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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명깊은설교

<왕국절을 위한 연속설교: 알 수 없는 나라 3> “천국의 은유”-김영봉 목사

“천국의 은유”(Metaphors of Heaven)
--요한계시록 1:9-20

방송듣기:

http://live.kumcgw.org/2010new/sermons/2011/audio071711kim_b.wma
1.
지금의 터키 반도 동쪽 끝에 에베소라는 도시가 있고, 그곳에서 약 75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밧모 섬이 있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 이 섬은 불순분자들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유배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그곳에 유배당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곳에서 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요한이라는 사람도 그곳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소아시아 반도 끝에 있던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목회하고 전도했던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염병처럼 로마 제국의 도시들로 퍼져 나가자, 로마 정부는 그리스도인들을 ‘염병’같은 사람들이라고 단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박해는 특히 도미시안 황제(Emperor Domitian, AD 81-96) 때 극에 달했는데, 요한은 바로 그 때 체포되어 유배당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박해와 유배는 요한의 믿음을 억누르지도, 질식시키지도 못했습니다. 본시, 참된 믿음은 고난으로 인해 더 순결해지고 강해지는 법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병상에 누울 때 그 병상을 기도의 상으로 만들고, 감옥에 갇히면 그 감방을 기도방으로 만듭니다. 요한은 유배당한 것을 구속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깊은 기도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중에 그는 하나님 나라를 봅니다. 요한은 그 경험을 이렇게 적어 놓았습니다.

주님의 날에 내가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습니다. ...... 나는 내게 들려오는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 보니, 일곱 금 촛대가 있는데, 그 촛대 한가운데 ‘인자와 같은 분’이 서 계셨습니다. (계 1:10-13)

여기서 ‘주님의 날’은 일요일을 가리키는데, 초대 교인들은 그 날에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고 예배드렸습니다. 주간의 첫 날 즉 일요일에 주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소아시아에 두고 온 교인들을 기억하며 홀로 예배를 드렸을 것입니다. 그렇게 홀로 예배드리는 중에 그는 하나님 나라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온 마음을 다해 집중하고 있을 때, 어느 순간, 모든 의식이 멈춰지고, 알 수 없는 음성을 듣고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봅니다. 하늘이 그에게 열린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하여 우리 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요한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을지 모를 천국 여행을 끝내고 나서, 그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적어 놓았습니다. 그가 적어 놓은 것 중에는 그 자신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니 그것을 읽는 사람들은 오죽 더하겠습니까?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처음부터 신비에 둘러싸인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대 교회 지도자들은 요한계시록을 기독교의 정경(canon)으로 받아들일 것이냐 말 것이냐를 두고 오래도록 씨름해야 했습니다. 결국 이 책은 신약성경의 마지막 자리에 차지하게 되었고 수많은 학자들이 연구했지만,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은 책으로 남아 있습니다.

2.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는 하지만, 이 책은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이 하늘나라에 관한 모든 것을 계시해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기대감을 가지고 요한계시록을 펼치는지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헛된 기대감을 악용하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영적 사기꾼들이 끊임없이 있어 왔습니다. 요한계시록의 비밀을 다 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왔고,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사람들도 늘 있어왔습니다. 그로 인해 이단이 생기고, 기독교가 사회적인 혼란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본질적으로 다 이해하도록 의도된 책이 아닙니다. 요한이 체험한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가 들은 말씀은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기억에 남아 있는 잔상들을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일곱 교회, 곧 에베소와 서머나와 버가모와 두아디라와 사데와 빌라델비아와 라오디게아의 교회로 보내라. (11절)

그러므로 너는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들을 기록하여라. (19절)

