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갈 수 없는 책심적인 주제들을 성경 말씀에 비추어 깊이 성찰하는 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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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6일: 내 영혼의 오두막 3>
“아픔이 아픔을 치유한다”
(Pain Heals Pain)
-- 이사야 (Isaiah) 53:1-6
1.
얼마 전, 어느 교우께서 예배 후에 찾아 오셔서 기도를 부탁하셨습니다. 최근에 상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받은 상처에 대해서만 생각했을 뿐,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답니다. 자신을 피해자라고만 생각했지, 가해자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곰곰히 따져 보았답니다. ‘내가 누구에게 무슨 상처를 주었나?’
그 교우님은 자신이 받은 상처도 많고 깊지만,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준 상처도 그에 못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특별히, 아이들과 남편에게 말과 행동으로 많은 상처를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답니다. 그분은 이를 악 물고 아내로서 혹은 엄마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들과 남편을 진실로 사랑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대답이 되지 않았습니다. 따져 보니, 남편에게 ‘미/고/사’(미안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라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알게 모르게 남편의 자존심에 수 없는 상처를 만들어 냈음을 알겠더랍니다. 그 날 저녁, 그 자매는 남편에게 고백했다고 합니다. “내가 얼마나 잘 할지, 장담은 못 하겠어. 하지만 앞으로 당신을 진실로 사랑하게 되기까지 최선을 다할께. 그동안 미안했어, 여보.”
저는 지난 주일, 소설 <오두막>의 이야기를 가지고, 내 영혼 깊은 곳에 그대로 남아 내 마음을 은밀하게 지배하고 내 이성적인 판단을 교란시키는 상처들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사람의 상처를 치유하는 문제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우리는 앞에서 소개한 그 자매처럼 본능적으로 내가 받은 상처를 먼저 생각하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나는 피해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2.
알고 보면,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고 살아가는지요! 가령, 얼마나 많은 어린아이들이 초보 부모의 실수로 인해 상처를 입는지 모릅니다. 저 자신도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유학생 시절, 일회용 기저귀값이 부담 되어 그 때 그 때 갈아주지 않았습니다. 젖어있는 상태가 괜찮아 보이면 두 번, 세 번 쌀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나중에 아동 심리학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것이 아이의 성격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미안했는지요! 잠 버릇 가르친다고 제 풀에 지쳐서 잠들 때까지 침대에 홀로 내버려 두었던 것도 미안하고, 아들이니 강하게 키워야 한다고 호되게 야단 친 것도 미안합니다. 가장 예민할 시기에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어려움을 겪도록 만든 것도 미안합니다. 돌아보니, 애비가 한 일이 상처 주는 일 투성이인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혹은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데리고 이민 오신 분들이 자주 그러십니다. “아, 아이들은 금방 적응하고, 영어도 금방 트입니다. 어른인 우리가 문제지요!” 저도 그런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목회를 하면서 관찰해 보니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겉으로는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 앓고 있습니다. 더구나, 아이들의 마음은 어른처럼 상처를 견뎌낼 힘이 부족하고, 마음에 입은 상처가 어른보다 더 오래 갑니다. 그러므로 뿌리가 잘려서 새로운 토양에 심겨진 아이들이 이곳에서 완전히 정착할 때까지, ‘자는 아이’도 ‘다시 보아야’ 합니다.
