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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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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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늘이 교회력(church calendar)으로 강림절 혹은 대림절(Advent) 첫 번째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4주간이 강림절이고, 성탄일(Christmas Day)이 지난 다음 12일 후로부터 주현절(Epiphany)이 이어져 사순절(Lent)까지 지속됩니다. 강림절 기간 동안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을 축하하고 또한 장차 오실 것을 기다립니다. 주현절 기간 동안에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류에게 나타나신 것을 축하하고 그 의미를 되새기는 기간입니다. 저는 오늘부터 주현절이 끝나기까지 요한복음 1장의 말씀을 읽어가면서 강림절과 성탄일 그리고 주현절의 의미를 묵상해 보려 합니다. 이 연속설교의 제목을 ‘내 곁에 온 하늘’(Heaven Descended Unto Me)이라고 잡았습니다. 이 단기 설교 시리즈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성경 안에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이 네 개 있습니다. 그것을 ‘복음서’(The Gospel)라고 부르는데,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이 그것입니다. 네 개의 복음서는 서로 다른 네 사람이, 서로 다른 독자들을 위해,
서로 다른 환경에서, 그리고 서로 다른 시각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쓴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와 유사합니다. 네
명의 서로 다른 복음서 저자가 자신이 체험했고 또 많은 사람들이 체험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전하기 위해 그린 초상화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쓰면서 한 편으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기 위해 힘썼지만, 동시에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 의미를 알리려는 관심이 더욱 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건에 대한 기록이 복음서마다 약간씩 다르기도 하고,
사건의 순서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화가가 초상화 주인공의 이마를 실제보다 좁게 그림으로써 그 사람의 편협한 성품을
그리려고 한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마가복음의 저자는 유대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세례 요한의 사역과
분리하여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반면, 마태복음의 저자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족보로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는 선민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믿은 것입니다. 이 복음서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쓰여졌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수긍이 가는 일입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는 세례 요한의 잉태 이야기부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는 요한과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마치고 공생애 이야기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족보를 써 놓았습니다. 마태복음 1:1-17에 나오는 족보와 달리, 누가복음
3:23-38의 족보는 아브라함을 거쳐 노아로, 노아를 거쳐 아담에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인류의
역사와 연결시켜 보아야만 한다는 믿음이 누가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이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즉 이방인을 대상으로 쓰여졌기
때문에 이같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2.
또 다른 한 편, 요한복음의 저자는 더 멀리 내다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쓰면서 첫 머리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그 ‘말씀’은 하나님이셨다. 그는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모든 것이 그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으니, 그가 없이 창조된 것은 하나도 없다. (1-3절)
성경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라면,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라는 첫 문장을 읽으면서 창세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이야기를 쓰면서 인류의 역사가 아니라 우주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세례 요한과 연결시키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고,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선민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으며,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전 인류의 역사와 연결시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주 역사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요한복음의 첫 문장에 나오는 ‘태초에’라는
말은 창세기의 첫 머리에 나오는 ‘태초에’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말하는 ‘태초’는 우주가 창조되는 시점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조 이전을 가리킵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분,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존재하던 그 때를
