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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김영봉 목사의 문화영성 프로젝트 '오두막' 5 (Evil Is a Reality)


상처의 치유, 악의 문제, 용서의 문제, 삼위일체 등 그리스도인의 영적 생황에서
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연속설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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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성 프로젝트 <내 영혼의 오두막 5>

“악은 현실이다”
(Evil Is a Reality)
--마태복음 26:36-46




1.

내일은 Memorial Day입니다. 한국식으로 하자면 ‘현충일’입니다. 크고 높고 고귀한 뜻을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특별히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날입니다. 와싱톤 DC에 있는 한국 전쟁 기념비에 새겨져 있는 문장을 기억하시지요? Freedom Is Not Free. “자유에는 값이 따른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평화와 번영은 자신의 생명을 바쳐 싸운 사람들의 희생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젊은 날의 한 때를 그렇게 희생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감사하다는 말씀과 함께, 주님의 위로와 축복을 기원합니다.

전쟁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를 가장 절실하게 직면하게 해 줍니다. 전쟁은 항상 자유나 인권 같은 고상한 목적 때문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난 전쟁 중 절대 다수는 인간의 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쟁터는 인간의 악마성이 가장 자극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악의 현실 앞에서, 혹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을 핑게로 하여 거침 없이표현되는 개인의 악마성 앞에서,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연 인생에는 의미가 있는가? 인생사를 주관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이나 원리가 있는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같은 상황에 처하여 더 큰 혼란스러움을 경험합니다. 선하고 사랑 많고 능력있는 신이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할만한 단서를 찾기 어렵습니다.

소설 <오두막>은 인간이 당할 수 있는 가장 참담한 악의 현실을 소재로 듭니다. 다섯 살짜리 여자 아이가 유괴 당하고 성폭행 당한 다음 살해 당한 사건은 전쟁의 한 복판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유사한 악의 현실입니다. 그 악의 현실 앞에서 그동안 이 세상에 대해 그리고 인생에 대해 맥이 견지하고 있던 믿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립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리고 그분이 사랑의 하나님이며, 무로부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신이라면, 그같은 비극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은 셋 중 하나입니다. 1)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2)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 해도 악을 막을 능력이 없거나 3) 막을 능력은 있는데 그럴 뜻이 없거나. 이 셋 중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믿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믿어 보아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이 맥의 결론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문제에 대해 누군가 여러분에게 묻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설명하실 것입니까? 얼마 전, 아이티를 강타한 지진 피해에 대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여러분은 어떻게 이해하고 있으며 또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2009년 가을, 한국에서 일어난 ‘나영이 사건’은 그 참혹성으로 볼 때 ‘미시 사건’보다 더 심합니다. 짐승보다 못한 한 인간에게 아무런 방어 능력이 없는 어린 아이가 능욕을 당할 때, 과연 사랑의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고 무엇을 하셨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이같은 사건을 이해하고 설명하기에 더 나아 보이지 않습니까?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은 폐기되는 편이 낫지 않습니까?

2.

영국의 신학자 톰 라잇(Tom Wright)은 문명 국가에 사는 현대인들이 악의 문제에 대해 가지는 태도를 잘 분석해 놓았습니다. 그의 분석에 의하면,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 사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낭만적인 ‘진화론적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고, 문명의 이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습니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을 대하는 데 다음의 세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첫째, 현대인들은 악이 우리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면 악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악의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방책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래서 현대인들은 악이 자신을 개인적으로, 정면으로 공격할 때 깜짝 놀랍니다. 자신은 예외인 줄로 착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셋째,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들은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숙한 방식으로 반응합니다. (<악의 문제와 하나님의 정의>, 23쪽. Evil and the Justice of God).

악에 대해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톰 라잇은 현대인들이 악의 공격에 대해 보통 둘 중 하나의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말합니다. 첫째, 악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책임을 회피하려 합니다. 모든 문제를 정부 책임이라고, 사회 책임이라고, 혹은 다른 사람 책임이라고 비난합니다. 둘째, 그 반대 극단으로서, 모든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로 인해 우울증 같은 정신 질환이 전염병처럼 확산되고 있습니다. 매일 배달되는 신문을 조금만 주의깊게 읽어 보면, 이 두 가지 증상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를 놀라게 하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는 우리 사회에 만연되고 있는 현대판 전염병 우울증의 심각성을 일깨워줍니다. 이같은 미숙한 반응으로 인해 악의 현실은 더 심해지고, 그에 대한 대책은 아무 효력이 없고, 그로 인해 사람들은 더 깊이 상처 받고 앓습니다.

