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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용사들

김웅수장군의 6.25 한국전쟁 58주년 회고-김웅수장군

2008년 6월 21일

참전
유공자 모임을 위한 6.25 한국 전쟁 회고

                                                     -김웅수장군


이곳에
모이신 전우들은 모두가 6.25 한국 전쟁에 참가하신 분들이기에 한국 전쟁에 대해서 틀별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을 압니다. 회장님이 저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말씀을 부탁하셨기에 생각을 보았습니다. 나는 전쟁 기간 교육 기관이나 사령부 근무가 태반이라 이렇다할 자랑해 볼만한 용맹 거리도 갔고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다 연령이 많다보니 한국 군의 창군 과정을 많이 경험한 인연으로 그런 면에서 이야기를 볼려합니다.

 

나는 군사 영어학교가 문을 닫고 한국군의 1 사관학교가 시작하는 무렵 1946 51일부로 당시의 국방 경비대 육군 참위(현재 육군 소위) 임관 하였습니다. 한국 군을 대한민국이 출발하는 1948 8 15일부로 시작하면 나의 국군으로의 임관은 없던 것이 되며 경비대 기간 임관된 분이 1기에서 7기까지라 하니 기간에 임관된 분들은 전부가 국군으로 임관되지 못한 분이 되는 격이 됩니다. 5.16군사 혁명 제정된 우리의 군인 연금법이 돈을 절약할 목적이었던지 불연이면 거치장 스러웠던 선배들의 예우를 끄린 결과가 같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군정은 대한민국을 수립할 경비대를 국군의 기초가 되게 해달라는 각서를 수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군의 모든 기초가 경비대로 풀이 되고는 있으나 일각에서는 광복군이 한국군의 기초라는 주장이 제기 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한국전쟁  한국군이 기습을 당했을 까 하고 의아해 보았습니다. 여러분 중에도 그런 질문을 던지는 분들이 있을 믿습니다. 그분들을 위해 최근 미주한국에 연재된 나의 한국전 회고록의 일부 워데마이야 장군 대해 소개해 봅니다.

 

남한군을 실망시킨 육군 작전국장 웨데마이아 장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도 옹진 반도나 개성 송악산을 중심으로 남북 간의 작은 충돌 사건은 왕왕 있어 왔다. 북한 정권은 정권 수립 직후부터  의도적으로 전쟁준비를 하고 있었던 같다. 나는 1949년초 초대 국방 장관의 부관으로 중국을 방문한 육군성 작전 국장이었던 웨데마이야 장군을 환영하며 그에게 북한군의 무장과 훈련에 대비한 남한 군의 요청을 위한 회의에 참석한 일이 있었다. 당시 이범석 초대 국방 장관은 2 세계대전 중국 운남성에서의 미중 합동작전을 통한 그와의 교류를 믿고 그에게 일본군이 남겨놓은 무기로 무장한 남한 군을 북한 군의 포화와 전차 전투기에 대항할 있도록 무장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도와줄 것을 요청하였었다.

 

웨데마이야 장군은 놀랍게도 국군의 무장은 북의 도발을 유도한다며  한국은 후일 혹시나 여객기가 필요할 때가 올런지도 모른다는 반응으로 우리를 실망 시켰다. 그리고 6.25 국무장관이 한국군 7 사단 정면 시찰한 기회를 지적, 일본의 좌경 학자 간에는 한국전쟁은 북침 혹은 미국이 유도한 전쟁이었다는 설을 한동안 주장한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의 무장과 부대 훈련을 알고 있었던 것은 없었으나 미국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있었던 같습니다. 현재 북은 우리끼리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공산권의 거짓은 몸에 밖혀있는 합니다. 나의 회고록에서 북의 위장전술을 다시 소개해 봅니다.

 

북의 6.25 남침 위장 전술

 

전쟁 발발 일주일 전으로 기억한다. 북한으로부터 북에 감금되어 있던 조만식 선생과 남에 구속되어 있던 남로당 간부 이주하와 김삼룡을 1950 62438 상에서 교환하자는 제의가 있었으며 남한 정부의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북한은 약속을 1950 6 25 미명에 걸친 남한 기습 공격으로 대신하였다. 북한은 교환을 남침 위장용으로 사용 하였던 것이다. 나는 1992 6월경 당시 쏘련에 망명 중이던 한국 휴전 회담의 북측 부대표 전상진 중장(당시 인민군 육군 참모부장) 개전 당시 북한 육군 작전국장이었던 성철 소장과 같이 버지니아 주에 위치 했던 Annandale 한국 감리교회 김영훈 목사의 초대를 받아 한국전쟁에 증언을 하였으며 그들과 같이 워싱턴 DC 있는 Heritage Foundation 방문에 동행한 일이 있었다. 유소장은 개전 일주일 모스크바에서 쏘련 장교가 남침 공격 명령서를 갖이고 방문해 그를 우리 말로 번역하는데 무척 고생했다고 설명하는 것을 들은바 있었다. 나는 당시 6.25 남침 공격 명령도 쏘련제였구나 생각한 있었다.”

 

나는 한국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한국 전쟁 휴전에 따른 의견차로 고민을 하게 되었으며 다시 나의 회고록을 이용해 봅니다.

