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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0)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 이어 몇 가지 더 살펴보자.

** 단군조선 제12세 아한(阿한)왕검 38(기원앞 1797)에 하()나라의
걸왕이 포악하고 무도 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아한 왕검께서는
국정을 더욱 바로 살피니 하
()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나라의
신하나 백성되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有爲者:11세 단군 도해왕검의 태자인
아한의 태부로 삼았으며 아한 왕검은 스승인 그를 國太師로 삼았다
.)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다 옮겨올 수 없어 중요한 부분 몇가지를 간추려 본다.
()나라는 단군조선의

왕이 바뀔 때마다 사절이 찾아왔고, 그러다가 어느때에는 조선의 변방을
침공하기도 했다
.

즉 제21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47(기원앞 1291)에는 은나라(상나라에서
은나라로 바뀜
)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을
침공하였는데
, 결국 조선에 크 게 패하고 물러나며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온 일도 있었으며
, 23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8(서기앞 1210)에는
은나라 백성들이 몰려와 은나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가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게해달라고 간청하므로 임금께서 허락하니
이에 은나라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 하였으며
, 25세 단군
아홀
(阿忽)왕검 29(기원앞 1122)에 은나라의 임금 주()가 주()나라의
무왕
(武王) 희발(姬發)에게 패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수차례에 걸쳐 연대별 중국의 역사를 다루어 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우리들의 잘못 된 역사인식과 사대적인 관념을 먼저
타파해 나가야할 것이다
. 과연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유구하며 그 뿌리가
깊고 길어 우리의 문화가 대부분 그들의 것을 받 아들여 발전해 욌다고
믿고 있는가
?

여기에서 <중국역조 제왕개람>의 중국 최 고대의 인물들, 그들이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세명의 황제와 다섯 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자
.


삼황: 태호 복희(기원앞 3500년대)— 배달국(神市) 태우의 환웅의 12 아들
중 막내아들
(동이(東夷)에서 차용해간 내역, 아래 동일)

: 염제 신농(기원앞3200년대)—배달국(神市) 8세 안부련 환웅때 신하였던
소전의 아들
.

: 황제 헌원(기원앞 2698~2598)—배달국(神市) 14세 치우환웅(자오지천황)
때 제후의 아들로 소전의 먼 후손

오제: 소호 금천(기원앞 2598~2515)—헌원의 아들

: 전욱 고양(기원앞 2514~2437)—헌원의 손자.

: 제곡 고신(기원앞 2436~2367)—헌원의 증손자.

: 제요 도당(기원앞2357~2284)—고신의 막내아들.

: 제순 유우(기원앞 2284~2224)—장님인 고수의 아들


이제는 분서갱유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필원칙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중과 배경을 미루 어 알만하지 않은가
, <다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인용한 내용을 보자
>

중국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그의 저서
<중국역사 연구법>에 춘추 필법의 사필원칙을 쓰면서 중화사상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부분을 날조했다
.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
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


앞서 설명한 춘추필법 사필원칙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문난적(斯文亂賊)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
.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이지(李贄 이탁오)가 공자는 존경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 받들면서 살아있는 천만인의 입을 틀어
막는 주술로 삼고
, 중생의 성령을 조여 죽이 는 법보로 삼는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비판 하였다
.

주자(朱子)가 일찌기 “하늘의 중니(仲尼: 공자의 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놓고
그는
(유해칭찬)이라는 글에서 “그러면 아마도 중니(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불을 밝히고 길을 다녔겠소 이다”
라고 설파 했다
.

공자를 신격화하는 황당함과 가소로움을 조소한 이 글을 근거로 이탁오는
성인을 비난하고
, 법을 어겼다는 죄명을 쓰고, 76세의 나이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되었으며 결국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머리를 벽에 찍고
죽는 최후를 선택하고 말았다
.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그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 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

송나라 이후 주자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 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 체계로서 공자 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며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


공자가 떠난 지 2,500여 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조선 서인들의
사대주의가 일제 식민사관 에 접목되고 한민족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일부
강단론자들의 뿌리 깊은 사문난적 현상은 오늘도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