믿는 사람들의 경우도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실에 대해 믿는 사람들은 자주 너무도 기계적으로, 너무도 교리적으로, 그리고 너무도 쉽게 결론을 내립니다. 아이티에 일어난 지진이 부두교(The Voodoo)를 믿은 것에 대한 징벌이라고 단정합니다. 거대한 쓰나미로 동남아에 재난이 닥쳤을 때도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맥이 당한 것과 같은 개인적인 비극에 대해서도 기독교인들은 너무도 성급하고 근거 없는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뭔가 숨겨진 죄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얼마나 모순 투성이의 말인지, 그리고 악의 현실을 경험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그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그리고 그 단정이 기독교를 얼마나 해괴망측한 종교로 보이게 만드는지요!

3.

소설 <오두막>에 대해 신학적인 해설서를 쓴 로저 올슨(Roger E. Olson)은 그의 책 <오두막에서 만난 하나님>(Meeting God in the Shack>에서 아들을 잃은 어느 철학 교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 철학 교수는, 아무리 참혹한 비극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하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교수도 자신의 아들을 잃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고 또한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의 무덤 옆에서 다음과 같이 다짐했다고 합니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그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라고 말하는 일은 앞으로 절대 없을 거야.”(34쪽, “I will never tell another parent whose child has died, ‘It was God’s will.’”p. 20)

우리 교회 교우들 가운데 견디기 힘든 악의 현실을 경험한 분들이 계십니다. 심각한 질병으로 인해, 혹은 이혼으로 인해,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로 인해, 혹은 심각한 사고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신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분들이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가장 힘겨울 때 그분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믿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위로한다는 뜻으로 하는 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의 마음은 알겠는데, 그분들이 던지는 말들이 비수처럼 마음에 꽂혔다는 것입니다. 가뜩이나 마음이 복잡하고 아픈데, 앞에 앉혀 놓고 훈계를 하는 사람이 없나, 설교를 하는 사람이 없나, 심지어는 심문하듯 말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생각나는 시가 있어서 여러분과 나눕니다. 리다 모랜(Rita Moran)이라는 분이 서른 네 살짜리 딸을 잃고 쓴 시, “제발”(Please)입니다. 슬픔을 당한 사람들이 서로 위로와 용기를 주고 받도록 돕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 The Compassionate Friends의 웹 싸이트에 올라 있는 것을 제가 우리 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제발, 내가 슬픔을 완전히 극복했는지 묻지 말아 주세요.
나는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제발, 그가 지금 있는 곳이 이곳보다 낫다고 말하지 마세요.
내 곁에 없는 것이 문제이니까요.

제발, 더 이상 그가 아프지 않으니 됐다고 말하지 마세요.
왜 그 애가 고통 받아야 했는지도 아직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발, 내가 느끼는 것을 당신도 알고 있다고는 말하지 마세요.
당신 또한 아이를 잃었다면 모를까요.

제발, 버티고 계속 살아가라고 말하지 마세요.
이렇게 버티고 있잖아요?

제발, 좀 나아졌느냐고 묻지 마세요.
상실의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잖아요?

제발, 하나님은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마세요.
그분이 일부러 이렇게 하셨다는 뜻인가요?

제발, 적어도 그와 함께 34년을 함께 살지 않았느냐고 위로하지 마세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가 몇 살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요?

제발, 신은 인간에게 견딜만큼의 형벌만 내린다고 말하지 마세요.
인내력의 정도를 누가 결정하나요?

제발, 당신의 마음이 아프다고만 말해 주세요.

제발, 그 아이를 기억하고 있다고만 말해 주세요. 진실로 기억하고 있다면요.

제발, 내가 말하고 싶을 때 그 말을 들어 주세요.

그리고
제발, 내가 울어야 한다면 울도록 내버려 두세요.