 

아이젠하우워 대통령 당선자와 이승만 한국 대통령

 

내가 아이젠하우워 대통령 당선자를 만나게 것은 1952 12 이며 장소는 서부 전선의 미군 부대 사령부에서로 기억한다. 대통 당선자로서 한국 휴전을 위한 공약 실천을 판단키 위한 방문이었다.  승만 한국 대통령은 한국의 통일 가능성을 보장 받지 하거나 북의 재침 방지의 보장 없는 휴전에는 반대한 것으로 안다. 그는 1953 58 U N 휴전 조건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고 6 3 한국정부의 4 휴전 조건 제시했으나 이승만 대통령을 납득 시키지  못한 미국은 대통령 6 18 거제도에서 반공포료 27,000명을 미국과 상의 없이 석방 조치함으로  한미간의 긴장이 있었다. 급기야 Robertson 국무 차관보와 육군 참모 총장인 Collins 대장이 한국에 급파되었다. 나는 휘전 직전 대통령의 특사인 신태영 원용덕 장군의 사단 방문을 받고 한미간 휴전 문제의 대립으로 고문단의 경계를 의식했던 기억이 난다. 불행 다행 으로 1953 7 15 한미간의 타협이 이루어저 한국군의 근대화와 경제 원조 후일 한미동맹의 체결 약속으로 휴전이 성립되게 되었다. 

 

통한의 휴전

 

드디어 1953 727 휴전이 성립되었다. 내가 군단장으로부터    휴전 지시 7 27 정오 12시를 기해 사격을 포함한 일체의 적대 행위를 중지하라는 명령이었다. 한국정부의 일시적인 휴전 반대 정책은 군단에 소속된 한국 사단장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통일 되지 하며 남침과 막대한 군과 민의 인명과 재산 피해를 초래케 북의 남침을  응징 못하였으나 부하들의 희생을 막을 있는 기회이기도해 착잡한 경을 표현키 어려웠다. 나는 군단 명령 사격중지 명령을 오전 11시로  앞단겨 수정해 내렸다. 이제는 유사시를 위해 비축할 필요가 없는 탄약이 전부 사용해 적을 응징하는 포격을 가하도록 하였다 . 적으로부터의   응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해서 휴전날은 지나 갔으며  수일 방탕 죳기를 입고 맥마산 산정에 올라가 보았다. 아군 진지 방에서 나려다 보이는 골짜기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아니하였다.”

 

6.25 한국 전쟁에 관한 국내외적 뜻은 이미 알려저 있으니 언급을 피하며 나의 한국전쟁에 관한 개인 견해 몃가지만 피력해 보겠습니다.

 

1) 나는 한국 전쟁을 신생 민주 국가에 대한 공산 침략으로부터 구출하 려한 세계 정의로 파악하였습니다. 변을 당한 남한 입장으로 보면 만족 한 휴전 결과는 못 되었지만 세계 2차대전 중의 피해의식을 참작한다면 41 UN 국가가 동원된 세계 정의의 표현이었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2) 한국 전쟁은 2차 대전후의 동서 냉전의 일환으로 발생했으며 북한이    남침에 대한 직접적 책임은 있겠으나 동서 냉전 기간 중 북과 쏘련및 중공의 의도에 대처 못한 미국도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고 생각케 됬었 습니다. 특히 1950 1 12일 발표된 아치슨 line은 쏘련과 북에게 남침을 고무했다 생각됩니다. 미국은 최소한 남한 군이라도 무장 시켰어 야 했으며 그런 의미에서 남한도 무방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 다 생각됩니다.                    

 

3) 한국 전쟁의 휴전은 세계 3차전을 우려한 UN회원 국가들과 미국의 정치 발상으로 타협됬으며 전사에서 유래없는 근 200만의 병력이 대치 하는 초 긴장 국면을 오늘까지 유지해 전선 유지경비가 전쟁 경비를 초과하는 휴전과 어려운 남북 통일 과제를 남기고 있습니다.

 

4) 남북과 중공 쏘련을 제외한 UN 41개국들이 직 간접적으로 참전하였 으며 UN군 약16(89%는 미국), 중공90만의 희생이 보고되 있습니 다. 남 북한도 500만 이상과 난민 1000만 이상의 한국 역사상 유레 없는 물적 인명 피해를 갖어왔습니다. 한국 전쟁 중의 많은 외국 국민의 희생은 통일을 위한 민족 자결의 행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생각 됩니다. 특히 장차 미국과 중공의 주장이 개입치 아니한 통일이 어려워 질 가능 성을 갖어온 것 같습니다.

5) 한국전쟁은 개방된 남한과 폐쇠된 북한을 만들었으며 개방된 남한은 세계 최빈국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세계 10대 교역 국가 가 되었고 반대로 페쇠된 북한은 인구의 10%를 아사케 하며 정치 수용 소에는 재판 없이 구속된20만 이상의 정치범과 많은 탈북민으로 국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북은 국민 아사의 대가로 핵 개발을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나 그로 인한 남북 문제와 국제정세는 과연 북에 보답이 될런지 아직 미지수입니다.

 

끝으로 이종수 회장님을 중심으로 참전 유공자 회의 무궁한 발전을 빕니다.


'2008 621일 한국전쟁 58주년을 기하여'             

      
        워싱턴 지역 참전 유공자회 고문
                       육군 예비역 소장 김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