왜 주님께서는, 요한 자신도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읽는 독자들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라고 했을까요? 이 질문에 대해 제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한 가지 집히는 것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다 이해할 수 없다.’ 혹은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크고 신비한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하늘나라에 대해 모든 것을 드러내는 책이 아니라, 그 일부를 드러내 보여 주면서 더 많은 것을 감추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일부러 감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알아볼 능력이 우리에게 없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영어의 apocalypse라는 말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계시’(啓示)라고도 하지만 ‘묵시’(黙示)라고도 합니다. ‘묵시’라는 말은 환히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은밀하게, 드러나지 않게, 잘 알아보지 못하게 보여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요한계시록’이라는 이름보다는 ‘요한묵시록’이라는 이름이 더 적당해 보입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말씀과 이야기들을 접하면서 우리는 칼 바르트가 한 말, 즉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사람은 땅에 있다.”라는 말의 의미를 거듭 확인해야 합니다. 우리는 너무도 작고 하나님의 나라는 너무도 크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겸손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계시록을 통해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이 담고 있는 비밀을 다 알아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 왔습니다. 천국의 비밀을 다 알아냈다고 선전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천국 이야기를 종합하여 ‘천국의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체험을 기초로 하여 ‘천국 안내서’를 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해 뭔가 확실하게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런 책에 아주 쉽게 빠져듭니다. 그리고는 그것이 천국의 진짜 모습인 양착각합니다. 그렇게 믿고 살다가 큰 낭패를 당합니다. 이런 일이 2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얼마나 많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3.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을 때 혹은 천국 체험에 대한 기록을 읽을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글자 그대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요한이 밧모 섬에서 환상 중에 본 것은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보면, 본 사람의 경험과 문화의 틀로 인식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자동 변환 작용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에 남겨진 잔상들은 실제로 본 것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언어는 또 어떻습니까? 언어가 ‘생각의 집’이라고 말하지만, 그 집은 생각을 다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도저히 말로 표현되지 않을 때 차라리 침묵하는 것은 언어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이 자신의 기억에 남겨진 잔상들을 글로 썼을 때, 글로 표현된 그것은 요한이 실제로 본 하늘나라의 모습으로부터 얼마나 심하게 달라졌겠습니까?
그로부터 2천년 후,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요한이 본 것이 무엇인지를 상상합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상상한 그것이 요한이 본 것과 동일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요한이 본 것은 요한의 기억 속에서 축소되었고, 요한이 적은 글은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잔상들을 더 축소시켰으며, 우리가 요한의 글을 읽고 상상하는 것은 그가 표현하려던 것과 같은 것일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읽고 상상하는 것과 요한이 실제로 본 하늘나라와는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하늘나라는 이런 곳이야.’라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요한계시록만이 아닙니다. 소위 임사체험(near-death experience)을 통해 천국을 보고 쓴 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즈음 와싱톤 포스트 비소설(non-fiction) 분야 베스트셀러인 Todd Burpo의 <Heaven Is For Real>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우리말로는 <3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네 살짜리 아이가 수술 과정에서 약 3분 동안 천국 여행을 하고 온 이야기입니다. 콜튼(Colton)이라는 이름의 그 아이는 지상의 시간으로 3분 동안 엄청나게 많은 경험을 하고 돌아옵니다. 이 책 속에 기록된 이야기들은 잘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달리 설명할 도리가 없으니 그 아이가 뭔가를 보고 왔다고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아이가 말한 세세한 내용들에 대해서는 자주 의문이 들지만, 그가 뭔가를 분명히 경험하고 돌아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영적 체험을 통해 천국을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신성종 목사님의 경우가 그 예입니다. 그분은 템플 대학교에서 신약학으로 Ph. D. 학위를 받고 총신대학교에서 가르치면서 많은 책을 저술한 분입니다. 제 또래의 신학도들은 공부하는 동안 그분의 책 한 두 권을 읽었을 것입니다. 그분이 나중에는 목회를 하다가 은퇴를 하셨는데,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죽음에 대해 준비 과정으로서 죽음과 천국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만큼은 연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보게 해 달라고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꿈과 환상을 통해 지옥과 천국을 보았고, 그것을 소설 형식으로 적어 놓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본 천국과 지옥>이라는 책입니다. 저는 그분의 학문과 인격을 믿어 왔기 때문에 이 책에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책들을 잘 분별해서 읽으면 신앙에 큰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무분별하게, 닥치는 대로 읽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저자가 믿을만한 사람인지 잘 분별해야 합니다. 믿을만한 저자가 쓴 글이라 하더라도 읽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그 기록들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신성종 목사님은 책의 후기에 이렇게 썼습니다.