우리가 악의 현실 앞에서 얼마나 위험하고 미숙하게 반응하는지를 잘 묘사한 시입니다. 생각해 보니, 리타 모랜이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한 말들 가운데 많은 말들을 하고 살았던 것을 깨닫습니다. 저의 생각 없는 말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주었을지를 생각하니, 식은 땀이 납니다. 이 시를 읽고 나니, 앞으로 그런 사람 앞에서 아무 말도 할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실은, 그게 정답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처신입니다. 그것이 상실의 아픔을 당한 사람들을 겪어 본 분들이 주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악의 현실을 경험했던 분들이 눈물로 고백하는 말입니다.

4.

악의 현실에 대해 건강하고 성숙하게 반응하려면 먼저 두 가지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일상 생활에서 경험하는 각각의 악의 문제에 대해 단순하고 명쾌한 정답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아야 하며,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들면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악이 왜 생겼으며, 이 세상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 왜 악을 그대로 방치하고 계신지, 선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왜 때로 악에 희생 당하며, 악을 일삼는 자들이 왜 때로 번영하는지를 단순하고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지난 2천년 동안 수 많은 종교적 천재들이 이 문제를 붙들고 씨름했습니다만,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악의 문제에 관한 한, 우리 기독교인들은 좀 더 겸손해지고 말을 아낄 필요가 있습니다. 악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번민하되, 섣불리 어떤 판단이나 결론을 내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톰 라잇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악을 매우 진지하게 취급하는 한 고상한 기독교 전통은 그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명확하게 ‘해결’하려고 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악에 대하여 어떤 분석을 제시했는데,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그렇군요. 좋습니다. 이제 우리도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를 축소해 버린 것입니다. (43쪽)

오늘 읽은 본문에는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는 악의 현실 앞에서 예수께서 어떻게 반응하셨는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따로 데리고 동산 깊은 곳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는 악의 현실에 대한 당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십니다. 37절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말로 표현하기도 하십니다. “내 마음이 괴로와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38절).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당신이 직면하고 있는 악의 현실을 완전히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것 이외에 다른 방도가 없는지, 그분은 기도를 통해 성부 하나님께 물으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십시오”(39절, 42절)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신이 껴안아야 하는 악의 현실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혹시, 제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고 있다고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비밀을 다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이 거슬립니까?

소설 <오두막>에 이 문제에 관해 아주 좋은 비유가 나옵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땅에 내려 앉아 걷고 있다면, 어떤 필요를 위해 자신을 제한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알 수 없는 어떤 뜻을 이루기 위해 때로 당신 자신을 제한하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역사 속에 들어오신 것도 스스로 신성을 제한하여 이루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많은 능력을 제한하셨습니다. 그분이 악의 현실 앞에서 이렇게 심하게 동요되었던 것은 스스로를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과 똑 같이 악의 현실을 대면하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악의 문제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려 주시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러고 싶어도 그렇게 하실 수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악의 현실을 끌어 안고 그 악을 선의 도구로 변화시키는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우리는 그분의 모범을 따라야 합니다.

5.

