈등이 심해요. 당신에게 버릇없이 굴고 상처가 되는 말들을 했지요. 케이트야말로 첫 번째 후보이며 가장 타당한 선택이 아닐까요? 어때요? 매켄지, 당신이 심판관이니 당신이 선택해야 해요.”
맥이 고통과 번민 가운데서 대답합니다.
“나는 심판관이 되고 싶지 않아요. ……이 일을 할 수 없어요.”
소피아가 말합니다.
“해야 해요.”
맥이 대답합니다.
“할 수 없어요.”
“해야 해요.”
“나는 …… 하지 …… 않겠어요!”
“해야 해요.”
“할 수 없어요. 할 수 없다고요. 하지 않겠어요!”
맥은 고개를 떨구고 머리를 쥐어 뜯으면서 웁니다. 한 참을 운 후, 맥이 소피아에게 애걸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대 신 내가 가면 안 될까요? 영원히 고문받을 사람이 필요하다면 내가 대신 가겠어요. 그래도 될까요?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내 아이들 대신 내가 가게 해줘요. 제발, 그러면 좋겠어요. …… 제발, 이렇게 빌게요. 제발…… 제발……”
소피아는 맥을 끌어 안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당신은 예수님 같은데요. 매켄지, 당신은 심판을 잘 했어요. 당신이 몹시 자랑스러워요!”
맥이 반문합니다.
“아무 것도 심판하지 않았는데요.”
소피아가 웃으며 답합니다.
“아, 당신은 이미 심판을 했지요. 당신의 아이들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으며, 그 사랑 때문에 당신의 목숨을 내어 줄 수도 있다고, 당신은 심판했어요. 예수님의 사랑이 바로 그런 것이었죠. …… 이제 당신은 파파의 마음도 알게 됐어요. 자기 아이들을 완전하게 사랑하는 그 마음을.” (259-263쪽)
 

3.

이 대목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성부 하나님의 마음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망나니 자식이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아무리 극악한 범죄자라도 하나님이 그 사람을 당신의 자녀라고 생각한다면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 가장 깊은 곳까지 찾아가 구원해 내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맥도 소중한 자녀이고, 미시와 케이트도 그렇고, 미시를 살해한 연쇄 살인범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대목은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의 신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줍니다.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 ‘잔’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마 26:39). 예수께서 마셔야 했던 이 잔은 하나님의 진노의 잔입니다. 모든 인류가 마셔야 할 진노의 잔을 예수께서 대신 마신 것입니다. 맥이 “내 자녀들 중 누군가가 영원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내가 당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처럼, 성자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께 “인류가 당해야 할 영원한 형벌이 있다면 내가 대신 당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잔을 마셨고, 십자가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전에도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셨고 또한 그렇게 사셨습니다. 당시, 유대교인들은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구원 받을만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별하려 했습니다. 구원 받지 못할 사람으로 판단되면,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동정도 베풀 필요가 없다고 믿었습니다. 유대교인들은 그 사람들을 ‘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무슨 특별한 범법의 사실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기준으로 볼 때 함량 미달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율법의 기준으로, 그들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 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고 차별하고 정죄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셨습니다. 그분은 당시 유대교인들이 가까이 하기를 꺼리던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셨습니다. 당시 보수적인 유대교인들에게 사마리아 사람과 이방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접촉하면 부정 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시고 어울리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에게도 열려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대교인들은 장애인들을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찾아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민족을 모두 배반한 범죄자들로 여겨졌던 세리들이나 성을 파는 부정한 여인들을 예수께서는 내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보수적인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증오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너무나 강조하여 하나님의 정의를 짓밟는 것처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하나님의 거룩성을 하찮케 만드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행동하는 대로 내버려 두면, 종교도 필요 없고, 제사도 필요 없고, 마침내 믿음도 필요 없고, 다 각기 하나님을 무시하면서 제 마음대로 살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인들은 예수님을 비난했고 그를 침묵시키려 했습니다.  