본다는 것은 혹 잘못 볼 수도 있고 같은 것을 보면서 잘못 판단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주관적일 수밖에 없다. 내용도 보는 사람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볼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결코 내가 본 것만을 고집하지는 않는다. 다만 지옥과 천국이 있다는 진리를 내가 확신하게 된 것만으로 족할 뿐이다. (187-88쪽)

천국에 대해 한 모든 기록은 ‘은유’(metaphor)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은유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서 표현하려는 대상을 다른 무엇으로 빗대어 표현하는 수사법입니다. 며칠 전, 땅거미가 질 즈음에 아내와 숲속을 걷는데, 숲속에 자욱이 안개가 내려앉아 있고, 저만치에서 한 떼의 사슴이 고개를 빼고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데, 마치 이 세상에 저와 제 아내만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순간 “이건 천국이다!”라고 말했고, 아내도 공감했습니다. 그것이 은유입니다. 은유는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4.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요한이 환상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뵙습니다. 그가 본 모습은 이렇습니다.

그는 발에 끌리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띠를 띠고 계셨습니다.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과 같이, 또 눈과 같이 희고, 눈은 불꽃과 같고, 발은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와 같고, 음성은 큰 물소리와 같았습니다. 또 오른손에는 일곱 별을 쥐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고, 얼굴은 해가 강렬하게 비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13-16절)
실력 있는 화가가 이 장면을 그림으로 그렸다고 상상해 보십시다. 그것이 요한이 본 것과 일치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이 여기서 사용한 표현들은 모두 은유입니다. 그 은유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발에 끌리는 긴 옷: 왕 같은 위엄
가슴의 금띠: 왕권
양털같이 혹은 눈같이 흰 머리: 거룩성
불꽃같은 눈: 전지의 능력(omniscience)
풀무불에 달구어 낸 놋쇠 같은 발: 전능하심(omnipotence)
물소리와 같은 음성: 말씀의 능력
오른 손에 쥐고 있는 일곱 별: 그분이 모든 교회의 주인이라는 뜻
날카로운 양날 칼이 나오는 입: 말씀의 진리성
해처럼 빛나는 얼굴: 그분의 영광

요한은 환상을 통하여 어린 양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섰습니다. 그 순간 그는 그분에게서 발산되어 나오는 위엄과 거룩성과 능력과 영광으로 인해 졸도했습니다. 그분의 발 앞에 엎어져서 죽은 사람같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그는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든 말로 표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이미 경험하여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가장 비슷한 단어와 사물을 찾아 표현했습니다. 그게 은유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읽는 우리는 그 은유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천국에 대해 사람들이 하는 말들 가운데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천국에도 노숙자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이 땅에서 예수를 믿었지만 선행을 쌓지 못한 사람은 천국에서 노숙자가 된다고 합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노숙자로 살아간다면, 그게 어디 천국 간 것입니까? 지옥 간 것이지요. 왜 이 같은 오해들이 일어납니까? ‘천국에서 상급을 받는다.’는 은유를 글자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이 천국에 대해 하는 말들이 어떤 경우에는 이 세상만도 못해 보입니다. 그래서 생각 있는 사람들은 천국 이야기에 아예 귀를 닫아 버립니다.
이제는 고인이 된 박완서 선생의 작품 <한 말씀만 하소서>는 의대에 다니던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나서 쓴 일기에서 나온 소설입니다. ‘현대판 욥기’라는 별명을 얻은 이 소설은 고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을 찾아 몸부림치는 거룩한 영혼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 한 대목에서 박완서 선생은 천국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어 놓았습니다.

잡다하게 읽은 책 중 어떤 목사님이 죽었다 깨어나서 보고 왔다는 천당 생각이 났다. 그가 보고 온 천당은 바닥은 온통 황금이고 궁정 같은 집은 화려한 보석으로 되어 있더라고 했다. 내가 상상한 천당하고는 너무 달라서 더 읽을 마음이 나지 않았다. 내가 그랬으면 하고 그려보는 천당은 내 고향 마을과 별로 다르지 않다. 풀밭, 풀꽃, 논, 밭, 맑은 시냇물, 과히 험하지도 수려하지도 않지만 새들이 많이 사는 산,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좋아 맨발로 걷고 싶은 들길, 초가집 등이 정답게 어울린 곳이다. 내 고향 마을에서 천당으로 옮겨놓고 싶지 않은 건 터무니없이 크고 과히 깨끗지 못한 뒷간뿐이다. 그러나 천당 바닥이 풀밭이 아니면 또 어떠랴. 황금이나 양탄자라 해도 사후에도 뭔가 보이는 것만 있다면 말이다. (199-200쪽)