이민자들의 가정에서 전형적으로 일어나는 일 중 하나가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른 노릇을 하며 자라는 것입니다. 중간에 이민 온 부모는 영어를 정복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생활 전선에 뛰어 듭니다. 때로는 두 개 혹은 세 개의 직업을 가지고 정착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녀들 가운데 착실한 아이가 가장의 역할을 떠맡습니다. 영어로 오는 모든 전화와 편지를 부모 대신 처리합니다. 부모가 가게에서 일하는 동안 집안 살림을 챙깁니다. 부모들은 그 아이를 대견하게 여기고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만, 그 짐이 고스란히 그 아이의 영혼에 쌓이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또한 그 아이가 가장 역할을 하느라고 건너 뛴 청소년기의 공백이 그에게 얼마나 큰 심리적인 상처로 남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 상처가 청년기에 혹은 결혼 후에 혹은 중장년이 되어 흉칙한 모습을 드러내면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아픔을 겪어야 합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다 보니, 요즈음 다 큰 자식들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미안한지 모릅니다. 요즈음, 두 아이에 대한 저희 부부의 주요 과제는 상처의 치유입니다. 상처 주는 것인 줄도 모르고 준 상처, 알면서도 감정에 사로잡혀 준 상처, 혹은 자라는 과정에서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데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결혼을 하더라도 배우자와 행복할 것이고, 사회 생활을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때로는 내가 준 상처가 너무 깊고 아파서 그가 쏟아내는 쓴물을 한 없이 받아 마셔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자식에게 혹은 배우자에게 혹은 부모에게 한 일이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너무도 늦게 깨닫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상처가 치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어져 버린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경우, 그 상처가 치유되고 회복되기까지 그 상처로부터 나오는 피고름을 한 없이 빨아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이 받은 상처는 그 자식으로, 그 자식의 자식으로 대물림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교우님의 이야기를 그분의 허락을 받고 나눕니다. 그분은 아들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과 함께 이민을 왔습니다. 이민 생활에 빨리 적응하려는 마음으로 아들 아이를 친정에 맡기고 부부만 먼저 왔습니다. 둘은 열심히 살았고, 그렇게 하여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아들을 데리고 오려 했을 때, 그는 이미 열 살이 되어 있었습니다. 늦게서야 부모 품에 들어온 그 아이는 청소년기에 들어서면서 방황을 시작했고, 자주 부모의 마음을 찢어놓곤 했습니다. 이 부부는 그 때마다 아들을 다그치고 혼 내고 싸웠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 부부가 우리 교회에 나오면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자라면서 새로운 눈으로 자신의 주변을 보기 시작합니다. 아들의 문제도 새롭게 보입니다. 10년 동안 부모와 떨어져 살았던 상처와 어린 나이에 미국 땅에 와서 적응하느라고 얻은 상처가 그 아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음을 깨닫습니다. 그 동안에는 아들의 행동이 밉기만 했는데, 막상 그가 받은 상처를 생각하니 죄스럽고 미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결심을 합니다. “아들에게 입힌 상처가 다 치료될 때까지 나는 그 쓴물을 다 마시겠다”고 말입니다. 그 이후로는 아들이 말로나 행동으로 마음을 찢어 놓아도 화를 내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자신이 아픔을 당하면 그만큼 치유되는 것임을 믿고 아들이 내품는 쓴 물을 빨아 들이고 아들이 쏘는 화살을 고스란히 맞아 줍니다.
그 교우님이 제게 한 말씀이 제게 큰 감동이 되었습니다. “목사님, 제가 그 아이에게 10년 동안 상처를 주었는데, 그 상처가 치유되려면 그 기간의 두 배는 족히 걸리지 않겠어요? 사실, 지금까지 아이가 변화된 것만 보아도 놀라워요. 아직 멀었지만 말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지금은 비록 힘들겠지만, 그런 마음만 있으면, 그 아들에게도, 그 부모에게도 희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아내, 내 남편, 내 자식, 내 부모, 내 며느리, 내 시어머니, 내 사위, 내 장인, 장모, 시집 간 내 딸, 친정 부모를 생각해 보십시다. 혹시, 나로 인해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휘청거리고 있는데, 나는 내가 받은 상처만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는지요? 잠시 눈을 돌려, 내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을 살펴 보십시다. 그리고 내가 준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다. 진실한 고백과 회개 그리고 사과로 충분할 수도 있습니다. 혹은 얼마가 걸릴지 모를 긴 시간 동안 그 사람의 치유를 위해 속이 시커멓게 되도록 쓴 물을 받아 먹어야 할 수도 있습니다.
