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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3)-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3)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10세 단군 노을 왕검 때의 병오년(기원앞 1946)에 육지에서 연꽃이 피더니 지지를 않았고,
장백산의 누워있던 돌이 저절로 일섰으며 천하(天河)에서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 그림은 윷판과 같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그 윷판에 관한 기록
, 즉 ‘윷놀이에는
한민족 신선철학의 정수와 환단
(桓檀:한단) 시대의 통치조직이 담겨 있다’고 하는 그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


윷놀이에는 동양철학의 핵심인 오행(五行)의 방위관념(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중앙해 태)과 성수(聖獸)신앙, 칠성(七星)신앙, 삼신(三神)신앙이 들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

우리는 흔히들 태극기에 그려진 팔괘(八卦), 오행상수철학, 신선사상, 유교사상, 제천문화
등이 중국에서 들어온 사상과 문화라고 잘못 알고있는데 이 모두 우리민족의 것이다
.


윷판을 보면 29개의 원점이 있으며 중앙의 점()은 천원점(天元點)이라 해서 황극(皇極),
즉 임금자리에 해당하는 중심이기 때문에 세지 않는다. 따라서 윷판에서는 28개의 원(),
바둑판 에서는 360개이다.

윷판 28개의 원은 하늘의 28(宿) 별자리를 나타내며, 바둑판의 360점은 지구의 360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

28(宿) 별자리는 중국 도교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하늘의 별자리를 체계화
시 킨 것이다
. 칠포리의 암각화, 단양군 영춘면 하리의 윷판바위, 수곡리의 신선바위, 만주
집안현 의 고구려 고분 인근바위 등에 윷판이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

윷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

전국 명산의 사찰에는 산신각, 칠성각, 삼성각이 있는데 이러한 전각들은 삼신신앙,
산신신앙, 칠성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몽골, 터키, 위그르, 여진, 사모예드,에벤키, 거란,
선비 등 수많 은 유목민족 또는 수렵민족들이 37의 성수(聖數)신앙을 받들고 오행의
방위관념을 갖고있 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이유는 이 민족들이 본래 환단시대에는 천손족
,
삼한을 구성하던 같은 민족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양사상과 태극문양, 징기스칸이 행한3수의식, 5수의식, 광명사상, 백산(불함산, 태백산 등)
신앙, 굴렁쇠 놀이, 가위 바위 보,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부르며 추앙하는 등은 물론
신단수
, 소도(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신앙 등이 이들 민족에 유래하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

환단고기(한단고기)에 의하면 윷놀이는 신시의 제 14대 한웅 자오지( 치우천왕:
기원앞2706 ~2598)천왕 때의 자부선생께서 ‘천부경’이 전하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

이로부터 베링해협을 건너간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풍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윷놀이와 마야족의 불
(bull)게임과 아즈텍의 파톨리 게임 등이 남아있는 같은 풍속이고,
캘리포니아 소노 마 레이크의 인디언 풍속박물관에 인디언들이 즐긴 윷놀이가 전시되어
있는데 윷말과 윷 판이 한국의 윷놀이와 꼭같다고 한다
.

우리나라에서의 윷놀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조선시대의 김문표(金文豹:1568~1608)
시작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윷판을 만든사람은 도를 알고 있었으며
, 윷판의 둥근 외각은
하늘을 형상 하고 네모진 속은 땅을 본떴으며 안팍으로 늘어선 것들은
28수인데, 소위
북극성이 제자 리에 머물고 뭇 별들이 그것을 향해있는 모습이다”고 하였습니다
.

윷놀이 하나에도 천손민족의 철학과 하늘의 이치를 담아내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기사 전문을 옮기지 못하고 간추려 옮기는 것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윷판(놀이)에 새겨진 한민족의 철학

거북이가 등에 윷판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는 병오년(1946)년의 기이한 현상의 기록에서 이미
앞서 시행돼오던 놀이문화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고
, 역시 위의 기록에서 밝혀주듯 이미
그때로 부터
700여 년 전의 자부선생께서 창안하신 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성취루 현상, 일식, 밀물과 썰물 등의 천문기록들 또한 어김없는 사실들로 천문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단군 9대 아술왕검 때 두 해가 함께 떴다는 기록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며
단군 제
11세 도해(道奚)왕검 편으로 이어간다.


11세 단군 도해(道奚)왕검

도해왕검께서는 부왕 노을왕검께서 세상을 뜨신 기원앞 1893년에 보위에 올라 57년 동안
재위 하였다
. 이때 단군조선은 개국한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 나라의 정치는 날로
신선해지면서 백성들 생 활 역시 꾸준히 나아지기는 했지만
, 한편으로는 조상 때부터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신교문화
(新敎文化)의 윤리적 질서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임금께서는 태자로 세운 아한(阿漢) 의 선생인 태자태부 유위자(有爲子)의 상소에 따라
오가
(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에게 명 하여 명산에 소도(蘇塗)를 짓게하고 제단 주변에
박달나무를 둘러심게 하였으며 그 중 제일 큰 나무를 골라 환웅
(신시 1대 거발환)의 상으로
삼는 등 퇴색 되어가는 숭조정신과 윤리적 질서 확립에 성심을 쏟았다
.

이렇게 하여 단군조선의 정신문명이 나라밖까지 떨치게 되자, 이해 여름 하나라
14대 임금 근 (기원앞 1990~ 1880)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부여후(夫餘候)가 거느리는 지방에서 알유의 난이 있었으나 임금은 웅가(熊加)
명하여 구려
(句麗)와 진번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평정하게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
실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