박완서 선생이 말한 그 목사님은 하늘나라를 진짜 보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분이 본 천당은 더 이상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 목사님에게 가장 귀하고 값진 것은 황금과 보석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이 천당에 관해 한 말을 우리는 은유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것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서, 천국의 레미콘 트럭에서 누런 황금물이 흘러나와 도로를 포장하는 광경을 상상하면 안 됩니다. 한 편, 박완서 선생이 천국에 대해 한 말도 역시 은유입니다. 천국은 고향 마을과 같은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고향이 가난과 고생과 상처로만 기억되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박완서 선생의 은유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천국에 대해 은유를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고, 은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에 천국에 대해 너무 많이 알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알면 다칩니다. 알 수 없는 것을 자꾸 알려 하다가는 오해에 빠지거나 영적 사기꾼의 밥이 됩니다. 성경을 읽거나 천국에 대한 경험담을 읽을 경우, 그 나라의 도로 포장이 어떤지, 먹는 음식이 어떤지, 사는 집이 어떤지, 무엇을 하고 사는지에 관심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은유로 받아야 합니다.

5.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천국에 대한 많은 은유와 상징들 그리고 믿을만한 사람들이 영적 체험이나 임사 체험을 통해 전하는 하늘나라 이야기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적어도 세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그 은유와 상징들을 통해 확인해야 합니다.
첫째, 그 모든 것은 천국은 실재한다는 것을 증언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 드렸던 것처럼, 하늘나라는 가상공간도 아니고 공상 공간도 아닙니다. 엄연히 존재하는 영역입니다. 다만, 그것이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3차원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영적인 눈이 열리지 않고는 볼 수 없을 뿐입니다. 성경에 있는 수많은 기록들은 믿을 수 없는 광신자들에게서 온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하게는 예수님에게서 온 것이며, 바울 사도에게서 온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알지 않습니까? 바울이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 알지 않습니까? 그들이 체험하고 기록한 것이라면 신뢰할 수 있습니다. 또한 영적 체험이나 임사 체험을 통해 경험한 하나님 나라 이야기 중에도 귀담아 들을만한 것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 모든 체험은 단순히 심리 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둘째, 그 모든 것은 천국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그곳은 하나님의 통치권이 완전하게 작동하는 나라입니다. 비뚤어지고 흠이 난 인간성이 치유되어 완전해지는 곳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겪는 모든 부정적인 것들, 즉 상처, 갈등, 싸움, 악의, 음란, 타락, 변태, 욕심 등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며, 이 땅에서 우리가 소망하는 모든 좋은 것들, 즉 사랑, 화해, 평화, 안식, 선의, 거룩, 진실 같은 것들만이 존재하는 곳입니다.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느껴 보려면 자신이 경험한 가장 좋은 것들을 상상하면 됩니다. 그 모든 좋은 것들이 완전하게 되어 있는 상태가 바로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주간에 목회실 식구들이 예배를 드리면서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이, 자신에게 천국은 KFC에서 한 없이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살이 찌지 않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농담으로 한 말입니다. 이것도 은유입니다. 하지만 천국은 우리의 타락한 욕망이 마음껏 채워지는 곳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이 정화되고 그 정화된 소망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먹고 싶은 것을 한 없이 먹어도 질리지 않으리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천국을 기다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릅니다. “아, 참 좋아 보이기는 하는데요. 그런데 왠지 재미없을 것 같네요. 항상 웃기만 하고, 항상 노래만 하고, 항상 즐겁기만 하면, 재미가 없을 것 아닌가요?” 그럴 듯한 반문입니다. 영화든, TV 드라마든, 소설이든, 재미있는 이야기에는 항상 악당이 있고, 항상 문제와 갈등이 있습니다. 뉴스도 그렇습니다. “좋은 소식은 뉴스거리가 되지 못한다.”(Good news is no news)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만 전하는 신문은 얼마 못 가서 폐간되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자극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신문은 잘 나갑니다. 그러니 천국은 아주 재미없는 곳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악당 이야기를 좋아하고 나쁜 뉴스(bad news)를 좋아하는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죄로 인해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에 이르면 이 타락한 본성이 치유 받습니다. 사실, 그 치유는 믿음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곳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본성이 치유를 받으면 더 이상 악한 이야기를 즐기지 않게 됩니다. 