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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2)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9세 단군 아술(阿述)왕검


8세 단군 우서한(于西翰)왕검께서 보위에 오른지 단 8년만인 을묘년(기원앞 1986)
세상을 뜨시고 태자 아술이 보위에 오르니 곧 제
9세 단군 아술(阿述)왕검이다.

역시 원년인 병진년(기원앞 1985)에 맏아들 노을(魯乙)을 태자로 세웠다.

이 해 봄에 두 해가 함께 뜨니 구경하는 사람들이 늘어섰는데 마치 울타리같았다.

임금이 어질고 덕이 있어서 법을 어기는 자마저도 “땅이 오물로 더러워질 수도 있으나
결국 비나 이슬로 씻겨내려가는 법”이라며 용서하니 그 덕에 감화되어 법을 어긴자들을
포함
, 백 성들이 크게 감화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사년(1984)에는 청해(靑海)의 우착(于捉:단기고사에는 于促우촉)
군 사를 일으켜 성에 들어와 궁궐을 포위하는 반란이 있었다
. 임금께서는 상춘(常春)으로
피하 였다가 지우속
(支于粟)을 보내어 우착의 목을 벤뒤 환궁하는 불상사도 있었다.


임금이 북쪽지방을 순행하며 민정을 살피는 한 편 고소(高蘇)에게 명하여 제6세 달문왕검
때부터 실행해오던 공화
(共和)와 화백(和白)의 정치를 펴오던 국법전서를 보강, 수정 보완한
새 국법전서를 편찬하였으며 을성문덕
(乙成文德)의 간청을 받아들여 매년 81일을
참정권 의 날로 정하고 백성들이 직접 국정에 참여하는 민권의 길을 열었다
.

우리민족의 참정권이 기원앞 1980년에 이미 실시되였다는 기록이다.

또 위의 두 해가 떴다는 기록을 황당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후 여러 차례 이같은
경우가 발생 했으며 과학적으로도 입증할 수 있는 기록이 있으나 그에 대한 설명은 뒤로
미룬다
.

한가지를 더 곁들이자면 지난 주 제7세 단군 한속(翰粟)왕검에 대한 기록을 보시고 전화를

주신 분이 계셨는데 본 연재에 대한 찬사와 격려와 아울러 의문점을 제시하였는데
한단고기에 의하면 한속이 아닌 한율
(翰栗)로 되어있는데 어느것이 바른 것이냐는
것이었다
.

밤 율()자와 조 속(:오곡의 하나)자 사이에서의 오기일 것인데 어느것이 오기일지는
지금부터 여러자료를 좀더 검토하겠다는 약속을 드렸다
.

위의 기사에서도 또 한번 율()과 속()의 다름이 나타난다.

상춘에서 임금이 지우속을 보내어 반란괴수 우착의 목을 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한단고기에 의하면 우지
(于支)와 우율(于栗)을 보낸 것으로 돼 있다.

西의 아래에 오는 나무 木 자와 쌀 米 자의 혼돈으로 오기가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고동영의 <단군조선 47대사>를 참고 하는지라 일단 확인될 때까지는
이에 따르기로 한다
.


임금이 재위 35년 되던 경인년(기원앞 1951)에 세상을 뜨시니 태자 노을이 보위에 오른다


10세 단군 노을(魯乙)왕검


원년 신묘년(1950)에 맏아들 도해(道奚)를 태자로 세웠다.

또한 혁보(赫普)를 태자태부(太子太傅), 풍오(風五)는 수상으로, 을성문덕(乙成文德)
상장으로
, 용가(龍加)와 내양(來良)은 호군(護軍)으로 각각 임명하였으며 처음으로 큰
동산에 울
(우리)을 만들어 가축과 그밖의 짐승을 기르게 하는 등 목축을 권장하였다.


이아한(伊阿漢)의 건의로 임금이 부리지 않는 자문기관을 설치하여 정사를 자문
받았으니 정사의 최고 자문처로 삼았으며 이아한을 숙정처장
(肅政處長)으로 삼아
고시
(考試)를 통해 인재를 뽑아 관직을 맡기게 하였다.


을미년(기원앞 1946)에는 처음으로 각 고을에 신원함(申寃函:伸寃木:신문고와 같음)
설치하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을 들으시니 백성들이 기뻐하였다
.

엄년(嚴年)이라는 자가 처들어 왔으나 역시 상장군 지우속(支于粟)을 보내어 정벌하였다.


병오년(기원앞 1935)에는 동문밖 십리되는 곳 육지에서 연꽃이 피더니 지지 않았고,
장백산의 누워 있던 돌이 저절로 일어섰으며, 천하(天河)에서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 그 그림은 윷판과 같았으며, 발해 연안에서 금덩이가
노출되었는데 그 수량이
13()이나 되었다. (윷판에 대한 설명도 뒤로 미룬다)


무자년(기원앞 1893)에는 천문대(첨성대)를 쌓고 감성관(監星官)을 두었다.


기축년(기원앞 1892)에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니 태자 도해(道奚)가 보위에 올랐다.

*** 노을왕검의 재위기간을 <단기고사>58, <단군세기>에는 59년으로 되어 있으나

11세 도해왕검은 <단군세기>1년 적게 되어있어 단군조선의 역년에는 변함이 없다.


*** 필자의 부주의로 인해 미쳐 지우지 못한 초고가 본 란에 실리므로 해서 읽는
분들에게 크게

결례 되었음을 사과 드리며 늦게나마 이의 바른 글을 보내 바로잡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