4.
내가 누구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굳이 내가 준 상처가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받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픔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치유되기 때문입니다. 화학의 기본 법칙 중에 ‘질량 불변의 법칙’ 혹은 ‘질량 보존의 법칙’(law of conservation of mass)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얼음이 물이 되고, 물이 다시 얼음이 된다 해도, 그것을 구성하는 원물질은 소멸되지 않고 어떤 형태로든 보존된다는 법칙입니다. 아픔에도 같은 법칙이 적용됩니다. 아픔의 질량도 변하지 않습니다. 저절로 소멸되거나 증발하지 않습니다. 이동하거나 변화할 뿐입니다.
내가 당한 상처를 마음 속에 그대로 품고 있으면, 그 아픔은 내 영혼 속에 그대로 남아 나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내가 내 상처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면, 그 사람이 나 대신 고통을 당합니다. 아픔이 이동하는 것이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가 내 아픔을 끌어 안고 그 쓴 물을 빨아 들이면, 내 아픔은 이동할뿐 아니라 변모합니다. 산소 하나(oxyson)와 수소 둘(hydrogen)이 합해지면 물(H2O)이 되듯, 내가 빨아들인 ‘아픔’은 내 마음 안에서 ‘사랑’과 결합하여 보람과 기쁨으로 변모합니다. 영적인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것이 영적인 능력이며 신비입니다. 테레사 수녀가 한 말이 기억납니다. “저는 하나의 역설을 발견했습니다. 즉, 아픔을 느끼기까지 사랑하면, 아픔은 사라지고 사랑만 남는다는 진실 말입니다.”(I have found the paradox, that if you love until it hurts, there can be no more hurt, only more love.)
우리가 이 영적인 신비를 믿고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속이 시커멓게 되도록 아픔을 감당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이 아닐까요? 내 아내 혹은 내 남편이 나를 만나기 전에 얻은 상처가 있어서 때로 견디기 힘 든 아픔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갈라서는 것이 제일 쉬워 보일 수 있습니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힘 입는다면 다른 길이 열립니다. 주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 아픔을 견뎌주며 그 상처의 피고름을 빨아내어 치유를 도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님을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이 더 복된 선택이라는 사실을 간증할만한 사람들은 적지 않습니다.
소설 <오두막>의 저자 폴 영의 아내 킴벌리가 그 예입니다. 어느 날 그는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남편의 사무실에 갑니다. 남편을 기다리는 동안 남편의 의자에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봅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남편이 읽다가 그대로 두고 간 이메일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남편에 대한 의심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무심코 열려 있는 남편의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자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보낸 메일이었습니다. 그 순간, 킴은 피가 거꾸로 솟아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남편이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아주 깊은 관계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킴벌리는 분노하고 절망하고 통곡합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폴 영은 아내에게 달려와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지만, 아내의 분노를 풀 길이 없었습니다. 폴은 그동안 은폐와 거짓말로써 지켜 온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멕시코의 어느 도시로 날아가 모텔을 잡고 충분한 양의 수면제를 사 먹고 자살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 위기에서 폴은 어느 친구의 도움으로, 씨앗 하나만큼의 희망만 있다면 살아남아 그 씨앗을 키워 볼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를 만나 상담 치료를 시작했고, 아내에게도 자신의 숨겨졌던 상처를 털어놓기 시작합니다.
