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7)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여기 즉 이 삼황의 시대는 중국의 실역사에 해당하지 않고 신화의 시대로
분류되는데 여기서 주목할만한 대목은 이미 앞서 소개했 듯
염제신농
(炎帝神農), 태호복희(太호伏羲), 여와 등 중국의 3조상은 우리의
단군조선 앞 신시의 실존 인물들이다
.

즉 태호 복희씨는 신시(한배달) 5세 환웅 태우의(太虞義)
아들 열둘 중 막내아들이며
, 6 세 환웅 다의발(多義發)의 아우이다.
그는 삼신산에 가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천하(天河)에서 괘도(卦圖)
얻었으며 팔괘
(八卦)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였으며, 여와는
환웅 다의발의 여동생이니 복희씨와도 남매지간이다
.

신농씨는 신시 제 8세 환웅 안부련 제위시 강수(姜水)의 군사감독관
소전
(小典)의 아들이다.

신농씨는 강수에서 살아 성을 강()씨라 했고 복희씨의 여동생 여와의
뒤를 이어 제후국 왕이 되었다
.

화하족과 무관한 천손(天孫) 민족의 조상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만들어 받드는 이유가 무었일까
?

*[최근, 1980년대부터 남.북한에 일고있는 역사 민족주의적 분위기의
확산에 대한 대응책 중의 일환 으로 동이족
(묘족)의 수장이라는 신시
14대 자오지(치우)천황을 한족(漢族)의 조상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이미 마쳤다
.

1992년부터 1997년까지 하북성 탁록현에 건설한 귀근원(歸根苑)
중화삼조당
(中華三祖堂)이 그 중 하나다. ‘귀근원’은 중화민족의
근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중화삼조당’은 중화민국의 중화민족
3명의 조상을 모신 사당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자신들 최고의 황제로 떠받드는 그 헌원황제와 동아시아
최초의 대전
, 탁록대전을 치른 붉은악 마라 부르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치우천황을 헌원황제와 나란히 삼조당 안에 안치해놓고 있는 것이다
.

즉 중화삼조당 안에는 치우. 황제. 염제를 모셔놓고 조상으로 모시고
있는 것이다
.]

<*[ ] 안은 우실하의 요하문명론 간접인용.>

이렇게 중국이 진시황의 분서정책(焚書政策), 공자의 춘추필법,
서남공정, 서북공정, 동북공정을 너머 최근에는 요하문명론을
제기하고 있다
.

소위 만주지역 서쪽인 요서 지방과 요하 일대를 중국문명의 시발지로
삼고
, 이 지역은 신화와 전설의 시대부터 중화문명의 시발점으로 삼아,
요서 지역 신석기문화인 홍산문화의 주도세력은 황제의 후예들 이며,
그러므로 요하 일대에서 발원한 모든 고대 민족과 역사는 중화민족이고
중국의 역사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 지역에 기원한 예. 맥족은 물론 단군. 주몽 등 우리의
조상들이 황제의 후손이 되며
, 우리 의 역사. 문화 모두가 중국의
방계 역사
. 문화로 전락하게 되는 공정이 곧 요하문명론의 실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은 다른 공정들보다 더욱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공정
, 요화문명론을 펴고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그것은 곧
홍산문화와 요하문명의 문화적 주된 맥은 한반도로 이어지는 북방 문화
계통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 요하문명과 홍산문화는 결국 한국문화의
원류이고
, 그 주인공은 우리 민족의 선조들인 때문이다.(이미 많은
유물
, 유적들이 발굴되었음)

이제 중국의 고대사를 들여다보자.

우리 단군조선의 개국과 같은 연대의 요임금, 뒤를 이은 순임금, 그리고
우임금의 얘기는 후에 따로 하기로 하고
19963월부터 시작된 중국의
하상주단대공정으로 대대적인 유적 발굴과 연구를 통해서 자신들의
고대 왕조인 하
(), (), ()의 설립 연대와 멸망 연대를
공식적으로 확정 지은 역사 부터 살펴보자
.

**(): 기원앞 2070~기원앞 1600

**(): 기원앞 1600~기원앞 1046, 상나라의 19대 반경왕(盤庚王)
도읍을 은
()으로 옮긴 것은 기원앞 1300년이며 이후 즉 도읍을
은으로 옮긴 이후를 상나라와 구별하여 은나라라고 한다
.

**(): 기원앞 1046~기원앞 771

사실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중국의 권위있는 역사학자, 고고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등 200여명 의 전문가들이 이루어낸 이 업적이
없었다면 중국의 역사시대는 주나라 공화
(共和)원년인 기원앞
841 년이 그들의 상한선이었으니 물경 1229년이나 그들의 역사를
고대로 끌어올린셈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