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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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오두막> 열 두 번째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목사
“땅은 하늘로 가득하다”
(Earth Is Crammed with Heaven)
창세기 (Genesis) 28:10-22
1.
오늘로서 소설 <오두막>을 가지고 나눈 열 두 번의 말씀을 마칩니다. 그동안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경청해
주시고 함께 고민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은 마지막으로 이 소설이 독자들에게 제시하는 ‘세계관’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영어 표현에 “last but not least”라는 것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말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중요성이 가장 낮은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오늘 나누는 주제가 그렇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루는 주제이기는 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주제입니다. 작가인 폴 영은 그 자신의 ‘영혼의 오두막’에서 하나님을 참되게 만남으로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뜹니다. 그리고
이 소설을 통해 그 새 세상을 보도록 독자들을 초청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맥이 오두막에서 지낸 것은 단지 몇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간의 대부분을 깊은 잠으로 보냈는데, 아주 특별한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그는 2박 3일을 보내는데,
어느 대목에선가, 죽은 미시와 다른 두 자녀 즉 케이트 그리고 조시가 평화롭게 함께 어울려 노는 모습을 봅니다.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꿈을 통해 서로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롭기도 하고 혼란스럽기도 합니다. 그래서 맥이 예수님에게 묻습니다.
“나에게 설명 좀 해 주세요. 지금은 한낮인데, 내 아이들이 꿈을 통해 이곳에 와서 놀고 있었다구요?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죠? 이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도 있나요? 아니면 그냥 꿈일 뿐인가요?”
예수님은 웃으며 대답하십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묻지 말아요. 꽤 어려운 문제예요. 시간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는 문제니까요. 사라유의 전문
분야죠. 당신도 알다시피, 시간을 창조하신 분은 시간의 한계를 초월하여 행동하시지요. 궁금하면 그녀에게 물어봐요.”
맥이 대답합니다.
“아뇨. 좀 더 두고 보겠습니다. 좀 궁금한 것 뿐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이 중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도 있나요?’라고 물었죠? 이 모든 일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일입니다.”
잠시 뜸을 들인 후 예수님이 말을 잇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는 것이 더 좋을지 몰라요. ‘실제로 일어난다는 말이 무슨 뜻인가요?’라고 말입니다.”
맥이 고개를 흔들며 대답합니다.
“전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만약 모든 것이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까요?”
맥이 답합니다.
“글쎄, 좀 실망할 것 같은데요.”
예수님이 반문하십니다.
“왜죠? 맥, 당신이 인식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이 모든 일들은 ‘실제로’ 일어난 일들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살면서 경험한 일들보다 훨씬 더 실제적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2.
이 대화를 통해 저자는 ‘현실’과 ‘비현실’에 대해, 혹은 ‘실제로 일어난다’는 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독자들을 자극합니다. 우리는 보통 손에 만져지고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물질이나 육신에
일어나는 변화만을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만이 참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꿈에서 일어난 일은 실제가
아니라고(unreal) 생각합니다. 영적인 체험은 실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손에 만질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으니
하나님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런 것을 믿는 사람들은 비현실적이라고(unrealistic) 간주합니다.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서 이같은 현실 인식이 옳은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같은 현실 인식을 ‘유물론적
세계관’(materialistic world-view)라고 부릅니다. 이 세계관은 약 3백년 전부터 눈부시게 발전해 온 과학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과학이 발달되기 전에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신의 행동으로 간주했습니다. 천둥과 번개를 신의 분노로
생각했고, 무지개를 신의 화해의 손짓으로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 영이 충만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과학은, 그런 것들이
단순한 자연 현상이라는 사실을 밝혀 냈습니다. 과학자들이 아직 그 원인을 명확히 밝히지 못한 현상들도 있지만, 그것들도 언젠가는
자연 현상으로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과학이 자연의 비밀을 하나씩 밝혀내면서 기독교와 과학은 적대 관계에
서게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하나님의 행동’이라고 믿던 것들을 과학이 ‘자연 현상’으로 설명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는 수 많은 이적들에 대해 과학은 기적이 아니거나, 거짓이거나, 둘 중 하나라고 판정했습니다. 즉,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면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고, 자연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 이야기들은 거짓이라고 결론을 지은 것입니다.
