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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어르신들

실향민 최 할머니 "동생 두고 6일 만에 온다는 게 60년이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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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2

워싱턴 인근에 사는 실향민 최 할머니는 6.25동란으로 할머니와 동생을 북한에 두고 6일 만에 돌아온다는 것이 6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면서 통일되면 그리운 동생을 만나보고 싶다고 호소합니다.

사진제공-연합뉴스

제15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행사에서 북측 리영근 씨가 어릴적 자신을 업어키운 누나 이복녀 씨를 업어보고 있다.

실향민의 애절한 사연과 가족을 그리워하는 간절한 소망을 소개하는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실향민 최 할머니를 만나 봅니다.

질문: 최 할머니 고향이 어디십니까?

답변: 부모님 고향이 황해도 재령이고요. 피난 올 당시는 사리원에서 살았습니다.

질문: 고향에서는 몇 년이나 사셨습니까?

답변: 북한에선 한 5년 살았고요. 북경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해방되면서 북한(조선)으로 왔습니다. 1950년 6.25를 북한에서 겪었습니다.

질문: 6.25사변 당시를 회고해 주세요.

답변: 그때 학생 시절인데 전쟁 하루 전에 강당에 다 모이라고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갔더니 총대를 메고 나가자고 궐기대회를 하는 거예요. 우리를 인민군에 보내려고요. 그때 상공에 B 29기가 상공을 빙빙 돌아요. 폭격하려고요. 그래서 빨리 방공호로 들어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방공호는 우리 강당에서 땅굴을 파고 (옛날부터 땅굴을 잘 파요.) 운동장 밖까지 통하도록 파 놓았으니까 운동장 끝에서 나가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 집으로들 헤어져 갔지요. 그대로 남한으로 피난 간 거예요.

질문: 남한으로 피난갔다고 했는데 언제 어떻게 피난길에 올랐습니까?

답변: 1950년 12월 5일 유엔군이 함경도까지 올라갔잖아요. 유엔군이 진군했다 후퇴했잖아요. 함경도에서 평양 그리고 사리원으로 왔어요. 유엔군이 여기 있으면 죽는다고 빨리 나가라고 했어요. 갑자기 짐 보따리 챙길 사이도 없지요. 빨리 가야 한다고 하니까. 피난길에 나서려고 하는데요. 함께 할머니가 계셨고 9살 난 남동생이 있었습니다. 동생이 놀러 가고 없어요. 어데 갔는지 알 수 없어요. 할머니께서 너희 갔다 한 엿 세후면 돌아올 텐데 동생은 내가 데리고 있을 테니 너희끼리 가라고 하셨어요. 또 어머니가 동생이 없으면 나도 안 간다고 하고 아버지도 엄마가 안 가면 안 간다고 하셨어요. 그러다 얼떨결에 아버지 어머니 큰어머니 사촌 동생 둘과 나 이렇게 떠나게 됐어요.

질문: 최 할머니 피난길 이야기를 들려 주세요?

답변: 갑작스럽게 피난 보따리 하나씩 짊어지고 사리원 역으로 갔습니다. 사리원 역으로 가라고 해서 말입니다. 사리원 역에 가보니 기차 방통이 있더라고요. 기차 방통에 사람이 많으니까. 위에 올라타라고 그러더라고요. 방통 꼭대기로 올라간 겁니다. 기차가 지나갈 때 잘못하면 떨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죽는 거예요. 그리고 굴다리를 지날 때는 딱 엎드려야 하고요. 그런 어려움을 겪으면서 개성까지 왔습니다. 개성에 오니까 개성에 내려서 주먹밥 하나씩 주더라고요. 이에 주먹밥 하나씩 얻어먹고 나서 다른 기차를 태우더라고요. 그리고는 인천으로 왔습니다. 인천에 오니 인천 소년 감옥이라고 있었어요. 소년 감옥에 수용하더라고요. 그리고 심사를 받았습니다. 심사 후에 CIC 증명서를 받았습니다. 그 증명서가 있어야 인천시내를 다닐 수 있었습니다. 다니다가 검문하면 이 증명서를 보여주면 통과시켜주곤 했습니다.

질문: 인천 피난시절 어떻게 사셨습니까?

답변: 처음에 소년 감옥을 나오니까. 어디 잘 때도 없지요. 갈 때도 없지요. 그래 한 집에 가서 잘 때가 있느냐고 물으니까. 문간방을 보여 줬어요. 한국에서는 한 칸이라고 하는데 방 한 칸의 절반인 문간방을 주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식구가 다섯 식구지 않아요. 이 방에서 다 잘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앉아서들 자곤 했어요. 그리고는 다음날부터는 살길 찾아 헤매는데 갑자기 피난와서 돈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러다가 우연히 북경에 함께 있었던 아버지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때 아버지 친구 분이 부산으로 피난가면서 자기 집에 있도록 해 줬습니다. 그래서 잠자리는 해결이 됐습니다. 그 당시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피난민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함께 있던 피난민 중에 엿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래 엿을 만들어서 인천 시장에 나가서 파는 거예요. 엿이 잘 팔리더라고요. 또 죽도 써서 팔고 해서 식생활을 해결하면서 피난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인민군이 인천까지 왔습니다. 또 피난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평택까지 피난 갔습니다. 평택까지는 걸어 걸어서 가는 거예요. 그 피난길에 파편이 떨어지는 어려움 속에 어머니를 잊어버렸습니다. 많은 피난민 가운데 아버지가 엄마를 부르는데 “나 여기 있어요.” 해 다행히 찾았어요. 평택서 피난 생활하다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먹고 살아야 하니까 부끄러운 것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살았습니다.

질문: 최 할머니 북녘땅 고향을 떠나 남한에 살다 미국에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답변: 제가 한국에서 미 8군에 다녔습니다. 한 20년 근무를 했습니다. 그 당시 15년 이상 근무한 사람에게 미국에 갈 수 있는 특혜를 준다고 했는데 신청자가 많아지니까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 저는 일하면서도 토요일과 일요일에 봉사한 덕에 미국에 오게 됐습니다.

질문: 통일이 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답변: 통일이 되면 우선 동생부터 찾아봐야 하겠지요. 그리고 고향에 학교를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살던 동내도 가보고 싶습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는 소풍을 장수산이나 정방산으로 갔습니다. 그곳도 가보고 싶습니다.

질문: 최 할머니 보고픈 동생에게 안부 전해 주세요.

답변: 동생아 그때 네가 어려서 나를 기억할는지 모르겠지만 너를 두고 올 때는 너를 내 버리고 온 것이 아니고 네가 없어서 매우 급한 상황에서 빨리 피난은 가라고 하고 할머니가 내가 돌볼 테니 가라고 해서 너를 두고 왔는데, 오랜 세월동안 너를 못 만나고 이렇게 늙어 버렸구나. 우리가 죽지 않고 만나면 얼마나 좋겠니! 한번 만날 수 있는 그런 통일이 빨리 오면 좋겠다. 보고 싶다! 하여튼 살아 있다면 건강하게 잘 있어라 한번 꼭 만나자.

자유아시아방송의 ‘보고 싶은 얼굴’ 오늘은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실향민 최 할머니를 만나 봤습니다. 제작 구성에 이현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