둘째, 악의 현실은 대면하여 통과해야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 인생을 고해로 보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불교가 일치합니다. 하지만 그 고통의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다릅니다. 불교는 고통처럼 보이는 것이 실은 고통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으라고 가르칩니다. 반면, 기독교는 악은 엄연한 삶의 현실이라고 봅니다. 고통을 고통으로 보고, 아픔을 겪어서 고통의 터널을 관통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것을 관통하는 과정에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임재가 필요하고 또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여 고통을 겪어 내야만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을 맞닥뜨린 사람은 불가피하게 “왜?”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은 대답을 알고 싶어서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예상하지 않은 악의 현실 앞에서 숨이 막혀 내지르는 비명이거나, 어이가 없어서 토해내는 넋두리입니다. 그 사람이 당한 악의 이유에 대해 정답이 있어서, 그것을 그 사람에게 설명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이 “아, 그렇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고 나니, 이제 슬픔이 사라지는군요”라고 말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악으로부터 뒤통수를 얻어 맞은 그 사람에게는 그 어떤 설명도 납득되지 않습니다. 머리가 띵하고 멍한데 무슨 말이 들어 오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악의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인 처방을 보여주는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악의 문제와 관계하여, 하나님조차도 고난의 터널을 우회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면, 이 세상의 악을 한 순간에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행했던 기적의 능력을 발휘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렇게 하지 않고 묵묵히 고난의 터널을 걸어가셨습니다. 그것이 악의 문제와 고난의 문제를 진실로 해결하는 길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의 현실 앞에서 당연히 움츠러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앞에 두고 여러 번 그같은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은 제자들에게 두렵고 떨리는 심경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것은 연극도 아니었고 쇼도 아니었습니다. 진실로 그분도 악의 현실 앞에서 흔들리셨습니다. 신의 능력을 스스로 제한하셔서 저와 여러분처럼 되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기도하시면서 주님은 믿음을 회복하십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친 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46절). 예수님은 그렇게, 악의 현실을 마주하기로, 그리고 고난의 터널을 통과해 지나가기로 결정하셨고, 그 이후로는 침묵 가운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마음이 동요되고 믿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입니다. 주님도 그러셨다면, 우리가 어찌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겠습니까? 다만, 우리는 기도를 통해 고난을 직면할 용기와 담력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난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고난의 터널을 지나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고난의 심장을 통과하고 났을 때, 비로소 고난은 변모하게 됩니다. 불교가 말하듯, 고난은 처음부터 허상이었던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엄연한 실상이요 현실입니다. 다만 그것을 대면하고 겪어 냈을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해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6.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은 처음에는 왜 내 딸 미시를 죽게 했느냐고 하나님에게 따져 묻습니다. 그는 오두막에서 하나님과 대화를 하면서 그분에게는 그런 악의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적어도, 하나님이 하고자 하기만 했으면 그 비극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 때문에 맥은 하나님에게 섭섭함을 느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미시에게 벌어졌던 사고를 내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까? 물론 있었지…… 첫째, 내가 애초에 창조를 하지 않았다면 그런 일이 아예 생기지 않았겠지. 이런 질문들도 생기지 않았을 거야. 둘째, 나는 미시의 상황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이런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아예 창조하지도 말았어야 했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어. 나는 둘째 방법도 택하지 않았지. 그 이유를 너는 지금 이해할 수 없어. 지금으로서 내가 네게 대답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나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주는 것이지. 내가 미시를 죽게 한 것이 아니야. 하지만 나는 그 아이의 죽음을 이용하여 선한 것을 만들어 낼 거야. (365쪽, translation is mine, p. 224)

하나님께서 맥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의 현실을 마주한 사람에게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그것으로써 고난과 아픔을 극복하고 나면, 마음을 어지럽히던 그 많은 질문들이 어느덧 안개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그리고 고난을 통과함으로써 정금같이 연단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때, 우리는 시편 기자처럼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119:71)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 계십니까? 악의 현실을 마주하여 흔들리고 계십니까? 악의 몽둥이에 얻어맞은 후유증에서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계십니까? 상실의 아픔과 고통 중에서 “왜? 어째서? 무엇 때문에?”라고 물으며 몸부림 치고 계십니까? 하지만 여러분도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이요, 관계요, 우정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그 고난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을 만나시고 그분을 통해 사랑과 관계와 우정을 발견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가족이나 친구나 교우를 통해 그같은 도움을 찾으실 수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아직까지 그런 상황에 처해 본 일이 없습니까?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이 가지기 쉬운 낭만적인 낙관주의나 헛된 기대감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악의 현실은 세상 마지막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성경의 예상이 맞는다면, 악의 현실은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에 대해 마음의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악의 현실 앞에서 위험하고 미성숙하게 반응하면 결국 자멸하고 맙니다. 따라서 여러분에 대한 저의 기원은 이것입니다. 고난 당하는 형제 자매에게 줄 수 있는 최선의 선물은 우리의 사랑과 선의 그리고 함께 있어 주는 것임을 알고, 고난 당한 사람들을 돌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다 보면, 그 어떤 악의 현실이라도 마주할 수 있는 믿음과 시각과 용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난 당한 사람을 돕는 일은 스스로를 돕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떤 상황에 있건, 주님의 사랑과 선의를 믿으십시다. 그리고 주님의 임재를 구하십시다. 그분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분이 모든 것을 사용하여 모두에게 유익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 그것을 여러분도 아십니까? 그것을 아시고, 믿으시고, 매일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고난으로써 고난을 이기고
죽음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주님,
악의 현실 속에 있는 저희를 도우소서.
때로 저희는 이리 떼 가운데 서 있는 어린 양과 같습니다.
악의 세력으로부터 폭력을 당할 때
저희는 정신을 잃고 휘청거립니다.
그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고난을 통과하여 고난을 이기게 하소서.
고난이 축복이 되는 기적을
저희도 경험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