과학이 절대적인 진리의 기준으로 자리를 잡고 나자,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기독교의 믿음을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인들조차 하나님께서 세상을 주관하신다는 세계관을 그대로 붙들고 살기에 힘겨워졌습니다. 모든 것이 자연
법칙에 따라 움직여지고 있는 이 세상에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는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설사 존재한다 해도, 그 존재에 신경
쓰고 살 이유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 시대의 최고의 과학자라고 칭송받는 스테펜 호킹(Stephen Hawking)이 말하는
것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그동안 우주의 기원을 과학 법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것이 자연 법칙으로 설명된다면, 우주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신을 들먹일 필요가 없겠지요. 신이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신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3.
하지만 이제 상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 전환점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대략
세계 2차 대전이 끝난 이후로 사람들이 세계를 보는 눈이 서서히 변화되기 시작합니다. 학자들은 그 이전을 ‘현대’(modern
era)라고 부르고, 그 이후를 ‘현대 이후’(post-modern era)라고 부릅니다. 무엇이 이같은 변화를 만들어냈습니까?
첫째, 과학자들이 달라졌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이후로 과학은 점차로 진리를 독점하고 있다는
교만을 내려 놓게 되었습니다. 양심적인 과학자들은 과학이 절대 진리를 향해 접근해 가려는 노력일뿐이라는 사실을 겸허히 인정합니다.
과학적인 연구가 성숙해 지면서, 자연 법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과학자들 중에 기적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아졌습니다. 독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칼 야스퍼스(Karl
Jaspers)는 이같은 상황 변화를 두고, 현대 과학 앞에서 신학자들이 무릎을 꿇었는데, 현대 이후의 과학자들이 무릎 꿇은
신학자들을 일으켜 세워 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이성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도 무너졌습니다.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이성은 한 없이 성숙하고 성장할 것이며, 인간의 이성이 활짝 피어나는 날이 되면 이 땅에 지상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1차와 2차 세계 전쟁이 일어났고, 크고 작은 전쟁과 테러와 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또한 기계 문명과 산업 발달로 인해 인간의 정신과 도덕은 점점 파괴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겪으면서 인간의 이성이 무한히
성숙하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믿을만한 안내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같은 변화를 겪으면서, 이 세상은
물질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법칙에 따라 돌아가는 기계와 같은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기적은 일어날 수 없다고 함부로
단정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 알면 알 수록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진다는 진리를 인정하는 현대 과학자들이 많습니다. 물론,
그같은 겸손함이 자동적으로 과학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학이 절대 진리를 독점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종교와 과학은 이제 서로를 친구로 대하며 대화를 나눌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과거보다 더 강해졌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고 영혼을 믿고 천국을 믿는 것이 더 이상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으로 무시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무시하는 과학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성숙하고 겸손한 과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정신 분석학자들은 꿈에서 일어나는 일이
현실과는 다른 차원에서 일어나는 엄연한 현실임을 증명해 놓았습니다. 뇌와 몸 속의 화학 반응과는 전혀 상관 없이 일어나는 영적
체험이 있음을 인정하는 과학자들이 늘고 있습니다. 뇌의 화학 반응 때문에 영적 체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체험이 뇌의
화학 반응에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따라서, 이제 믿는 사람들은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성경적인 세계관을
다시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이 우주의 운행과 인간의 삶에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별로 없다는 생각을 수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세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지켜 보고 계시다가 필요할 때가 되면 가끔씩 기적을 통해 개입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며, 우리의 일상에 늘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세계관입니다.
4.
맥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대목을 폴 영은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현실’과 ‘비현실’의 차이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하게 합니다.
