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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우리역사문화의 요람-이문형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9)-이문형시인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搖籃)  (49)

                                    <참역사문화 운동>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문 형(워싱턴 문인회)

신시 력 5906, 단군조선 력 4342, 서양력 200910 3일 개천일을
맞았다
.

본 중앙일보사의 적극적인 지원과 미력한 필자의 노력으로
<우리 역사문화의 요람>의 연재가 1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5회 정도를 거른 셈인데 본 연재는 50
또는
51회에서 마무리를 지을 것이기에 단군조선의 역대임금
연표와 동서양의 주요사건의 기록을 간추려 기술함으로서 우리
상고사의 전체모습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선에서 종결
짓겠으나 우리 참역사문화를 알리면 서 바로 세워 민족정기를
회복해나가는 일을 중단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기원앞 1484 년 제 18세 단군 동엄(冬奄)왕검 즉위.

1483년 은나라가 사절을 보내어 사례하였다.

1480년에는 선왕시 정법원론 38편을 써 올린 고수노(高수老)
시켜 국사
18편을 편찬하 게 하였다.

1465년에는 지백특(支伯特: 티베트)사람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436년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고 태자 종년(또는 구모소)
제위에 올랐다
.

 

*기원앞 1435년 제19세 단군 종년(縱年)(구모소)왕검 즉위.

***<단군세기>, <규원사화>에는 19세 왕검을 종년이 아닌 구모소라
하였는데 그 둘 중 종년 을 택한 이유는 아우의 이름이
종선
(縱鮮)이기 때문에 종년이 맞을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

맏아들 고흘을 태자로 세우고 아우 종선을 청아왕(淸芽王: 기자조선
또는 번조선의 태조 徐于餘의 증조부
)으로 삼았다.

1433년 나라 안 곳곳에 국문서당(國文書堂:아무나 와서 글을 배울 수
있는 초등교육기관
)을 세웠으며 또 1426년에는 조개엽전(貝葉錢)
만들어 썼고
1420년에는 공창(工廠)을 만들어 닥나무 껍질로 종이를
만들고 칙껍질로 베를 짜서 옷감을 생산하였다
.

***원공패전, 자모전에 이은 단군조선 세번번째 화패이다. 또한
닥나무 껍질로
한지를 만들었 다는 인류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에서는 서기 105년 후한의 채륜(蔡倫)이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 었다고 주장하고 있음
.
1412년 남상인(男裳人)이 벼슬을 얻어
조정에 들어왔다
. 남상인은 남장인(男掌人)의 오기로 보며 남장은
지금의 운남성 변두리에 있던 섬라국
(暹羅國)을 말함이며 이로서
단군조선의 강역 은 만주
+중국 대륙+몽고+한반도임이 들어난다
<환단고기>에서-
1410년 조선소(造船所)를 송화강 남쪽에 세웠으며
1391년에는 황운갑(黃雲甲)이 지남거(指 南車)와 목행마(木行馬)
발명하여 임금이 후한 상을 내렸다
.

1385년에 목아득(牧雅得)이 우주원리론(宇宙原理論)을 저술하였고
3년 뒤에는 지이숙(支離 叔)이 주천역(周天歷)과 팔괘상중론
(八卦相重論)을 저술하였다.

 

**1381년 임금께서 세상을 뜨시고 태자 고홀이 보위에 올랐다.

*기원앞 1380년 제20세 단군 고홀(固忽)왕검 즉위.

맏아들 소태를 태자로 세웠다. 1377년 북흉노(北匈奴)가 변방에서
어른 노릇을 하므로 군사를 보내어 물리쳤으며
1345년에는
이궁
(離宮)을 영고탑(寧古塔)에 두었고 1341년에는 공공(共 工),
을홀(乙忽)이 구환(九桓)의 지도를 만들어 바쳤다.

 

**1338년 임금이 세상을 뜨시고 태자 소태가 제위에 올랐다.

*기원앞 1337년 제21세 단군 소태(蘇台)왕검 즉위하였고 이 해에
은나라의
21대 왕 소을 (小乙) 이 사신을 보내어 공물하였다.

 1335년에 공신(功臣) 여심심(黎尋心)을 창해군(滄海君)
임명하였다
.

*1300년 은()나라가 도읍을 옮겼다.

 1291년 은의 22대 왕 무정(武丁)이 귀방(句方)을 점령하고 색도(索度),
영지(令支)등을 침공하였으나 결국 크게 패하고 물러갔다.

1289년 개사원(蓋斯原)의 제후인 고등(高登)이 은밀히 군사를 일으켜
귀방을 습격하여 멸하고 많은 군사들과 손을 잡고 서북쪽 땅을 공략하여 그 세력이 강성하였는데
1286년  임금을 압 박하여 우현왕(右賢王)을 제수받고 마침내 부여의 신궁에서 즉위하였다.
임금께서는 할 수 없 이 그를 두막루(豆莫婁)로 제수하였으며 고동이
죽자 그의 손자 색불루
(索弗婁)가 세습하여 우현왕이 되었는데,
단제께서 종친인 서우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는 것을 알고 심히 압박 하니 임금께서는 어쩔 수 없이 옥책국보(玉冊國寶)를 전하고 은퇴하여
아사달에 들어가 살다가 붕어하셨다
. 이 해에 백이(伯夷), 숙제(叔齊)
고죽군
(孤竹君)의 아들들로서 나라를 버리고 수양산에 은둔 하였다.

**색불루를 <마한세가 하>에는 고등의 손자가 아닌 아들로, <단기고사>
에는 소태임금의 태자 로 되어 있으나 여기서는 <단군세기>의 기록을
인용하였다고 한다
.

**기원앞 1285년 제22세 단군 색불루(索弗婁)왕검 즉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