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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24)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조선 제3세 단군 가륵(嘉勒: 기원앞 2182)

앞서 가륵 8(기원앞 2175)에 강거(康居)가 반란을 일으켰고 임금께서는 지백특(支伯特=티베트)에서 토별하여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불함산(不咸山)에 올라 민가를 내려다 보니 밥짓는 연기를 보고 그 많지 않음에 세금을 감하고 살림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그 불함산에 대한 주 장과 기록이 다양하여 이를 정리하여 이해를 돕고자 한다.

우선 본문의 출처 高東永<檀君朝鮮 47代史>의 기록을 먼저 살펴본다.

*** 不咸山: 백두산이라고 하는가 하면 완달산(完達山)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다.

<신단실기>에는 백두 산이 모두 여덟 개의 이름이 있는데,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백산 (白山), 백두(白頭) 태백(太白), 장백(長白), 가이민상견(歌爾民商堅) 등이다

다음은 안호상의 <배달.동이는 동아문화의 발상지>에서 발췌한다.

 *** 세상에서 흔히 평안도의 묘향산(妙香山), 황해도의 구월산(九月山) 한밝산(三危.太白) 백두산 이라 하나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다. 단군 한배검(단군왕검)께서 나시고 오르시던(탄생하시고 돌아 가신) 산은 결코 산들이 아니라, 오직 삼신산인 한밝산(삼위.태백)이다중략옛날 배달사람( 선사람) 들과 중국사람들이 배달(조선) 삼신산인 한밝산(삼위.태백) 하나를 두고 한문(漢文) 빌어 여러가지 이름들로 적었는데, 그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46가지들이다.

 

개마대산(蓋馬大山, 後漢書) / 개마산(蓋馬山) / 구월산(九月山) / 궁골산(弓忽山) / 금미달(今彌達) / 단단 대령(單單大嶺) / 단산(丹山=발산) / 대박산(大朴山) / 도산(塗山=발산) / 도태백(徒太白, 唐書) / 도태산 (徒太山, 魏書, 勿吉傳) / 두산(頭山) / 목단봉(牧丹峰=한밝재) / 방골산(方忽山) / 백산(白山, 史記, 활지      ) / 백아강(白牙崗) / 백악(白岳) / 백역산(白亦山) / 백악산(白岳山) / 백운산(白雲山) / 백주(白州) / 부 산(釜山=검산) / 불함산(不咸山, 산해경) / 비백산(鼻白山) / 삼성산(三聖山) / 삼위산(三危山) / 삼신산 (三神山) / 설 산(雪山, 설뫼, 최치운문집2) / 신산(神山=검산) / 백계산(白階山) / 백달(白達, 규원사 화) / 백두산(白頭山) / 증산(甑山) 장백산(長白山, 金史) / 천등산(天登山) / 천산(天山) / 천백산(天白山) / 천성산 (天聖山) / 천조산(天祖山) / 천신산(天神山) / 태박산(()博山) / 아사달산 (阿斯達山) / 조백 산(祖白山) / 조산(祖山) / 태백(太伯) / 태백(太白, 魏書) / 태백산(太伯山) / 태백산(太白山, 장백산, 唐 書) / 태황산(太皇山, 中國地辭典) / 풍산(風山=발산) / 환산(丸山) / 항산 (桓山) / 함박산(咸朴山).

 

이 외에도 9개의 이름이 더 있어 총 55가지라 하는데 알 수가 없고 위 46가지를 기술하였는데, 서적 마다, 학자 마다 위 지명들을 서로 다르게 기술하고 있어 여간 혼란스럽지를 않았는데, 같은 이름을 두고 이처럼 여러가지로 사용하였다 하니 비로소 명료해지는 듯 하다.

 

       소시모리(素尸毛犁)와 소머리(牛頭國) 

 

10, 무신(기원앞 2173) : 두지주(頭只州) 예읍(濊邑)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여수기(餘守己)가 그 우두머 리 소시모리(素尸毛犁)의 목을 베었다. 이로부터 그 땅을 <소시모리>라고 하였다. 지금은 음이 변하여 소머리(牛首國)가 되었다. 그 후손에 협야노(협野奴)라는 자가 있었는데 바다로 도망하여 세 섬을 점령 하고 참람하게도 왕이라 하였다.

 

13, 신해(기원앞 2170) : 봄에 임금이 이르기를, “화창한 이 봄에 만물이 다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는데 내 백성 중에 고독한 홀 아비와 과부 그리고 생활이 어려운 사람은 항상 비애와 우수에 젖어 눈썹을 펴고 웃어볼 날이 없으니 어 찌 가련한 일이 아니겠는가.” 라며 불쌍한 사람을 조사하여 도우니 하()나라  사람들이 이 소문을 듣고 우리 백성되기를 원하는 자가 많았다.

 

20, 무오(기원앞 2163) : 임금이 동쪽으로 행차하여 창해(滄海)에 이르러 산천을 바라보고, “아름답고 아름답다, 산하의 수려함이여, 내가 장차 도읍을 옮기리라하였다.

 

30, 무진(기원앞 2153) : 25년만에 큰 궁전 건청궁(乾淸宮)을 완성하였다.

 

45, 계미(기원앞 2138) : 임금이 천하를 다스린지 45, 나라는 태평하고 백성들의 살림은 안락하였다.

*9월에 임금이 세상을 뜨니 태자 오사구(烏斯丘)가 보위에 올랐다.

***소시머리(素尸毛犁): <일본서기>의 신대기(神代紀)<스사노오노미고도>가 네노구니(根國)으로 돌아 갔다고 했으며 또 신라의 소시모리(승척무이)로 갔다는 기록도 나온다. 일본 학계에서는 강원도 춘천지 방의 소머리산(우두산)이라고 하나 <비류백제와 일본의 국가기원>에서 김성호씨는 경남 진해로 보고있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연구가 지속되고 있으니 정확히 밝혀질 날 있으리라고 믿으며, 노라은 것은 소시머리 에 관한 기록이 제3세 단군 가륵 임금과 35세 단군 사벌 50(무오년, 기원앞 723)에 임금이 언파불합 (彦波弗哈) 장군을 보내어 해상의 웅습(熊襲: 일본 큐슈 남쪽에 살던 족속(구마소))을 평정하였다는 기록 과 제36세 단군 매륵 38(갑인, 기원앞 667)에 협야후(협야후) 배반명(배반명)에게 명을 내려 전선 5백척을 거느리고 가서 바다의 세섬을 치게하니, 12월에 왜인(왜인)들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기록이 나온 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