4.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은 히틀러까지도 용서하신다”라고 말한다면, 나치 수용소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고 홀로 살아남은 사람은 치를 떨 지 모릅니다. 만일 누군가가 “하나님은 김일성까지도 용서하신다”고 말한다면, 한국 전쟁으로 인해 아픔을 겪은 사람들은 분노할 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딸을 성폭행과 살인으로 인해 잃어버린 맥에게, 하나님은 그 살인마까지도 용서하신다는 말이 가당치 않게 들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이방인도, 세리도, 장애인도, 성매매 여성도 용서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교인들로 하여금 치를 떨게 하고 분노를 느끼게 하였습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예수님은 ‘보편 구원’을 믿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아셨고 그 뜻을 받들어 사셨습니다. ‘제한 구원론’을 생명처럼 지키려는 유대교인들에게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그분은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당신 자신의 생명을 바쳐 모든 인류의 죄값을 치루셨습니다. ‘보편 구원’을 위해 당신의 전부를 바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구원의 은혜에 대해 어떻게 응답해야 옳겠습니까? 어떤 죄를 짓더라도 그 죄를 해결할 길이 마련되어 있으니, 마음 놓고 죄를 짓자고 하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살든 상관 없이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니, 내 마음 대로 살자 하겠습니까? 언제든지 십자가의 보혈로서 죄를 씻을 수 있으니, 죄에 대해 신경 쓰지 말고 거침 없이 살자 하겠습니까?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이 이렇습니다. 조금이라도 여유가 보이면 죄를 탐할 기회로 삼는 것이 우리의 타락성의 증거입니다.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강조하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이유는 우리에게 마음놓고 방탕할 구실을 주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을 차별하지 못하게 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떨어져 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은혜를 받고 그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려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습니다. 
‘보편 구원론’을 믿으신 것처럼 보이는 예수께서는 또한 끊임 없이 회개를 요청하셨습니다. 그분은 죄인으로 취급받던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율법의 의에 근거하여 구원 받았다고 자만하던 사람들에게도 “회개하라!”고 도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중 지옥에 대해 가장 자주 언급하신 분입니다. 그만큼 그분은 죄를 심각하게 다루셨고, 죄가 만들어내는 비참한 결과에 대해 염려하셨습니다. 그분이 죄인들을 찾아가시고 그들과 어울리신 이유는 죄를 하찮게 여기셨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죄에 대한 책임을 지신 것은 죄를 소홀히 여기도록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누구나’ 구원 받도록 길을 여셨지만, ‘아무나’ 구원받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가 어떤 선행이나 공로를 쌓아서 얻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누구나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받기를 거부한다면, 그리고 그것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에게 그 은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은 지옥에서의 심판이 때로 ‘영원한 고문’이라고, 또 때로는 ‘영원한 멸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한 결산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C. S. Lewis가 말한 것처럼, 그 결산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의 회복’입니다.

5.

그렇다면, ‘보편 구원론’과 소설 <오두막>의 입장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독교계에서는 ‘보편 구원론’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는 경향이 있는데, 성경에서 ‘보편 구원론’을 입증하자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반면, ‘제한 구원론’을 입증하자고 해도 수 많은 성경 구절들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둘 중 하나를 택하는 것은 성경 말씀의 일부를 무시하는 처사가 됩니다. 두 입장 모두 성경 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둘을 다 껴안는 길을 찾아야 하겠습니다.
많이 알려진 격언 가운데 “최선을 기대하고, 최악을 대비하라”(Expect the Best, and Be Prepared for the Worst)는 것이 있습니다. 이 격언에서 우리는 ‘보편 구원론’과 ‘제한 구원론’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지칠 줄 모르는 사랑의 능력으로써 마침내 지옥을 텅 비게 하실 것을 기대하는 것은 잘 못된 것이 아닙니다.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때, 사탄과 악한 영까지도 모두 변화시켜, 한 생명도 잃어버리는 일 없이, 한 영혼도 고통 속에 사는 일 없이, 완전한 구원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소망한다고 하여 잘 못 될 것이 없습니다. 그 소망은 바로 성부 하나님에게 있었고, 성자 예수님에게 있었으며, 성령께서 지금도 그 목표를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반 면, 최악을 대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옥과 지옥의 형벌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싶은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도 생각하기에 거북한 일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나에게 혹은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저는 그동안 목회를 하면서 믿지 않는 부모님의 임종을 두고 마음 아파하는 분들을 적지 않게 만났습니다. 그분들은 지옥에 대해 그동안 들은 이야기들을 기억하고는 두려워 떱니다. 자식으로 “그것은 그분들의 선택이었으니, 나로서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잊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경우에는 도대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그분의 능력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 것도 단정할 수 없습니다.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이 하나님에게도 최선이기를 바라고, 그 최선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으로든 모든 생명을 구원하시고, 마침내 지옥이 텅 비게 만드신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 생각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최악을 대비하고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최선이 하나님에게도 최선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장기판에 서 있는 말에게 좋아 보이는 것이 장기를 두는 사람에게도 좋아 보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지옥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이 단순한 경고가 아니라 실재일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옥에서의 ‘영원한, 의식적, 고문’이 지금 우리에게는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에서는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지옥을 조크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인터넷을 여행하다가 흥미로운 사진을 하나 보았습니다. 어느 건물 앞에서 교인들이 찬송을 하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 곁에 어느 중년 신사가 피켓을 들고 서 있습니다. (그분을 알아 볼 수 없도록 포토샵 처리를 했습니다.) 그분이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렇게 쓰였습니다. “예수 안 믿고 지옥 가겠습니다.” 아마도, 그 전도대원들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친 것 같습니다. 이 남자분은 전도대 옆에서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보고 한 참 웃었습니다만, 잠시 후,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찼습니다. 그 남자분이 지옥을 조크로 여기고 있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지옥이 조크가 아니라면, 그분이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를 생각하니, 그분을 위한 기도가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6.

