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6)
<참역사문화 운동>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지역별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각 가정에서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벽 위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로된 주머니를 걸어 두거나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고 삼신주머니’라 불렀으며 종이주머니 대신 흰 항아리를 놓아둔 경우도 있는데 이를 ‘삼신항아리’ 또는 ‘삼신단지’라고 불렀다.
또한 앞선 칼럼에서 밝혔듯이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 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 는 것으로서 ‘부루단지 (夫婁壇地)’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이는 단군조선 의 2세 단군이신 부루단군께서 홍수를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게 해준 것에 대한 보답하여 기리기 위한 것이다. 삼신에 관한 또다른 해설을 보자
사마천이 쓴 <사기> 권117 사마상여열전의 주(註)에서 삼신(三神)은 하느님(上帝)라고 되어 있으며 <규원사화> 등의 사서에서 삼신은 우주의 모든 만물을 창조하고 백성과 사물을 이루고 다스린다고 되어있다.
** 지방에 따라서는 삼신 할머니는 삼신 할매, 삼신 할미라고도 불리어 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종교와 상관없이 부르며, 애국가에 나오는 최고의 신인 하느님이 삼신이다.
단군조선의 왕검 계보를 이어간다.
단군 제3세 가륵이 기원앞 2138년에 세상을 뜨시고,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제4대에 즉위 하였다. 임금은 즉위하면서 북쪽을 순행하는 등 변방 백성들의 형편을 살펴보고 나서 조정의 시책이 변방까 지 미치지 못함을 보고 나라를 21개 주(州)로 나누는 단안을 내렸다.
임금의 친 아우 오사달(烏斯達)을 몽고지방의 왕으로 임명하여 미개한 그곳 백성들에게 하늘의 이치 와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문명을 일으키도록 명하였다. 훗날 그 자손이 몽고족이 되었다.
맏아들 구을(丘乙)을 태자로 세웠다.
9월에 하(夏)나라 사절이 입조(入朝) 하였으며, 10월에는 북쪽으로 행차하였다가 태백산으로 돌아와 서 하나님께 제사지내고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仙藥, 또는 人蔘으로 추정)
무자년(기원앞 2133)에 조개껍질에 구멍을 뚫은 돈(圓孔貝錢)을 만들었으며 가을 8월에 하(夏)나라 사 람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고 신서(神書)를 구해갔다.
2년 뒤 경인(기원앞2131)년에는 조선소(造船所)를 살수(薩水) 상류에 세웠다.
***아직까지도 논란의 한 대상이 되어있는 살수에 관해 알아보면, 진한(眞韓)의 남해안이라는 기록이 <마한세가 상>에도 있다. 진한이라면 당시 삼한(三韓) 중에서 임금이 직접 다스리던 북쪽에 위치한 진한을 말한다. 이는 흔히 말하는 살수가 청천강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중국의 난하로 보는 학자 들이 많다.
임인(기원앞2119)년, 하나라의 제4대 상왕(相王)이 덕을 잃으니 자신의 신하들 중에서 군사를 일으 켜 왕위를 빼앗고자 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단군 오사구 임금께서는 식달(息達)에게 명을 내려 남 (藍), 진(眞), 번(番) 세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는데 이 소문을 들은 반란군들이 모두 항복하여 무혈진압을 하게되었고, 이 일로 나라의 위엄은 더 욱 빛났다.
***하(夏)나라는 물을 잘 다스려 인정받은 우(禹)가 순(舜)임금으로부터 제위를 이어받아 기원앞
2224년에 세우며 안읍(安邑)에 도읍하였고 걸(傑)왕 때인 기원앞 1767년에 은(殷)나라 탕왕 (湯王) 에게 망한 나라이다.
기원앞 2109년 임자년, 마한(馬韓)이 명을 받들어 상춘(常春)에 들어와 구월산(九月山)에서 제사 지내는 일을 도왔고 10월에는 목단봉(牧丹峰) 중턱에 천황이 머무는 별궁을 세웠으며 매년 3월 마다 마한의 군사를 사열하고 또 사냥도 하였다.
이해 10월 16일 기린굴(麒麟窟)에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조의(조(검을)衣)에 관을 씌워주는 예를 행한 후 노래와 춤을 추는 등 여러놀이를 더불어 한 뒤 파하였다.
***구월산(九月山)에 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한밝산(삼위.태백)의 46가지 각기 다른 표현 일 뿐 황해도의 구월산과 무관함을 인지해주기 바란다. 더구나 상춘(常春: 지금의 길림성 장춘)에 있는 구월산이라고까지 밝혔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다.
***조의(皁衣)에 관해서는 다음으로 그 설명을 미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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