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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4)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나라를 위하는 길에 사기(士氣)보다 먼저인 것이 없고, 사학(史學)을 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 이
    없으니 그 까닭은 사학이 밝지 아니하면 사기를 펼 수 없고
    , 사기를 펼 수 없으면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고 정사
    (政事)와 법령(法令)이 갈라진다…..

    나라는 역사와 더불어 존재하며 사람은 정사와 더불어 갖춰지고 드러나는 것이니…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버린 후에 나라를
    위한다는 이들은 도대체 어떻게 스스로만 안전하다고 하겠는가…
    ..(中略)


    신시(神市)에 하늘을 여니 이로부터 나라의 계통이 이어지게 되었고, 나라의 계통이 이어짐에
    나라가 바로 서게 되었으며
    , 백성도 다스리는 계통이 있음으로써 모여들게 되었으니 역사가
    어찌 중요하지 않겠는가
    ? 이런 까닭에 기쁘게 단군님의 역사를 쓰기 시작한다.

    효경대왕(孝敬大王, 공민왕) 12(1363) 계묘 103,

    홍행촌(紅杏村)의 늙은이가 강도(江都)의 해운당(海雲堂)에서 쓰다.

    고려말 국무총리를 지내신 행촌 이암(1297~1364)께서 <단군 세기>를 지으며 쓴 서문 중의
    일부이다
    .


    오늘 우리에게 과연 선비의 꿋꿋한 기개가 있으며 사학(史學)을 최 우선 과제로 삼아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고 있는지
    , 그래서 나라가 역사와 더불어 어떠한 고난과 시련 앞에서도
    한 점 두려움 없이 견딜 수 있는 든든한 모습인지 돌아보며 성찰을 해보아야할 것이다.

    행여 바른 길도 사람다운 생각도 다 없어지고, 나라 꼴도 나라 정신도 다 사라져버리고 국가
    존망의 위기 앞에 서있는 꼴은 아닌지
    , 국가의 안전과 유익이 우선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데 과연 무엇이 우선이고 무엇이 차선인지를 고뇌하고 있는 세태인지 묻고 싶다
    .


    11세 단군 도해(道奚)왕검

    도해왕검께서는 부왕 노을왕검께서 세상을 뜨신 기원앞 1893년에 보위에 올라 57년 동안
    재위하였다
    . 이때 단군조선은 개국한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 나라의 정치는 날로 신선해지면 서
    백성들의 생활 역시 꾸준히 나아지기는 했지만
    , 한편으로는 조상 때부터 정신적 지주가 되었 던
    신교문화
    (神敎文化)의 윤리적 질서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임금께서는 태자로 세운 아한(阿漢)의 선생인 태자태부 유위자(有爲子)의 상소에 따라 오가
    (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에게 명하여 열 두 명산에 소도(蘇塗)를 짓게하고 제단 주변에
    박달나무를 둘러심게 하였으며 그 중 제일 큰 나무를 골라 환웅
    (신시 1대 거발환)의 상(雄常)
    으로 삼는 등 퇴색 되어가는 숭조정신과 윤리적 질서 확립에 성심을 쏟았다.

    사흘 동안 언행을 삼가하고 이레동안 강론하니 바람이 온 세상을 움직였다. 그 뜻을 밝히는
    글 을 써서 돌에 새겼다
    . 그 내용을 원문 생략하고 <단군조선 47대사><환단고기>를 종합
    하여 옮겨본다
    .


    ** 하늘은 아득하고 오묘하여

    그 道는 온누리에 막힘이 없이 가득하리니

    모든 일은 다만 참된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땅은 쌓아 간직하므로 큰 것이어서

    그 道는 어디에나 막힘이 없이 드러나리니

    모든 일은 다만 부지런히 힘쓰는 것으로부터 비롯됨이라

    사람은 지혜와 능력이 있어 큰 것이어서

    그 道는 어디에서나 막힘이 없고 고르게 구별함이니

    모든 일은 다만 조화를 이룸으로부터 비롯됨이라

    그렇기 때문에 神은 정성스러운 마음에 내려와

    성품은 광명을 이루어 세상에 바른 가르침을 펴서

    온 누리를 이롭게 하나니(弘益人間) 이에 돌에 이 글을 새겼다.

    ** 소도(蘇塗) 옆에는 경당을 세워 삼윤구서(三倫九誓:삼윤-,,/
    구서-,,,,, , ,,)를 가르쳤다.

    이렇게 하여 단군조선의 정신문명이 나라밖까지 떨치게 되자, 이해 여름 하나라 14
    임금 근
    (기원앞 1990~ 1880)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그러나 나라에는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부여후(夫餘候)가 거느리는 지방에서
    알유의 난이 있어 매우 시끄러웠다
    .

    임금은 웅가(熊加)를 명하여 구려(句麗)와 진번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평정하게한 일도
    있었으 니
    , 이를 바탕으로 임금께서는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장정들은 다 병역에 종사)
    실시하였다
    .

    을유년(기원앞 1836)에 송화강(松花江)가에 기계를 만드는 작청(作廳)을 두고 각종 배와 기계
    를 만들었는데 발명품 수가
    26가지 이상이 된다.

    임금께서는 재위 57년의 병술년(기원앞 1835)에 세상을 뜨시니 만백성이 슬퍼하였다. 태자
    아한
    (阿漢)이 보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