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하.상.주 또는 하.은.주 시대로부터 현 중화인민공화국까지의 역사를
역대순으로 살펴 보았는데, 사실 하.상.주 이전의 요임금과 순임금은 물론
그들의 최초의 황제라는 헌원의 대를 통틀어 우리 민족 조상의 신시,
단군조선과 연계 또는 관련되지 않은 중국의 고대사는 없다.
앞서 설명한 바 있는 기원앞 2700년대의 한족의 시조라는 황제 헌원과
단군조선 앞 신시 14 대 한웅 자오지 천왕과의 관련기록을 보자
(우리의 한단고기, 규원사화 및 중국 최초의 정사라 는 사기 권1, 이외
수십여종의 사서)
신시(또는 九黎구리)자오지 환웅은 13대 환웅 사와라(斯瓦羅)가 세상을
뜨시고 보위에 올랐는 데 기원앞 2706~2598년까지 109년 동안 제위에
계셨으며 수는 151세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하면서 기원앞 2700년대 한족의 시조 황제헌원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 해 동시대의 영웅이었던 신시(神市)의 동두철액
치우천자를 비교론 법으로 기술하고 있다.
제후국 소전의 아들이었던 황제헌원이 반란을 일으키자 치우천자가
탁록에서 징벌하였다.
이미 산동성 동평에서는 치우천자의 유물 ‘치우총’이라는 비석과
‘치우사’라는 표지석이 나왔다.
요와 순을 거쳐 하(夏)나라를 건국한 우(禹)는 누구인가에 대한 설명은
뒤로하고 마지막 임금 걸(桀)왕에 대한 관련기록들을 살펴보자.
걸왕은 악독하고 탐욕하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이런 그가 매희(昧喜)라는
한 여인에게 빠져 주지육림(酒池肉林)에서 혜어나질 못하였으므로
백성의 원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에 탕임금이 군사를 일으켜 하나라를 치니 하나라는 패망하고 걸왕은
남소(南巢)로 달아났다. 소위 하나라는 걸왕 때 망하고 순임금 시절 우를
도와 치수(治水)사업에 종사했던 설(契) 의 13대 손 탕(湯)왕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이러한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 역시 경국지색(傾國之色) 달기에 빠져,
달기가 원하는 것 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았다.
‘여봐라 이 잔치에 참석하는 모든 사람은 발가벗어야 하며 남자는 반드시
벗은채 벗은 여자를 업고 짐이 있는 곳까지 걸어와야 한다’는 명령도
달기의 원함에서 비롯 되었다. 그래서 1000 여명의 남녀가 발가벗은채
춤을 추었고, 주지육림에 묻혀 환락의 극치를 치닫다가 주나라의 무왕
(武王)에게 멸망하고 만 것이다.
그때 남겨진 얘기 하나, 나이 90이 념은 형리가 처형장으로 끌려나온
달기의 목을 치려고 칼을 잡았는데 달기의 얼굴을 보자마자 현기증을
일으켜 칼을 들어올릴 수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은 달기의 얼굴을 보자기로 가린 후에야 목을 쳤다고 하는
얘기이다.
단군조선 속의 중국 하.은(상).주
다시 우리 상고사에 나타나는 하나라의 기록과 그 패망시기를 우리 사서는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 제1세 단군왕검 67년인 갑술년(기원앞 2267)에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서 순 (舜)임금이 보낸 우(禹)와 만나 치수(治水)법을
가르쳐주게 했다.
태자 부루는 우에게 천부왕인(天符王印), 신침(神針), (皇거倧寶) 등
세가지 보물까지 주며
물을 잘 다스리라 하였다. 이에 우는 삼육구배(三六九拜)를 하고 ‘천제의
아드님의 명을 힘써 행하여 태평을 열고 삼신에게 감사 드리겠습니다’
고 하였다.
** 제2세 단군 부루왕검 26년 병인년(기원앞 2215)에 순(舜)임금의 아들
상균(商均)이 고국인 조선에 돌아와서 관직이 사도(司徒)에 이르렀다.
** 제4세 단군 오사구(烏斯丘)왕검 19년 임인년(기원앞2119)에 하(夏)나라
상왕(相王)이
덕을 잃자 그나라 신하들이 왕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임금(烏斯丘)이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藍), 진(眞), 번(番)
세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는데 소문만 듣고도
그들은 항복하였다.
** 제5세 단군 구을(丘乙)왕검 5년 병인년(기원앞 2096) 봄에 하나라
학사 두 사람이 역서 (曆書)와 두건갑자기(頭建甲子記)를 가지고
와서 입조하였다
** 제5세 단군 달문(達門)왕검 10년 정해년(기원앞 2073) 가을에 하나라
왕 소강(少康)이 사신을 보내와 신년 하례를 하였다… 중략
** 제12세 단군 아한(阿漢)왕검 2년 무자년(기원앞 1833)에 발 하나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에 나타나 울었는데 이 짐승은 하나라 남쪽의 양수(陽獸)로서
하나라에 난이 일어날 것을 미리 알고 난을 피하여 온 것이라고
하였다.
* 제위 38년 갑자년(기원앞 1797), 임금(阿漢)이 하나라 걸이 포악하고
무도하여 멸망하는 것을 보고 더욱 근면하여 국정을 바로 살피니
하나라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 신하되 기를 마다하고 조선으로
들어와 살았다.
* 이윤(伊尹)은 일찍이 유위자에게 배워 재주와 덕을 함께 갖춘사람으로
상나라 탕왕의 재상 이 되어 탕왕을 도와 하나라 걸왕을 쳤다.
** 무인년(기원앞 1783)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후의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이 바뀔 때 마다 사절이 찾아왔고,
21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47년(기원앞 1291)에는 은나라 왕
무정 (武丁)이 귀방(鬼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 (令支) 등을
침공하였는데 조선에게 크게 패하고 물러나며 화친을 청하고
공물을 보내온 일 도 있었으며 23세 단군 아홀(阿忽)왕검 28 년
(기원앞 1210)에는 은나라 백성들이 와서 은의 정치가 문란하여
살 수 없으니 조선에 와서 살게 해달라고 간청하므로 허락하니
이에 은나라 사람이 많이 옮겨와 살았다고도 하였으며 제 25세
단군 솔나(率那)왕검 29년(기원앞 1122)에 은나라 임금 주(紂)가
주(周)나라 무왕(武王) 희발(姬發)에게 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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