가리킵니다. (저는 지금 언어의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존재하는 신의 상태를 시간과 공간의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어폐가 있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말입니다. 하지만 다른 언어가 없으니, 이렇게 밖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습니다.) 여하튼, 요한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천지 창조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첫 머리를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분이 계십니다. 중학교 때 영어 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수업 중에
지루한 느낌이 있을 때마다 철학 이야기와 종교 이야기를 해 주곤 하셨습니다. 당시, 그분은 아무런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참다운 진리를 찾는 구도자라는 느낌을 진하게 풍겼습니다. 특별히 기독교에 많은 관심을 보이시며, 때로 교회 다니는 아이들에게
의견을 묻기도 하셨습니다. 그 선생님이 하신 말씀 중에 잊혀지지 않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교회는 다니지 않지만 성경은
한 번 읽어 보았거든. 그런데 내게 가장 궁금한 성경 구절이 있어. 요한복음 1장 1절이지. 태초에 말씀이 있었는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 구절에 뭔가 중요한 비밀이 담겨 있는
것 같은데, 아무리 책을 뒤져봐도 알 수가 없거든. 너희 중에 대답할 사람, 있어? 그 의미만 알면 교회에 나갈 것 같은데
말이야……”
그 선생님은 학생들로부터 폭 넓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안타까웠습니다. ‘아, 저런 선생님이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나 많은 아이들에게 영향을 끼치실까? 전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전도가 될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이
교회에 나가시도록 저라도 요한복음 1장 1절의 의미를 설명해 드리고 싶었지만, 당시 제게는 그만한 성경 지식이 없었습니다. 지금도
그 의미를 다 알 지 못합니다. 성령께서 요한에게 영감을 주셔서 이렇게 쓰게 했을 때, 성령께서 전달하려 했던 메시지가
무엇인지, 저는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오늘 저와 여러분이 확인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과, 그분과
함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예수님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창조되기 이전,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서 스스로 존재하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생각해 보아야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다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석가모니, 공자,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의 반열에
오른 사람입니까? 인생의 길에 대해 훌륭한 가르침을 주신 ‘인생의 스승’입니까? 인류의 정신을 깨운 선각자입니까? 이스라엘의 개혁
정신을 이은 위대한 예언자입니까? 혹은, 불의와 싸운 위대한 개혁자입니까?
여기 열거된 칭호들은 다 각각 나름대로 예수님의 일면을 말해줍니다. 하지만 그 모든 칭호들을 다 합해도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입니다.
그
이상이 무엇일까요? 성령께서는 요한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기 위해 땅만 보지 말고 하늘을
보라고 말입니다. 인간만을 생각하지 말고 우주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창조 세계만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우주 만물이 창조되기 이전에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존재했었고,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온 우주를
창조하는 데 참여했으며, 그 우주를 품어안고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다스리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 차리라는 것입니다.
여러
분, 우리가 사는 이 지구, 지구가 사는 태양계(solar system), 태양계가 사는 은하계(milky way), 그리고 그
은하계가 사는 이 우주(universe)가 얼마나 광대한 것인지 아십니까? 2천 년 전, 예루살렘 성 바깥에 있는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나사렛 청년 예수가 우주의 창조와 관련이 있으며, 실은 우주의 창조 이전부터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이라고 믿는 사람이, 우리가 사는 이 우주가 얼마나 거대하며 신비로운 것인지를 안다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느껴 보기 위해, 잠시, 허블 망원경이 찍은 사진을 통해 우주 여행을 다녀 오겠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로부터 시작하여 태양계로, 태양계에서 은하계로, 그리고 은하계와 같은 수많은 소우주로 구성되어 있는 우주 전체로 여행할
것입니다.
<The Size of the Universe 비디오>
어떻습니까? 마지막에 본 우주 전체의 모습은 지금의 천체 관측 기구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허블 망원경보다 더
발달된 기계가 나오면 얼마나 더 놀라운 광경이 나타날지 모릅니다. 비디오에서 보았습니다만, 우리가 사는 태양계를 포함하고 있는
소우주(galaxy)를 가리켜 은하계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사는 은하계 안에 지구와 같은 별이 약 2 천 억 개(200
billion)라고 합니다. 현재 관측할 수 있는 우주 안에 은하계와 같은 소우주의 수가 천 이백 오십 억 개(125
billion)라고 합니다. 어느 우주과학자의 계산에 의하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별의 수는 지구상의 모든 해변에 있는 모래알의
수와 맞먹는다고 합니다.
별의 수도 엄청납니다만,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면 더욱 놀랍습니다. 별과 별 사이의 거리를
말할 때, 마일이나 킬로미터를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단위가 너무나도 커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것이
‘광년’(light year)입니다. 빛이 1년 동안 가는 거리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빛은 1초에 186,000 마일을 갑니다.
그 속도로 1년 동안 가는 거리면 짐작하시겠습니까?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이 약 4 광년의 거리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별과
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가늠이 되십니까?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모래알의 수만큼이나 많은 별들이 적어도 4
광년 이상의 거리를 두고 움직이고 있는 우주를 생각해 보십시오. 숨이 멎을 듯하지 않습니까?