아름답고 참되고 선하고 거룩한 것들만을 보고도 결코 지루해하거나 권태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셋째, 이 모든 이야기는 하늘나라가 우리가 이곳에서 경험하는 세상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뜻합니다. 차원이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의 경험으로 그곳의 삶을 추측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을 부정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논쟁을 걸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이 세상의 삶과 천국의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너희는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르기 때문에 잘못 생각하고 있다. 부활 때에는 사람들은 장가도 가지 않고, 시집도 가지 않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다. (마 22:29-30)
이것도 역시 천국에 대한 은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듣도록 비유를 사용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두고, “남녀 사이에서 즐기는 재미가 없으면 천국이 별 재미없겠네.”라고 생각할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휴 헤프너 같은 사람은 분명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계에 따라 행복의 이유가 달라지도록 인생을 지어 놓으셨습니다. 어린아이의 행복의 이유는 장년의 행복의 이유와 다르고, 장년의 행복의 이유는 노년의 행복의 이유와 다릅니다. 행복하게 살려면 각 단계마다 마련되어 있는 독특한 기쁨을 발견해야 합니다. 과거에 누리던 기쁨을 회상하면서 “아, 옛날이여!”를 노래하는 것을 불행에 이르는 지름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는 천국의 단계에 맞는 행복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땅에서 누리던 즐거움을 그곳에서 계속 즐기려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청년이 되어서도 어릴 때 즐기던 사탕을 끊지 못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린 아이의 세계와 어른의 세계가 질적으로 다르듯, 하늘나라와 이 땅의 나라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유로써 그 나라에서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6.
혹시, 여러분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릅니다. “아, 이 땅의 일들도 복잡한데, 왜 하늘나라에 대해 이렇게 복잡한 생각을 해야 합니까?”
그렇게 느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계신 분들에게는 참 미안합니다. 그런데요. 그런 상황에 있기에 하늘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토록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제대로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땅에서 겪는 어려움을 이기기 위해 있지도 않은 천국을 믿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늘나라가 정말 존재한다면, 그 나라를 제대로 알고 그 나라를 믿고 그 나라를 살아가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며,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땅에서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참되게 믿고 제대로 보면, 그들이 누리는 부귀영화가 헛된 것임을 알고 물질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게 될 것입니다. 반면, 이 땅에서 어렵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를 참되게 믿고 제대로 보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역경을 능히 이기고 물질적인 상황에 짓눌리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할(살전 5:16-18)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 하늘나라에 대해 눈을 뜨고 그 나라를 믿고 살아가는 것은 전 재산을 주고 바꿀 정도로 진귀한 보석을 찾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하늘나라에 대해 무관심하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는다면, 하나님 나라도 존재한다고 믿어야 논리적으로 맞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고, 하나님 나라도 있었습니다. 그 나라가 그 동안 여러 가지 모양으로 계시되었고, 우리는 그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모든 기록은 은유입니다. 그 은유를 통해 우리에게 열린 그 영원하고 완전한 나라에 대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나라를 소망하시고, 꿈꾸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여기서 그 나라를 사시기 바랍니다.
혹시 여러분은 천국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습니까? 그 나라의 모습에 대해, 그 나라에서 먹는 음식에 대해, 그리고 그 나라에서 사는 방법에 대해 무엇인가 본 것이 있거나, 읽거나 들은 것이 있습니까? 그 모든 것이 은유요 상징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침묵해야 합니다. 꼭 말해야 한다면,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은유로만 말할 수 있을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나라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을 모두 접어 두고, 그 나라를 믿고 그 나라를 사는 일에 전념하기 바랍니다.
여기,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그 거룩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활짝 열렸습니다. 마음을 돌이켜 그 나라를 믿으십시다. 마음의 눈을 열어 그 나라를 보십시다. 이 땅에서 그 나라를 살고, 마침내 그 나라에 들어가 영원히 사는 구원의 길을 걸으십시다. 이 믿음과 소망이 저와 여러분에게 늘 살아있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오, 주님,
저희로 하여금
그 나라를 믿게 하시고
그 나라를 보게 하시며
그 나라를 살게 하소서.
아멘.