이 문제에 대해 여러분의 입장은 어떤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으며, 그분을 모르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지옥불 속에서 영원히, 매 순간, 고문을 당할 것이라고 믿습니까? 그렇게 믿기에 ‘보편 구원론’에 대해 분노하십니까?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이단자들로서 모두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필경 여러분 자신에게는 천당행이 이미 결정되었고 그 결정은 결코 철회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렇게 확신하기에 지옥불의 심판이 그토록 공포스럽다는 사실에 대해 마음 놓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 자신의 구원에 대한 그 확신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만일, “나는 부족하여도 영접하실 터이니 영광 나라 계신 임금 우리 구주 예수라”는 찬송가 545장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라면,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감격하게 만들 것입니다. 나에게는 구원받을 아무런 공로가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로 말미암아 구원 받았음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구원에 대해 확신하기는 하되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의 영혼이 지옥불에서 영원히 고통 받을지 모르는 상황에 대해 그렇게 무심하게, 혹은 그렇게 거침없이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감당할 수 없는 구원의 은혜’를 모두가 누릴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하고 기도하며 전도할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그동안 ‘제한 구원론’ 때문에 불편하셨습니까? 예수 외에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 때문에 그리고 지옥에서의 영원한 고문에 대한 가르침 때문에 불편했습니까? 그래서 소설 <오두막>을 읽으면서 해소감을 느끼셨습니까? 저도 공감합니다. 이 편협해 보이고 배타적으로 보이는 교리에 대해 불편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진실로 영원하고 참되다면, 그 사랑은 결국 모든 죄인을 구원해야 마땅하고, 심지어 사탄과 악한 영까지도 변모시켜 지옥을 텅 비게 만들어야 마땅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보편 구원론’은 듣기에는 참 좋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심각한 잘못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하찮게 대하게 만듭니다. 자신이 어떻게 살든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게 합니다. 죄를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하시기에 어려울 정도로 큰 죄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눈 감아 주실만큼 작은 죄도 없음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에게는 그 어떤 죄도 상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듭니다. 한 생명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구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도 역시 그같은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야 마땅합니다.
자 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보편 구원론’을 믿는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셈이 됩니다. 자신은 사랑에 인색하면서 하나님은 사랑에 너그럽기를 바란다면, 그같은 모순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진실하게 경험하면 달리 행동합니다. 그 사랑으로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 이 세상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더욱 사랑하고, 더욱 전도하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 더욱 힘을 씁니다. 지옥불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너무도 좋아서 그렇게 합니다. 봉사하고 헌신하고 때로 생명을 바치는 이유는 지옥에서의 형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그리고 그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는 사람이라면, ‘보편 구원론’을 말해도 별 문제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7.

어떤 사람이 그런 말을 했습니다. “천국에 가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 어린 소녀가 히틀러를 품어 안고 있을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은 바로 이런 미래를 꿈꿉니다. 그것이 예언자들이 성령의 감동에 젖어 꾸웠던 꿈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꾸셨던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지난 2 천 년 동안 수 많은 거룩한 사람들이 꾼 꿈입니다. 그 꿈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로 인해 자주 이 땅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양아들로 삼았을 때,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코리텐 붐(Corrie Ten Boom)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과 언니에게 성희롱을 했던 간수를 끌어 안았을 때, 그 꿈은 이루어졌습니다. 이 꿈은 장차 천국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진 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기적 때문입니다. 히틀러와 김일성이 천국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그리고 어린 소녀들을 골라 성폭행을 하고 살해한 연쇄 살인범도 하나님의 품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저와 여러분도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어떻게 그같은 죄인들과 나를 비교하느냐?”고 화를 내시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을 모르거나, 여러분의 진짜 모습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성을 진실하게 깨닫는다면, 우리도 바울처럼 “나는 죄인의 우두머리입니다”(딤전 1:15)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면, 누구나 이 은혜를 입어야 하고, 또한 입을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구원에 감사하고, 그 구원의 은혜가 모두에게 미칠 수 있도록 전도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입니다. 그것이 “최선을 기대하면 최악을 대비하는” 자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그 감당할 수 없는 사랑을 그나마 감당하는 길입니다.
저와 여러분 모두가 이같은 자세로 일관되게 믿음의 길을 걸아가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주님,
십자가의 그 사랑을 알기 원합니다.
저희에게 그 사랑 알게 하시고
저희에게 그 사랑 전하게 하소서.
지옥이 텅 비어지기를 기대하며
저희 각자가 신실하게 살고
또한 부지런히 복음을 전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