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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형

부끄러운 건 부모된 우리 어른이다.<1>- 이문형(워싱턴문인회) 미국 교과서에 한국역사가 대폭 추가된다고 합니다. 한국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과 농업기술과 불교 전파 내용을 비롯해서 10세기 일본의 귀족층이 한국 문화를 기반으로 일본의 고유문명을 개발했다는 내용까지 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교과서에 소개된 ‘2차대전의 원인과 결과’에 연관된 한국전쟁(10학년 세계사)이 유일했던 것에 비하면 이번의 이 결정은 가히 파격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얼마전 ‘한국 역사.문화에 어두운 2세들’이라는 제하의 글을 읽으면서 충격을 받은 바 있었는데 그 것이 불과 1개월여 만에 감동으로 다가올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그 충격이라는 것은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비교하여 유독 한인학생들이 자기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모르는 데 놀랐다는 한 미국인 교사의 얘기로 비롯되었습니다..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8)-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8)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배달. 동이겨레(안호상), 쥬신족(김운회), 천손족(김종서) 그 밖의 조선, 배달나라 등, 민족의 다양한 명칭이 통일되지 못한 탓으로 우리 상고사 이해에 미혹이 따르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디 수백년, 몇천년의 역사얘기인가, 단군조선 앞 환국, 환웅의 신시까지도 아우르는 상고사 에 합당하다고 판단되어 필자가 선호하는 명칭은 천손민족(天孫民族) 이고 그 선호하는 근거와 이유를 들어보겠다. 민족에 따라 산과 들, 물과 바위, 소와 돼지 혹은 개까지 그 숭앙하는 대상이 수도 없이 많은 데 우리민족처럼 하늘, 하늘임금을 우러러 숭앙하는 민족은 없다.우리민족은 슬퍼 도 기뻐도 하늘을 보며 한탄하고, 하늘을 보며 감사 한다. 그것이 설령 자연발생적 신앙..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7)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서 미처 설명치 못한 조의(皁衣)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다 소위 검은색 조복을 입은 선가(仙家)로서 고구려 전기에도 조의라는 벼슬이 있었으니, 이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교육기관인 경당(扃堂)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전통적인 생활과 수련을 하는 조의선인(皁衣仙人)들이 폭넓게 기층을 형성하고 있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등용에 대한 확실한 철학과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갖춘 체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고유경전 중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 神誥)에 근거를 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 촉(禁觸), 곧 삼법수행 (三法修行)을 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한 자를 조의라 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인식으로 강렬하게 남아 있는 날세고..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6)-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6)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각 가정에서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벽 위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로된 주머니를 걸어 두거나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고 삼신주머니’라 불렀으며 종이주머니 대신 흰 항아리를 놓아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삼신항아리’ 또는 ‘삼신단지’라고 불렀다. 또한 앞선 칼럼에서 밝혔듯이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 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 는 것으로서 ‘부루단지 (夫婁壇地)’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이는 단군조선 의 2세 단군이신 부루단군께서 홍수를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게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5)-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5)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오늘은 곁길로 들어 두어가지 경우를 통해서 우리가 우리의 역사를 바로 알고 바로 세우는 일이 얼마나 긴요하고 긴박한 일인가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중국 서안지방에는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약 100여개의 피라미드가 있다고 한다. 1982년 중국이 300m가 넘는 대형 피라미드에 대한 발굴작업을 벌였는데 3일 만에 발굴을 중단하고 다시 덮어버렸다는 것이다. 