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중국의 역사.문화가 우리 신시 및 단군조선의 굴레에서 맴돌던 화하,
화산족(華夏,華山族:나라 를 열었던 지명에서 나온 이름일 뿐 혈통적 종족
이름은 아님))의 무리였고 그나마
한(漢:西漢:B.C 206~A.D. 9 / 東漢:A.D. 9~24)나라 이후의
한족(漢族)이나, 중화민국 (中國:A.D. 1911~1949 ) 이나
중화인민공화국(중국:A.D. 1949~현재)은 수십의 종족이 섞여 이루어진
민족일 뿐이다.
그런 그들이 역사조작에 그들의 사서를 모두 태우고 다시 쓰는 분서갱유와
춘추필법의 사필원칙 이 우리와 무슨 연관이 있겠느냐고 반문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은 딱딱하고, 어렵기만한 기록형 역사기술에서 탈피하여 근거
불확실하면서도 가능 성이 높은 예측기사를 전해보려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필자의 상상력은 아니며 여러 역사학자들의 주장으로서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 것들이다.
이는 진시황과 만리장성의 얘기인데 공자와 춘추필법 얘기로 시작한다.
공자는 자기가 은(殷:동이족이 세운나라)나라 사람이라고 분명하게
밝힌바 있으며 또 동이에 가서 살고싶다고도 하였다.
그런데 그의 저서 오월춘추에서는 동이(東夷)에 대해 제자가 묻자
‘융적과 더불어 이(夷)는 더러 운 것이다’는 등 동이를 깍아내리는 말이
나오는데, 또 다른 제자가 이(夷)족들은 예(禮)가 없는 야만족입니까?라고
질문하였을 때는 “동이는 어진사람들이며 마땅히 공경할 만한 사람들”
이라고 대답하였다. 이 모순을 어디에서 생긴 것으로 보아야 할까?
동이족이면서도 종족을 비하할 수밖에 없는 사연이 있었던 것이었을까?
아니면 2중인격자로서 권력에 아부하면서도 이면의 양심을 말하고
가르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을까? 다음 두 가지 예 를 참고해 보자.
‘그대는 교기(驕氣), 다욕(多欲), 태색(態色), 음지(淫志)를 버려라’
이 말은 공자가 예(禮)에 대해 묻기위해 노자를 찾아 주나라에 갔다가
노자의 꾸짖음을 받았다는 내용인데,남을 업신여기고 잘난체 뽐내는
태도(교기)와 욕심이 많다는(다욕) 것과 밖으로 드러내 는 표정(태색)으로
도리에 어긋나는, 즉 도리를 어지럽힌다(음지)는 꾸지람이다.
다른 하나는 가족과 더불어 좀 특이한 기록이다.
공자의 부친인 숙량홀(叔梁紇), 공자의 아들인 백어(伯魚), 백어의 아들
즉 공자의 손자인 자사 (子思)가 모두 자기 아내를 쫓아낸 소위 공씨삼세
출처(孔氏三世出妻)라는 고사의 장본인들이며 공자 또한 아내를 쫓아
내지는 않았으나 노나라 소공때 난리가 나서 제나라의 이계 땅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아내 기관씨는 남편인 공자를 따라가지 않고 송나라로
가벼렸다는 것이다.
공자의 출생에도 더 나쁜 기록이 있으나 공자를 폄하하기 위해 그의
나쁜점 만을 들춰내는 것이 아니니 그만두겠으나 우리(동이) 역사 조작과
직접적 관련이 있는 춘추필법 즉 중국을 높이고 외국(동이를 지칭)은
깍아내린다. 중국역사는의 상세히 외국사는 간단하게, 중국을 위해 중국의
수치를 숨긴다는 사필원칙을 기억하기를 바라면서 다음의 얘기를
전개한다.
공자와 진시황과 만리장성
공자 사망 후 진시황의 대대적인 분서갱유가 단행되었고, 춘추전국시대를
종식시킨 진시황은 몇 종의 책을 제외하고 모든서적을 불태우고 다시
썼으며 수많은 유학자들을 생매장까지 시켰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제도정비와 도량형 정비를 하였고 스스로 최초의 황제라
칭하며 만리장성 구축 에 나섰다. 이미 세명의 황제 조상이 있었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최초의 황제로 내세운 것은 앞서 3황제는 실제 있었던 사람들이
아닌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했거나 무시해버렸다는 것이고, 아마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자기가 제후국의 왕으로 머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실제 단군조선 제후국으로서의 지배를 받고있는 상황은 아닐지라도,
그들의 유학자들이 대대로 신봉해온 동이족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들을
말살하지 않고서는 지나족(화하, 화산족)의 천자국 단군조선 숭배사상을
지워버릴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결론적으로 진시황은 중국대륙에서 동이족으로부터 받은 지배흔적을
모두 몰아내고 또 종주국
단군조선의 공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만리장성 축조사업정책을 펼친
것이다.
진시황은 한족(漢族) 언어를 쓰는 나라들을 통일한 후 내륙에 존재하는
수많은 동이계열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이들을 숙청하고, 만리장성
축조에 동원된 것도 이들 타민족 계열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서적을 불태우고, 조작된 사서들을 다시쓰고, 수만명의
유학자들을 생매장 하고나면 당 연히 유물과 유적이 남을 것인데,
금속이나 철제 등은 녹여 진시황의 아방궁 건축물에 사용하였 듯,
변형시켜 흔적을 없앨 수 있겠으나 그 많은 무덤들(고인돌 포함)과
돌기둥과 탑들과 비석들은 어찌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보통
무덤이라면 모르되 신시 18대 및 단군조선 47대 총 65 대의 왕릉이며,
이는 고구려 장군총을 연상하면서 그 규모가 장군총보다 규모가 더
큰 왕릉들을 상상해보면 8~10층 축대형식의 돌의 양은 얼마이며 탑과
비석의 수는 얼마이겠는가, 이를 어디 에 묻을 수 이ㅆ으며, 어떻게 다
부숴버릴 수 있겠는가, 만리장성의 축대 속에는 유물이 될만한 것들을,
돌담에는 왕릉의 축대(상상을 초월하는 양)의 돌들을 사용하면서
유적들을 감추었으리라, 그것이 진시황의 만리장성 축조의 숨은 뜻이
아니었을까? 불과 30여년을 지속하다가 만 진나라 가 들과 산에서
자연석을 캐고, 나르고, 깍고, 다듬어 그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 이후 인류문화유산을 파괴하면서 반대세력 축출이라기
보다는 동이족 축출과 동이문화 숭배사상을 말살하려 하였으며, 그것은
우리 민족의 혼 빠진 정신상태를 비추어 일단 일본의 역사왜곡과 더불어
성공을 걷우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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