4.
성경은, 이 모든 우주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는 이 모든 것이 ‘빅 뱅’(Big
Bang)으로부터 시작하여 진화되었다고 믿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영어로 ‘빅 뱅’이라는 말은 ‘거대한 폭발’을 가리킵니다. 우리
말로 하면 ‘큰 뻥’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창조론을 믿는 사람들은 빅뱅 이론을 이름 그대로 ‘큰 뻥’(big lie)이라고
보고,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창조가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창조냐 진화냐, 혹은 창조냐 빅뱅이냐의 질문을 두고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그게 아닙니다. 우리는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꿔야 합니다.
“빅뱅과 진화 과정의 배후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있었다고 믿을 것인가, 아니면 빅뱅과 진화가 우연히 일어났다고 믿을 것인가?”
창조를 믿는다는 말은, 만일 이 모든 우주의 시작이 최초의 빅뱅으로터 시작되었다면 그 폭발을 시작시킨 보이지 않는 손이 있었을
것이며, 진화가 엄연한 진실이라면 그것도 역시 창조의 방법이었을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는 과학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과학 지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창조를 더 확신하는 사람도
있고, 과학 지식에 대해서 하나도 알지 못하는 사람 가운데도 창조를 부정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학적인 개념이 전혀 없던 시대에도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조를 믿느냐 안 믿느냐는 개인의 선택입니다. 자신의 삶을
관찰하고 세상을 관찰하며 나름대로 발견한 단서에 근거하여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신앙 고백(confession)이라고
부릅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생각할 때 숨이 멎을 듯한 감격을 느껴야 합니다. 요한이
이 글을 쓸 때, 지금 우리가 허블 망원경을 통해 보는 우주의 모습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저 옛날 다윗처럼 혹은 별의
시인 윤동주 선생처럼 마음으로 그 광활한 우주의 모습을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영적 거장들은 이렇게 기도와 묵상을 통해 우주의
광대한 넓이와 그 신비를 꿰뚫어 보았습니다. 파스칼이 그랬고, 유영모 선생이 그랬습니다. 영적 감각이 둔화된 우리는 앞에서 본 것
같은 그림을 보아야만 그 광대함과 신비를 느껴 압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힘입어 ‘아빠’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이 저 어마어마한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마치 떨기나무 불꽃 앞에 선 모세처럼 경외감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나사렛의 목수 출신의 그 청년 예수가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그 창조의 과정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그분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엄청난 영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모래알처럼 많은 별들이,
수 광년의 거리를 두고, 적어도 시속 48만마일의 상상할 수 없는 속도로 순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것을 설계하고
지으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그 위대하심, 그 질서, 그 신비, 그 아름다움을 느끼며 거룩한 떨림에 사로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창
조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이 우주의 무변광대한 모습만을 생각하면 나의 존재라는 것이 참으로 초라해 보입니다. 우주 전체에서
은하계는 하나의 점과 같이 작고, 은하계 안에서 태양계도 하나의 점으로 보일 뿐이며, 태양계 안에서 지구도 보일락 말락한 작은
점에 불과합니다. 지구 안에서 나라는 존재는 60억이 넘는 사람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니 우주 전체를 생각할 때 나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너무도 무가치해 보입니다. 크게 보면, 우리의 삶이나 하루살이의 삶이나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모든 것이 우연히 생겨난 것이고, 우연히 움직여지는 것이라면, 나의 인생도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그 엄청난 우주를 계획하시고 지으시고 운행하시는 분이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그리고 그분이 지금 나를
아시고 돌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나는 그것으로 인해 저 광활한 우주보다도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나사렛 예수는
단지 하나의 인간이 아니라, 영원과 시간을 잇고 하늘과 땅을 잇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면, 그분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나는
내가 믿는 그분으로 인해 그 존재와 의미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저 무변광대한 우주를
지으신 위대하신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며, 온 우주를 합친 것보다 더 커다란, 우리로서는 그 모습을 짐작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연결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5.