아내의 마음을 돌이킬 수 있으리라는 희망은 버렸지만, 최소한 그에 대한 참회의 과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내 킴벌리는 처음에는 배신감으로 치를 떨었고, 남편의 얼굴을 대면하기에 치가 떨렸지만, 치유에 대한 남편의 진실한 태도로 인해 서서히 마음을 엽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편의 상처 치유를 위해 쓴 물을 빨아 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여 11년만에 폴은 하나님의 은혜와 아내의 인내 그리고 본인 자신의 일관된 노력을 통해 완전히 치유를 받았고, 또 다른 이들의 치유를 위해 이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The Healing”, <Guideposts>, http://www.guideposts.com/story/paul-young-shack-healing)
만일 킴벌리가 배신감과 분노와 절망감에 압도되어 그대로 그 결혼을 끝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폴 영은 지금도 낙오자가 되어 비관 속에서 하루 하루를 죽이고 있을 것이며, 킴은 남편에게서 얻은 상처를 어쩌지 못하고 우울의 늪 속에서 힘겹게 살고 있을 것이고, 그 자녀들도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의 칼날로 이웃에게 아픔을 주며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소설 <오두막>을 통해 치유를 경험하고 신앙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인터넷에 올라 있는 수 많은 독자평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의 치유를 위해 킴벌리가 감내했던 고통과 아픔은 당시로서는 힘겨운 것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니 충분히 보상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5.
오늘 우리는 이사야서 53장의 일부를 읽었습니다. 학자들은 이사야의 예언 안에 네 개의 ‘종의 노래’(the Songs of the Servant of Yahweh)가 있다고 봅니다(42:1-4; 49:1-6; 50:4-9; 52:13-53:12). 오늘 읽은 이사야 53장은 네 번째 노래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바로 이 종의 사명을 부여 받았다고 믿으셨습니다. 이 노래의 예언대로 그분은 묵묵히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그 누구도 메시야가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을 것이라고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의 핵심에 고난이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세상이 당하고 있는 아픔은 아픔으로써만 치유될 수 있음을 그분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에 아픈 사람들을 찾아 다니셨습니다. 육체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으며, 영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온전케 하시고, 사회적으로 아픈 사람들을 회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강력한 치유의 능력이 있어서, 돌아 다니면서 아픈 사람들을 툭툭 쳐서 고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을 공감하고 그 아픔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며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빨아 들이는 일입니다. 그랬기에 저녁이 되면 예수님의 심신은 지쳤고, 그래서 저녁이나 새벽이 되면 홀로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그분의 공생애는 사람들의 상처에서 나오는 쓴 물을 빨아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미래를 내다 보시고는, 십자가에서 당하게 될 그 아픔을 통해 인류의 아픔을 치유할 수 있다고 믿으셨습니다. 네 번째 고난의 종의 노래에서 내다 보았던 그 상처 치유의 사건이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내다 보셨습니다.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
우리는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각기 제 길로 흩어졌으나,
주님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다. (5-6절)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받는 찔림과 상처와 징계와 매로써 사람들의 상처와 아픔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그 길로 당신을 부르셨다고 믿고, 십자가의 길, 그 아픔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이 땅의 모든 상처 난 영혼들을 사랑하여 그 아픔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모두 들이 마셨습니다. 예수께서 들이마신 그 아픔은 그분의 사랑과 결합하여 영적 화학 반응을 통해 변모되어 기쁨과 보람과 행복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 밑에 머리 숙여, “주님, 제 상처와 아픔을 내어 놓습니다. 저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그 십자가는 여전히 살아 있어서 우리의 아픔을 빨아들여 변모시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같은 거룩한 꿈을 꾸어 볼 일입니다. 먼저 가족들에게 그렇게 하기를 꿈 꾸고 기도할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가족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 주시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 있기를 꿈 꾸고 기도할 일입니다. 누군가의 상처 치유를 위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을 겪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에게서 가장 보고 싶어하시는 모습입니다. 선교가 무엇입니까? 목회가 무엇입니까? 사역이 무엇입니까?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다른 사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 내가 그 아픔을 대신 담당하는 것입니다.
어느 원로 목사님께서 산책을 하다가 속이 시커멓게 썩은 고목 나무를 보셨다고 합니다. 그분은 그 앞에서 한 참을 서 있더니, 그 고목나무에게 말하시더랍니다. “너는 목회도 하지 않았는데 왜 그렇게 속이 썩어 버렸니?”