그는 낡은 문을 열고 다 망가진 현관 베란다로 달려 나갔다. 오두막은 예전처럼 부서지고 황폐한 상태였고, 문과 창문은 모두 부서진 채 녹이 슬어 있었다. 윌리의 지프차가 서 있는 곳까지 이어진 오솔길과 숲은 겨울 색이 완연했다. 엉킨 가시나무와 덤불 너머로 호수의 모습이 겨우 보였다. 선착장은 거의 다 물에 가라앉고 다리탐과 부속물 몇 개만 서 있었다. 드디어 현실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현실이 아닌 세계로 돌아온 것만 같아 혼자 씩 웃었다. (390쪽)
맥에게는 꿈 속에서 경험한 세계가 더 현실처럼 느껴졌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맥에게는 여러 가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의 마음을 납덩이처럼 짓누르던 ‘거대한 슬픔’이 사라졌고, 하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살아났고,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원한이 풀어졌고, 인간 관계에 있어서 누구에게나 마음을 다하게 되었습니다. 그 경험으로
인해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아니지만, 그를 알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만큼 분명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맥과 비슷한
영적 체험을 한 사람을 성경에서 찾자면, 야곱이 가장 유력한 후보가 될 것입니다. 그는 단 몇 초 상관으로 쌍둥이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납니다. 고대 사회에서 첫째 아들의 특권은 대단했습니다. 몇 초 늦게 태어난 것으로 인해 그 많은 특권을 포기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에게는 부당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첫째 아들의 특권을 빼앗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입니다. 그 결과로 그는 아버지의 집에서 살 수 없게 됩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그를 친정 오빠가 사는 하란으로 피신시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민의 삶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야 했던 야곱은 심사가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꾸 꼬여만 가는 운명에 대해 화가 났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인생이 얼마나 더 심하게 꼬여갈지, 불안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유일한 협력자인 어머니를 떠나 어떻게 홀로
살아가나, 염려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번민과 고민을 안고 낯선 땅 하란을 향해 가고 있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그 날도 그는
돌을 베개로 삼아 누워 이 생각 저 생각에 잠을 못 이루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잠시 잠에 빠졌고, 신비로운 꿈을
꿉니다.
꿈 속에서 야곱은 자신이 선 땅으로부터 하늘까지 층계가 서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층계 위에는 천사들이
보이는데, 어떤 천사는 하늘로 올라가고, 어떤 천사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옵니다. 또 보니, 그 층계 위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주, 너의 할아버지 아브라함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요, 너의 아버지 이삭을 보살펴 준 하나님이다. 네가 지금 누워
있는 이 땅을, 내가 너와 너의 자손에게 주겠다. 너의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아질 것이며, 동서 남북 사방으로 퍼질 것이다. 이
땅 위의 모든 백성이 너와 너의 자손 덕에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며,
내가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 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내가 너를 떠나지 않겠다. (13-15절)
너무도 선명하고 특별한 꿈을 꾸웠을 때, 우리는 깨어나서 그 꿈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야곱도 그랬습니다. 한 참을 골똘히 생각한 후, 야곱은 이렇게 혼잣말을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곳에 계시는데도, 내가 미처 그것을 몰랐구나.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 곳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다. (16-17절)
야곱의 세계관이 뒤집혀지는 순간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의 집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예배했을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을 만난 이야기를 들으며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은 아무 이유도 없이 몇 초 상관으로 둘째로 태어나게 하시고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스테펜 호킹이 “하나님은 주사위 놀이를 하시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때로 주사위를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던져 버리기도 하신다”(God not only plays dice. He sometimes throws the dice where they cannot be seen)라고 했는데, 야곱이 생각하는 하나님도 그와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없이 자신의 인생을 도모해 왔습니다.
5.
야곱은 이 꿈을 통해서 하나님을 새롭게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나 아버지 이삭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자신에게도 관심을 두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주사위 놀이에 자신이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인생에 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 이전까지, 야곱은 현대
과학을 배운 적도 없는데 유물론적인 세계관을 믿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베델에서의 꿈을 통해 그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세계에 대해
눈을 떴습니다. 그가 누웠던 그 곳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생각하니 두려워졌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며, 따라서 자신이 선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하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자신은 하늘과 땅의 경계선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리적인 세계와 영적 세계의 경계선에 서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베델에서 야곱은 물리적인 세계보다 더
실제적인 영적 세계에 눈을 뜹니다.