여기까지 들으시고, 혹시 이렇게 묻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 참 좋은 이야기입니다. 가슴 뛰는 이야기이군요. 그런데 그것이 매일 생활 현장에서 전쟁을 치뤄야 하는 나에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고
등학교 시절에 제게 지구과학(astronomy)을 가르치신 선생님이 생각납니다. 키가 아주 작고 땅딸한 체격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지구과학을 이야기하다 보면, 거리와 시간과 크기를 말하는 단위가 일반적인 단위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천문학적
숫자’(astronomical number)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습니까? “은하계에서 가장 가까운 소우주(galaxy)는 약
2백2십만 광년의 거리에 있습니다”라는 식입니다. ‘2백2십만 광년의 거리’는 우리에게는 거의 영원처럼 느껴질 거리입니다. 그같은
천문학적 수를 들을 때, 우리는 “와!”하고 탄성을 지르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 선생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야, 우리같이
지구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너희 하고는 차원이 달라. 같은 급으로 보지 말란 말이야.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차원이 달라.
뻥을 쳐도 크게 친단 말이지. 그러니 큰 사람이 되려면 지구 과학을 전공으로 선택해 봐.”
그 선생님께서 실제로 얼마나 크고
대범하게 사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분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아빠’라고 부르는 하나님이 저 광막한 우주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처음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분임을 믿는다는 것은 하루 하루
일터에서 전쟁을 치루며 사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삶을 살 수 있어야 하고 또한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것 같은데 다 가진 사람처럼 행동하고,
마치 뭔가 든든한 백이 있는 것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겪었습니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 보십시오.
우리는 많이 참으면서, 환난과 궁핍과 곤경과 매 맞음과 옥에 갇힘과 난동과 수고와 잠을 자지 못함과 굶주림을 겪습니다.(고후 6:4-5)
그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이 누구이며 자신이 주님으로 섬기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우리는 무슨 일에서나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합니다”(고후 6:4)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처신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계속하여 바울 사도가 하는 말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순결과 지식과 인내와 친절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 일을 합니다.
우리는 오른 손과 왼 손에 의의 무기를 들고, 영광을 받거나, 수치를 당하거나, 비난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그렇게 합니다.
(6-8절)
바울 사도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타협하거나 결탁하지도 않았습니다. 속이거나 배반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진실하고 정의롭게 그리고 사랑과 자비로써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랬기에 세상적으로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겸손한 당당함으로 살아갔습니다. 그같은 삶의 모습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속이는 사람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는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 같으나 죽임을 당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고, 근심하는 사람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8-10절)
그러니, 태초에 말씀이 계셨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가 그분에 의해 지어졌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 하나님이 숨이 막힐듯이 놀라운 우주를 지으신 분이요,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 하나님과 함께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다스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루 하루 전쟁을 치뤄야 하는 상황에 살고 있기에 그 믿음이 더욱 절실합니다.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전쟁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믿음의 눈을 견고하게 태초의 그 시간에 고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6.
강림절 첫 번째 주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감사하며 또한 장차 오실 것을 기다리며 마음을 준비하는 이 주간, 우리는
요한의 영감어린 말씀을 통해 영원으로부터 온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2천 년 전에 일어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지를 더듬어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원에 닿고 무변광대한 우주의 공간을 뛰어 넘는 엄청난 사건임을
확인했습니다. 그것을 믿고 안 믿고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만들어 낼 것인가를, 바울 사도의 고백을
통해 또한 확인했습니다.
이제, 영원으로부터 온 메시지에 대해 어떻게 응답할지는 저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이 선택은 우리의
영원을 좌우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행동에 차별성을 만들어 낼 것이며, 마침내 영원에 그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현기증이 날 정도로 광활한 우주에서 실종되고 말 것인지, 아니면 그 우주를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에 잡힐 것인지, 그것은 저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부디, 바른 선택과 결단으로 통해, 이 땅에서 바울처럼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마침내 하나님의 그 신비로운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위대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을 너무나도 작게 생각해 왔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도 작아져 버렸습니다.
저희의 눈을 밝혀 주시고
저희에게 믿음을 주소서.
주님의 위대하심에 눈을 뜨고
저희에게 주신 유산에 눈 뜨게 하소서.
그 믿음으로 이 땅을 살게 하시고
영원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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