그렇습니다. 목회는 속 썩는 겁니다. 다른 사람의 상처 치유를 위해 속을 썩고 있다면, 목사가 아니라도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를 기르는 것도, 직장에서 동료들을 품어 안는 것도, 교회에서 교사로 섬기는 것도, 속회를 섬기는 것도, 모두, 나를 위해 속 썩으신 하나님, 나를 위해 쓴 물을 삼키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흉내를 내다 보면, 그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를 알게 됩니다. 내 속에서 사랑과 아픔이 결합하여 만들어지는 영적 화학 반응을 경험하며 삶의 신비를 맛보게 됩니다. 이렇게 행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6.
산다는 것은 곧 상처를 주고 받는다는 뜻입니다. 상처는 아픕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의 성품을 결정하고 기질을 결정합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는 우리의 삶을 파산시킵니다. 자신의 인생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인생까지도 파괴시킵니다.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불편하게 합니다. 하지만, 잘 치유된 상처는 아름다우며, 깊은 상처로부터 치유받은 사람은 향기로운 사람이 됩니다. 시인 복효근씨는 ‘상처에 대하여’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 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우리 교회 안에도, 수 많은 상처로 인해 설 익은 포도처럼 시큼 털털하던 분들이 치유를 받고 나서 향기로운 포도주 맛과 향을 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상처로 인해 짖밟힌 장미처럼 으깨어졌지만, 그 상처로부터 회복되어 눈매에서 꽃향기를 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향기가 배어나오는 사람의 가슴 속엔 잘 익은 상처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라는 진리를, 저는 교우님들을 통해 확인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내 자신의 상처 치유와 내 사랑하는 사람들의 상처 치유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일인지를 체득하고 있습니다.
소설 <오두막>의 주인공 맥의 이야기는 저자인 폴 영의 이야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맥처럼 폴 영도 ‘거대한 슬픔’을 안고 살았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맥은 2박 3일 동안의 영적 체험을 통해 치유를 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 대목을 소설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또 맥은 어떤가? 그는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변화의 과정 속에 있는 인간이다. 나[맥의 친구 윌]는 대개 변화의 과정에 저항하는 편이지만 그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나는 그가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먼저 용서하며 더 빨리 용서를 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변모된 모습은 그와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고, 그중에는 이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맥처럼 단순하고 즐겁게 삶을 영위하는 성인 남자를 본 적이 없다는 말은 꼭 해 두어야겠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과거의 그라면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을 모습의 아이가 되어 단순한 신뢰와 경이로움 안에 살게 되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길을 가진 거장이 짠 풍요롭고 심오한 테피스트리를 안듯이, 심지어 그늘조차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어두운 부분을 끌어안게 되었다.(407-8쪽)
복효근 시인의 표현대로라면, 맥은 그 깊은 상처를 치유받은 후 눈매에서 꽃향기를 풍기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저자 폴 영에게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 킴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상처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럽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은 힘겹지만, 치유가 되고 나면 상처를 받기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폴 영과 그 아내 킴은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잘 치유된 상처는 축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처 입은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모든 상처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들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씩 향기로운 꽃으로 변모되기를 바랍니다. 저와 여러분의 눈가에서도 꽃향기가 진하게 풍기기를 바랍니다. 이 소망을 마음에 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에 더욱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앞으로의 우리의 말과 행실이 이 세상에 상처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치유를 더하는 일에 사용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주님,
주님의 삶이 그렇게 향기로운 이유가
주님의 상처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끌어 안으신 상처로 인해
공포스러운 형틀인 십자가가
아름답게 변모하였습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십자가에 기대어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게 하소서.
저희도 주님처럼
이웃의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하는 일을 위해
마음과 삶을 드리게 하소서.
그래서 우리 모두의 눈매에서
꽃향기가 번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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