기자들까지 초청하여 발굴내용을 설명하고 공개적으로 시작한 발국작업이 그렇게 중단된 것이다. ‘자기들의 역사와 다른 유물이 나왔기 때문에 덮어버렸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당시 그곳을 방문했던 사람은 말한다. 이집트의 가장 큰 피라미드의 높이가 180m를 넘지 않는데 비해 중국 서안지역의 피라미..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조선 제3세 단군 가륵(嘉勒: 기원앞 2182년) 앞서 가륵 8년(기원앞 2175)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고 임금께서는 지백특(支伯特=티베트)에서 토별하여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를 내려다 보니 밥짓는 연기를 보고 그 많지 않음에 세금을 감하고 살림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불함산에 대한 주 장과 기록이 다양하여 이를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선 본문의 출처 高東永의 의 기록을 먼저 살펴본다. *** 不咸山: 백두산이라고 하는가 하면 완달산(完達山)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에는 백두 산이 모두 여덟 개의 이름이 있는데,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 (白山..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3)-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3)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조선 제3세 단군 가륵(嘉勒: 기원앞 2182년) 선대임금이 다스리던 도(道)를 이어 개국 이후 미진했던 일들을 완성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이 때 나라에서는 신시시대부터 내려오던 녹도문(鹿圖文:사슴 발자국을 형용한 상형문자)이 있었는데 뜻글 이어서 백성들이 해득하기 어려워 하므로 불편을 덜기 위해 소리대로 적는 문자를 만들어 널리 사용하 게 하는 등 과감한 어문정책을 단행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국사를 편찬하기도 했다. 이 모두 나라의 근 본을 더욱 굳게 다지기 위한 큰 치덕이다. 앞 임금대에 착공된 궁궐신축을 완공하였다. 비대해진 조정 정사는 25년이나 끌어온 궁궐을 완성함으 로써 한층 질서가 잡혔고 지방 행정 역시 짜임새를 갖추었다. 원년..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2)-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2)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홍익인간(弘益人間) 우리나라 교육법 제1조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교육하라’이다. 그렇다면 이 홍익인간이라는 용어는 언제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내용의 정확한 뜻이 무엇 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개천은 단군으로부터, 홍익인간 역시 단군왕검의 백성다스리는 이념(철학)으로 생각 하고 있다. 그러나 환인(하늘임금: 天帝)께서 홍익인간의 세상을 펼 수 있는 환웅을 불러 홍익인간을 펼칠 수 있는 삼위 태백을 가르키며 너희가 가서 다스리라 하면서 무리 3천명과 천부삼인(天符三印)을 주어 내려보냈다는 앞서의 기술을 기억하시리라 믿는다. 곧 신시 1세 환웅 거발환(居發桓)이며 이로부터 나라의 개천은 시작되었다는 것, 그러니까 위대한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1)-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1)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단군 제2세 왕검 부루(扶婁) 11년, 신해(기원앞 2230) *여수기(餘守己)에게 예(濊)를 다스리게 하니 아들 아홉이 각각 작은 고을을 맡아 일 을 도왔다. 12년, 임자(기원앞 2229) *신지(神誌) 귀기(貴己)가 칠회력(七回曆)과 구정도(邱井圖)를 만들어 바쳤다. *10월에 칠성역을 널리 사용하도록 명령하였다. 16년, 병진(기원앞2225) *남산(南山)에 삼일신고(三一神誥)비를 세웠다. 18년, 무오(기원앞2223) *이때 임금은 16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맏아들 가륵(嘉勒)을 태자로 삼고, 그 밖의 15 명 중봉건국(封建國)을 얻은 아들이 8명이며, 나머지는 다 친왕(親王)이 되었다. *6월에 조서를 내려 충의열사, 효자효부, .. 더보기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0)-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0)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아직까지도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중국으로부터 들어왔다. 중국의 것이 더 오래고, 더 크고, 무엇이든지 먼저였다며 문화 및 물질문명이 중국으로부 들어왔다는 고정관념의 틀 속에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유적이나 유물이나 고고학적 자료가 발굴되어도 그저 조용하기만 하다. 중국이나 일본은 물론 다른 어떤 나라에서 유적, 유물의 발굴에 이처럼 냉담할 것이며 이처 럼 부정적이겠는가! 여기 부루단지(扶婁壇地)만 해도 지금까지 혹은 50여년 전까지 내려오는 풍속인데 이를 귀하 게 여겨 소중하게 지켜나가려는 일말의 움직임도 없다. 부루단지는 가을에 햇곡식을 질그릇 단지(항아리)에 담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어 집안의 안..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