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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7)-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7)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난 칼럼에서 미처 설명치 못한 조의(皁衣)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다

소위 검은색 조복을 입은 선가(仙家)로서 고구려 전기에도 조의라는 벼슬이 있었으니, 이는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교육기관인 경당
(扃堂)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전통적인 생활과
수련을 하는 조의선인
(皁衣仙人)들이 폭넓게 기층을 형성하고 있어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 등용에 대한 확실한 철학과 폭넓은 사회적 기반을 갖춘 체계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
우리의 고유경전 중의 하나인 삼일신고(三一 神誥)에 근거를 둔 지감(止感), 조식(調息),
금 촉(禁觸), 곧 삼법수행 (三法修行)을 하여 어느 경지에 도달한 자를 조의라 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인식으로 강렬하게 남아 있는 날세고 수련이 잘된 검은 옷의
조의 모 습이다
. 벼슬이라기보다는 의열단에 준하는 집합체로서 민족의 위기에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처하는 등 깊은 인상을 남기고 있는 인식이다
.


5세 단군 구을(丘乙)왕검

4대 단군 오사구(烏斯丘)께서는 재위 38년 만인 신유(기원앞 2100)에 세상을 뜨시고
태자 구을이 보위에 올라 제
5대 단군 구을(丘乙)왕검이 되었다.


어디를 가나 백성들의 살림은 안정되었다.

반면 이즈음 하()나라는 정치가 어지러워진 탓에 단군조선을 흠모하는 하나라 백성들이
가족을 이끌고 찾아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

태백은 거룩한 곳으로서 제천(祭天)행사가 잦았는데 자연 참배자들도 늘어나 성역으로서의
질서가 무너질 것이 염려되어 나라에서는 그곳에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엄한 규범을
만 들었다
.

또한 구을왕검께서는 나라의 기후에 맞는 역법(曆法)을 만들어 농사짓는데 사용하도록 하였고
이를 위해 천문
(天文) 천도(天度)를 연구하는 감성관(監星官)을 조정에 두어 천문관측기를
만드는 등 자연의 이치를 밝혀 백성들이 실생활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

***중국의 학자 서량지가 쓴 <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도 “중국의 책력법은 동이에서
시작되었다
. 책력을 만든사람은 회화자이다. 그의 계통은 은나라 상나라의 동이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것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기술되어 있다고 한다.


구을 원년, 임술년에 맏아들 달문(達門)을 태자로 세우고, 세 아우를 각각 임금이 세운 봉건
제후국인 번왕
(藩王)으로 봉하였다.

이듬해인 계해(기원앞 2098)5월에는 누리라고도 하는 황충(蝗蟲)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는데 이는 농민들이 가장 두려워 하는 해충이다
.

메뚜기과에 속하는 이 곤충은 떼지어 날아다니다가 내려 앉으면 그 앉은 곳에는 풀이 하나 도
남아나지 않는다는 해충이다
.

임금께서 백성의 근심하는 바를 들으시고 친히 밭과 들을 돌아보신 뒤 황충 한마리를
삼키고나서 하느님께 황충을 없애달라고 간절히 아뢰었더니 황충이 다 죽었다
.


구을 4, 을축(기원앞2096)년 봄에 하()나라 사절이 왔었고, 유응(有應)씨가 도에 어긋
나는 발칙한 짓을 하므로 상장
(上將) 소나벌(蘇奈伐)을 보내어 평정하였다.

10, 신미(기원앞2090)년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므로 국고(國庫)를 열어
쌓아 두었던 곡식을 풀어 백성을 구제하였으며 갑술
(기원앞 2087)년에는 앞서 두었던
감성관
(監星官) 즉 천체를 관측하는 관리 황보덕(皇甫德)을 시켜 천체의 위치와 운행을
관측하는 기계 혼천기
(渾天機)를 만들게 하여 천도(天度: 일주일의 밤낮에 걸쳐 하늘이
움직이는 단위
)와 맞게 하였다.


정축(기원앞 2084)년에는 임금께서 장당경(藏唐京) 고역산(古曆山)에 행차하여 제천단을
쌓고
(봉축) 주변에 근화(槿花:薰花:나라꽃:무궁화)를 많이 심었다.

그해 7월 임금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었고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으며 대박산
(大博山)에 장사지냈다.


단군 제5대 구을께서 남쪽으로 행차하였다가 병을 얻어 돌아가신 송양(松壤)에 관한
기록을 살펴본다
.

<단기고사>에는 송양을 강동(江東)이라 하였다. <신단실기><강동릉변>에는
강동현이라 했으며 이 강동에 단군릉이 있는데
1세 단군왕검의 능이 아니라
5대 단군 구을왕검의 능 일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곧 이 능의 소재지인 평양시 강동군(전에는 평남 강동군) 대박산을 이름이며
몇 년전 이북에 서는 이 단군릉을 대대적으로 개축한 일이 있는 그 릉이다
.

삼국유사를 보면 단군왕검은 아사달로 돌아 오시사 산신이 되시니 단군의 수는
1908세를 누리셨더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4747명의 왕검이 있었다는 것을
믿지 않고서는 강동의 릉을 제
5대 구을왕검의 릉이라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먼저 조선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서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그
것을 과장하여 조선 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침으로서 그 부모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하략

이 내용은 1925년 사이토 총독이 전국에 시달한 교육시책 중 일부 내용이다.

우리는 이러한 의도된 역사 말살, 민족혼, 민족문화 상실 교육을 받아온 세대들이거나
그들로 부터 배워온 세대들이고 또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는 한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기에 우려하는 바가 큰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