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33)
<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장백산의 누워있던 돌이 저절로 일섰으며 천하(天河)에서 신기한 거북이가 등에 그림을 지고
나타났는데 그 그림은 윷판과 같았다고 하였는데 오늘은 그 윷판에 관한 기록, 즉 ‘윷놀이에는
한민족 신선철학의 정수와 환단(桓檀:한단) 시대의 통치조직이 담겨 있다’고 하는 그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
윷놀이에는 동양철학의 핵심인 오행(五行)의 방위관념(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중앙해 태)과 성수(聖獸)신앙, 칠성(七星)신앙, 삼신(三神)신앙이 들어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들 태극기에 그려진 팔괘(八卦), 오행상수철학, 신선사상, 유교사상, 제천문화
등이 중국에서 들어온 사상과 문화라고 잘못 알고있는데 이 모두 우리민족의 것이다.
윷판을 보면 29개의 원점이 있으며 중앙의 점(원)은 천원점(天元點)이라 해서 황극(皇極),
즉 임금자리에 해당하는 중심이기 때문에 세지 않는다. 따라서 윷판에서는 28개의 원(점),
바둑판 에서는 360개이다.
윷판 28개의 원은 하늘의 28수(宿) 별자리를 나타내며, 바둑판의 360점은 지구의 360일을
나타내는 것이다.
28수(宿) 별자리는 중국 도교에서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이 하늘의 별자리를 체계화
시 킨 것이다. 칠포리의 암각화, 단양군 영춘면 하리의 윷판바위, 수곡리의 신선바위, 만주
집안현 의 고구려 고분 인근바위 등에 윷판이 새겨져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윷판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북두칠성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국 명산의 사찰에는 산신각, 칠성각, 삼성각이 있는데 이러한 전각들은 삼신신앙,
산신신앙, 칠성신앙을 의미하는 것으로 몽골, 터키, 위그르, 여진, 사모예드,에벤키, 거란,
선비 등 수많 은 유목민족 또는 수렵민족들이 3과 7의 성수(聖數)신앙을 받들고 오행의
방위관념을 갖고있 기 때문이라고 하며 그 이유는 이 민족들이 본래 환단시대에는 천손족,
삼한을 구성하던 같은 민족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음양사상과 태극문양, 징기스칸이 행한3수의식, 5수의식, 광명사상, 백산(불함산, 태백산 등)
신앙, 굴렁쇠 놀이, 가위 바위 보, 활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 부르며 추앙하는 등은 물론
신단수, 소도(하느님께 제사드리는 제단)신앙 등이 이들 민족에 유래하고 있는 것을
간과해서 는 안될 것이다.
환단고기(한단고기)에 의하면 윷놀이는 신시의 제 14대 한웅 자오지( 치우천왕:
기원앞2706 ~2598)천왕 때의 자부선생께서 ‘천부경’이 전하는 정신을 구체적으로
풀어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베링해협을 건너간 남북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풍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윷놀이와 마야족의 불(bull)게임과 아즈텍의 파톨리 게임 등이 남아있는 같은 풍속이고,
캘리포니아 소노 마 레이크의 인디언 풍속박물관에 인디언들이 즐긴 윷놀이가 전시되어
있는데 윷말과 윷 판이 한국의 윷놀이와 꼭같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의 윷놀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조선시대의 김문표(金文豹:1568~1608)에
시작 되었다고 하는데 그는 “윷판을 만든사람은 도를 알고 있었으며, 윷판의 둥근 외각은
하늘을 형상 하고 네모진 속은 땅을 본떴으며 안팍으로 늘어선 것들은 28수인데, 소위
북극성이 제자 리에 머물고 뭇 별들이 그것을 향해있는 모습이다”고 하였습니다.
윷놀이 하나에도 천손민족의 철학과 하늘의 이치를 담아내고 있다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기사 전문을 옮기지 못하고 간추려 옮기는 것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윷판(놀이)에 새겨진 한민족의 철학
거북이가 등에 윷판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는 병오년(1946)년의 기이한 현상의 기록에서 이미
앞서 시행돼오던 놀이문화임을 미루어 알 수 있었고, 역시 위의 기록에서 밝혀주듯 이미
그때로 부터 700여 년 전의 자부선생께서 창안하신 놀이었음을 알 수 있다.
오성취루 현상, 일식, 밀물과 썰물 등의 천문기록들 또한 어김없는 사실들로 천문학자들에 의해
증명되고 있다. 단군 9대 아술왕검 때 두 해가 함께 떴다는 기록에 대한 설명을 뒤로 미루며
단군 제11세 도해(道奚)왕검 편으로 이어간다.
제11세 단군 도해(道奚)왕검
도해왕검께서는 부왕 노을왕검께서 세상을 뜨신 기원앞 1893년에 보위에 올라 57년 동안
재위 하였다. 이때 단군조선은 개국한지 400년이 지나는 동안 나라의 정치는 날로
신선해지면서 백성들 생 활 역시 꾸준히 나아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상 때부터
정신적 지주가 되었던 신교문화(新敎文化)의 윤리적 질서가 퇴색되어가고 있었다.
임금께서는 태자로 세운 아한(阿漢) 의 선생인 태자태부 유위자(有爲子)의 상소에 따라
오가(우가, 마가, 구가, 저가, 양가)에게 명 하여 명산에 소도(蘇塗)를 짓게하고 제단 주변에
박달나무를 둘러심게 하였으며 그 중 제일 큰 나무를 골라 환웅(신시 1대 거발환)의 상으로
삼는 등 퇴색 되어가는 숭조정신과 윤리적 질서 확립에 성심을 쏟았다.
이렇게 하여 단군조선의 정신문명이 나라밖까지 떨치게 되자, 이해 여름 하나라
14대 임금 근 (기원앞 1990~ 1880)이 사절을 보내어 방물(方物)을 바쳤다.
부여후(夫餘候)가 거느리는 지방에서 알유의 난이 있었으나 임금은 웅가(熊加)를
명하여 구려 (句麗)와 진번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평정하게 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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