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 이어 몇 가지 더 살펴보자.
** 단군조선 제12세 아한(阿한)왕검 38년(기원앞 1797)에 하(夏)나라의
걸왕이 포악하고 무도 하여 멸망에 이르는 것을 보면서 아한 왕검께서는
국정을 더욱 바로 살피니 하(夏)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의
신하나 백성되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有爲者:11세 단군 도해왕검의 태자인
아한의 태부로 삼았으며 아한 왕검은 스승인 그를 國太師로 삼았다.)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다 옮겨올 수 없어 중요한 부분 몇가지를 간추려 본다.
상(은)나라는 단군조선의
왕이 바뀔 때마다 사절이 찾아왔고, 그러다가 어느때에는 조선의 변방을
침공하기도 했다.
즉 제21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47년(기원앞 1291)에는 은나라(상나라에서
은나라로 바뀜) 왕
무정(武丁)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令支) 등을
침공하였는데, 결국 조선에 크 게 패하고 물러나며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온 일도 있었으며, 제23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8년(서기앞 1210)에는
은나라 백성들이 몰려와 은나라의 정치가 문란하여 더 이상 그곳에서
살 수가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게해달라고 간청하므로 임금께서 허락하니
이에 은나라 사람들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 하였으며, 제25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9년(기원앞 1122)에 은나라의 임금 주(紂)가 주(周)나라의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패망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수차례에 걸쳐 연대별 중국의 역사를 다루어 보았다.
우리는 이를 통하여 우리들의 잘못 된 역사인식과 사대적인 관념을 먼저
타파해 나가야할 것이다. 과연 중국의 역사와 문화는 유구하며 그 뿌리가
깊고 길어 우리의 문화가 대부분 그들의 것을 받 아들여 발전해 욌다고
믿고 있는가?
여기에서 <중국역조 제왕개람>의 중국 최 고대의 인물들, 그들이 조상으로
섬기고 있는 세명의 황제와 다섯 왕에 대한 중국의 기록을 살펴보자.
삼황: 태호 복희(기원앞 3500년대)— 배달국(神市) 태우의 환웅의 12 아들
중 막내아들 (동이(東夷)에서 차용해간 내역, 아래 동일)
: 염제 신농(기원앞3200년대)—배달국(神市) 8세 안부련 환웅때 신하였던
소전의 아들.
: 황제 헌원(기원앞 2698~2598)—배달국(神市) 14세 치우환웅(자오지천황)
때 제후의 아들로 소전의 먼 후손
오제: 소호 금천(기원앞 2598~2515)—헌원의 아들
: 전욱 고양(기원앞 2514~2437)—헌원의 손자.
: 제곡 고신(기원앞 2436~2367)—헌원의 증손자.
: 제요 도당(기원앞2357~2284)—고신의 막내아들.
: 제순 유우(기원앞 2284~2224)—장님인 고수의 아들
이제는 분서갱유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필원칙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들의
심중과 배경을 미루 어 알만하지 않은가, <다음 한눌의 ‘고대사 메모’ 중에서
인용한 내용을 보자>
중국의 정치가이며 학자였던 양계초(梁啓超 1873~1929)가 그의 저서
<중국역사 연구법>에 춘추 필법의 사필원칙을 쓰면서 중화사상을 높이기
위해 공자가 <서경>에 기록한 이래 <사기>를 거쳐 한민족과 관련된 역사는
상당부분을 날조했다. 이 악습은 공자의 수법에서 나와 2천년 동안 중국
역사가 그 악습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앞서 설명한 춘추필법 사필원칙에 이어 춘추필법의 사문난적(斯文亂賊)의
실례를 하나 들어본다.
명나라의 사상가이자 교육자였던 이지(李贄 이탁오)가 공자는 존경하지만
“그를 신성불가침의 우상으로 떠 받들면서 살아있는 천만인의 입을 틀어
막는 주술로 삼고, 중생의 성령을 조여 죽이 는 법보로 삼는다면 이는
가증스러운 것”이라고 비판 하였다.
주자(朱子)가 일찌기 “하늘의 중니(仲尼: 공자의 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만고의 역사는 기나긴 밤과 같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놓고
그는 (유해칭찬)이라는 글에서 “그러면 아마도 중니(공자)가 태어나기 전의
복희나 그 이전 성인들은 날이면 날마다 불을 밝히고 길을 다녔겠소 이다”
라고 설파 했다.
공자를 신격화하는 황당함과 가소로움을 조소한 이 글을 근거로 이탁오는
성인을 비난하고, 법을 어겼다는 죄명을 쓰고, 76세의 나이에 이단이라는
낙인이 찍혀 투옥되었으며 결국 그는 감옥에서 스스로 머리를 벽에 찍고
죽는 최후를 선택하고 말았다.
부처와 노자보다 훨씬 파괴력을 지닌 그 공자를 비판하거나 경전의 진리를
부정한다는 것은 당시 로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충격적인 것이었을 것이다.
송나라 이후 주자의 주석으로 고정된 유교 경전은 국가에서 인정하는 유일한
학문 체계로서 공자 는 신성불가침의 권위를 지니며 중국을 지배했던 것이다.
공자가 떠난 지 2,500여 년,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조선 서인들의
사대주의가 일제 식민사관 에 접목되고 한민족의 역사마저 부정하는 일부
강단론자들의 뿌리 깊은 사문난적 현상은 오늘도 여전히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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