깨달음이 여기에 이르자, 야곱은 베고 자던 돌을 세워 그곳에 기름을 붓고 예배를
드립니다. 아버지의 집에서 그는 많은 예배를 드렸으나 형식 뿐이었습니다. 루스라는 이름의 낯선 땅에서 야곱은 처음으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를 드렸고, 그곳의 이름을 베델이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하나님께 약속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20-22절)
베델에서 세계관이 뒤집어진 이후, 야곱의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졌습니다. 베델 이전까지 야곱은 인생의 주인은 자신이며
인생의 행복은 물질에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하지만 베델 이후에 그는 인생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며 인생의 행복은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가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약속한 것은 그의 인생의 주인은 하나님이며 그의
참된 행복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신앙 고백의 표시입니다. 야곱은 그 신앙 고백대로 살았습니다. 그 결과, 그가 그렇게도 바라던 인생
역전이 이루어졌습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고 홀로 성공하는 인생 역전이 아니라,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인생 역전을
이룬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맥처럼 혹은 야곱처럼 영적 세계를 보고 그 세계를 진실로 믿는다면, 우리의 예배가
달라질 것입니다. 의무감으로, 형식적으로 혹은 무덤덤하게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마음 다해, 기쁨으로, 그리고 정성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만져지지도 않는 영적 세계를 믿는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예물이 달라질 것입니다. 인사
치례로 드리지도 않을 것이며, 마지못해 드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더 이상 습관적으로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 그 영원한 가치를 위해서 드리는 물질임을 안다면, 드릴 때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할 것이며, 드리는 것으로 인해 큰 기쁨을 맛
볼 것입니다. 영적 세계를 믿으면, 기도가 달라집니다. 찬양이 달라집니다. 교회에서의 봉사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우리의 영적 생활이 달라지면, 우리의 일상 생활도 달라집니다.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과 사회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곳에서도
하나님이 활동하고 계심을 알고 그분과 함께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살아나갈 때, 가정은 교회가 되고, 직장에서 하는
일은 예배가 되며, 사회에서 행하는 모든 일이 예배가 되고 선교가 되며 전도가 됩니다. 세계관이 바뀌면 인생관이 바뀌고, 인생관이
바귀면 삶의 질이 바뀝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영적 생활입니다. 그렇게 이 땅에서 천국을 사는 것이 바로 구원의 삶입니다.
그것이 성령께서 오늘 우리의 마음을 만져 일으키려 하시는 변화입니다.
6.
소설 <오두막>의 마지막에 인용된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Elizabeth Barrett Browning)의 싯구가 참 인상적입니다. ‘Aurora Leigh’라는 제목의 장편시에 나오는 한 구절입니다.
땅은 하늘로 가득차 있다.
모든 평범한 나무들이 하나님과 함께 불타오른다.
그러나 오직 볼 줄 아는 자만이 신발을 벗으며,
다른 이들은 나무 주변에 몰려 앉아 검은 딸기나 줍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느 편에 속하십니까? 육신과 물질만을 보고 그것을 즐기기에 급급한 유물론자들입니까?
아니면, 떨기 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신발을 벗어 들고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께 경배 드리는 사람들 편에 있습니까? 여러분은
베델 이전의 야곱처럼 하나님 없는 세상에서 스스로의 인생 역전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델 이후의 야곱처럼
하나님으로 충만한 이 세상에서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고 있습니까?
부디, 떫떠름한 검은 딸기 한 줌을 얻는 것으로 만족하는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온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의 현존에 눈 뜨고, 물적 현실과 영적 현실을 모두 품고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주님을 보게 하소서.
저희 눈을 열어 주시어
영적 세계를 보게 하소서.
산딸기 한 줌으로 만족하지 말게 하소서.
주님의 임재를 보고 떨게 하시며
주님과 함께 춤추며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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