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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5)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12세 단군 아한(阿漢)께서는 원년 정해년(기원앞 1834)에 맏아들 흘달(屹達)을 태자로 세우고
둘째 아들을 안평왕
(安平王)으로 삼았다.

이듬해 무자년 여름에 발 하나 달린 짐승이 송화강 북쪽 변방에 나타나 슬피울었다.

임금께서 유위자(有爲子)에게 물으니 유의자가 답하기를 “천지조화의 징조로서 이 짐승은
()나라 남쪽의 신명(神明)한 양수(陽獸)인데, 하나라가 앞으로 어려울 것을 미리 알고,
그 난을 피하여 이곳에 와서 슬피울고 있는 것입니다”


무자 2년 즉 기원앞 1833년 가을에 단군 아한왕검께서 나라 안을 두루 순시하였는데 요하
(遼河)의 남쪽에 이르르자 순수관경(巡狩管境)의 비를 세워 역대 제왕의 이름과 호를 새겨
이를 전하게 하셨다
. 이것이 금석문자(金石文字)로는 최초이다.

훗날 창해(蒼海)의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이 이곳을 지나다가 시 한편을 지었는데
그 시 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마을 밖 변한(弁韓)이라 이르는 곳에 / 홀로 뛰어난 돌이 있었네

받침은 허물어지고 철죽만 붉었는데 /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고나

천지가 처음 열릴 때 생겨나서 / 흥망의 황혼에 우뚝 서있으니

글에 보이는 증거는 없지만 / 이 어찌 단군의 자취가 아니겠는가


여기에서 창해(蒼海)의 역사(力士) 여홍성(黎洪星)의 창해와 역사 여홍성에 관해
부언하고자 한다
.

창해(蒼海)라는 곳을 강원도 강릉으로 보는 학설이 난무했던 바, 이를 바로 잡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후한서의 동이전에는 “원삭 원년 예군(濊君) 남여(南閭) 등이 우거왕을 배반하고
28만명을 이끌어 요동을 찾아가 항복하고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

28만명을 이끌고 강릉에서 요동까지?

왜곡도 이정도가 되면 내두르던 혀까지 굳어버릴 지경이 된다.

그 진실은 “…전약 다시 팽오(彭吳)로 하여금 예맥조선(穢貊朝鮮)을 재물과 금품으로
매수하 여 그 일부에 창해군을 두니 연나라 제나라 등지에서 소요가 일어났다”인 것이다
.

무력으로서 당당하게 침략한 것이 아니라 엄청난 재물을 써서 예맥조선의 ‘남여(南閭)’라는
족장 하나를 매수한 것이다
.

천하장사 여홍성은 장랑의 뜻에 동조하여 양무현(陽武懸) 박랑(博浪)에서 120근이나 되는
쇠방망이로 진시황의 마차를 공격하였으나 실수하여 그 부차
(副車)만을 박살내는 것으로
진시황 시해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

***진시황에게 망국의 한을 품은 장량이 여홍성을 만난 곳은 하북성이요, 진시황을 공격한
곳은 하남성이다
.

***진시황의 분서정책(焚書政策)은 의학과 농업 등의 기술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서를
불 태워버린 악명 높은 정책인데 특기할만한 것은 불태운 것으로 끝나지 않고 태우고나서
다시 썼다는 것이다
. 이에 관해서는 차후 설명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역사 여홍성이 위의
시를 언제쯤 썼을까
? 하는 것이다.

진시황이 동방순행 도중 발병하여 죽게되는 해가 기원앞 210년이다.

짐작컨데 여홍성이 장량을 만나게 되는 것을 기원앞 206년 전후로 추정한다면 단군 제12
아한왕검께서 나라 안을 순행하시다가 요하의 남쪽에 이르러 순수관경비를 세웠던 기원앞
1833 년으로부터 16백여년이 흐른 후였다는 것이니 ‘글자는 보이지 않고 이끼만 푸르구나’
는 말을 이해할 수 있겠고 그가 동이족었다는 것 또한 쉽게 짐작이 간다
.


다시 원류에 돌아와 아한왕검의 특기할만한 기록들을 발췌하여 옮긴다.

을묘년(기원앞 1806)에 처음으로 청아(靑我)의 대부 한불배(韓不倍)와 옥저(沃沮)의 대부
고사심
(高士深)과 맥()의 대부 신돌개(申突蓋)에게 명하여 제후로 삼고 토지를 주었다.

이듬해에는 유위자를 국태사(國太師)로 삼고, 태학관(太學館:처음 시도된 고등교육관,
고려때 의 국자감이나 성균관과 같은 교육기관)을 세워 선비를 양성하였다.


갑자년(기원앞 1797) 임금께서는 하나라의 걸()이 포악하고 무도하여 스스로 멸망해가는
것을 보면서 더욱 근면하게 국정을 살피며 백성을 살피니 와서 신하되는 자가 많더라
.


무인년 상나라의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해 7월에 왕검께서 세상을 뜨시니 백성들이 부모의 상을 당한 것처럼 울었으며 태자
흘달
(屹達)이 제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